2015. 3. 4. 18:51ㆍ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도서관엘 가보면 온갖 방면의 책이 참 많기도 하요으잉?
그리고 뭔가가 좀 궁금하다 싶어 컴퓨터 검색창을 두들겨 보면 이것저것 없는 게 없으요잉?
참말로 참말로! 별아별 걸 다 아는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당께요잉!
세상 일을, 반에 반에 반에 반만 만큼이라도 알고서 죽었으면 쓰것는데요잉?
그런데 어찌 한 우물만 파다가 갈 수가 있겠으요잉?
김봉규 지음 / 출판사 담앤북스 | 2014.07.30
『현판기행』은 옛 현판을 찾아 현판에 담긴 이야기와 글씨를 쓴 서예가 이야기, 현판이 달린 건물 이야기 등을 취재해 정리한 책이다. 건물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현판의 글씨는 역대 왕을 비롯해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나 명필 등이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다. 따라서 현판은 그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 예술의 정수가 담겨 있는 문화 예술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에 비해 홀대받고 있는 현판의 현주소를 꼬집고, 소중한 가치를 지닌 현판 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자 했다.
이 책은 현판이 걸린 장소에 따라 총 4개의 장, 35곳의 이야기로 구성하였다. ‘정자와 누각에 걸린 현판’에서는 옛 선비들이 올라 자연의 풍광을 감상하던 정자와 누각에 걸린 현판을 살펴보고, '서원과 강당에 걸린 현판‘에서는 조선시대 유학의 산실이었던 서원과 강당의 현판을 소개한다. ’사찰에 걸린 현판‘에서는 전국의 절과 암자에 걸린 현판을 알아보고, ’더 알아보는 현판 이야기‘에서는 고택, 궁궐, 중국의 현판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이 땅 곳곳에 걸려있는 현판을 직접 발로 찾아가 조사함으로써 현판을 둘러싼 역사와 문화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김봉규 : 1990년 영남일보 입사 후 논설실과 편집국 내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등을 거쳤으며, 2008년 현재 논설실에서 근무
현판기행을 시작하며
현판(懸板)의 의미에 대해 사전에는 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 위에 거는 편액(扁額)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편액과 주련(柱連)을 통칭해 일컫는다. 간단히 말해 편액은 건물의 명칭을 나타내는 표지이고, 주련은 건물의 기둥에 좋은 글귀를 써서 붙이거나 새겨 거는 것을 말한다. 글귀를 이어 기둥에 건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었다.
편액의 역사는 중국 진(秦)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진나라때 문자의 통일을 하면서 글자체나 용도에 따라 8가지 서체(八書)로 정리했는데, 그 중 여섯번째인 서서(署書)가 제서(題書) ·방서(榜書)등에 쓰인 서체였다. 즉 건물의 명칭 등을 쓰는데 사용했던 편액 글씨였던 것이다.
편액에 쓰이는 한자는 액체(額體)라고도 하는데, 굵은 필획으로 써서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짜임새가 긴밀하고 방정하면서도 강건한 글씨여야 하기에 주로 해서(楷書)를 많이 썼다.
편액 글씨체로 원나라 승려 설암(雪庵) 이부광의 글씨가 고려 말에 수용된 이래, 공민왕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설암 서법에 따랐고 편액에도 애용했다. 설암은 안진경과 유공권의 글씨를 배워 특유의 해서 서법을 이루었다. 설암체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도 계속 유행했다.
편액 중에 가장 오래된 글씨로, 신라의 명필 김생(711~791)이 쓴 것으로 전하는 공주 마곡사의 ‘대웅보전’이 있다. (물론 현재의 편액 자체는 원본이 아니고 여러 번 복각을 거친 것임.) 또한 그의 글씨를 집자했다는 '만덕산 백련사' 편액도 강진 백련사에 전하고 있다. 공민왕의 글씨로 전하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동 '영호루' 편액도 귀중한 유산이다. 추사 김정의, 원교 이광사, 창암 이삼만 등 당대의 최고 명필의 편액 작품도 전국 사찰 곳곳에 걸려 있다.
누각과 서원, 정자, 명문가 고택 등에도 흥미로운 사연이 담긴 현판 문화재가 즐비하다.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 현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현판이 국보나 보물 등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하나도 없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추사 글씨인 봉은사 '판전(板殿)' 현판과 명종 글씨인 영주 '소수서원' 현판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1. 정자와 누각에 걸린 현판
-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보다
경북 안동 ‘영호루’/
▲ 공민왕 / 박정희의 친필 현판.
경북 안동 봉정사 ‘덕휘루’/
봉정사(鳳停寺)라는 이름의 유래가 흥미롭다. 신라시대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천등산에서 수도를 마친 후 종이로 만든 봉황을 도력으로 날려, 그 봉황이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명명했다 한다. 672년의 일이다.
봉정사가 있는 산의 이름인 ‘천등산(天燈山)’도 능인대사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 전에는 대망산이라 불리던 산이었다.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천상의 선녀가 옥황상제의 명으로 능인(能仁)대사의 도력을 시험했으나 넘어가지 않았다. 옥황상제는 이에 감복해 선녀로 하여금 등불을 바위굴에 내려 보내 수도를 더욱 열심히 하도록 도왔다. 능인대사는 그런 도움에 힘입어 마침내 득도할 수 있었다. 이후 그 굴은 ‘천등굴’, 대망산은 ‘천등산’으로 불리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이 있는 사찰인 봉정사는 한국 영화사에 길이 빛날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촬영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1999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탐방해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라는 글귀를 남기며 봉정사에 스토리를 더하기도 했다.
이 천등산의 봉정사(안동시 서후면 태장리)도 여느 고찰처럼 숲이 좋다. 계곡을 따라 난 숲길을 올라 일주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멀리 가파른 돌계단 위로 누각이 눈에 들어온다. 돌계단 길을 올라 누각 아래 서면 커다란 누각 처마에 ‘천등산봉정사(天燈山鳳停寺)’ 현판이 맞이한다. 그 필획이 예쁘고 정감이 가는 글씨가 눈길을 끈다.
누각 밑을 지나 마당에 오르면 조선초기 건물인 대웅전(보물)이 보이고, 다시 뒤로 돌아 누각에 오르면 대웅전 쪽에 ‘덕휘루(德輝樓)’라는 아름다운 글씨의 대형 편액을 볼 수 있다. ‘천등산봉정사’를 쓴 사람의 글씨임을 바로 알 수 있다.
◆ 덕이 빛나 봉황이 내리는 ‘덕휘루’
누각 위에 걸려있는 ‘덕휘루’ 현판은 여러 개의 판자를 붙여 만들었고,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되어있다. 테두리는 연꽃 문양 위주로 장식돼 있다. 왼쪽에 ‘계축중하(癸丑中夏) 김가진(金嘉鎭)’이라는 낙관 글씨와 ‘동농(東農)’인장이 새겨져 있다. 계축년(1913) 여름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100년 전에 단 현판이라 바탕과 글씨 부분의 칠은 물론, 테두리 문양 장식도 많이 바랬다.
김가진(1846~1922)은 조선말기 문신으로, 상하이 임시정부 고문을 지냈으며 한학과 서예로도 유명했다. 동농은 그의 아호다. 동농은 일찍부터 시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격조에 버금하고, 서체는 북송대의 미불과 명대 말기의 동기창의 필법을 심득(心得)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봉정사 누각 편액 ‘덕휘루’의 ‘덕휘’는 덕이 빛난다는 의미로, 나라가 태평하면 하늘에서 봉황이 내려온다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중국 전한시대 가의(賈誼:BC 200~168)가 지은, 굴원의 절개를 기린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봉황새는 천 길 높이로 날면서 덕이 빛나는 곳을 보고 내리고, 덕이 없고 험악한 조짐을 보일 때면 날개를 거듭 쳐서 멀리 날아가 버린다(鳳凰翔于千兮 覽德輝而下之 見細德之險微兮 遙增擊而去之).’ ‘덕휘’는 이 글귀의 ‘남덕휘이하지(覽德輝而下之)’ 중에서 따온 것이다.
누각 이름 덕휘의 의미는 유교적인 성격이 강한데, 봉정사에는 유교적인 요소가 적지 않게 녹아있다. 대웅전 앞에 사대부가의 건물처럼 쪽마루 난간을 둔 것도 다른 사찰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고, 부속암자인 영산암은 전체적으로 사대부가의 한옥 구조와 흡사하다. 극락전 건물도 현재의 건물과는 달리 복원전 건물은 앞쪽에 툇마루가 있었다.
1680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하는 덕휘루는 현재 ‘만세루(萬歲樓)’로도 불린다. 누각 위의 ‘덕휘루’ 맞은편에 ‘만세루’ 현판도 걸려 있다. 덕휘루는 1913년 여름에 썼고, 같은 해 가을에 쓴 것으로 되어있는 만세루 현판은 석능(石能) 김두한(金斗漢)이 쓴 것으로 낙관글씨가 있지만, 어떤 인물인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석능은 이 현판과 함께 ‘화엄강당(華嚴講堂)’ ‘무량해회(無量海會)’ 편액도 쓴 것으로 되어있다. 사찰 누각 이름으로 흔히 사용되는 ‘만세루’는 부처의 법이 영원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글씨는 동농이 경술국치 후 칩거하면서 지내던 시절의 글씨인데, 그가 어떤 연유로 이 작품을 남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당시의 암울한 환경에 처한 우리나라에 덕이 빛날 날이 빨리 와서 봉황이 내려앉기를 바라면서 쓰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덕휘루’와 함께 ‘천등산봉정사’ 현판 글씨도 동농이 썼다. 같은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인다. ‘천등산봉정사’ 현판은 판자 11개를 이어 만들고, 테두리는 단순한 각목을 사용했다. 덕휘루와 마찬가지로 검은 바탕색에 글씨는 흰색을 칠했고, 테두리 부분은 연꽃문양 등으로 장식돼 있다. 다만 테두리 문양은 덕휘루 현판과 달리 연꽃 부분을 붉은색으로 칠한 점이 다르다.
글씨를 보면 몽글몽글한 떡가래를 구부려 만든 글씨 같다. 글씨 획의 굵기 변화가 거의 없고 기교도 부리지 않았다. 획의 마무리 부분도 깔끔하게 처리해 마치 백묵으로 쓴 달필 글씨 같기도 하다. 예쁘고 정이 가는 글씨체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한편 봉정사에서 눈길을 끄는 옛 현판들로는 1882년에 채색을 했다는 글귀가 새겨진 ‘대웅전(大雄殿)’ ‘극락전(極樂殿)’ 편액, 영산암의 ‘우화루(雨花樓)’ 편액 등이 있다. 이와 함께 공민왕 친필로 전하는 ‘진여문(眞如門)’ 편액, 선조 임금이 즉위 전에 쓴 것으로 추정하는 ‘독포도덕(獨抱道德)’ 현판이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봉정사 주지 자현스님의 설명이다. ‘독포도덕’은 ‘오로지 도와 덕을 감싸 안는다’는 의미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 김가진 글씨의 경북지역 다른 현판 ‘보백당’ 의미
“우리 집엔 보물이 없네 보물이 있다면 오직 淸白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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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불 글씨를 즐겨 썼다는 동농 김가진은 봉정사 편액 글씨 외에도 경북 지역 곳곳에 글씨를 남기고 있다.
대표적으로 보백당 종택(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여러 개의 편액 글씨를 남겼다. 종택 사랑채에 걸린 ‘보백당(寶白堂)’ 편액(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글씨가 동농의 글씨인데, 봉정사 편액 글씨체 그대로다. 보백당은 김계행(1431~1521)의 아호이자 당호(堂號)다. 보백은 청백을 보물로 삼는다는 의미다. 김계행은 ‘보백(寶白)’의 의미를 해설한 다음 글귀를 남겼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네(吾家無寶物)/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네(寶物惟淸白).’
그는 또 87세에 자신의 거처 보백당에서 임종하면서,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돈독한 우애와 독실한 효심을 유지하도록 하라.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
보백당은 동농과 같은 안동김씨 가문이다. 보백당 종택에 걸린 ‘용계당(龍溪堂)’과 ‘묵은재(默隱齋)’ 편액도 동농 글씨다. 이 두 편액은 원본 글씨를 가지고 근래 새로 제작한 것이다.
그는 안동의 북애(北厓) 김후 종택(풍산읍 현애리)에도 ‘매죽헌(梅竹軒)’이라는 편액 글씨를 남겼다. 동농은 또한 문경 김용사 일주문의 ‘운달산김용사(雲達山金龍寺)’ ‘홍하문(紅霞門)’ 두 편액 글씨도 남겼다. 붉은 노을을 뜻하는 ‘홍하’는 ‘붉은 노을이 푸른 바다를 뚫는다(紅霞穿碧海)’에서 유래한 말로 불국토의 세계를 의미하며, 홍하문은 불국토인 부처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문이다.
김봉규기자
☞ 東農 김가진= 동농은 당시 세도가인 안동김씨 가문에 태어났으나 서자였기에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적서차별이 철폐된 후인 1886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문과에 응시해 급제할 수 있었다. 그후 1887년부터 4년간 일본공사로 있으며 반청자주외교를 펼쳤고, 1894년에는 갑오경장의 주역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농상공부 대신, 중추원 참의, 충청남도 관찰사 등을 거쳤다. 규장각 제학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동농은 1907년 11월 남궁억, 장지연, 오세창 등과 대한협회를 만들고, 이듬해 7월에는 2대 회장에 취임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실의에 빠져 칩거하던 동농은 1919년 3·1운동 발발 직후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맡아 활약하다 그해 10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게 된다. 대신을 지낸 그의 망명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에 추대되었다. 동농은 이후 만주지역 무장투쟁을 계획하는 등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77세의 나이로 상하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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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 ‘영남루’/
밀양의 영남루(보물 147호)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영남루는 신라 때 창건된 영남사라는 사찰이 있던 자리에 건립되었다. 지금 누각은 184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시원하고 자연스러운 '영남루' 글씨는 당대의 명필로 유명했던 송하(松下) 조윤형(1725~1799)이 64세에 썼다. 송하는 어려서부터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1705~1777)에게 글씨를 배웠으며 각 서체에 능했다. 특히 획이 굳세고 예스러운 해서와 초서 예서를 잘 썼다. 그는 벼슬을 못하다가 1766년 글씨로 벼슬길에 올라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당시 관청의 금석과 편액 글씨를 도맡아 썼다고 한다.
진주 '촉석루', 수원 화성행궁의 '신풍루' ·'봉수당' ·'낙담헌', 영주 풍기의 '금선정', 공주 마곡사의 심'검당', 김천 직지사의 '황악산 직지사' 편액 등이 남아 있다. 시원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글씨들이다.
강원 삼척 죽서루 ‘제일계정’/
경북 안동 ‘추월한수정’과 ‘탁청정’/
경북 봉화 청암정 ‘청암수석’/
강원 강릉 선교장 ‘활래정’/
경남 진주 ‘촉석루’/
전남 담양 ‘식영정’, ‘제월당’
2. 서원과 강당에 걸린 현판
- 선비의 정신을 담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
경북 예천 삼강강당 ‘백세청풍’/
경북 함안 군북면 군북리 ‘채미정’, 금산 부리면 불이리 ‘청풍서원’, 함양 정여창 고택,
경북 안동 ‘도산서원’/
경북 경주 안강 ‘옥산서원’/
경북 경주 ‘용산서원’/
경남 산청 덕천서원 ‘경의당’/
전남 장성 필암서원 ‘확연루’/
확연루’ 편액 글씨는 송시열이 썼다. 작명도 그가 했다
양송체(兩宋體)는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두 사람의 글씨체를 말한다. 이들은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었으므로 율곡을 사숙한 석봉 한호의 글씨체를 썼지만, 석봉체의 골격을 가지면서도 웅건장중한 무게와 기품을 더해 별도의 품격을 가진 서체를 만들었다.
석봉은 성리학자라기보다 서예가라고 할 수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글씨가 조선의 국서체가 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대의ㅡ대학자 두 사람이 새로운 글씨체를 만들자 사람들은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우암에게 글을 받고, 동춘당에게 글씨를 받아 비석 등을 세우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동춘당의 글씨가 송설체와 석봉체를 바탕으로 안진경체의 비후미를 더해 유려하고 활기차다면, 우암은 안진경체를 더 깊게 받아들여 웅건장중미가 더욱 돋보였다. 이때의 안진경체 수용은 조선 후기의 안진경체 유행의 계기가 되었다.
경북 안동 송암구택 ‘관물당’, ‘한서재’
3. 사찰에 걸린 현판
- 절집에서 듣는 이야기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공민왕 글씨
전북 완주 화암사 ‘극락전’/
경북 영천 은해사 ‘불광’/
▲ 추사 김정희필 <불광> 현판. 176×174cm
경남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경북 의성 고운사 ‘연수전’/
해사 김성근은 1862년 과거에 급제한 후 전라도 관찰사 공조 형조 이조 예조 판서 등을 거쳐 1894년 개화파 정권 이후 물러났다가 1898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다시 등요되었다. 1910년 일제가 자작을 수여했다. 해사 김성근은 미남궁체(미불체)를 즐겨썼다. 그의 글씨는 매우 유려하고 웅건했으며, 특히 큰 글씨에 능햇다. 연수전 옆 건물에 걸린 '고운대암(孤雲大菴)' 편액도 그의 글씨다.
해남 대흥사의 '백설당', '응진당', '명부전', '두류산 대흥사'..
울진 불영사의 '극락전',
부산 범어사 일주문의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
고양시 '흥국사',
대구 동화사 '영산전'
안동 노송정 종택 대문에 걸린 '성립문', 안동 하회마을 북촌댁의 '수신와' 등이 그의 대표적인 편액 글씨이다.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화엄사 '대웅전' 편액은 의창군 글씨, 각황전 편액은 성재 이진휴가 썼다.
의창군이 쓴 대웅전 편액 글씨는 하동 쌍계사 완주 송광사 등 다른 사찰에서도 많이 번각해 사용했다.
경남 하동 쌍계사 ‘육조정상탑’/
전남 구례 천은사 ‘지리산천은사’/
경북 칠곡 송림사 ‘대웅전’/
칠곡 송림사 '데웅전' 편액은 오래 전부터 숙종의 친필로 전해져 내려온다. 불국사의 대웅전이나 속리산 법주사의 대웅보전 글씨체도 같은 바, 직접 쓴 것인지, 베껴쓴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공주 마곡사의 영산전은 세조가 썼고, 순천 선암사의 '대복전'은 수조의 친필이고, 합천 해인사의 '사방무일사' '길상' 글씨는 헌종이, 그리고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 편액 글씨는 정조가 썼다. 팔공산 파계사의 '천황각' 편액도 정조 글씨다. 농암 종택에는 선조가 하사한 '적선'이라는 글씨를 편액으로 만들어 걸어놓고 있다.
전남 순천 송광사 ‘세월각’, ‘척주당’/
경기 남양주 봉선사 ‘큰법당’/
경남 양산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4. 더 알아보는 현판 이야기
경북 영덕 난고종택 ‘만취헌’/
物盛則必衰(물성즉필쇠) : 만물은 성하면 반드시 쇠하게 되고,
有隆還有替(유융환유체) : 융성함이 있으면 다시 쇠퇴함이 있나니,
速成不堅牢(속성불견뢰) : 빨리 이룬 것은 견고하지 못하고,
亟走多顚?(극주다전지) : 빨리 달리면 넘어질 때가 많은 것이다.
灼灼園中花(작작원중화) : 활짝 핀 정원의 꽃은,
早發還先萎(조발환선위) : 일찍 피면 도로 먼저 시든다.
遲遲澗畔松(지지간반송) :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는,
鬱鬱含晩翠(울울함만취) : 울창하게 늦게까지도 푸름을 머금는다.
賦命有疾徐(부명유질서) : 타고난 운명은 빠르고 더딤이 정해져 있으니
靑雲難力致(청운난력치) : 입신출세를 사람의 힘으로 이루기는 어렵다
寄語謝諸郞(기어사제랑) : 제군들에게 일러 말하노니
躁進徒爲耳(조진도위이) : 조급히 나아감은 부질없는 짓을 뿐이니라.
- 소학
대구 달성 ‘삼가헌’/
창암 이삼만의 대표적인 편액 글씨로 ─
구례 천은사 ‘보제루’ ‘회승당’ ,, 해남 대흥사 ‘가허루’ ,, 승주 선암사 ‘임지관월’ ,, 구례 화엄사 ‘삼전’ ,, 곡성 태안사 ‘배알문’ , , 밀양 표충사 ‘법해당’ ,, 강화 전등사 ‘원통각’ ,, 공주 동학사 ‘동학사’ ,, 금산 보석사 ‘대웅전’ ,, 순천 송광사 ‘육감정’ .
서울 ‘숭례문’/
경북 안동 농암종택 ‘애일당’/
경북 울진 ‘대풍헌’/
중국 자금성 ‘건극수유’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행복한미래2013.04.19
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 일주문
능가산 내소사 천왕문
경북 문경 운달산 김룡사 봉명루
경기 양평 용문산 용문사 일주문 ↕
양평 용문산 용문사 관음전
전북 김제 모악산 금산사 일주문
전북 김제 모악산 금산사
전북 고창 도솔산 선운사
대구 팔공산 파계사 일주문
경남 양산 천성산 홍룡사 요사채
전북 정음 내장산 내장사 범종각
청도 운강고택 백류원
강화도 낙가산 보문사 일주문 ↕
경남 남해 망운산 화방사 일주문
대구 팔공산 파계사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
전남 해남 두륜산 일지암
전남 해남 두륜산 일지암
전남 두륜산 대흥사
경북 문경 운달산 김룡사
영광 불갑산 불갑사
보성 송재 서재필 기념관의 외삼문 『開化門』 광개토대왕비문의 개字의 서체라고함.
광개토 대왕 비문 ####廣開土境好太王####* 광개토경호태왕
속초 설악산 신흥사 사천왕문 ↕
부여 만수산 무량사 ↕
부산 태종대 태종사
통영 미륵산 관음암 ↕
여주 봉미산 신륵사 ↕
양산 영축산 통도사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합천) ↕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 수 천겁 지나도 오히려 새롭고 .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 수 만년 지나도 언제나 당당하다
가야산 해인사 구광루측문(합천)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 대적광전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 법보전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 대방광전
대적광전 금강계단
노악산 남장사 일주문(상주)
금강산 건봉사 불이문(고성)
상왕산 개심사(서산)
백양산 고불총림 백양사(장성)
재약산 표충사 대광전(밀양)
태화산 마곡사(공주)
부소산 고란사(부여)
조계산 조계총림 송광사(순천)
영축산 영축총림 통도사(양산) 국지대찰 불지종가
영축산 영축총림 통도사 ↕ 양산 示跡雙林問幾秋(시적쌍림문기추) 쌍림에서 열반에 드신 지 몇 해인가 묻노니,
潽使群生禮不休(보사군생예불후) 많은 군생들 예 올리기를 쉬지 않네
운제산 오어사(포항)
정족산 전등사(강화도)
삼신산 쌍계사(하동)
태백산 보덕사 (영월)
발본산 금몽암(영월) ↕ 금몽암 ▲
우화루 ▼
부산 금정산 범어사 조계문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 1912년인 78세에 쓰신 글 ↕
고성 연화산 옥천사 옥천각
해남 두륜산 대흥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
대구 팔공산 동화사 71옹 해사
대구 팔공산 동화사
대구 무학산 학산재 1891년 海士 書
순천 조계산 선암사 삼성각
봉화 청암정 청암수석 1682년書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 ↕
곡성 동리산 태안사 ↕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
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 강선루
대구 팔공산 파계사 진동루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경남 양산 천성산 홍룡사
공주 태화산 마곡사
강진 만덕산 백련사
안동 천등산 봉정사
안동 천등산 봉정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순천 조계산 선암사 傳 김익겸書
영주 봉황산 부석사
부안 능가산 개암사 김석천 9세
부아 능가산 개암사 김례산 8세
익산 함라산 숭림사 일주문
정읍 내장산 내장사 정혜루 『천하명승내장산』
양산 영축산 통도사 해장보각
구미 태조산 도리사 산문
문경 운달산 김룡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원주 치악산 구룡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 화장법해
해남 두륜산 대흥사
순천 조게산 선암사
부산 금정산 원효암
양산 영축산 통도사 극락암
영천 팔공산 은해사
용문산 용문사
고창 선운사 백파대율사비
예산 화엄사 ↕
영천 팔공산 은해사
대구 남평문씨세거지 광거당
양산 영축산 극락암
대구 남평문씨세거지 수봉정사
[죽서루]
이 누각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년(1711)에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죽서루 현판]
죽서루에는 당대 쟁쟁한 많은 문인 학자들이 시를 남겼고
그시가 오늘날 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일부는 죽서루에 현판과 벽면에 걸려 있었다.
그 중의 몇 가지만 담아 왔습니다.
그 중 촛점이 맞지 않아 떨린 사진도 있지만, 올려봅니다.
[이규헌이 쓴 海仙遊戱之所(해선유희지소)]
[허목이 쓴 第一溪亭(제일계정)]
▲ 보광사는 영조의 효심이 절절히 배어있는 곳입니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
운주사 일주문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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