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2. 20:57ㆍ미술/서양화
셋슈(雪舟·1420~1507)는 일본의 화성(畵聖)이라고 불리는 무로마치(室町)시대 수묵화의 완성자이다. 그는 초년엔 스승인 슈분(周文)에게 조선풍 산수화를 배웠고 중년엔 명나라에 들어가 여러 화풍을 익힌 다음 노년엔 전형적인 일본 실경산수로 돌아섰다. 그런데 그의 말년 '산수도'(사진) 중에는 조선의 이손(李蓀)과 박형문(朴衡文)의 제시(題詩)가 들어 있어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써준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에 간 사실도 없고 이손의 제시 중에는 '만리길 건너와 비자나무 책상 위에 있네'라는 구절이 있어 미스터리처럼 되었다.
이 수수께끼는 근래에 셋슈가 오나이(大內) 휘하에 있는 야마구치(山口)에 있을 때 오나이의 사신 중 누군가가 이 작품을 조선에 갖고 와 찬시를 받아간 것이라는 유력한 학설로 풀리게 되었다.(村井章介, '한시(漢詩)와 외교') 당시 오나이와 쇼군(將軍)가에서는 거의 해마다 조선에 사절을 보내 1475년부터 1491년 사이만 10번이나 된다. 그런데 이 기간에 이손은 김해부사, 박형문은 창원부사로 있었던 때가 있다. 일본에서 떠난 배가 조선에 입항한 항구는 진해 웅천(熊川)이었고 웅천에서 김해까지는 15리, 창원까지는 25리다. 그렇다면 1485년 아니면 1487년의 사신 중 한 명이 가져온 것으로 된다.
그림을 보면 셋슈 초년의 조선 산수화풍에서 벗어난 전형적인 일본풍의 산수화다. 셋슈는 자신의 일본화된 그림을 조선에선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했던 모양이다. 마치 우리 현대미술에서 김환기와 이응로가 파리화단에서 평가받고 싶어 프랑스로 갔던 그런 심정이 있었을 것이다. 셋슈 시대에 조선은 그런 문화적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문인들은 이 이국적인 산수화에 대해 직접적인 화평 대신 그림에 어울리는 시를 읊어주는 겸양의 미덕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이 작품은 15세기 동아시아 문화 지형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유흥준(?)
나중에 보충해 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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