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 여태 안 가본 사람도 있슈?

2014. 11. 22. 10:59산행기 & 국내여행

 

 

 

나는 이 馬耳山을 대여섯 번도 더 다녀간 것 같수.

 

 

 

 

 

 

 

 

아득한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하늘 나라에서 쫏겨난 한 산신 부부 내외가 이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면서 수 억겁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을 보내고 드디어 하늘 천상계로 승천의 기회가 열렸다. 이때 남편 산신이 아내 산신에게 말했다. "이제 하늘 나라로 다시 올라갈 때가 되었소. 그러나 우리가 승천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면 부정을 탈것이니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자시11시~01시)을 택해 승천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한밤중은 너무 무섭습니다. 게다가 밤중에 일을 치르자면 너무 피곤합니다. 그러니 푹 자고나서 이른 새벽에 올라가십시다.누가 꼭두 새벽에 잠 안자고 우리들이 승천하는 것을 훔쳐보고 있겠습니까? 남편 산신은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었지만 아내 산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이 무위로   돌아갈지도 몰라 불안 했지만 이튿날 새벽에 승천하기로 마음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산신 부부는 마침내 승천을 시도했다. 하늘을 향해 산이 쑥쑥 솟아가고 있을 때 아랫마을의 어느 부지런한 아낙네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정화수를 뜨려고 우물을 찾았다가 그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낙네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러 댔다. 이 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부부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승천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 지금의 암수 마이봉이 되었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편 산신은 아내 산신을 걷어 차고는 두아이를 빼앗아 버렸다는 뒷얘기도 전한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수마이봉(해발 673m)은 두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고, 암마이봉(667m)은 수마이봉을 등지고 앉아 한없이 고개를 떨군 채 후회하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밖에서 떨어지니
쌍으로 쭈빗한 모양이 말의 귀와 같구나.
높이는 몇천길이 되는 데
연기와 안개속에 우뚝하도다.
우연히 임금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에 전하네.
중원에도 또한 이름이 있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비슷하도다.
천지 조화의 교묘함은 실로 끝이 없으니
천지가 혼돈했던 처음일을 생각하도다.

 

- 김종직(성종때의 성리학자)
  
임금은 바로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다. 태종이 남행해서 마이산이라는 이름을 짓기전에 이산은 신라때 서다산(서쪽에 많은 산들중에 가장 아름답게 쏫은산!, 쏫았다, 섯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는 용출산(용이 하늘로 쏫아 오를듯 한 기상) 이라 불렸다. 그리고 조선의 태조는 속금산(금을 묶어 놓은 금덩어리 산! .., 땅속에서 쏫아난 산 )이라고 이름  붙였다고도한다. 이중에서 서다산과 용출산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즉 서다를 이두식 표기로 볼 때 그뜻은 '섯다'이고 그 한문식 표현은 용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벚나무들 수령이 50~60년 됐다고 합디다.

아시우? 마이산 벚꽃은 늦게 피우다. 열흘이나 보름쯤이나.

 

 

마이산 탑사아래로 500m 지점에 위치한 관광지가 있으니 이것이 탑영제 벗꽃길이다. 이곳엔 봄마다 저수지를 따라 벗꽃길이 펼쳐지는데, 본래 관광풍치 조성을 위해 축조 되었다. 이곳에도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드린 후 영험을 받았다고 한다. 탑영제에서 탑사를 올려다보면 산에 가리워져 탑은 보이지 않지만 암마이봉과 나도산 봉두굴이 유연한 자태로 탑영제 수면을 비추고 있다. 이곳은 큰 가뭄이 들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방생의 최적지로 꼽힌다.

 

 

 

 

 

 

 

여기 아주 웃기드만

주차료로 2,000원 따로 받고, 입장료를 3,000원씩 두 번 받습디다

金堂寺 몫, 塔寺 몫, 銀水寺 몫으로 각각 분빠이해서

 

 

 

 

 

 

 

 

 

쪽갈비, 목삼겹살, 메추리, 그리고 산채비빔밥.... 이 동네는 늘 그거지 뭐.

촌동네 뭐, 솜씨 별루지 뭐.

 

 

 

 

 

 

 

 

 

이 집에서 먹었는데,

서빙하는 젊은 베트남 처자, 참 부지런하고 시원시원하니 일 잘 합디다.

27살인데 결혼했답디다. 며느리감으로 베트남 여자도 괜찮긴 한데.....

 

 

 

 

 

 

 

 

 

마이산에 절이 세 개 있잖우?  금당사, 탑사, 은수사.

제일 사이비처럼 생긴 당사는 조계종으로, 탑사 · 은수사는 태고종인가로 겨들어간 모양입디다.

 

 

 

 

 

 

 

 

전엔 온갖 동물 석상에다가, 기왓장이고 뭐고 온금칠을 해놨었는데,

금칠을 벗겻습디다?

(조계종에서 쪽팔리다고 그랬나?)

(누가 봐도 웃겼지. 무당집도 아니고 중국무협영화 셋트장도 아니고.)

 

 

 

 

 

 

뭐, 이런식이었었지. ㅎㅎㅎㅎ

 

 

 

 

 

이거 봐, 좀이 쑤셔서리.......

이 자리에다 둘 건 아닐거고, 산지사방에다 세워놓으려고 했을텐데,

김빠지게 조계종단에서 또 부레끼 걸었네벼. 아까워서 어쩐디야?

 

 

 

 

 

 

기왓장 새로 올린 겨. 예전엔 북경 자금성 같았지.

 

 

 

 

 

 

 

 

 

 

 

 

 

 

 

 

 

 

 

 

 

 

 

 

 

 

 

 

 

 

 

 

 

 

 

 

저 닫집을 어떻게 천정에 붙였을까?

자세히 보니까 저렇게 나무에 구멍 뚫어 철주를 박아서 고정시켰습디다.

한옥을 이딴식으로 하면 반칙이디요.

 

 

 

 

 

 

 

 

 

 

 

 

그게 아닌게빈디? 기왓장만 새로 올린 게 아니라 집을 전부 다 새로 진 묑인디?

 

 

 

 

 

 

 

 

 

이 괘불탱화, 그래봬두 보물이우.

 

 

 

 

 

 

 

 

아, 지붕천장을 저렇게 이중으로 치는구나....... 꼼꼼하게 일 잘하네.

서까래 갯수, 기왓장 폭이랑, 다 계산해서 짓는 거겠지?

 

 

 

 

 

 

 

 

 

 

 

이 왼편 단청 안한 집은 지붕 처마 가운뎃 부분이 너무 내려앉았습디다.

대웅전 극락전은 잘 빠졌는데, 이건 여엉~~~''

 

 

 

 

 

 

 

 

 

 

 

 

탑사(塔寺)는 이따 내려오면서 보기로 하고, 은수사(銀水寺)부터 올라갔시요.

 

 

 

 

 

 

 

 

 

 

 

 

저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돈 받는 뎁디다.

 

 

 

 

 

 

 

 

 

 

 

 

 

 

 

 

 

 

 

 

 

 

 

 

 

 

 

여기도 종단에서 경쟁적으로 돈 대줘서 새로 진 묑이여.

 

 

 

 

 

 

 

 

북 두들겨봤수? 두우웅~ 두우웅~ 울리는 소리가 끝내줍디다.

가운데 희미하게 이은 자리가 보이지요? 소가죽 두 장을 기막히게 붙였습디다.

 

 

 

 

 

 

 

 

 

 

 

 

돈 안 내도 되오. 맘껏 두들겨봐도 되오.

 

 

 

 

 

 

저쪽은 무량광전, 이쪽은 대적광전.

 

 

 

 

 

 

자, 이제 탑사로 내려가는 길이오.

이 은수사나 아까 본 금당사는 탑사에 치여서 장사가 안되게 생겼습디다.

 

 

 

 

 

 

 

 

 

 

 

 

 

 

 

 

 

 

 

 

 

 

 

 

 

 

 

 

 

 

 

 

 

 

 

 

 

 

 

 

 

 

 

 

 

 

 

 

 

이 양반 자리 밀려났습디다. ㅎㅎㅎ

전에는 한 복판 중앙에 있었는데 지금은 옆구리 산 밑에다 치워놨습디다.

주지가 증손자뻘이라는데, 즈 할아버지를...... 고연놈!

 

 

 

 

 

 

 

 

접착제를 쓴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이어 굳힌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홈을 파서 서로 끼워 맞춘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백여년의 풍상속에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덕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10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 탑들이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에는 유난히 세찬바람이 사시사철 불어 오고 있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옆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가지만, 이곳의 돌탑들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뿐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런 접착물 없이 서로 맞닿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돌탑의 축조비법은 무엇이고 100년 풍상을 견뎌낸 돌탑의 신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낮에는 돌을 날으고 밤(자시)마다 하루 한 개씩 정성으로 올렸고, 음에 날에는 양에 돌을 올리고 양에 날에는 음에 돌을 올렸다. 또한 탑을 쌓기 위해 자리를 잡고, 다음 올라갈 음, 양돌을 앞에 놓고 좌선을 하면서 천기를 받아 지기를 올리고 온 몸에 기를 넣어 자시에 정확히 단번에 올려 작은 돌맹이로 고정시킨다. 탑을 쌓은 것은 2가지 방식이 있는데 피라밋 형식과 일자형 탑인데 피라밋 형식의 탑은 팔진도법에 의해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며 밖으로 돌을 쌓고 안으로 자갈을 채우고 그속 가운데 비문을 넣고 올라가며 쌓은것이다. 또한 맨 꼭대기 마지막 돌을 올리는데는 100일의 정성의 기도 후 올렸고 피라밋 상단부분에는 잔돌로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우물정(井)자로 나무를 고정시킨 후 그 위에 올라서 음양돌을 올렸다 한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이갑룡의 진법과 기공법등 축지법의 힘이 사용되었다 한다 , 이갑룡 처사는 축지법을 39살부터 터득하였는데 이때부터는 몸이 가볍고 사픈이 다니는등 아무리 무거운 돌도 으흑음! 하고 소리를 내면 겉든 이 돌을 들어 올렸다 한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이갑룡처사는 매일 다람쥐 바뀌돌 듯 돌만 들고 다니거나 산속에서 혼자 앉아있거나 암,수 마이산을 오르내리고 암 마이봉과 수 마이봉에 강목천을 묶어 놓고 건너 갔다 왔다 하는 것을 본 이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주를 단숨에 갔다 왔다하는데 당시 진안경찰서장이 찾아와 면담을 하고 전주에 갔는데 벌써 이갑룡은 전주에서 볼일을 다 보고 진안으로 오는 것을 보고 "아니 언제 전주에 오셨습니까?" 물으니 "당신이 나가고 나서 바로 출발해서 왔네" 하니 그 사람은 아니 놀랄 수 없다고 한다. 이렇듯 이갑룡의 축지법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목격하고 이 탑을 쌓는데는 축지법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불의의 명작을 축조할 수 있겠나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이 현상은 이갑룡 처사의 정신력이라 할수 있겠다.

 

이갑룡 처사(본명 경의, 호 석정)는 1860년 3월 25일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난 효령대군 16대 손이다. 수행을 위해 25세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 하던중 신의 계시를 받는다.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이처사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뒤숭숭했던 어두운 세속을 한탄하며 백성을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기도로써 밤을 보내고 낮에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처사는 탑을 쌓기 위해 30여년을 인근 30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기단부분을 쌓았고,상단부분에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하여 날라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아온 돌로 팔진도법과 음양이치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부분은 기공법(氣功琺)을 이용하여 쌓았다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다.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한 탑이다. 돌에도 암수가 있어 암수의 조화를 이뤄 쌓은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오행을 뜻하는 오방탑(五方塔)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돌탑의 우두머리 천지탑(天地塔)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한쌍의  탑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석탑들이 1백여년의 풍상을 하나같이 지켜오고 있는것은 정녕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이 불가사의에 더하여 마이산탑사에는 또하나의 신비가 있다. 바로 역고드름이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뻗쳐 오른다. 정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릇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이 신서는 이처사가 신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형태도 있으며 30여권의 책에 전해 내려온다. 사적비에는 언젠가 이 글을 해독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없다. 현재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혜명스님은 바로 이갑룡 처사님의 3대손이다. 혜명스님 위로 2대손인 도생 처사님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지금은 혜명스님과 4대손인 진성스님이 함께 마이산 탑사를 지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지형이 생겨났을까잉~~~'?

여긴 올 때마다 기분이 참 묘합디다잉. 진짜 신령기(神靈氣)가 느껴져요잉~~~'!!!!

 

 

 

 

역고드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