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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펌글 · 자료/역사

허황옥 루트 & 중국의 서역행로

 

http://blog.daum.net/okkim88/8843826

http://ko.wikipedia.org/wiki/%EA%B0%80%EC%95%BC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駕洛國記〉에 따르면 허황옥(許黃玉, 33년 ~ 189년) 금관가야(金官伽倻)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비이고

김해김씨(金海金氏)·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모이고 허황후(許皇后)라고 한다. 본래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48년에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왕비가 되었다. 거등왕(居登王)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았다.

그녀의 나이(156살)은 수로왕과 9살 연상의 나이차로, 수로왕의 나이(157살)와 함께 논란이 되고 있으나, 이는 가야사람들이 자신의

시조에 신화적인 요소를 포함하고자 과장된 표현이 있던 것으로 사료되고 있다.

 

왕비가 먼바다를 건너온 경위에 대해서는 ‘금관성(金官城) 바사석탑(婆娑石塔)’ 조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금관성의 호계사라는 절에

 있는 석탑(石塔)에 대해 일연은 다음과 같이 썼다. 처음에 허황옥이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에 나가 동쪽으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파도

 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아뢰자, 아버지는 이 탑을 싣고 가라 하였다는 것이다. 과연 제대로 건너와

남쪽 언덕에 와서 정박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일연 자신도 약간의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때까지 우리나라에는 절을 짓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연은 이 절을 찾아 탑을 직접 보고 ‘네모나게 4면이요 5층인데, 조각한 모양

새가 매우 기이하다. 돌에는 엷게 붉은색 반점이 있고, 바탕이 아주 부드럽다. 이 지역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은 거의 본디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문드러졌지만, 일연의 기록을 참고하여 그 원형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불교 전파설

일설에는 가야의 불교 전래에 기여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허황옥과 그녀의 친정 오빠 장유화상이 가야 지역에 불교를 처음 전래했다

는 설이 있다. 불교의 승려였던 친정오빠 장유화상은 금관가야 지역에 장유암(長游庵)이란 사찰을 짓고 불상을 모셨으며 이후 가야지역

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長游庵) 경내에는 장유화상사리탑이 현존하고 있다. 장유화상의 사리탑은 1983년

 7월 20일 경남도 문화재자료 31호로 등재되었다.

 

중국 도래설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오지 않고 아요디야 이민자들이 거주하던 지금 중국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에서 건너왔다는 설도 있다.

인도의 도시국가였던 아요디아는 태국에도 아유티야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하였고, 중국 서남부 사천성 주변에도 건너와 이민촌을 건설

였다.안악현 근처에 보주 라는 마을이 있으며, 사천성의 안악현과 보주 지역은 허씨(許氏)들의 집성촌이자 아요디야에서 이민온 인도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인도계 이주민 중 고위직에 오른 인물 중에는 당시 한나라의 황제 선제의 후궁이 된 허씨가 있었다.

선제의 장인에 해당되는 평은후 허광한도 사천성 출신으로, 허황옥 역시 그의 일족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요지인즉, '인도 아유타야 왕국의 공주가 느닷없이 배를 타고 와서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

-  사실이냐 아니냐? 사실이라면 연유는 무엇이고, 경로가 어떻게 되느냐?

    김수로는 또 뭔 생각으로 덥썩 왕비로 들였느냐?

 

이 계통에 대해서 연구하는 분이 몇 있죠. 서 너 사람 정도? 

저도 의문이 드는 거야 많고 많지만, 자세한 것들은 그 분들께 넘기기로 하고,

저는 '어떻게 왔느냐'가 제일 궁금합니다.

 

 

오래 전에 제주도 놀러가서 마라도를 간 적이 있습니다.

50명에서 100명 정도 타는 배였는데, 가는 중간에 느닷없이 너울을 만났습니다.

이건 산더미 같은 파도가 일렁이니까 우리가 탄 배는 그야말로 존재랄 것도 없더군요.

스으윽 올라갔다가 밑으루 푸우욱 꺼지는데, 첩첩산중이 따로 없습디다.

선원들에게도 흔치 않고,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 흔들리는 와중에도 튜브를 풀러내더니 선내로 막 뿌립디다.

하나씩  알아서 붙잡아라 이 말이지요. 진짜 무섭습디다.

 

 

그런데 김수로왕 때면 언젯적입니까? 2천년 전이에요.

2천년 전에 인도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까지 왔다는 애깁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큰 배도 아니었던 모양인데요.

당시의 인도(印度) 기록을 뒤져보면 알아낼 방법이 있긴 할 겁니다.

그렇지만 가야(加倻) 배를 타고 인도를 갈 수는 없었겠죠. 하긴 그것도 모를 일입니다.

 

 

역사학을 하는 분들 보면 기록만 생각하고 결과만을 생각하 것 같은데,

왜 이러한 구체적 과정들은 기정사실로 치부해버리고 외면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런 문제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고대 · 중세사를 전부 다시 써야만 할 지도 모르는 문제입니다.

당시에 배를 타고 이렇게 장거리까지 자유왕래가 가능했다고 해보십시요.

우리는 은연중에 자꾸 지금의「국가」라는 개념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고 하는데, 그건 넌센스죠.

중국이니 일본이니 한국이니 하는 게, 당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기준점을 지금 싯점에 둘 것이 아니라 당시에다 둬야죠.

 

 

2천년 전의 바다, 1천년 전의 바다 환경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으리란 생각이 들고요,

당시의 항해 기술이 원시적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가야라면 석기시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던 때입니다.

청동기 시대, 이러면 무지하게 무식했던 시절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공자니 맹자니 강태공이니가 언젯적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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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보게 된 책입니다.

한나라때 장건, 동진의 법현, 당나라 현장, 명나라 정화가 어떻게 서역으로 가게되었는지,

어떤 경로를 해서 갔는지에 대해서 쓴 책입니다.

법현이 바로 허황옥 루트로 온 듯한데, 뱃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더군요.

명나라, 하면 지독히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나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명나라가 아프리카에 까지 무역로를 개척했다는 것이 너무도 의외였습니다. 

 

 

환관 출신의 건장하고 모험심 많던 정화(鄭和)가 영락제의 명을 받아서 7차례에 걸쳐서 원행을 이끌었는데,

'원정(遠征)'이 아니고 '친선 무역 사절'의 성격이었습니다.

정화가 34세에 시작을 해서 7차 원정을 마치고 죽을 때가 64세였으니까 꼭 30년 동안입니다.

1차 때는 캄보디아,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 캘커타.

2차 때에는 인도 남쪽 실론까지.

4차 때는 호르무즈 해협까지.

7차 때에는 골고루 들려서 나중에는 아프리카 모가디슈에 까지 돌아왔습니다.

지도를 보면 엄청난 거리입니다.

도대체 배가 얼마나 컸길래 이런 장거리 여행이 가능했을까요?

이 책을 보면서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습니다.

 

 

 

 

 

 

 

 

 

 

 

 

 

 

 

 

 

 

아래는『대여행가』'정화'편 (P168~) 에서 옮긴 것입니다.

 

영락제는 정화를 대표로 하여 왕경홍, 후현, 마환, 비신, 공진, 합삼, 곽숭례를 함께 선발했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뽑은 아랍어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아울러 군수용품을 담당하는 호부랑중, 예물을 관리하는 홍려사서반, 천문에 정통한 음양관,

이약품과 치료를 담당하는 의관, 구매를 담당하는 매판, 문서를 담당하는 서수, 사공, ... ,

전부 포함해서 2만 7,000여명이 되었다.

 

이때부터 남경의 관청과 조선소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호부와 공부에서 보선(寶船) 제작에 관한 일을 시작했다.

복건 조선소에서 137척, 남경 조선소에서 50척, 절강 조선소에서 1,180척을 제작하게 했다.

정화가 해외 원정에 나갈 때마다 출항한 배의 수는 매번 달랐다.

적게는 50, 60척에서 많게는 수백 척에 달했다.

큰 배의 경우 8개의 큰 노(25명 노수)와  28개의 작은 노를 가졌다.

 

 

명조때의 기록에 의하면 배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이름      돛대    길이(丈)     너비       수
 보선(寶船)       9      44.4      18       36
 마선(馬船)       8      37      15      700
 양선(糧船)       7      28      12      240
 좌선(坐船)       6      24       9.4      300
 전선(戰船)       5       8       6.8      180

 

 

 

항해 기술은 당시로 볼 때 선진적이었다.

숙련된 선원의 경험을 통해 별자리를 보고 항로를 파악하였다.

낮에는 태양을 보고 방위를 관측했으며, 비라도 내리면 나침반(24방위)으로 정했다.

해수면의 깊이는 연추를 이용했다.

명나라 조정은 항해에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공급했다.

대량의 식량은 물론 비단, 면, 자기, 서적, 금 은 동 철기, 돈, ... ,

"수많은 물자를 공급하고도 나라 안에서 사용하는 물자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정화가 원정 나갈 당시 말라카는 26차례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때마다 명나라는 융숭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통상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연회를 한 번 베풀지만 말라카 왕에게는 두 번 베풀었다.

돌아갈때 황금 100냥, 백은 500냥, 지폐 40만 관, 동전 2,600관, 비단 300필, 명주 100필을 선물로 주었다.

말라카 사신도 에물을 비롯해 다양한 물건을 가져왓다. 자료에 따르면 41종이다.

명나라는 말라카 사신이 가져온 물건을 시장에서 팔 수 있도록 허락해주고

다른 나라보다 더 높은 가격을 매기게 해 주었다.

 

 

 

 

왓따매~!!!!

 

도대체 함께 출항한 배의 숫자가 도대체 몇 척이랍니까!

36 + 700 + 240 + 300 + 180 = 1,456 척(隻)

아무리 대국놈들이라지만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습니다.

저렇게 거느리고 항구로 들어오면 얼마나 장관이었을까요?

자전거 오토바이도 아니고 큰 배가 1,456척이라니요!

큰 도시가 하나 갑자기 생겨난 셈이었을 겁니다.

장삿꾼들은 얼마나 신났을까요.

 

 

마젤란이나 콜럼버스가 한참 깃발 날리며 항해하던 때가 1500년 이쪽 저쪽이었습니다.

정화는 1371년생인데 34살에 1차 원정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1405년이지요?

더도 덜도 아니고 꼭 100년을 앞서가는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몰랐을까요?

어떻습니까? 세계사 흐름의 윤곽이 대충 그려지지 않습니까?

서양 중심의 세계사가 얼마나 왜곡됐으며, 우리는 얼마나 잘못된 교육을 받아왔었는지.

곧 중국의 시대가 되면 역사책 바꿔 써야 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허황옥 시대 얘긴 나중에 합시다.

 

 

 

 

 

 

아래는 '쌍어문(雙魚紋)'에 대한 내용인데, 오래전에 올려놨던 것을 다시 옮깁니다.

재미는 없으니 관심이 있는 분이나 보십시요.

  

 

 

 

 

 

 

 

 

 

 

 

 

 

김병모 / 허황옥 루트 (360쪽. 1만3천원) 

 


1961년 여름, 대학생이던 저자는 자신의 시조인 수로왕의 능을 방문했다가 왕릉 대문에 그려진 물고기 한 쌍을 보고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신어神魚라고 부르는 이 물고기는 인도식 탑과 비슷한 물체를 마주 보고 있었는데 이런 종류

의 그림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로왕릉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왕비의 무덤 앞 능비에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

태후 허씨릉’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과연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에 인도 여인이 머나먼 인도에서 한반도까지 어떻

게 왔는지 궁금해졌다. 이러한 궁금증은 그로 하여금 46년에 걸쳐 가까운 중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인도ㆍ네팔ㆍ파키

스탄ㆍ영국ㆍ독일ㆍ미국ㆍ이란 등을 구석구석 답사하며 쌍어신앙을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그 결과 아유타국이 기원

전 7세기경 아리아족이 세운 인도 코살국의 중심 도시 아요디아이고, 중국에서 일어난 한나라와 흉노의 대립에 영향

받아 아요디아의 지배계급과 지식인들이 동쪽으로 이주해 지금의 중국 사천성 안악현(보주)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곳에서 태어난 허황옥이 서기 47년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가락국으로 왔음을 밝혀냈다.  

 

  
쌍어신앙은 신석기시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했으며, 쌍어는 기원전 12세기에 그 지역에서 아시리아 문화가 꽃피

시작할 때 만물을 보호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그 후 아시리아의 사제들은 인간과 인간의 생활을 보호한다는 의

미로물고기 모양의 사제복을 입고 의식을 집행했으며 그런 물증들이 인장印章으로 나타나 있다.  쌍어신앙은 바빌로

니아시대에도 계속되어 왕권의 상징처럼 쌍어문이 유행한다. 그것이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던 민족들의 이동으로

서쪽으로는 지중해로,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로마의 탄압을 받던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쌍어신앙은 물고기 아이콘으로 서로 기독교인임을 확인했고, 지하교회인 카타콤에 오병이어(떡 다섯

개가 가운데있고 물고기 한 쌍이 양쪽에서 떡을 보호하는 그림)를 그려 예수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았다는 요한복음의 내용을 전한다.

 

 
한편 쌍어신앙은 흑해를 근거지로 일어난 기마민족인 스키타이를 통해 중앙아시아 전역과 알타이 산악지대의 유

에게 퍼졌다. 이런 과정에서 쌍어신앙은 각 지역의 토착 신앙의 내용들과 섞여서 인도 대륙에 흡수되었고, 그것

힌두교와 불교에 스며들었다. 그래서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 사이에 중앙아시아를 장악한 스키타이족들은 타고

다니던 말의 이마에 쌍어문을 부적으로 달고 다녔고, 말안장도 쌍어문으로 장식했다. 그 전통은 오늘날 파키스탄 간

다라 지방을 운행하는 자동차에 그려진 쌍어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 쌍어신앙이 인도인의 이민으로 중국의 운남

사천 지방의 주민들에게도 퍼져나갔고, 북쪽으로는 라마교를 통해 몽골의 초원 민족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이렇게 하

여 쌍어신앙은 사천 지방에서 한국으로 이동한 허황옥 일행에 의하여 가락국에 퍼졌고, 그것은 다시 가락국 출신들의

일본 이민으로 일본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불가에서는 물고기가 석가모니를 보호하는 동물로 되어 있으며,  몽골의 풍속에는 물고기가 사람보다 눈이 좋아서

물속에서도 사람들이 잘 살아가는지 또는 위험에 처했는지 살피며 밤이나 낮이나 자지 않고 사람을 보호하는 신적

神的인 존재로 알려져 있다. 또한 몽골의 전통 종교인 라마교에서는 물고기를 팔보八寶 중 하나로 여기며, 그래서

몽골인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물고기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무나 꽃, 신관神官이나 신물 등을 보호하기도 한다.

수로왕릉의 쌍어는 가운데 탑을 보호하고 있으며, 김해의 은하사에 있는 쌍어는 가운데 꽃을 보호하고 있다. 메소포

타미아의 수메르 문화를 보여주는 페르가몬 박물관의 한 방에는 높이가 사람 키만 한 커다란 수조水槽 바깥벽에 특

이한 그림이 조각되어 있는데 어피복魚皮服을 입은 사제가 넘쳐흐르는 물병을 손에 든 수신水神 오아네스를 호위하

는 모습이다. 여기서 물고기 상징의 복장을 한 사제는 초자연적 능력을 갖춘 물고기, 곧 신어神魚를 의미한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약을 생산하는 커다란 나무의 뿌리를 보호하는 물고기 두 마리 이야기를 통해

 물고기가 인류를 모든 질병에서 구해준다는 믿음에서 신년축제 때 금붕어를 사며,

일본에서는 가족이 모두 건강하게 해달라는 의미로 ‘고이노보리’ 민속축제 때 종이로 물고기를 만들어 장대에 매단다. 


 
지금 한국인 핏줄의 한 갈래는 허황옥과는 다른 루트를 통해 그 훨씬 이전부터 인도쪽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

남쪽으로 들어왔다. 고인돌과 벼농사, 난생신화로 대표되는 문화를 일군 이 혈통의 선조들은 맨 먼저 한반도에 정착해

지금의 한국어에 그 흔적을 남겼다. 한국어는 통상 북방 우랄 알타이어로 분류되지만 최초 정착민들은 그 쪽이 아니라

남방계통었다.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는 쌀, 벼, 밥, 풀, 메뚜기, 모 등의 쌀농사와 관련된 말과 인체명칭, 친족호칭들 중

상당수가 인도 토착어인 드라비다어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우랄 알타이어 계통은 진의 중국 통일 무렵 난을 피해 한반도

로 이주한 사람 등 북방계로 연결되며, 천손강림신화를 신봉하는 이들 갈래가 남방계통과 융합한 뒤 신라통일과 더불어

한반도인 주류를 형성한다. 북방계통은 연해주와 이르쿠츠크 인근 바이칼 호수를 넘어 멀리 서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

아의 스키타이 문화 혈통들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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