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
1624년 에도막부의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습직(襲職)에 대한 회답사행으로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부사 강홍중의 기행문인 《동사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왜인들이, "수길(秀吉)이 조선사람의 코와 귀를 모아 이곳에 묻었는데,
수길이 죽은 후에 수뢰(秀賴)가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하며,
어떤 사람은 "진주성이 함락한 후에 그 수급을 이곳에 묻었다"하니,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것은 교토의 대불사(大佛寺)를 방문했을때 그 앞에 있는 귀무덤에 관해 적은 감회다.
귀무덤이란 일본군이 명령에 따라 혹은 자신의 전공을 인정받기 위해 보낸,
주로 소금에 절인 조선인의 코를 모아서 묻은 무덤이다.
<기요마사 고려진 각서>에는
"그 때(1597년)에는 일본인 한 사람 당 조선인 코가 세 개씩 할당되어,
그 코를 고려에서 검사관이 검사한 뒤에 큰 통에 넣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내졌습니다.
그것을 대불사 앞에 무덤을 쌓아두었습니다."
또한 일본에 연행되었다가 귀국한 강항의 《간양록》에는
"사람은 각각 귀가 두 개 있지만 코는 하나다,라고 하면서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의 코를 잘라서 목을 대신해 왜의 수도에 보내게 하였다.
이것을 대불사 앞에 묻었던 바, 거의 교토 서쪽 아타고산 중턱 높이에 이르렀다.
혈육의 참화는 이것을 들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 중에 코 없이 살던 사람이 또한 많았다." 《지봉유설》
여기서 코를 자르는 행위의 유래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것은 이전에는없었던 것일까.
중국의 고대 기록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중세 일본에는 비형(鼻刑)이나
손가락을 자르는 육형(肉刑)이 재산 없는 일반 서민 이하에 대한 형벌로 많았다.
이 <귀코 자르기 형벌>은 에도 시대 초기에도 서민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로서,
막부나 여러 번(藩)에 채용되었다. 요컨대 당시의 일본에 있던 형벌의 하나였기 때문에,
일본군에 있어서는 코를 자르는 행위에 대한 저항감이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코자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진주성 전투 4년 후인 정유재란 때이므로,
진주성 함락 때와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평화의 사절에게 굳이 귀무덤을 보여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2)
두 번에 걸친 진주성 공방전의 치열함, 지키는 쪽과 공격하는 쪽의 목숨 건 결전은 실로 처절함의 극치였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측의 사상자 6만, 일본측 3만명이 넘었다.
"죽은 군사와 백성이 6만여명이었고, 개와 닭도 남지 않았다.
적은 성을 다 뭉개고, 호를 메우고, 우물을 묻고, 나무를 다 베어버려서 전일의 분풀이를 한껏 하였다.
군민간에 여기서 사아남은 자는 겨우 몇 사람 뿐이었다.
왜변이 있은 이래 사람 죽은 것이 이 싸움 처럼 심한 일은 없었다." 《징비록》
- 최관, 『일본과 임진왜란』에서 발췌
2.
전쟁은 일본군이 철수함으로써 종식되었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유지해 온 국가가 외적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고,
의병과 명나라 군대에 의해 국토를 되찾음으로써 갖는 정치적인 부담은 매우 컸다.
선조와 관료들은 자신들이 져야 할 전쟁의 책임을 왜의 호전성에 돌려 강조하였다.
나아가 "왜적들을 소탕하여 원수를 갚으려 했었는데,
일부 관료가 서둘러 화의(和議)를 맺음으로써 일을 그르쳤다"는 논의를 제기하였다.
결국 정부는 일본과의 화의를 주재하였던 영의정 유성룡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전쟁책임론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선조와 집권층은 전쟁을 승전으로 호도하고 관원들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신을 책봉하였다.
먼저 의주로 피난가 전시정부를 꾸렸던 관원들을 공신으로 책봉한 것이다.
다음으로 전쟁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관원 및 명군 파병에 공을 세운 관원을 공신에 책봉하였다.
그러나 정작 전공을 이정받아 공신에 책봉된 인원은 이순신 이하 18명에 불과하였다.
공신 가운데 의병장 몇 사람이 포함되기는 하였으나 곽재우 김천일 등 대부분의 의병장은 포함되지 않았다.
전공을 관군이 아닌 의병장에게 돌린다는 것은 그만큼 집권층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정치의 주도권을 의병장 출신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조정은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일련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성리학 이외의 사상들을 '요언혹중지설(妖言惑衆之說)'로 규정하여 단속하였다.
그리고 향약을 권장하고, 삼강오륜을 범한 죄를 엄단함으로써 민을 지배 질서 안에 묶으려 하였다.
아리러니칼하게도 국가적 위기인 임진왜란을 경험한 조선왕조는 신속히 멸망해가기보다
오히려 사후 수습을 매우 기민하게 해냄으로써 지배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 정홍준 고려대 강사,『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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