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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의 제작 시기를 우리는 어떻게 1844년의 59세로 단정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그 시기는 1844년의 어느 시점이고,
추사는 왜 1844년에 <세한도>를 그렸으며,
과연 어떠한 실존적 상황에서 <세한도>를 그렸을까?
평소에 최고급의 중국 종이를 애용하던 추사가
생애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세한도>를 거칠고 흔한 우리의 편지지에,
그것도 작은 종이를 3장이나 이어붙여서 그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통상 화화사적인 논증과 화론 중심의 제발(題跋)을 통해서 고증학적인 지식을 과시하던 추사가
그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채
가슴 뭉클한 편지 형식의 독특한 문장으로 <세한도> 발문을 쓴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한 제발까지 그림의 본질적인 조형 요소로 간주하고 그 통합성을 강조하며
이를 철저하게실천했던 추사가 유독 <세한도>의 발문만 별지에 자를 대고 방안까지 쳐서
구양순체의 단정하고 엄격한 해서(楷書)로 쓴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아가 추사 사후 그의 문집에 이 <세한도>의 발문이 '제발'편에 수록되지 않고
특이하게 '서독(書牘)'편에 이상적에게 보내는 편지로 수록되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답이 궁금하신분은 '정병삼 외《추사와 그의 시대》 p209~274'를 읽어보세요.
옮겨적기에는 양이 많습니다. 추사에 대한 논문을 모아놓은 10인 共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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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본래 추사가 쑥대머리의 시동(侍童)이었던 달준(達俊)에게
어느 날 우연히 손길 가는대로 그려주었던 작은 난초 그림이다.
그런데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될 때 추사의 복심(腹心)으로 불린 오규일이
우연히 이 그림을 보고 억지로 빼앗아 갔다.
그후 이 그림은 추사 말년의 애제자 소당 김석준을 거쳐서 장택상, 손재형 등을 거쳐
지금은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사연이 담겨 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불이선란도>는 그림보다도 글씨가 더 많을 뿐만 아니라,
그림보다 오히려 글씨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독특한 그림이다.
글씨가 많아지게 된 것은 추사가 제발을 네 번이나 추가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손길 가는대로 그렸던 이 그림이 의외의 득의작(得意作)으로 느껴졌는지
여러가지 사념과 심회를 적으며 제발을 추가했을 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문하생들끼리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뀌게 되었던 특별한 사연까지 밝히며
제발을 계속 추가했다.
(같은 책에서 발췌)
얼마 전에《난 그림 비교》라는 제목으로 포스팅하면서,
이 <불이선란도>에 대해 제 나름대로의 추리를 해서 쓴 적이 있었답니다.
오늘 상세한 내용을 보니까 제 얘기가 맞았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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