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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미술 이야기 (책)

워홀 & 폴락

 

 

 

 

1

 

 

워홀은 탐욕스런 공장장이자 무책임한 노무자였다.

돈이 궁하면 작품 크기를 멋대로 부풀렸고,

물감을 닦는데 쓴 헝겊마저 버젓이 신작이라며 팔아먹었다.

꼭지 덜 떨어진 한 평론가는 '헝겊 쪼가리'를 두고 난삽한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어느날 그는 커다란 캔버스 위에 올라타서 오줌을 내갈겼다.

오줌이 물감을 번지게 했고 금속성분은 산화하기 시작했다.

캔버스에는 얼룰덜룩한 반점이 생겼고 기묘한 무정형의 추상화,

최초의 오줌 회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구상을 한다구? 나는 골치 아픈 생각을 아예 안해.

나보고 깡통을 그리라고 한다면 맨날 똑같은 깡통만 그리겠다."

 

이번에는 소더비가 워홀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워홀이 1964년에 제작한 <오렌지 마릴린>의 낙찰가가 불려지자 응찰자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1,730만 달러!

 

 

 

 

 

 

- 손철주,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에서 발췌.

 

 

 

 

 

2

 

 

지금까지 거래된 최고가의 미술작품은 2006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 4,000만 달러에 낙찰된 잭슨 폴록『넘버5』다.

대중에게 그토록 인기가 있는 반 고흐 등의 인상파 대가들조차 따돌리고 폴록이 이렇게 최고의 작품 값을 자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Pollock의 No.5 (1948년)  1억 4천만 달러

    

이는 냉전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미국 중앙정보국이 있다.

추상표현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말 형성되기 시작해 1950년대에 절정에 이른 미국의 미술 사조다.

이 가운데 폴록이 최고의 간판스타가 된 것은,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물감을 흩뿌리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추상표현 주의의 심벌로 안성맞춤이었던데다,

당시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에 맞서 외치던 가치를 풍성히 내포하고 있다고 어겨졌기 때문이다.

CIA는 소련과 ‘문화전쟁’을 벌어야 했다.

파시즘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는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인기를 크게 높여 놓았다.

공산주의는 특히 서유럽의 저명 예술가들과 문화인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고 퍼져나갔다.

피카소 등 유명 인사들이 공산당에 가입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났다.

유럽의 흔들림에 CIA는 긴장했다.

무엇보다 문화면에서 소련을 압도하고 유럽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했다.

이는 CIA 자체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문가들의 도움이 절실했던 CIA는 이 ‘문화전쟁’의 핵심 작전세력으로 뉴욕 현대미술관 관계자들을 끌어들였다.

현대미술관의 실질적인 지배자 넬슨 록펠러는 아이젠하위 대통령의 심리전을 위한 핵심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관장을 지낸 톰 브레이든은 정식 CIA 요원이 되어 문화전쟁을 지원하는 실무 총책임을 맡았다.

CIA의 목표는 소련의 미술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미술을 미국의 미술, 나아가 세계의 미술로 진흥시켜

미국의 사상적 · 문화적 우위를 유럽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은 양식상으로는 구상적인 미술이었다.

이에 따라 CIA는 양식상으로도 추상적인 미술, 곧 추상표현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된 것이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이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순수를 표방한 추상표현주의가 국가와 정치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그 어느 정치미술보다 더 정치적인 미술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공작은 비밀리에 수행됐다.

1952년 파리에서 열린 <걸작의 향연>, 1955년 로마에서 열린 <젊은 화가들>이 그 대표적인 전시다.

물론 미술계의 큰손들이 이런 전시에 출품된 작품을 가급적 많이 구매하도록 독려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미국 안에서도 추상표현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환경이 만들어지도록 많은 노력이 펼쳐졌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로 꼽히는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사격’에 나섰다.

결국 추상표현주의가 미국미술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적인 미술 사조로 우뚝 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다른 개인적인 이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록펠러는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쌀 때 많이 사들여 이후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보았다.

정부 예산이 비밀공작에 쏟아지는 등 국가가 미술을 적극 지원하는 상황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이주헌《지식의 미술관》p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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