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8. 07:44ㆍ미술/한국화 옛그림
퍼온 글과 그림입니다.
여러사람이 함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출처. http://blog.daum.net/sixgardn/15770163
<호방>(부분), 《사공도시품첩》중, 1749년, 비단에 엷은 색, 27.8×25.2cm, 국박
올 해는 겸재 정선(1676-1759) 서거 2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간송미술관 봄 전시를 시작으로 국립박물관과 삼성미술관 등 굵직한 전시장에서 정선을 기념하는 기획전이 열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국립박물관 전시는 무려 석 달 보름동안 계속되었고 삼성미술관은 내년 3월까지 6개월간 계속된다고 합니다.
국립박물관 전시는, 현재 남아 있는 정선의 기년작 중 가장 빠른 36세때의 작품《신묘년풍악도첩》을 비롯하여
41세 때 그린《북원수회도첩》, 한양의 명승지 장동의 여덟 장소를 그린《장동팔경첩》,
퇴계 이황의 친필과 송시열의 발문이 담긴 《퇴우이선생진적첩》
그리고 사공도의 시론과 정선의 그림과 이광사의 글씨가 담긴 《사공도시품첩》,
마지막으로 왜관수도원소장《겸재 정선 화첩》이 공개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산폭포도>나 <선인도해><해인사도>등 다른 작품들도 전시되었지만
아무래도 저의 관심사는 주마다 페이지가 바뀌어서 펼쳐지는 화첩에 있었습니다.
새로 펼쳐진 그림을 생각하며 주마다 박물관에 들어설 때마다 가슴이 설레임으로 쿵쾅거렸습니다.
긴 시간동안 지켜 본 전시회였고 볼 때마다 감동을 받았던 전시회인지라 오늘도 욕심껏 그림을 많이 올립니다.
저는 어떤 전시회에 가든 항상 도록과 자료를 먼저 챙기는 것이 버릇입니다.
전시 도록에서 가장 좋은 그림을 이곳에 올리고 있는데,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제가 가진 다른 자료 중에서 더 좋은 그림을 찾아 올립니다.
그 얘기는 제가 감상하는 수준의 그림을 그대로 올려드린다는 뜻입니다.
일을 하시다가 잠시 휴식이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지 들어오셔서 명화속에서 산수유람을 해 보세요.
솔바람이 솔솔 불어올 것입니다.
<금강내산총도>,《신묘년풍악도첩》, 1711년(36세), 비단에 엷은 색, 36.0×37.4cm, 국박
정선은 손과 발로 그림을 그린 화가입니다.
한양의 도성안에서부터 금강산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부지런히 돌아다녔습니다.
다니면서 직접 보고 느끼고 감동받은 것을 붓끝으로 쏟아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금강산은 정선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신묘년풍악도첩》을 비롯하여 여러 점의 금강산 그림을 남겼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신묘년풍악도첩》을 한꺼번에 전부 볼 수 있어서 아주 흐뭇했습니다.
정선이 여행한 여행코스도 함께 그려놓은 박물관측의 배려로 머릿속으로 정선의 뒤를 따라서 함께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금강내산총도>처럼 금강산의 전체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두번째는 금강산의 세부를 클로즈업하듯 가까이에서 그린 작품입니다.
이런 원칙은 36살 때 그린 이 화첩에서부터 72세 때 그린 《해악전신첩》까지 일관되게 지켜지는 원칙이었습니다.
금강산 전체 모습을 그린 작품 두 점을 비교해서 감상해 보세요.
<금강내산>,《해악전신첩》, 1747년, 비단에 엷은 색, 32.6×49.5cm, 간송미술관
<단발령망금강>,《신묘년풍악도첩》, 1711년(36세), 비단에 엷은 색, 34.4×39cm, 국박
단발령은 여행자가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첫번째 고개라고 합니다.
단발령에 서서 금강산을 보는 순간 머리를 깎고 수도자가 되기 위해 입산한 사람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처음 본 금강산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 고개에 서서 금강산을 보자마자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단발을 했겠습니까. '여한이 없다'는 말은 이런 경치를 본 후에나 할 수 있는 표현이겠지요?
정선은 구경꾼들이 서 있는 속세와 부처님과 신선이 산다는 금강산을 구별하기 위해 그 사이에 구름의 강을 흐르게 했군요.
피안의 세계는 저렇게 신기루같을까요? 똑같은 제목을 가진 다른 작품 하나 더 구경해보세요.
<단발령망금강>, 종이에 엷은 색, 34.4×39cm, 간송미술관
<백천교>, 《신묘년풍악도첩》, 1711년(36세), 비단에 엷은 색, 33×37.4cm, 국박
<백천교>는 정선이 금강산을 그리는 두 번째 방법에 속합니다.
금강산 안에 깊숙이 들어가 세부를 그리는 방식입니다.
너럭바위 위에 앉은 선비들이 황홀한 계곡 경치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선비들 보니까 중국식 복장이 아니라 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의 갓을 썼군요.
정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입니다.
정선은 조선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가일 뿐만 아니라 인물을 그리더라도 조선 사람을 그렸습니다.
그 전까지는 그림 속에 중국 사람을 그리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라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지 않다고 깨달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정선입니다.
가장 조선적인 화가인 김홍도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전에 정선같은 선구자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옹천도>,《신묘년풍악도첩》, 1711년(36세), 비단에 엷은 색, 26.6×37.7cm, 국박
'옹천'은 독(항아리)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벼랑이라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른쪽에 출렁거리는 파도를 배경으로 왼쪽에 좁을 길을 따라 여행하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정선은 벼랑 중간 외길에 점을 찍어 길을 표시했는데
당나귀를 놓친 아이가 바삐 걸어가는 모습을 그려넣었습니다.
만화같은 발상이지만 그림 읽는 재미가 느껴집니다.
<비로봉도>, 종이에 먹, 100×47.7cm, 개인 소장
정선은 표현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작품을 여러 점 남겼습니다.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을 화면 가득 배치하고 그 앞에는 낮은 바위산들을 들러리처럼 세웠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늠름한 장군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행진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지나친 비약이라구요? 그럼 다음 그림을 한 점 보실까요?
필자미상, <금강산도권>, 19세기, 종이에 담채, 26.7×43.8cm, 국박
그림 속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세요.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선비가 말을 타고 유람을 떠나는 것 같기도 하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바위의 형상이 워낙 기기묘묘하고 절묘하다보니 그런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큰 바위에 성스러운 이름을 붙이고 절을 하고 소원을 비는 행위는
자연에 대한 이런 경외감 속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요?
이야기가 옆으로 빠졌는데 비로봉 그림 한 점 더 감상하시지요.
<비로봉>, 종이에 수묵, 25×19.2cm, 개인
먹이 가진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날카로운 펜으로 죽죽 내려긋듯 바위의 질감을 표현한 이런 작품을 보면 대책없이 무조건 감동하고 맙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친절하고 자상한 남자가 좋은데
왜 그림은 과묵하고 본질에 바로 육박해 들어가는 작품이 좋은 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세밀하고 지나치게 친절한 그림은 잔소리 많은 남자처럼 거추장스럽고 번잡하다니까요.
이 작품은 본질의 뼈대가 뭔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금강내산>, 종이에 수묵, 80.5×28.2cm, 간송미술관
<북원수회도>, 1716년(41세), 비단에 엷은 색, 39.3×54.4cm, 개인소장
저는 이 작품을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봤습니다.
이 작품은 숙종대에 공조판서를 지냈던 이광적이 과거에 급제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그렸습니다.
보통 사람이 회갑을 넘기기도 힘든 상황에서 과거 급제 60주년을 맞아한다는 것은 더욱 힘들고 경사스럽겠지요.
당시 이광적의 나이는 89세였고 이 행사를 치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 그림은 서울 장의동에 있는 이광적의 집을 배경으로 열 다섯 명의 노인들과 그 자손들이 장수를 축하하는
모임 장면을 그린 기록화입니다.
그런데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풍속화가로써의 정선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북원수회도> 세부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모임 장면을 기념하기 위한 기록화인만큼 모임 장소와 분위기가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차분한 필치로 그렸습니다.
손주를 대동한 노인들이 노란 방석 위에 앉아 있고 난간에는 노인들이 짚고 온 지팡이가 놓여 있습니다.
댓돌 위에는 음식을 장만하는 아낙네들이 상을 들여가기 위해 앉아 있고,
마당에는 가마꾼들과 겸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니까 김홍도의 작품이 떠오르는 군요.
전 김홍도, <남소영도>, 종이에 담채, 43.7 ×32.5cm, 고려대학교박물관
2001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전시했던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때 나왔던 작품입니다.
나무와 숲에 둘러쌓인 건물 속에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주변에는 잔치를 진행하는 스탭들과 구경꾼들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사선으로 배치된 건물 담장이나 부감법의 시각 등은 겸재와 단원 작품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단원이 훨씬 세밀하고 꼼꼼한 것 같습니다.
소나무 아래 다양한 자세로 앉아 있는 인물들이나 뒷마당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들까지
단원의 눈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듯 합니다.
<세검정>, 종이에 엷은 먹, 22.6×61.8cm, 국박
정선은 북악산 자락 유란동에서 태어나 자랐고 만년에는 인왕곡에서 살았습니다.
인왕산 자락과 백악산 계곡은 '우대'라고 불렸는데 한양의 권문세가들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북원수회도>의 주인공 이광적도 이 곳 장동에 살았습니다.
정선은 이 곳에 사는 권문세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화가로써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는 인왕산 동쪽에 위치한 청풍계를 비롯해, 세검정, 창의문, 백운동 등 한양 진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세검정>은 북한산 아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세워진 정자인데
정자를 중심으로 주변 경관이 부챗살처럼 퍼져 한 눈에 들어옵니다.
부감법으로 그린 정선 작품과 카메라로 찍은 다음 그림을 비교해보시면
동양화와 서양화의 시각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삼승조망도>, 1740년, 비단에 엷은 색, 66.7×39.6cm, 개인소장
이 작품 앞에 서자 함께 구경하러 갔던 지인이 갑자기 탄성을 지릅니다.
와...이런 곳에서 한 번 살아봤으면...!
저는, 사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한 번만이라도 저 정자 속에 앉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은 정선의 이웃 사람인 이춘제의 후원입니다.
이춘제는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대저택의 주인인데 당시 한양 귀족의 생활이 어떠했는 지 짐작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창의문>《장동팔경첩》, 종이에 엷은 색, 32.9×29.4cm, 국박
장동은 인왕산의 남쪽 기슭에서 백악산(북악산) 계곡에 이르는 지역으로 지금의 효자동, 청운동 지역입니다.
권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과 명문가들이 모여 사는 한양 최고의 부촌이었습니다.
정선은 장동에 위치한 명문가 저택, 유명한 명승지 여덟 곳을 그려《장동팔경첩》에 담았습니다.
취미대, 대은암, 독락정, 청송당, 창의문, 백운동, 청휘각, 청풍계의 순으로 그려진 이 화첩은
지금의 청와대와 그 일대를 그렸습니다.
<대은암> 《장동팔경첩》, 종이에 엷은 색, 32.9×29.4cm, 국박
<백운동>,《장동팔경첩》, 종이에 엷은 색, 32.9×29.4cm, 국박
<계상정거도>《퇴우이선생진적첩》, 종이에 먹, 25.3×39.8cm, 개인소장
《퇴우이선생진적첩》은 퇴계 이황이 직접 쓴「주자서절요서」에 우암 송시열의 발문이 담긴 서책입니다.
그래서 '퇴계'와 '우암'의 앞글자를 따서 '퇴우'라고 했습니다.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은 중국 주희의『주자대전』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글을 뽑아 책을 엮고 서문을 씁니다.
그것이「주자서절요서」인데, 퇴계의 친필은 그의 손자와 외손자를 거쳐 외손자의 사위인 박자진에게 전해집니다.
박자진이 바로 정선의 외조부인데 그는 퇴계의 글을 들고 송시열에게 가서 발문을 받아옵니다.
퇴계와 송시열의 친필로 쓴 서책이 외가집에 있다는 것을 안 정선의 아들 정만수는 박자진의 집에 가서 이 서책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이 서책의 앞 두 면을 여백으로 남겨 아버지 정선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이 서책이 전해지게 된 내력을 자신의 발문으로 써 넣어 장첩합니다.
나중에는 정선의 친구 시인인 이병연의 제시가 추가됩니다.
정선은 책의 앞 여백에 4면의 그림을 그려넣습니다.
첫번째는 이황이 학문을 닦고 제자를 양성하던 도산서원을 배경으로 <계상정거도>를 그리고,
<무봉산중>에서는 외조부 박자진이 송시열에게 발문을 받는 장면을,
<풍계유택>에서는 외조부 박자진이 살던 외가집을 그렸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인곡정사>를 그려넣습니다.
<계상정거도>는 그 첫번째 작품으로 퇴계의 고결한 선비정신이 느껴지도록 담담한 필치로 그렸습니다.
<무봉산중>《퇴우이선생진적첩》, 종이에 먹, 30.2×21.4cm, 개인
제목을 <무봉산중>이라 지은 것은,
박자진이 송시열에게 발문을 받으러 갈 당시 송시월이 은거하던 곳이 수원 무봉산이기 때문입니다.
계곡물이 흐르는 무봉산 정자에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박자진과 송시열이 마주 앉아 있습니다.
오른쪽에 사방관을 쓰고 흰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우암이고, 왼쪽에 갓을 쓴 사람이 자진일 것입니다.
박자진이 지금 왜 자신이 퇴계 선생의 진적에 우암 선생의 발문을 받아야 하는 지 열심히 설득하고 있는 중입니다.
<풍계유택(외조부 박자진의 집)>《퇴우이선생진적첩》, 종이에 먹, 30.1×21.5cm, 개인
<인곡정사(정선이 살던 집)>《퇴우이선생진적첩》, 종이에 먹, 32.3×22cm, 개인
외조부 박자진이 살았던 <풍계유택>에 이어 자신이 살고 있는 <인곡정사>를 마지막에 그려 넣었습니다.
송시열이나 정만수의 발문을 굳이 읽어보지 않고 단지 이 그림 4장만 보더라도
이 서화첩이 처음 누가 만들었고 어떤 경로를 통해 정선의 집에 소장하게 되었는가를 명료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선은 왜 이 서화첩을 만들었을까요?
이 서화첩은 정선의 나이 71세 때 만들었습니다.
그 늦은 나이에 이 서화첩을 만든 이유가 어쩌면 자신의 뿌리찾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나는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고 어떤 맥락속에서 살아왔는가, 를 찾다보면
결국 자신의 삶의 근간을 이루는 큰 뿌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뿌리가 조상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스승일 수도 있고, 때론 예술혼이거나 돈일 수도 있습니다.
정선은 그 뿌리를 퇴계에서 시작하여 우암으로 이어지는 '유학'이라 여겼던 것이지요.
이런 자부심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소야>,《사공도시품첩》, 1749년(74세), 비단에 담채, 34.5 ×29.6cm, 국박
이 번 전시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처음 공개된 작품을 볼 수 있었다는 점 이외에도 각 화첩의 그림을 전부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항상 전시회를 갈 때마다 두꺼운 화첩 중에서 오직 펼쳐진 면만 봐야 하는 아쉬움이 컸었는데
이번에는 화첩 전체를 볼 수 있어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석달 동안 내내 일주일에 한 번씩 국박으로 출근했지만요.
출근할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가서 본 그림이 바로《사공도시품첩》이었습니다.
이 화첩은 오른쪽에는 정선의 그림이, 왼쪽에는 원교 이광사가 사공도의 시품을 필사한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사공도(837-908)는 당나라 말기의 시인인데, 그가 쓴「시품」은 시를 쓸 때 갖춰야 할 품격 스물 네 가지를
요약한 글입니다.
「시품」의 내용은 시를 쓰는데 필요한 기교가 아니라 품격을 논한만큼 구체적이기보다는 매우 추상적입니다.
'웅혼'' 충담''섬농''침착''고고' 전아''자연''호방''함축' 비개'....등등
단어만으로는 뚜렷한 실체가 잡히지 않을 정도로 추상적입니다.
이런 추상적인 내용을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작업, 쉽지 않았겠지요?
아니, 추상을 형상화한다는 시도 자체가 애초부터 무모한 것인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추상적인만큼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가 충분해서 오히려 독창적인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론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숙성시켜 충분히 자신의 빛깔로 표현할 수 있을 때
붓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정선의 그림처럼 시를 옮겨 쓴 이광사의 글씨체 또한 다양했습니다.
글의 내용에 맞게 때론 전서체로, 때론 예서체, 해서체, 행서체, 초서체로 쓰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곁들인 글씨체를 선택했습니다. 역시 대가다운 면모였습니다.
윗 그림의 <소야>는 그 뜻이 '활달하여 예법에 얽매이지 않음'입니다.
여러분같으면 '소야'를 어떻게 그리시겠어요?
<유동>,《사공도시품첩》, 1749년(74세), 비단에 담채, 27.8 ×25.2cm, 국박
'유동'은 '지장없이 부드럽게 흘러감'이란 뜻입니다.
무엇이 부드럽게 흘러간다는 뜻일까요?
막힘없이 흘러가는 계곡물이 그렇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정자 속에 앉은 시인의 시상이 그렇다는 걸까요.
《사공도시품첩》을 보면서 놀란 것은 정선이 채색을 아주 효과적으로 잘 썼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의 맨 위에 나온 <호방>의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에 볼터치를 하듯 붉은 채색을 물들였습니다.
<소야>에서는 화분만 붉게 칠했고, <유동>에서는 붉은색 탁자와 파란색 책이 눈에 띕니다.
좋은 도판이 없어서 올리지는 못하지만 <자연>에서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낛시가방을 붉게 칠했더군요.
처음에는, 뭐 이런 것까지 세밀하게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담담하게 한 가지 톤으로만 깔린 배경속에 진한 액센트를 찍자 갑자기 그림이 생기가 나고 생동감이 돌더군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도 절대로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역시 정선은 프로였습니다.
<비개(悲慨)>,《사공도시품첩》, 1749년(74세), 비단에 담채, 34.5 ×29.6cm, 국박
"큰 바람 물 말아 일으키니
숲의 나무가 꺾어진다.
마음은 괴로워서 죽을 것 같은데
쉬러오라 부른 이는 오지 않는다
인생 백년은 유수와 같고
부귀는 차가운 재가 되었도다.
대도는 날마다 멀어지니
웅걸한 인재는 그 누구인가?
장수는 검울 어루만지고
눈물 흘리며 마냥 슬퍼한다
우수수 낙엽은 지고
빗물 새어 푸른 이끼가 생기도다."
<고산방학>,《겸재 정선 화첩》, 비단에 담채, 29.2 ×23. 5cm, 왜관수도원
마지막으로 살펴보게 될 화첩이 왜관수도원 소장《겸재 정선 화첩》입니다.
이 화첩은 1925년 성 오틸리에 수도원 소속의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신부가
금강산 유람 중에 구입해서 독일로 가져간 작품으로
2006년 성 베네딕도회 소속 경북 칠곡 왜관수도원에 영구 임대 형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화첩에 있는 그림 중에서 20여점이 1977년에 간행된『겸재 정선』(한국의 미 시리즈:중앙일보사)에
소개되었는데 원작을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림 내용은 정선의 다른 작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고 소재도 겹치는 작품이 많았습니다.
물론 채색을 올리는 형식이나 필치는 작품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래 두 작품 <고산방학>과 <노자출관>은 같은 소재의 그림이 간송미술관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두 작품을 비교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산방학>, 비단에 담채, 22.8×27.8cm, 간송미술관
<고산방학(孤山放鶴)>은 송나라 때의 은일지사인 임포의 이야기를 그린 것입니다.
임포는 서호 부근 고산에 집을 짓고 살면서 집 주변에 매화를 심고 학을 길렀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던 임포는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 삼아 평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그의 사는 모습은 이후 수많은 풍류가들의 부러움을 샀고
아취 있는 은거생활의 전형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시인과 화가의 상상력을 자극한 임포의 모습은,
매화를 감상하는 모습을 그린 '고산상매'라는 제목으로도 많이 그려졌습니다.
<노자출관>,《겸재 정선 화첩》, 비단에 담채, 29.6 ×23.2cm, 왜관수도원
<노자출관>, 비단에 엷은 색, 28.5×23.2cm, 간송미술관
지난 번 간송 전시회 때 전시되었던 작품입니다.
간송미술관 소장 작품이 엷은 먹을 써서 차분한 느낌이라면,
왜관수도원 소장품은 채색을 강조하여 좀 더 화사한 느낌입니다.
<연광정>,《겸재 정선 화첩》, 비단에 담채, 28.6 ×23.9cm, 왜관수도원
연광정은 대동강변에 위치한 장소로 빼어난 풍광이 유명한 장소입니다.
기암괴석 위에 세워진 이층 누각과 절벽아래 들어선 아담한 초가집,
넓은 강가에 줄지어 선 버드나무들이 꼼꼼한 필치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노를 젓는 뱃사공과 말을 타고 가는 인물 등이 세부 묘사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필치로 그려져 있어
실제로 보면 더욱 그 진가가 발휘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보고 함께 갔던 지인이, 정선은 정말 쪼잔하다고 혀를 내둘렀던 작품입니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돋보기를 들이대고 봐야 제대로 보일 정도로 극밀하게 그린
정선의 표현력에 대한 최대의 찬사일 것입니다.
<함흥본궁송>,《겸재 정선 화첩》, 비단에 담채, 28.8 ×23.3cm, 왜관수도원
<금강전도>, 1734년(59세), 종이에 담채, 130.7×59cm, 삼성미술관
한남동에 있는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본 <금강전도>와 <인왕재색도>의 감동을 쉽게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전시될 때부터 수없이 많이 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볼 때는 특별히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그렇더니 새삼스럽게 갑자기 찾아온 감동의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이 두 작품을 보기 위해 1년동안 정선의 발자취를 쫓아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유난히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시에 '만이천봉 개골산'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면 겨울의 금강산을 그렸습니다.
눈도 내리지 않는 한겨울 추위가 창날처럼 솟아 있는 암산 사이로 내려 앉았습니다.
파란 하늘에 예민한 봉우리끝을 담군 바위들이 시퍼렇게 얼어 있습니다.
'머리맡에 걸어 놓고 늘 보고 싶어서' 그렸다는 정선의 심정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선미(禪美)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인왕재색>, 1751년(76세), 비단에 담채, 79.2×138.2cm, 삼성미술관
1751년 윤5월 29일에 친형제처럼 지내던 친구 이병연이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웃집에 살면서 한 스승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나이 들어서는 서로 시와 그림을 주고 받으며 마음을 나눈 친구였습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가 떠나가자 이병연과 함께 했던 시간을 기념하며 그린 작품이 바로 <인왕재색>입니다.
그림 오른쪽 위에 '신미년 윤월 하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병연이 죽기 직전이거나 죽고 나서일 것입니다.
'하완(下浣)은 '하순'과 같은 뜻입니다. 한 달 중에서 20일 이후를 하순이라 합니다.
이병연이 2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아마 살아 있을 때 그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죽고 나서 그렸다면 친구를 잃은 슬픔에 이런 대작을 구상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며
또 몇일만에 끝내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후에 그렸다면 그림의 완성은 6월달로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굳이 하순이라는 시간을 강조할 것을 보면 그 때 이 작품을 완성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작품만 좋으면 됐지, 그린 날짜가 뭐 그리 중요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는 그것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비가 오고 나서 막 개기 시작한 인왕산이 빗물과 안개로 축축이 젖어 있습니다.
흰 바위는 검게 칠해 그 무게감을 강조했고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구름 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76세의 노장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록 힘찬 필력이 느껴집니다.
<금강전도>도 그렇지만 <인왕재색>도 무척 큰 작품입니다.
정선의 웅혼한 필력을 힘없는 저의 글 솜씨로 도저히 전달해 줄 자신이 없습니다.
직접 가셔서 감상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정육)
- 최완수, 간송미술관연구실장
- 국립중앙박물관, 2009년 인문학 명사 토요특강 9월 자료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한국 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화가로
'화성(畵聖)'의 칭호를 올려야 마땅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가장 알맞은 고유화법을 창안해서
우리 산천을 소재로 그 내재된 아름다움까지 표출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성자이기 때문이다.
겸재는 화가이기 이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로 이어지며
완성된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의 학통을 이은 성리학자였다.
율곡으로부터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으로 이어지는 율곡학파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리학의 근본경전인 사서삼경에 박통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성리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주역(周易)에 정통해서 당대 제일로 꼽힐 정도였다.
이에 주역의 근본원리인 음양조화(陰陽調和)와 음양대비(陰陽對比)의 원리를 이끌어 화면구성원리로 삼고,
다시 중국 남방화법의 기본인 묵법(墨法)을 취해 음(陰)인 토산(土山)을 표현하고
북방화법의 기본인 필묘(筆描)를 취해 양(陽)인 암산(岩山)을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을 창안해 낸다.
암산과 토산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우리 산천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기법은 없다.
이는 필묘 위주냐, 묵법 위주냐 하는 대립개념으로 끝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던
중국 남북 양대 화법이 우리 손에 의해서 이상적으로 융합되는 현상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 겸재의 동국진경(東國眞景) 산수화법(山水畵法)이다.
따라서 이 겸재의 동국진경 산수화법은
이제까지 중국문화권 내에서 이루어진 회화발전의 모든 성과를 종합하여
우리 산천을 그려내기에 가장 알맞도록 맞추어놓은 이상적인 우리 고유의 새 화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겸재는 우리 회화사상 화성(畵聖)으로 불리워 마땅하다.
이런 겸재가 그 새 화풍 창안의 실험을 대담하게 시도하여 성공해 내는 것은 금강산 사생을 거치면서이다.
그가 36세 되던 해에 그와 시화(詩畵) 쌍벽으로 일컬어지던 지우(志友)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이 금화현감으로 있으면서
스승인 삼연 김창흡과 겸재를 초청하여 금강산 유람을 함께하는데
이때 겸재는 내외해(內外海) 삼금강(三金剛)의 절경을 30폭 그림으로 사생해내고
삼연과 사천은 시로 사생해낸다. 이것을 합쳐놓은 시화첩이《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인데
사천을 통해 이 시화첩이 세상에 알려지자 겸재의 화명(화명)은 한순간에 천하를 진동하게 되었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겸재는 더욱 진경(眞景) 사생을 통한 화법 창안에 매진하여
60세 전후한 시기에 벌써 확고한 자기화풍을 확립한다.
그 사이 겸재는
41세 때인 숙종 42년(1716) 관상감겸 교수로 특채되어 벼슬길에 나가 조지서별제, 사헌부감찰 등을 지내다
45세 때인 숙종 46년(1720) 경상도 하양현감에 제수된다.
하양에서 6년 만기를 채우고 영조 2년(1726) 51세로 상경하는데
그 사이 경상도 일대의 명승고적을 많이 사생하여 《영남첩》을 꾸밀 정도였다고 한다.
그 뒤 영조 9년(1733) 58세로 경상도 청하현감이 되어 내려갔다가
60세 때인 영조 11년(1735) 92세의 모친상을 당해 상경하기까지 2년 가까이
경상도 해안에서 강원도 해안으로 이어지는 관동팔경 등 해산(海山) 제일경을 사생하며
진경기법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모친의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머릿속으로 진경기법을 정리한 다음 영조 13년(1737) 탈상한 후
강산(江山) 경치로 국중 제일이라는 남한강 상류 사군(四郡, 청풍-단양-영춘-영월)산수
즉 단양8경을 찾아 진경사생여행을 떠난다. 그 결과 겸재의 진경화법은 최고도로 무르익게 되었다.
그래서 64세 기미년(1739) 봄에 그린《청풍계(淸風溪)》에서는
대담한 농묵쇄찰법(濃墨刷察法)과 임리(淋漓)한 수림법(樹林法)을 통해
겸재 특유의 진경산수화풍이 대성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65세 겨울 양천현령으로 나가 그려내기 시작하여 다음해 겨울까지 완성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서는 청록계(靑綠系)의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필치로 일관된 화법을 통해
대경(對境)에 따라 무궁하게 개발해내던 다양한 그의 진경화법을 실감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70세 전후에 겸재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그림솜씨의 황금기를 자랑하는데
바로 그런 황금기인 72세 때(1747)에 겸재는 벼슬도 다 내놓은 한가로운 몸으로
다시 금강산을 유람하게 된다.
36년 전에 무명 사인화가(士人畵家)로 처음 이곳에 와서 30폭 금강 절경을 그려 일거에 화명을 떨치던
옛 추억때문인지 겸재는 그 절정기의 솜씨로《해악전신첩》30폭 중 21폭을 다시 그려낸다.
그러니 이때 그린 《해악전신첩》은 겸재 진경산수화 중의 백미라 할 것이다.
이로부터 겸재 그림은 더욱 노력해져서 많은 걸작품들을 남기니
간송미술관 소장의 <삼일포> 등 관동팔경 8폭을 비롯해서
<통천문암> <여산초당> 등 대폭 산수도가 모두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이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기사년(己巳年) 산수화첩>도 겸재가 74세 되던 영조 25년(1749)에 그린 것이다.
그런데 겸재는 76세 되던 영조 27년(1751) 윤5월 29일에 슬픔을 당한다.
시화쌍벽(詩畵雙璧)으로 평생동안 지기를 나누던 진경시(眞景詩)의 대가 사천 이병연이
81세로 타계한 것이다.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겸재는
사천과 함께 오르곤 했던 사천댁 뒷동산인 북악산 남쪽 서록(西麓) 즉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 뒤쪽
산등성이에 올라 자신의 집이 있는 인왕곡 일대를 바라보며
비 개이는 정경을 장쾌한 필법으로 휘둘러낸다. 그것이 <인왕제색(仁王霽色)>이다.
겸재는 이런 그림을 그려 그 심회를 표출해내는 것이 겸재다운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노련한 필법으로 어느 때는 진경을 극도로 추상화시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더욱 강건한 필력을 구사하기도 하며 진경산수화법을 철저히 마무리 짓는다.
그런데 겸재에게는 그 호가 가리키는《주역(周易)》겸괘(謙卦)의 괘사(卦辭)대로
만년에 유종의 미를 거두는 홍복(弘福)이 터져오게 된다.
79세 되던 영조 30년(1754) 영조의 회갑년인데
영조는 겸재에게만 종4품 사도시(司導寺) 첨정(僉正)의 벼슬을 내린다. 그림 스승에 대한 예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국왕의 과갑(過甲)과 왕대비 인원왕후의 망칠(望七, 69세) 수경(壽慶)으로
70세 이상 조관(朝官)에게 1품을 가자승직(加資陞職)시킴에 따라
겸재에게는 종3품 첨지중추부사가 제수되고,
81세 되는 그 다음해인 영조 32년(1756) 왕대비 칠순으로 다시 70세 이상 조관에게 1품을 가자(加資)하니
겸재는 종2품 동지중추부사로 오른다.
이에 2품 이상은 3대 추증(追贈)하는 법전(法典)에 따라
부친(時翊)은 호조참판, 조부(綸)는 좌승지, 증조부(昌門)는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증직된다.
그래서 겸재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을 때 이를 축하 기념하는 글인
‘정겸재 선(敾)이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된 것을 축하하는 머릿글(鄭謙齋敾壽職同樞序)’이라는 글에서
창암 박사해(蒼岩 朴師海, 1711-1778)는 이렇게 말한다.
「옹(翁)은 끝없는 명성을 차지하였고 겸해서 80의 수를 누렸으니,
하늘이 옹(翁)에게 주는 것이 너무 풍부하지 아니한가.
대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초췌하고 마른 선비가 많다.
시(詩)에 궁인(窮人)이 많듯이 그림을 잘 그리고 궁하지 않은 자 또한 드물다.
옹(翁)은 비록 청빈하다 하나 안으로는 부인과 자손이 갖춰있는 즐거움이 있고
밖으로는 녹을 받는 벼슬의 영광이 있어 삼현(三縣)의 인부(印符)를 나누어 가졌었고
품계가 금옥(金玉)을 지냈으니(당상관의미) 하늘의 복이 옹(翁)에게만 어찌 완전한가.」
이런 대복인(大福人) 겸재가 영조 35년(1759) 3월24일 84세의 천수를 누리고 영면(永眠)하니
현재 도봉구 쌍문동인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에 안장한다.
이에 겸재의 10년 후배로 만년에 30여 년을 이웃해 살며
조석상봉으로 겸재와 함께 화도(畵道)에 정진하여 풍속화풍을 대성해낸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 1686-1761)은 다음과 같은 애사(哀辭)를 지어 겸재의 일생을 총평한다.
鄭公)의 휘(諱)는 선(敾)이요, 자(字)는 원백(元伯)이며
겸재(謙齋)라고 자호(自號)하니 광산인(光山人)이다.
어려서부터 한양 서울의 북쪽동네 순화방(順化坊) 백악산 밑에서 살고
나 역시 순화방에서 대대로 살며 公보다 10세가 어리니
내가 죽마를 탈 때 公은 이미 엄연히 관(冠)을 쓴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항상 공경하여 일찍이 너나들이를 한 적이 없다.
公은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었고
나 역시 그림 좋아하는 병이 있어서 대략 그 삼매경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나는 곧 매달려 하지 않았고 公은 곧 날마다 정진하고 익혀서
육요육법(六要六法)을 정밀하게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대개 우리 동쪽나라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이것을 아는 이가 없었는데
公에 이르러서 고화(古畵)를 널리 보고 공부를 또한 독실히 하여
앞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을 많이 내놓았다.
이런 까닭으로 이름도 날로 무거워지고 비단은 날로 쌓여 스스로 한가할 틈이 없었는데
곧 또한 예운림(倪雲林: 瓚)과 미남궁(米南宮: 芾), 동화정(董華亭: 其昌)을 배워
대혼점(大混点)으로 갑작스러움에 응대하는 법을 삼으니
세상의 그림 배우는 사람들은 다만 公 中年의 권필(倦筆: 마구 휘두르는 필법)만 보고
속으로 그림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여 다투어 서로 찡그린 것을 흉내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 짙고 진한 것은 세상에 미칠 자 없다.
매양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면 나에게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우리집 곁으로 이사와서는 서로 수십 보 가까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각건(角巾)쓰고 청려장 짚은 채 아침저녁으로 왕래하여 거른 날이 없이 지금 30년에 이르렀으니
公의 일생을 알기로는 나만한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대체 公의 성품은 본래 부드럽고 안존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남과 사귐에 일체 겉으로 꾸밈이 없었다.
집안은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자주 걸렀으나 일찍이 비의(非義)로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었다.
일찍이 옳지 않게 남을 간섭한 적도 없었다.
또 경학(經學)에 깊어서 《중용》과 《대학》을 논함에 있어서는
처음과 끝을 꿰뚫는 것이 마치 자기 말하듯 하였다.
만년에는 또한 《주역》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힘썼으니
손수 뽑아 베끼기를 파리머리 같이하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갓 公의 이름을 그림으로만 알고
公이 경학(經學)에 깊은 것이 이와 같음을 모른다.
어찌 이른바 위정공(魏鄭公: 魏徵, 580-643)의 문사(文辭)가 직간(直諫)으로 덮여지고,
구양공(歐陽公: 歐陽脩, 1007-1072)의 정사(政事) 재주가
문장(文章)으로 가려지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公이 하양과 청하를 거쳤으니 현감으로 양읍을 다스려 영광스럽게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나이가 80을 넘어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니 영화가 3世에 미쳤었다.
진실로 公의 인후한 덕과 성실하고 효성스런 독행(篤行)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임금님께서도 또한 公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그 號를 부르시니,
위로 공경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가마꾼에 이르기까지 公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며,
작은 그림 한 폭을 얻어도 큰 옥을 얻은 듯 집안에 전해줄 보배로 삼으려 하였다.
맑은 관직을 두루 거쳐서 한 시대에 벼슬살이 잘하는 것으로 알려졌었지만
고요하기가 소나무 아래에 있는 사람(세상을 피하여 은둔한 사람) 같았으니 어떠했겠나.
그러니 외물(外物)의 영욕과 청탁(淸濁)이 어찌 公에게 있었겠는가.
아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무오(戊午: 1738년) 겨울에 公과 내가 약속이 있었는데 하루는 바람이 맑고 달이 밝았다.
公이 그 막내 자제를 데리고 와서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약속대로 하리라”하며 붓과 벼루를 찾아들고 문비(門扉) 위에 나가
<절강추도도(浙江秋濤圖)>를 그리는데 순식간에 휘둘러내니
필세(筆勢)가 기이하고 웅장하여 정말 볼만 하였다.
내가 詩를 지어 이르기를
“정로(鄭老)가 밤중에 호흥(豪興)이 일어, 문 열고 쳐들어와 벼루 찾는다.
얕고 깊게 먹을 갈아 신운(神運)에게 맡기고, 좌우에서 등(燈)을 밝혀 눈 밝혀준다.
육필(六筆)을 함께 몰아 바람 천둥치듯하니, 세 문짝 모두 젖고 파도가 친다.
내 방은 이로부터 낯빛 더하고, 예원(藝苑)에 거연(居然)히 호사(好事) 이뤘네.”
다음날 악하 이공(岳下 李公: 秉淵)이 듣고 역시 그 운자(韻字)를 따서 지었었다.
그날 나는 홀연 안음으로 제수되어, 말을 주어 떠나보내니 드디어 公과 잠깐 작별하고 갔었다.
6년 있다가 만기가 차서 돌아와 다시 公을 대하니 문 위의 그림이 새벽에 그려낸 것 같거늘
다시 公에게 부탁하여 담채로 선염(渲染)하려 하였었으나 미적거리다가 해내지 못하고 말았었다.
그 후에 나는 배천군수가 되고(1748년) 公 역시 외읍(外邑)으로 나갔으며
(1740년 양천현령 임명, 1745년 1월 해임)
문 위 그림은 남이 빼앗아가게 되었었는데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20여 년이 지났고
公은 또한 돌아가서 사적(事蹟)이 쓸어낸 듯하니 정말 슬프구나.
대체 내가 이제 늙어 움직일 수가 없어서 公이 돌아갔고 장기(葬期)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으나
나는 아직 가서 곡(哭)을 하지 못하였으니 公에게 잘못함이 많다.
公의 여러 자손들이 만어(挽語)로 나에게 부탁하거늘 차마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
이에 감히 억지로 병을 무릅쓰고 애사(哀辭) 일통(一通)을 지어 내 슬픔을 쏟아내노니,
이 하나로 公의 대강을 볼 수 있다 하겠다. 사(辭)로 말한다.
"두 번 곱살이로 봉양하니, 좋은 반찬 거르지 않고, 三世에 추은(推恩)하니, 영요(榮曜)가 극하구나.
성주(聖主)께서 그 호를 부르시니, 가마꾼도 그 이름 아네.
옛 사람들 이름이 이루어짐 중히 여겨서
혹은 의술(醫術)로 혹은 검술(劍術)로 혹은 바둑 장기로 하기도 하고
심지어 빨간 불길 속에 몸을 던져 그 죽고 삶을 돌아보지 않기도 하였었으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죽어서 이름나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 하였네.
비록 功 세우고 德 세울 수 없었다 하나, 살아서 일세에 이미 이름났었고,
죽어서 백대 이후까지 내려갈테니, 가히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 있네."」
겸재는 조선중화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조선고유사상인 조선성리학을 전공하는 사대부이자 그 조선성리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조선 고유색을 현양하는 진경문화를 주도해간 장본인으로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그에 알맞은 우리 고유의 화법(畵法)인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산수를 우리 고유의 회화미로 표현해내는데 성공한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이자 대성자였다.
그의 진경산수화풍은 이후 많은 사대부화가들과 화원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쳐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우리 고유화법으로 표현해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세계 최고수준의 우리 고유의 그림이 있음을 보여주어
후손들에게 영원히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잃지 않게 하였으니
마땅히 ‘화성(畵聖)’으로 추앙해야 할 인물이라 하겠다.
- 최완수, 간송미술관연구실장
- 국립중앙박물관, 2009년 인문학 명사 토요특강 9월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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