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6. 09:21ㆍ미술/한국화 옛그림
♧ 아래는 某 카페에서 퍼온 글과 자료입니다.
돌려보게 해주신 혜곡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블로그에 맞도록 배열만 조금 바꿉니다.
김홍도는 1745년에 태어나서 1806년 이후 어느 해엔가 죽었다.
최근의 학자들은 1806년 경에 죽은 것으로 추측한다.
김홍도는 지금 그의 그림으로 전하는 그림만 500점에 육박하고
그 중에도 다수의 진작과 걸작이 있다.
김홍도는 한국 회화사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양과
질 높은 그림들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김홍도의 부인이 누구이고
김홍도가 말년을 어떻게 보내다가 언제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다만 정조가 돌아간 이후, 불행하고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운명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게 전부이다.
우리는 김홍도의 얼굴조차 알지 못한다.
무수히 많은 서양화가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사대부가 아닌이상
스스로의 초상을 남기는 일이 없었으므로
김홍도는 무수히 많은 그림을 그려내면서도
자신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다.
조선시대 화원에 대해서 알길은 막막하다.
요즘 사람들이 신윤복이 단 두줄 남긴 화가라서 여자일지도 모른다고들 말하지만,
조선시대 화원 화가 중 누가 2줄이상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지 의문이다.
김홍도만 해도, 비교적 자료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미비하기만 하다.
최소한 부인이 누구이고, 언제 죽었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1745년 ~ 1806년?
이 물음표를 볼때마다 안타깝기만 하다.
당시의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화가의 죽음을 왜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화원을 존대하는 시대가 아니었더라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인가.
김홍도. 군선도. 부분. 1776년, 지본수묵담채, 132.8 × 575.8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김홍도의 대표작들을 모아보고 싶었다.
우리의 역사를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풍족하게 해주는 그를 기려보고 싶었다.
그의 작품들을 모아보면서, 참 곤란했다.
이 포스터에 담을 수 있는 화면이라곤 고작 20장인데
김홍도는 대표작이 너무 많고 걸작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큰 그림 중에 고르고 골라서 몇작품을 골라보았다.
그리고 넣고 싶어도 자리가 모자라기 때문에 미치도록 안타까웠다.
김홍도는 단순히 이 그림들로 끝나는 화가가 아니다.
그의 대표작들은 무궁무진하다.
20장의 화면으로 다 보여줄 수 있는 그런 화가가 아니다.
김홍도. 군선도 부분. 1776년, 지본수묵담채, 132.8 × 575.8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현재 김홍도에 관한 기록의 시작은 1765년 21살 때이다.
궁중의 의궤병풍인 경현당수작도를 이때 주관하여 그렸는데,
김홍도가 이미 21살 때에 도화서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지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이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이므로
이미 21세 이전부터 정조와의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작품은 망실되었다.
김홍도는 이후 1773년 29살 때 영조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을 그린다.
주관화사는 변상벽, 동참화사는 김홍도,
수종화사는 신한평, 김후신, 김관신, 진응복 등이었다.
변상벽, 신한평 등과의 나이차이를 생각했을 때에
김홍도가 얼마나 이른 시절부터
이름이 났고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이 때의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같은 해에 그려진 신언인도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이 이후의 작품이 1776년 32살 때에 그려진 군선도이다.
군선도는 김홍도가 이른 시기에 그린 대표작이면서도,
한국 회화사에 손꼽힐 만한 대작 인물도이다.
이른 나이에 이만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29살에 어진을 그린 김홍도의 이름이 과연 허명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오도자가 즐겨 썼다는 난엽묘를 써서, 수묵을 주로 하여,
신선들을 그려내었다.
옷이 모두 바람에 휘날리는 것 같은 표현을 오대당풍이라고 한다.
이 것 역시 말로만 전하던 오도자의 수법으로
당시에는 이미 오도자의 그림이 전하지 않았으므로
과거 이름이 높이 나있던 오도자의 그림을 추측하여
김홍도가 그린 듯 하다.
당시 중국과의 영향은 별로 없어보이는게
당시 중국에서는 이런 형식의 인물도가 유행하지 않았다.
김홍도. 사녀도. 1781년, 지본담채, 121.8 x 55.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가 37되는 해에 그린 그림이다.
필선은 한층 여유롭고 부드러워졌다.
과거 화원들의 그림이 주로 이상화된 중국식의 얼굴을 그린 반면
김홍도의 그림에는 담백한 한국 사람의 얼굴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비록 머리모양새나 복식은 중국식이지만
눈고리와 눈썹, 콧매가 과장된 중국식의 얼굴이 아니라
조선의 백자항아리같은 얼굴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형체는 난엽묘를 써서 거의 감필법에 가깝게
인물을 그려내고 있는데,
선이 상당히 침착한 듯 여겨지면서도 율동적이다.
김홍도의 그림들은 옷주름에서 상당한 음악적 율동감이 나타난다
김홍도. 과로도기도. 견본담채, 134.6 x 56.6cm, 간송미술관 소장.
사녀도가 그려지던 즈음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으로,
굵은 옷주름은 상당히 팽팽하여 긴장감있다.
아마도 김홍도가 30대에 완성한 신선, 인물도는
이 정도에서 절정을 맞는 듯 하다.
어떠한 흠도 찾을 수 없이, 이미 완성된 회화를 보여준다.
당나귀 역시, 고정되지 않은 운동감을 보여주고 있다.
김홍도의 초년작에는 주로 사능이라고 낙관되어 있는데
사능은 김홍도의 자이다.
김홍도. 송하맹호도. 견본수묵담채, 90.4 x 43.8cm, 호암미술관 소장
이 송하맹호도 역시 30대 후반 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한 공필을 들인 것으로 수만번의 붓질이 왔다간 작품이다.
역시 사능이라고 낙관되어 있고,
위에는 표암화송이라고 낙관되어 있지만,
소나무는 이인문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인문은 김홍도의 동년배 화원친구로서
김홍도의 그림에 이인문의 글씨가 있고
이인문의 그림에 김홍도의 글씨가 있는 경우가 여럿있다.
당대 쌍벽을 이루었고, 정조에게 둘다 총애를 받은
지금 말로하면 베프였다.
조선의 호랑이 그림에는 어느 정도 도식이 있어서,
16세기 호랑이 그림부터 20세기 호랑이 그림까지
어느 정도 양식적인 면을 보여주는데,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은 그러한 양식적인 면에서 이탈해 있다.
우리가 이렇게 보기에는 상당히 규범적인 호랑이 같아도
실제로 이그림이 그려질 때는 상당히 이색적이었을 것이다.
그 동안 이렇게 잘생긴 호랑이 그림은 없었을 듯 하다.
내 생각에는 지금도 이 보다 잘생긴 호랑이 그림은 없는 듯 하다.
송하맹호도 부분.
김홍도. 삼세여래체탱. 1790년경. 견본채색, 440 x 350cm, 화성 용주사 소장.
김홍도는,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다녀오고
북경의 천주당에서 서양화법으로 그림을 보게 된다.
정조는 서양화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으므로
김홍도 등의 화원에게 특명을 내린 듯 하다.
그래서 그려진 그림이 현재 용주사에 소장된 이 그림이다.
이 그림은 김홍도가 주관하고, 이명기 등 당대 최고의 화원이 동참한 그림으로
김홍도의 46세 경에 그려진 그림이다.
아주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서양화법이 도입되어 있고,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기이하게 보였을 듯 싶다.
김홍도. 환어행렬도. 1795년경. 견본채색, 156.5 x 65.3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정조 재위 동안, 줄곧 아주 중요한 국책사업에만 참여하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세자 릉의 이전이었고, 거기에 관한 많은 사업을 벌이게 되는데,
이 환어행렬도는 정조의 어머니인 해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면서도,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지극히 보여주는 사업의 일환으로
사도세자의 릉이 있는 화성에서 홍씨의 환갑잔치를 열고 거기에 대해 남긴 기록화이다.
그 동안의 기록화가 상당히 까다로운 격식하게 제작되어서
매우 경직된 화면을 보여줬던 것에 비해,
이 그림은 매우 율동적인 행렬장면을 보여준다.
행렬장면은 변화무쌍하고, 장렬하다.
아마도 밑그림은 김홍도가 그리고,
김득신 등의 당대 최고 화원들이 투입되어 완성한 그림인 듯 한데,
단원이 51세가 되던 해의 작업으로
그의 인생에 둘도 없이 영광되고 거대한 작업이었다.
김홍도. 송하취생도. 지본담채, 109 x 55cm, 서울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늙은 소나무 아래에서 신선이 생황을 부는 화면이다.
화면을 가르고 있는 소나무에 구불구불 내려오는 선들은 율동적이고 변화롭기 그지 없다.
김홍도의 50년 전후하여 그려진 작품으로 추측되는데,
이미 그의 회화에 禪적인 냄새가 묻어나기 시작한다
김홍도. 주부자시의도. 1800년, 견본담채, 125 x 40.5cm, 호암미술관 소장.
김홍도가 56세 되던 해에 그린 작품이다.
주자의 시의 뜻을 담아 올린 작품으로
정조는 이 그림을 받고 매우 감동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이미 김홍도의 식견이 주자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인정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일개 화원을 도학자로 인정을 한 것이다.
이런 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이 그림에는 김홍도 회화의 개성이나, 수법의 완결적인 면모가 보인다.
조선의 풍속이 가득한 뒤로, 마치 금강산 같은 조선의 산천이 펼쳐져 있다.
정조는 이 그림을 받은 뒤 얼마 안되어 서거하고 만다.
김홍도. 주부자시의도. 1800년, 견본담채, 125 x 40.5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김홍도가 이러한 걸작을 정조에게 올릴 때만 해도,
감히 생각지 않았을 일.
정조는 붕어하고 만다.
정조는 그의 일생에 있어서 최대의 후원자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를 잘 이해하는 벗이기도 했다.
그러한 사람이 돌아갔으니
김홍도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이 후의 사정은 김홍도에게 비참하게 돌아가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때부터 그에 대한 기록도 적어지게 된다.
김홍도는 정조의 특별 배려를 받아
화원이 치뤄야 했던, 자비대령화원 시험에도 정조년간은 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장 최고의 중요한 작업들만 김홍도는 맡았다.
순조 즉위 이후 비참하게도 단원은 자비대령화원 시험을 보아야 했고
자신보다 수십년 어린 화원들과 경쟁해야 되었다.
단원의 신세는 그렇게 처량해졌다.
김홍도. 삼공불환도. 1801년, 견본수묵담채, 133.7 x 418.4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57세 되던 해에 그린 그림으로, 삼공의 자리를 주더라도,
초야에 묻혀사는 즐거움과 바꾸지 않겠다는, 뜻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 사후 고단해진, 김홍도는 더욱, 도가적, 선적인 세계에 침착하게 되는 듯 하다.
삼공불환은 중국의 시이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산천이나 가옥은 모두 조선의 것이다.
그림은 화재를 입어 다소 손상되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단원의 풍속, 산수 모든 것이 축약된 기념비적 걸작이다.
김홍도. 고사인물도 중 무이귀정. 지본수묵담채, 111.9 x 52.6cm,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 고사인물도 중 융봉취하. 지본담채, 111.9 x 52.6cm, 간송미술관 소장.
50대 후반에서 거의 60이 다되서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산수를 그린 필선이 거칠기 짝이없다.
점묘는 지극히 불규칙하며
그림 전반적으로 상당히 매마른 느낌을 준다.
겨울 풍경이라서 더욱 그렇겠으나,
먹을 극도로 아껴써 뻑뻑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이 그림을 보며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온통 비운 듯한 화면 속으로
그 뜻이 가득하여, 보는 사람의 가슴을 가득채운다.
말년의 대교약졸의 경지는 바로 이런 그림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김홍도. 주상관매도. 지본담채, 164 x 76cm, 개인 소장.
'늙은 나이에 보는 꽃은 안개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네'
라는 두보의 시구를 두고 그린 그림이다.
화면은 대부분이 여백이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변의 토파와, 배 한척
그리고 매화가 피어있는 산등성이이다.
산등성이 아래와 이로 자욱이 안개가 피어올라 있다.
모두 선적인 화경에 무르익은 노인 단원의 수법이다.
이러한 그림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을
그가 만약 겸재처럼 80을 살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위대한 걸작들을 보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러한 노경의 그림이 더욱 무르익으면
어떤 그림이 나왔을지 궁금한 일이지만
그 궁금증을 안타깝게도 풀 수 없다.
정조는 불시에 단원을 불렀다가 때마침 조윤형, 유한지 등
당대 최고의 서예가들과 단풍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거꾸로 궁중의 술과 안주를 보내어 다시 가서 놀게 하였다고 한다.
김홍도. 마상청앵도. 지본담채, 117.2 x 52cm, 간송미술관 소장.
나귀인지, 말인지를 탄 선비의 꿈꾸는 듯한 표정이 보이는가!
몇가닥 없이 길기만한 버드나무 가지사이로
울며 오가는 붉은색 꾀꼬리 한쌍을 보면서
선비는 그만, 무슨 생각인지 꿈같이 빠져
갈길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
아마도 저 사람은 단원이 아니었을까.
꾀꼬리 한쌍을 보며, 저 길 가던 선비는
무엇이 그리도 아름다워,
훤한 길을 헤매는 것일까.
하고 시동은 어리둥절해있기만 하다.
김홍도. 절로도해도. 지본담채, 105.5 x 58.3cm, 간송미술관 소장.
달마가 몇가닥의 갈대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다.
처음에 그가 건넌 것은 강이었으나, 화가들의 상상력속에서
어느새 강은 바다가 되었다.
소재도 소재이지만, 늙은 소나무 가지를 구부린 듯한
선묘들은 단원의 말년의 선적 유유자적의 경지를 보여준다.
단원의 말년의 붓질은 저렇게 유유자적하다.
천년묵은 소나무를 마음껏 구부리고
화폭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거친 붓질인 듯 하면서도,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격과 품위와 뜻이 함축되어 있다.
김명국으로 부터 내려오는 도식적인 달마의 얼굴이 아닌,
조선 사람의 얼굴이다.
단원이 그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김홍도. <耆老世聯圖> 1804년, 견본담채, 137 x 53.3cm, 개인 소장.
<耆老世聯圖>부분
김홍도 추성부도(부분). 1805년, 견본수묵담채, 214 x 56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구양수의 시를 그린 추성부도를 이후로 단원의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림 전면으로 쓸쓸하기 그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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