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술/미술 이야기 (책)

탐관오리 김홍도

 

 

 <아래의 글은 '오주석의 단원 김홍도'에서 발췌했습니다.>

  

 

 

12월 22일에 위 어진도사(御眞圖寫)의 공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리하여 1791년 세말에 연풍 현감으로 부임했다.

『연풍읍지』를 보면 ……김홍도는 신해년에 부임하여 을묘년에 갈렸다……

 

 

풍현은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소재하고 있었는데, 높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작고 아늑한

고을로서 일시 폐현이 논의되었을 정도로 아주 외지고 작은 고을이었다. 현전하는 19세기 전반경의 읍지를 보아도

호수 1천 5백 정도에 인구는 채 5천이 안되었고 풍속이 소박하고 농사에 힘쓰는 고을이라는 기록이 전한다.

  

 

#「울고왔다가 울고 간 원님」!!!

 

괴산군 연풍면은 옛날 연풍 고을로서 함한 산들로 둘러싸인 첩첩산중의 고을로 유명하였다. 이곳에 하인들과 예방, 책방들을 앞뒤로 거느리고 도임하는 신임 원님이 승교 안에서 시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로라는 양반의 집에서 태어나서 아까운 소년 시절과 청춘을 진종일 공자왈맹자왈로 보내고 남 다 하는 꽃놀이 단풍놀이 한번 제대로 해볼 겨를도 없이 어쩌어찌하다가 비록 대과에 장원급제는 못 했을망정 벼슬길에 올라서 몇 해 겨우겨우 출육이라고 현감 한자리 얻어 이제야 좀 팔자가 펴이는가 보다 한 것까지는 좋은데, 한양에서 사은숙배를 드리고 친구들의 송별연에 취했던 술이 깨인 지도 오래고,

권주가 한가락 멋있게 넘기던 기생의 고운 자태조차 잊어버릴 만큼 몇 날 며칠을 행차를 재촉해왔건만 사면팔방을 둘러 보아도 보이느니 산뿐이요 시내뿐이요, 더구나 이제 고을이 몇실 리 안 남았다는데 첩첩산중을 헤치고 들어가 보면 또 첩첩산중이니 대체 기름진 전답은 어느 구석에 있는가? 이 두메산골 구석에 객사는 오죽하며 동현은 오죽할 것이며, 필경 통인 방자란 놈들은 무지막지하기가 짝이 없는 촌놈들일 것이오, 명색 기생이란 것을은 절구통에 치마 둘러놓은 격일 것이니 무슨 놈의 팔자가 하필왈 이런 산간벽지의 수령 노릇이란 말인가? 나오느니 한숨뿐이요 생각할수록 산산스러울 뿐이니, 아무리 대장부로 자처해보려고 해도 눈물이 아니 나올수 없다. - 연풍 현감의 도임 행차 풍경이다.

 

과만이 차서 체임되는 날 이 연풍원님은 또 한 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에 가득 찬 나날이었더냐! 비록 벽촌의 소읍이라고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먹고 남고 입고 남을 만큼 물산도 있고 민심은 검소하고 순후하여 관장을 어버이 따르듯 했다. 금은보화를 바리로 시러다가 안겨주고 그 값으로 한몫 단단히 보자는 약삭빠른 장사치는 하나도 없는 대신에, 백성들이 철따라 정표로 가져오는 생치, 저담 등속이며 방 안에 향기가 가득해지는 것 같은 잣죽의 별미, 산저육에 송이버섯 안주하여 천하절승 새재의 타는 듯한 단풍을 내려다보며 문경 현감과 마주 앉아 국화주 잔 기울여가며 내 고을 자랑하던 일, 조석으로 시종 드는 관노사령 이며 관시들로 눈웃음 살살치며 아양 떠는 교태는 없을망정 말 한마디 손끝 하나 놀리는 테도 정성을 수북하게 담아주는 것 같은 따스하고 흐뭇한 인정미. 이 고을을 떠나 어데 가면 다시 이런 낙토를 구경하랴. 차라리 승진이고 官路고 다 집어치우고 이 고을 백성으로 늙어 이 정든 산천에 묻혔으면 싶으리만큼 떠나가는 발걸음은 무거웁고 부지중에 장부의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 연풍 현감의 과만체임 풍경이다.

 

  

 

 

 

 

 

1792년 김홍도가 현감으로 부임해 본격적으로 시정 활동에 들어간 해에 연풍에는 큰 가뭄이 들었다.

그리하여 수령으로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정결한 곳을 찾아서 조령산 상암사에 올라가 제를 지냈다.

그런데 당시 김홍도는 나이 마흔여덟 살이 되도록 후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곳이 치성을 드리기에도 적합한 곳이라 생각해 절의 불상 개금과 불화 조성에 크게 시주를 하고

대를 이을 아들을 빌었다고 한다. 이상은 「연풍군 공정산 상암사 중수기」에 보이는 내용이다.

  

 

 

김홍도가 상암사에서 치성을 올려 마흔여덟 살이 넘어 얻는 늦둥이는, 단원유묵첩에 보이는 아들 연록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단원유묵첩』을 작첩한 것은 김양기이다. 유묵첩의 서문과 발문을 보면 여러 사람이 김양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정작 본문의 김홍도 편지 가운데는 김양기라는 아들 앞으로 보낸 것이 보이지 않는다.

김양기는 부친이 남긴 글씨를 어린 나이였음에도 잘 갈무리했다고 하므로 부친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보관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따라서 '연록'은 김양기와 동일 인물이며, 바로 양기의 아명으로서, 그 뜻은 '연풍 현감의 녹을 누

릴 때 얻은 아들' 이라고 추측된다.

 

            

아들 연록 보아라. (完封) 

날씨가 이처럼 차가운데 집안 모두 편안히 지내며 너의 독서 공부는 한결 같으냐?

내 병의 상태는 모친에게 부친 편지에 이미 자세하므로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리고 김同知가 가서 직접 이야기하였으리라 생각한다.

너의 훈장 선생 댁에 갈 월사금을 찾아보내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정신이 어지러워 더 쓰지 않는다.

 

乙年 섣달 19日.

아버지가 쓴다.

 

 

 

사용이 연기 원으로있을 적에 이광섭이 충청도 병사가 되었는데, 이씨는 전서와 팔분서, 퉁소와 양금을 잘했다

이한진도 전서와 퉁소를 잘했으며, 김홍도는 그림을 잘 그려 연풍 현감 벼슬을 하고 있었다. 이씨가 서울에서 병영

으로 오니 김홍도는 관아에서 올라왔다. 병사가 연기 현감을 가까이하고자 짧은 편지를 내어불렀으나 연기 원이 오

지 않았다. 이에 병사가 격문을 내어 들게 하니 연기 원은 어쩔 수 없이 나왔다. 그러자 병사는 공식적인 예를 그만

두게 하고 각자 편한 옷으로 모여 앉아 각기 기능을 펼치게 하였다. 전서와 그림은 필획이 어려운 까닭에 종일 겨우

십여 장에그쳤으나, 글씨는 곧 쓰기를 비바람 몰아치듯 하여 연기 원은 수백장의 종이에 붓을 휘둘렀다. 병사가 연

기 원을 취해 쓰러지게 하려고 좌중의 손님에게 연거푸 큰 술잔을 권하게 하였으나, 연기 원은 평소 대단한 술꾼이

었던지라 저녁이 되도록 태연자약하다가 날이저물자 횃불을 들게 하고 연기로 돌아갔으니, 이날의 모임을 이름하여

'서원아집'이라 하였다.

 

   

 

 

 

 

1795년 김홍도가 쉰한 살, 연풍 현감이 된 지 만3년이 되었다. 1월 7일 어명으로 인해 현감직에서 갈렸다.

같은 날 『일성록』의 「삼남 지방의 위유사(충청도는 홍대협)들을 전각으로 불러 보심」이라는 기사에 그 내

용이 보인다.

과인이 말하기를……  "연풍 원은 과연 어떠하던가?" 하니, 홍대협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몸소 살펴보지는 못

하였습니다만, 듣건대 그 정령이 극히 해괴하다고 하옵니다"라고 하였다.

 

 "몸소 살펴보지 못했지만 매우 해괴하다"는 연풍 현감의 정령은 같은 날 『일성록』에 보이는 「호서위유사 홍대협이

올린 보고서와 별도의 명단」에 소상하다.

 

서면으로 보고드립니다.

신이 지난해 11월 4일에 명을 받들어 호서위유사로 가서 정황을 살펴본 결과…… 연풍 현감 김홍도는 다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하나도 잘한 행적이 없으며, 관청의 우두머리된 몸으로 즐겨 중매나 행하고 구실아치 들에게 위압적으로 호

령하여 가축을 상납케 하면서,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화를 내어 심지어 전에 없는 악형을 베푼다고 합니다. 또 듣자니

근일에는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온 읍의 군역에 매인 장정을 징발하여 그 빠진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날짜를 계산

하고 나누어서 별로 세미를 거둠으로써, 경내 전체가 소란하고 원망하는 비방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현의

이방을 잡아다 조사 문초해 본즉, 그 자백한 바와 전하는 말들이 처음부터 터럭만큼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이같이 백

석에게 포학한 무리는 중히 다스려 벌주어야 합니다.

  

위 사건의 내실에 대해 과연 김홍도가 실정을 했는지, 아니면 아전이 농간을 부렸는지, 혹은 홍대협이 김홍도를 개인적

으로 좋지 않게 보았는지 필자 역시 무어라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결론이 없다. 아무튼 이 일로 김홍도는 현감직에서 갈리

게 되었으며, 후임으로 송지경이라는 이가 부임했다.

 

 

 

 

 

 

 

 

 

1월8일 정조의 구두 지시에 따라 김홍도가 현감에서 갈린 이튿날 『일성록』 기사에는「비변사에서 호서위유사

홍대협의 보고서와 별도 명단에 따른 복주를 올림」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전 연풍 현감 김홍도의 죄는 구실아치들을 위압하여 가축을 상납게 하고 심지어 저에 없는 악형을 베풀었던 것이며,

사냥을 간다면서 고을의 군정들을 징발하면서 빠진 만큼 별조로 세미를 거둔것으로서, 경내 전체가 소란하고 원망하는

비방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저 자가 미천한 몸으로 나라의 은혜를 입고도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악을 저지른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미 직책에서 갈렸다고 하여 놓아둘 수 없습니다. 해당 관청에 영을 내려 잡아다 문초하고 엄히

죄를 밝혀야 합니다. 신창 현감 권상희와 함께…… 모두 잡아 문초토록 조처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주상께서 윤허

하셨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김홍도를 취조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조가 김홍도의 죄를 다스시라고 윤허한 지 열흘

만에 곧 그를 사면했기 때문이다. 1월 18일자『일성록』을 보면 의금부에서 미처 잡아 오지 못한 죄인을 사면하는 단자교

로 인하여 임붕한, 권상희, 김홍도, 심인 등을 놓아주었다.고 되어 있으니 김홍도는 한양까지 채 압송되기도 전에 사면을

받은 것이다.

              

    

현감 김홍도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감사의 소관사항이었으며, 설령 위유사가 탄핵을 했다고 하더라도

직속상관인 감사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반대의견을 냈다면 탁핵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의 정황을 보면 김홍도는 어쩌면 감사와 병사의 다툼 사이에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으로 횡액을

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져볼 수도 있다. , ... , 그 실상이야 어떻든 간에 정조가 김홍도를 현감직에서 갈도록하

나아가서 의금부에서 치죄하도록 윤허한 것은 모두 엄연한 사실이었다. 다만 열흘 후에 곧바로 사면해준 것 또한 정조

였다.  , ... , 사실 아무리 미관말직이라고 하지만 국왕이 각별히 총애해 특별히 현감에 제수한 인물을, 사실을 완전히 날

조해 탄핵해서 잡아 올린다는 것도 용이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김홍도의 현감 체직과 의금부 치죄

의 원인에 대해 분명한 결론을 낼 수 없다.

  

 

김현태라는 이는 재력이 거부일 뿐 아니라 시문서화에도 많은 취미를 가졌던 것으로 단원 김홍도와 깊은 교의가 있었다

하며, 그 광대한 주택의 一區에 단원의 집을 마련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시량범백을 다 대게 되어 단원은 일체 소위 살림

살이의  걱정이란 할 필요가 없이 예술에 정진할 수가 있었다 한다. 단원은 원래가 성격이 뇌락불기하여 속된 世事를 귀

찮게 생각하는 터에 더욱 김한태와 같은 좋은 벗을 갖게 된 것은 그의 행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들 연록 보아라. (完封) 

 

날씨가 이처럼 차가운데 집안 모두 편안히 지내며 너의 독서 공부는 한결 같으냐?

내 병의 상태는 모친에게 부친 편지에 이미 자세하므로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겟다.

그리고 김同知가 가서 직접 이야기하였으리라 생각한다.

너의 훈장 선생 댁에 갈 월사금을 찾아보내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정신이 어지러워 더 쓰지 않는다.

 

 乙年 섣달 19日

아버지가 쓴다.

 

 

음보로써 벼슬이 연풍 현감에 이르렀으나 집이 가난하여 혹은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이가 매화 한 분을

파는데 매우 기이한 것이었으나 매화와 바꿀 돈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돈3천을 예물로 보낸 이가 있었으니 이는

그림을 그려달라는 사례였다. 곧 2천을 던져 매화와 바꾸고 800으로는 술 몇 말을 사서 친구들을 모아 매화 술자리를

열었으니, 남은 200냥으로 쌀과 땔감 밑천을 삼았으나 하루 생계도 되지 않았다. 그 사람됨이 오활하기가 이와 같았다.

   

 

편지 한장 더 보자-,,
  

 

나의 질긴 목숨을 아직껏 이어가고 있으나 한 해가 다해가는 때를 맞으니

망극지통이 더욱 다시 새로워지는 듯하네.

보내온 여러가지 물건은 잘 받았으니 마음만 깊은 것이  아니구려.

祭需는 긴요한 것들이니 나에게 다정함이 어찌 이리 두터운가. ..... ,

올해 보내준 왕골 돗자리는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거처하는 방이 조금 넓으니,

내년 봄에는 좀더 길고 큰 것으로 촘촘하게 짜서 보내주지 않으려나?

 

乙年 12月23日

河楊에서 答함. 

 

  


p.s

 

화원 출신으로 현감에 제수된 것은 조선 500년 역사상 김홍도만이 누렸던 영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니, 그 전에도 어진 제작에 공이 컸던 김희겸(1710~)과 변상벽(1730~) 등이

각각 사천 현감과 곡성 현감을 지낸 예가 있다. 성종때 최경 화원은 당상관까지 제수되었거니와,

이러한 상황이 16세기 중엽 이후로 사림 학자들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기술관을 천시하는 경향이

현저해짐에 따라 김홍도 당시에 그의 현감 제수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고 이해하면 될

이다. 그리고 정조가 김홍도에게 연풍 현감을 제수한 데에는 제2의 외금강이라고 일컬어지는

단양 근린의 절경을 화폭에 담아오라는 어명이 깔려 있었을 수는 있다.

 

  

 

 

'미술 > 미술 이야기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중권/그림 보는 법  (0) 2009.04.30
스탕달 신드롬  (0) 2008.10.07
진짜그림 가짜그림  (0) 2008.06.14
그림감상법  (0) 2007.12.20
「사랑의 역사」  (0) 2007.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