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화백의 그림도 가짜가 무지 많다면서요?
진짜와 가짜가 있다.
가짜란 진짜와 꼭 닮았으나 기실 아주 고약한 것이니,
공자가 가짜 선비를 깊이 미워했던 것은 그것이 참 선비를 해치는 까닭이었다.
옛 그림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그러나 미술품의 진위眞僞 판별이란 생각 밖으로 수월할 수도 있다.
음악 감상에 비유해보자.
위대한 예술가의 연주와 서툰 학생의 연주는 1분도 안 돼서 금세 판가름이 난다.
두 사람이 연주하는 내용물은 같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말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겉모양새의 비슷함이 아니라 내면의 예술적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는 감상자는 곡을 듣고 누구 연주인지 몇 살 무렵의 연주인지까지도
곧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그림에서 생명이란 무엇일까?
선이며 점이며 형태와 색깔이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전체를 살아 숨쉬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옛 분들은 이것을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 일컬었다.
'기氣가 조화돼서 살아 움직인다'는 뜻이다.
감상에는 우선 뜻을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며, 또 마음이 아니라 기로써 보아야 한다.
보는 것은 눈에서 그치고 마음은 자신의 선입관에서 그친다.
오직 기만이 텅 빈 채로 만물을 있는 그대로 대하니,
이렇게 빈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진정 잘 보는 길이다.
상인들은 자칫하면 미술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작품을 예술 이전에 금전 가치로 여길 때, '이게 진짜라면' 하는 바람이 커져서
어느 순간 정말 진짜로 보게 되는 까닭이다.
명예욕이 강한 학자도 종종 일을 그르친다.
옛 그림을 명성의 디딤돌로 삼는 까닭에. '좋은 자료다'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저 자신도 모르게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좋은 그림, 나쁜 그림은 한눈에 판별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심없이 빈 마음으로 작품을 대하는 사람에게 한한다.
그러니 어찌 작품의 진위 가리기가 쉽다고만 하랴!
일평생 그 일에 종사해도 진짜 가짜를 가리지 못하는 이가 우리 주변에 없지 않다.
사람들은 말한다. 공개적으로 토론을 해서 문화재의 진위를 확실하게 가리자고….
곤란하고 난처한 말이다.
누구도 거장의 연주와 어린 학생의 연주가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지는 않는다.
들어보면 아는 것이 음악이다.
그리고 참된 음악애호가가 아니라면 함께 음악을 토론하지 않는다.
좋은 연주를 들으면 그냥 온몸을 부르르 떨고
나쁜 연주라면 슬그머니 자리를 떠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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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에서 감상하는 모습을 보면 바로 보는 이가 의외로 적다.
작품보다 설명을 더 오래 보는 사람,
남에게 열심히 해설하느라 정작 자신은 못 보는 사람,
감상 시간을 작품 숫자로 나누어 적확히 몇 분마다 옮아가며 보는 사람까지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단 한 점을 보더라도 마음에 와 닿는 작품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의 격조란 정확히 감상자의 수준과 자세만큼 올라간다.
美의 관조란 결국 마음의 관조인 것이다.
-오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