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는 미술관, 유혹하는 한국미술가들』- 도슨트 되기

2019. 4. 1. 19:21미술/미술 이야기 (책)



처음 가는 미술관 유혹하는 한국 미술가들 2019. 1. 25



이 책의 저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도슨트가 되었다. 저자는 초반에는 외국 작품에 대한 전시 설명을 주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외국 작품보다 자신과 닮은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에 빠져들어 진하게 감동하고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 미술을 가까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대에 따라 변하는 흐름이 보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근·현대미술 100년의 계보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배경이다. 물론 저자가 작가와 작품을 바라보는 지점이 미술평론가나 미술사학자들과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새로운 관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 : 김재희
덕성여대 의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서 미술학을 전공했다. 국내에 도슨트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시절, 스스로 미술관을 찾아가 백남준 1주기 추모전인 <부퍼탈의 추억>전에서 영어 도슨트로 활동의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다양한 주제로 도슨트 활동을 하면서 대중에게 미술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애썼고, 그 공로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특히 외국 관람객들에게 해설을 하면서 우리 작품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기회를 얻게 되어 국내 작가들에 대한 애착이 깊어졌다. ‘자식은 부모를 닮지 않고 시대를 닮는다’는 말처럼 예술가의 자식과도 같은 작품이 그 시대를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당대의 문화를 살펴보며 작품의 탄생 배경과 연결된 지점을 찾아내는 데 관심이 많다. 앞으로도 관객으로서 미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집필을 이어갈 계획이다.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 한국 현대미술의 발자취

저자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동력은 우리 삶이 현대 미술작품에 녹아 있다는 믿음에 있었다. 이 책은 서양 미술이 막 들어온 일제강점기 무렵에 태어나 지금은 작고한 선구 작가들에서 시작해 현재까지도 현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대 작가들로 마무리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도슨트와 함께 전시실을 둘러보는 형식으로 여덟 가지 시선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작품 안에 녹아 있는 작가들의 지독한 열정과 작품 밖에 있는 작가들의 하릴없이 어려운 삶을 공감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매몰되지 않고 살아내는 삶의 지혜를 꼼꼼하게 지적해 반면교사를 제공하고 있다.
‘자식은 부모를 닮지 않고 시대를 닮는다’는 말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의 자식같은 작품들은 그 시대를 많이 닮아 있다. 저자는 거리를 둔 시선으로, 작품이 제작되었던 시대의 문화를 살펴보며 작품이 탄생한 상황과 그것이 현재의 문화와 사슬처럼 연결된 폭넓은 글을 쓰고자 했다. 하지만 때때로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미술작품이 결코 우리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미술 대표작가 24인으로 이루어진 작은 미술관으로의 초대

이 책의 각 전시실에 걸려 있는 선구 작가들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미술가들이다. 또한 그 뒤를 잇는 작가들도 명실상부하게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이 책은 총 스물네 명의 현대미술 작가들로 이루어진 작은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관을 굳이 가지 않아도, 아무것도 모르고 미술관을 방문한 것처럼 도슨트의 해설을 듣는 것과 같이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세밀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쓴 목적과 감회를 이렇게 설명한다.

“작품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면 작품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마치 마음이 맞는 벗과 마주 앉아 ‘그랬구나!’ 하며 이야기를 나눌 때처럼 안온한 기운이 감돈다. 때로는 촌철살인처럼 일침을 가하며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돌이켜 보게 한다. 나는 미술을 통해 겪은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을 잡은 독자가 작품과 만나 가슴 떨리는 순간을 접하고 그 순간을 매개로 비밀의 문이 열려 다채롭고 재미있는 세상을 만나길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기대한다.”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미술 작품을 향유하는 데 익숙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와 가장 근접한 현대 미술 작가와 작품은 이해하기 용이할 뿐만 아니라 흥미를 가지고 다가가기에도 좋을 것이다.






목차


· 여는 말: 우리의 삶이 녹아 있는 한국의 미술 작품



1 전시실 / 대중매체를 소재나 주제로 한


안석주(1901~1950): 시대 변화의 패러다임을 담아낸 만문만화가


【서울=뉴시스】안석주, '모-던 껄의 장신운동', 『조선일보』, 1928.2.5



이동기(1967~):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겠다는 역발상의 예술가





정연두(1969~): 협업과 소통에 기반한 아이디어 창조자



2 전시실 / 마음 깊은 곳에 담겨 있는 미를 추구한


김환기(1913~1974): 인생과 예술에서 주인이 된 정체성의 화신



김환기의 색은 청정하다. 그 색채가 달과 항아리의 형상을 더욱 아름답게 빛나게 한다.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는 거의 혼색을 즐겨하지 않았는데, 그 점이 맑고 독특한 수화의 색채 감각을 유지해주었다.



이우환(1936~): 여백의 미학을 살린 공간 구성의 천재


이우환은 다섯 살때부터 할아버지에게 붓글씨와 그림을 익혔다. 이우환은 자신의 작품활동을 글씨를 쓰기 전에 하는 사전운동에 가까운 행위를 평생 구워먹고, 발라먹고, 지져먹었던 일 이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청년기에는 음악에 과심이 있었다. 그 관심은 점차 독서와 창작으로 이어져 니혼대학교 철학과에 재학하던 시절엔 니체와 릴케에 빠졌으며, 하이데거의 예술론과 신체성에 기초한 메들로 퐁티의 현상학, 구조주의에 심취했다.

이우환은 1960년에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모노하의 이론을 단단하게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모노하는 가공하지 않은 소재를 있는 그대로 놓아둠으로써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본의 획기적인 현대예술 사조로 사물과 공간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우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대상처럼 존재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본래 예술작품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오병욱(1959~): 절망 속에서 싹을 틔운 희망의 색채




3 전시실 / 보고 싶지는 않지만 항상 거기에 있는 민족분단과 관련된


이쾌대(1913~1965): 극한의 고난 속에서도 미술 세계를 지속한 거장
조양규(1928~?): 노동 현실을 담은 깊은 울림의 소리
노순택(1971~): 한반도의 분단과 불안의 근원을 쫓는 추적자




4 전시실 / 도시의 소외된 사람에 시선을 둔


박수근(1914~1965): 작품으로 시대를 조용히 이긴 사람


박수근은 미군부대 PX에 가서 초상화를 그렸다. 일감이 얼마나 많은지 미처 다 그려내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초상화 주문을 영어로 받아줬던 여인이 바로 소설가 박완서다. 박완서는 박수근의 근실한 모습에 감명받았으며 훗날 박수근을 모델로 한 소설 《裸木》을 남겼다.

박수근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한다는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대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가장 즐겨 그린다.



서용선(1951~): 현실의 트라우마와 문제의식의 재구성



서용선이 대학에서 서양화를 배우면서 품었던 가장 큰 의문은 서양에서 고전이 된 그림에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끈끈한 관심과 사회 속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이 밀도 있게 그려져 있는데, 왜 동양의 그림에는 그저 맑고 투명한 느낌이나 자연에 경도된 세계에 대한 관심만 표현되고 있는 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세[상 어디에나 인간과 권력, 인간과 역사,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가 항상 존재해 왔는데, 왜 우리의 예술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었는지 궁금했다.



최호철(1965~): 일상을 그림으로 풀어낸 우리 시대의 풍경




5 전시실 / 현실과 꿈이 치밀하게 직조된



이중섭(1916~1956): 정직한 화공을 꿈꾸었던 한국의 국민화가
최욱경(1940~1985): 고독을 강렬하게 표현한 색채의 추상성
박현기(1942~2000): 실제와 가상이 구분되지 않는 시뮬라크르의 세계



6 전시실 / 리얼리티, 극사실로 오히려 판타지를 보여주는



손응성(1916~1978): 독자적 화풍을 확립한 한국 사실주의의 선구자


한운성(1946~): 사실적 묘사로 나타낸 동시대의 리얼리즘


한운성은 말했다. "예술가는 예술가이기에 앞서 우선 철저한 장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손(手)의 능력 이상의 '무엇을'이란 작가 정신이 표출되지 못한다면 그는 평생 장인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예술가와 쟁이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나는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탁월한 두뇌의 무딘 손보다는 탁월한 솜씨의 무딘 두뇌를 높이 산다."



이광호(1967~): 내가 나를 보는 방식으로 세상이 나를 보는 시선



7 전시실 / 한국적 특징, 전통적인 것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장욱진(1917~1990): 특징적 스타일을 만들어낸 단순한 표현


장욱진은 충남 연기군 지주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경성 제2고보를 다니다 퇴학 맞고, 성홍열로 인해 수덕사에서 정양생활을 하다가 나혜석을 만나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양정고보 3학년에 편입했다.)

장욱진은 이미 10대에 사토 구니오에게 피카소와 입체파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며, 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자신의 미학적 시각적 안목에 적합한 것을 찾아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갔다. 1930년대에 일본 화단은 유럽에서 일어난 모든 이즘과 경향이 거의 동시에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박이소(1957~2004):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한 썰렁한 농담
손동현(1980~): 문화를 끊임없이 이어지는 변형의 사슬로 본 통찰력



8 전시실 / 비디오, 설치, 미디어 작품들로 아방가르드한



백남준(1932~2006): 재미와 예술의 결합, 그 끝없는 추구
최정화(1961~): 잡것과 날것들이 오롯이 살아 숨 쉬는 뮤지엄
이불(1964~): 직설보다 강력한 아이러니의 힘



· 책 속의 책


1. 도슨트란?
2. 도슨트 되기
3. 활동 도슨트 되기
· 닫는 말과 감사 글
· 참고 자료












1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사한 - 안석주 -


식민지 지식인의 나약함이여
function show_list(){ /*window.open*/('','popup3','resizable=no,scrollbars=1,status=0,width=350,height=360'); } 방학진 2005/12/15 16:24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언제쯤 통일이 될지 그리고 그 구체적인 형태가 연방제 또는 연합제로 될지 알 수는 없지만 가끔 통일된 조국은 어떤 깃발과 어떤 노래를 국기와 국가로 할지 궁금해진다. 깃발의 경우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남북한 단일팀이 남북한의 영토를 그려 넣은 단일기를 사용하고 있고 노래의 경우에는 아리랑을 쓰고 있다. 이 아리랑과 더불어 남북한 주민들이 편하게 부르는 노래를 꼽자면 단연 ‘우리의 소원’일 것이다.



이 노래는 1947년 안석주가 가사를 쓰고 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 중이던 그의 아들 안병원이 작곡한 것이다. 당시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3·1절 특집 어린이 프로그램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곡의 원래 가사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 / 꿈에도 소원은 독립’으로 시작되었다가 이듬 해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노래가 우리들에게 가장 감동을 준 장면은 아마도 2000년 6월 15일 남북한 정상이 합의서에 서명한 후 양쪽 수행원들과 함께 어울려 손을 맞잡고 부르던 바로 그 때가 아닐까 여겨진다.


이렇듯 남북 모두에게 동시에 인정받는 예술 작품은 그리 많지 않은 사정이고 보면 안석주, 안병원 부자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2005년 8월 29일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으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 영화분야에는 안석주의 이름이 올라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에서 태어난 안석주(1901-1950)는 한마디로 식민지 시대를 살다 간 불행한 천재라는 생각이 든다. 친일파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골수 친일파들의 경우보다는 안석주와 같이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인물들도 적지 않다. 안석주처럼 망국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나 식민지 한가운데서 고뇌하다 결국 친일로 귀결되고 연이어 분단의 책임까지 감수해야 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촉발된 태평양전쟁 시기에 대부분 친일로 돌아서고 만다. 이 시기를 일러 친일의 경쟁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지식인들의 변절은 열병처럼 퍼져 나갔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지금의 휘문고교) 재학 중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으로부터 미술 수업을 받았으며 졸업 후 1921년 일본의 동경 혼고 양화 연구소에 잠시 유학을 다녀 온다. 그 후 김동성으로부터 만화를 배웠다. 이 시기에 함께 수학한 장발, 노수현, 이상범 역시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해방 후 서울대(장발, 노수현)와 홍익대(이상범) 미술대의 초기 교수진으로서 활동한다. 이후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소설의 삽화를 시작으로 만화와 언론계에도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그리고 문학지 <백조> 동인 활동과 함께 신극 운동 극단인 <토월회>에서는 무대미술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배우로도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 안석주가 그린 만문만화(오늘날의 시사만화)
두 번째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1925년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한 곧 시대일보로 그리고 1928년에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가며 단순히 연재 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수준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상가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만문만화(오늘날의 시사만화)를 연재한다. 1934년 자신의 작품 ‘춘풍’이 영화화되는 것을 계기로 조선일보를 떠나 영화계로 진출하기 까지 그는 만문만화를 비롯해 미술 평론, 소설, 시 등을 통해 식민지 치하에서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를 꾸준히 내고 있었다. 이를 테면 ‘뿌르조아’(조선일보 1929.12.29)라는 만문만화에서는 브르주아를 뚱뚱하고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존재로 조롱하는 데에서는 그의 계급적 입장이 묻어나기도 하며, 일본이 가져 온 근대화 속에서 몸을 제 멋대로 내 던지는 조선 여성들의 모습을 대하면서는 민족적 울분 같은 감정이 자주 전해지곤 한다.

이러한 그의 당시 시각은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결성한 반일통일전선조직인 신간회 활동이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카프) 활동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카프의 6인 중앙위원의 한사람이었으며 기관지 삽화를 그리기도 한 그는 ‘잡문을 많이 쓴다’는 이유 등으로 1931년 카프에서 제명당하고 만다. 제명까지 당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자유분방함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1934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기 전까지 나름대로 식민지 현실에 고뇌하던 안석주는 영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점점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

1935년 영화 ‘춘향전’을 감독하고 몇 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그는 1939년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고 이윽고 ‘지원병'과 ’조선에 온 포로'는 친일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만들게 된다. 1940년에 일본 황실의 도를 따른다는 ‘황도학회’ 결성식에 참가하는 한편 1941년에는 친일어용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황도학회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가입한 조직으로 이른바 ‘내선 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황도 사상의 학습, 보급 그리고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 등을 실천 방책으로 하는 노골적인 친일단체였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을 이루기 위한 세기적 대전환기에 필요한 신시대의 대중교양’을 표방한 친일잡지 ‘신시대’의 1941년 4월호와 5월호 표지 그림을 그린다. 특히 4월호 표지 그림 ‘묵도’는 농사일을 마친 젊은 남녀가 황혼을 향해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여 기도를 하는 모습으로 유명한 밀레의 ‘만종’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기도의 대상은 천황일 것이다.

△ 1941년 안석영(안석주의 예명)이 연출한 친일 영화, 지원병의 한 장면

해방을 맞은 후 1950년 2월 병으로 죽기까지 안석주는 다양하고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우선 언론분야에서는 일제시대 동아일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학예부장 등의 경력으로 말미암아 1946년 중앙일보 고문, 1947년 민주일보 편집위원 겸 문화부장, 1948년 문화시보 창간 사장에 취임하였고 문화분야에서는 해방 직후 대한영화사 이사장을 비롯해 좌익 문화단체들이 연합한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대항해 1947년 2월 출범한 우익 문화단체인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에 참석한다. ‘우리의 소원’을 작사한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다. 1949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과 대한영화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그 밖에 서울시 예술위원 문화위원, 문교부 예술위원, 국립극장 위원 등을 지냈다.

안석주가 만약 한국전쟁을 맞았다면 과거 카프 경력이 어떻게 작용했을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는 50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간 덕분에 그의 존재는 물론 그가 저지른 친일 경력은 세인들의 관심권 밖에서 맴돌 뿐이었다. 어쩌면 안석주는 해방 후 자신이 범한 친일 행위를 반성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저버리고 제자들로부터 강력한 경호를 받고 있는 젊은 시절 동료들인 장발, 노수현, 이상범보다는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남북 교류의 상징적인 노래가 된 ‘우리의 소원’을 부를 때마다 식민지의 젊은 지식인으로서 끝까지 자신의 지조를 지키지 못한 나약한 천재 안석주를 떠올리며 그가 그토록 소원이라던 독립은, 그리고 통일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더불어 지금의 한국 영화인들은 제국주의를 그대로 빼닮은 헐리우드의 무차별 공세에 맞서 당당하게 우리 영화를, 우리 문화를, 우리 역사를 지켜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한 일인가.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모던 걸의 연애와 문화

지금은 촌티가 줄줄 흐른다는 이유에서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입 밖으로 내놓기에 여간 쑥스러운 말이 아닌 연애(戀愛)’라는 명사가 이 땅에 처음 등장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10년경이다. 물론 자유연애를 줄여 부르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땅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거쳐 식민지였던 당시 한반도에 출몰한 신조어였다.

 

이 말이 날개를 달고 퍼지기 전에는 청춘남녀가 바짝 붙어 거리를 활보할라치면 남자는 부랑아요, 여성은 탕녀로 불릴 정도로 조선은 엄숙한 나라였지만 소위 신문물과 신식교육의 세례를 받은 청춘남녀가 신인류로 등장하면서 그들을 일컫는 모던 보이모던 걸의 자유연애 행각은 어르신들의 꾸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춘남녀들의 부러움을 사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연애와 더불어 문화라는 구호를 줄기차게 외쳐대기 시작했고, ‘자유연애와 더불어 문화주택은 이들이 욕망하는 새로운 생활이자 주택으로 각광을 받았다.

 

지금은 벌써 80여 년이 흐른 그 시절의 실렸던 만문만화(漫文漫畵) 한 편을 살펴보자.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는 일본에서 그림공부를 한 뒤 귀국하여 휘문고보에서 교편을 잡다 동아일보를 거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가상소견’, ‘못된 유행’, ‘11등의 만문만화를 연재했는데 1930112일자 만문만화는 매우 흥미로운 세태 비판으로 읽힌다.

 

193011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만문만화 여성선전시대가 오면조선일보

 

만문만화의 내용은 1930년대에 들어서며 신여성들의 노출이 심해진 세태를 꾸짖는 것이다. 한복 대신 양장을 택한 모던 걸들의 짧은 치마 밖으로 드러난 다리가 사나이들의 눈길을 끌지만 속물적인 세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여성들의 육체가 상품화되는 상황을 개탄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 속 여성들의 다리에 써 넣은 문장들인데, 전차의 끄트머리 좌석쯤에 앉은 여성의 다리에는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 피아노 한 채만 사 주면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돈과 재물, 그리고 서구에 대한 선망이라는 당시의 대중적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화주택이란 것이 소위 서양풍의 주택을 말하는 것이어서 서구문화에 대한 쏠림현상이 심했다는 것이니 이를 누릴 수 있는 부류는 새롭게 자리한 전문직업인이거나 혹은 먹고 살 것이 제법 마련된 일부 상류층에 허용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1935년에 발표된 유진오의 소설 <김강사와 T교수>는 시간강사인 나약한 지식인 김만필과 교활하고 세속적인 T교수를 등장시킨 일제강점기의 작품인데, 이 소설에도 문화주택이 등장한다. 당연히 모던 보이였던 T교수의 집이 문화주택이다.

 

“T교수는 이곳서도 단골손님인 듯 여자와 농담을 주고받고 하며 술을 먹었다. 두 사람이 오뎅집을 나왔을 때에는 자정이 지나 있었다. 이번에는 김만필도 상당히 취했으나 정신은 도리어 똑똑했다. 삼월백화점 앞에 와서 T교수는 단장을 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다. 김만필이 사양하니까, 전차도 끊어졌는데 걸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집에 갈려면 어차피 자네 집 앞을 지나니까 같이 타자고 억지로 태웠다. ‘우리집을 아십니까?’ 김만필은 자동차가 움직이자 물었다. T교수의 훌륭한 문화주택이 김강사의 하숙 근처에 있는 것은 자기도 잘 알고 있었지만 뒷골목 속 더러운 그의 하숙을 T교수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또 다른 만문만화를 하나 더 보자. 1930414일자 같은 신문에 실린 것이다. ‘일일일화(一日一畵)’라는 연재물로 소개된 이 만문만화 역시 안석주가 쓰고 그린 것인데, 제목이 문화주택(文化住宅)?’ 문화주택(蚊禍住宅)?’이다. 제목으로만 뜻을 살피자면 당시 유행하는 문화주택이라는 것이 대부분 빚을 지고 얻는 것이어서 그곳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며칠 살지도 못하는 모기와 같은 삶이라는 것이다. 허식과 치레 그리고 은행자본의 농간을 꿰뚫고 있는 시선인 것이다.

 

1930414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만문만화 문화주택(文化住宅)?’ 문화주택(蚊禍住宅)?’ 조선일보

 

요사이 걸핏하면 여자가 새로 맞이한 사나이를 보고서 우리도 문화주택에서 재미있게 잘 살아보았으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쥐뿔도 없는 조선 사람들이 시외나 기타 터 좋은데다가 은행의 대부로 소위 문화주택을 새장같이 거뜬하게 짓고서 스위트홈을 삼게 된다. 그러나 지은 지도 몇 달 못 되어 은행에 문 돈은 문 돈대로 날아가 버리고 외국인의 수중으로 그 집이 넘어가고 마는 수도 있다. 이리하여 문화주택에 사는 조선 사람은 하루살이뿐으로 그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문화주택(文化住宅)이 문화주택(蚊禍住宅)이다.” 대부(貸付)라고 쓰인 긴 쇠사슬로 은행이 집을 옭아매고 있고 풍경은 유행과 허례를 좇아 문화주택을 취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사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등장한 하우스 푸어에 다름 아니다.

 

문화주택과 경성의 토막민

19311128<조선일보>의 만문만화는 ‘1931년이 오면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문화주택은 1930년에 와서 심하였는데 호랑이 담배 먹을 시절에 어찌 하야 재산푼어치나 뭉뚱그린 제 어미 덕에 구미의 대학 방청석 한 귀퉁이에 앉아서 졸다가 온 친구와 일본 긴자에 갔다 온 친구들과 혹은 A, B, C나 겨우 알아볼 정도인 아가씨와 결혼만 하면 문화주택! 문화주택하고 떠든다. 문화주택은 돈 많이 처들이고 서양 외양간 같이 지어도 이층집이면 좋아하는 축이 있다. 높은 집만 문화주택으로 안다면 높다란 나무 위에 원시주택을 지여놓은 후에 스위트 홈을 베푸시고, 새똥을 곱다랗게 쌀는지도 모르지.”

 

우리말 쓰기에 맞춰 인용한 만문만화의 내용을 곱씹자면 문화주택을 선호하는 계층은 부모덕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거나 외국에 한 때 기거했던 사람들이며, 소위 신여성과 결혼하려면 남성은 문화주택을 필수적으로 마련해야 했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게다가 문화주택 여부의 판단은 주택의 외양과 내부는 물론이려니와 2층이라는 조건이 상당히 중요한 판단기준이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곳에 삶을 의탁한 사람들이 바로 스위트 홈이라는 새로운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축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서양풍의 느낌이 강한 주택을 문화주택으로 불렀다는 기사와 함께 소개한 서양식 주택 近代日本住宅史

 

문화주택이라는 용어는 1922년 일본의 평화기념 동경박람회에서 14채의 주택이 실물로 전시되면서(문화촌)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은 뒤 그대로 식민지 한반도에 전해진 것인데 과학적 생활의 보장을 위한 일광과 통풍 등을 위해 유리창이 많았으며, 미백주의의 강조로 빚어진 순백의 커튼과 서양풍 입식생활을 보장하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신문물이라 할 수 있는 피아노와 축음기 등과 같은 근대적 이기물이 놓인 거실 등을 갖춘 집으로 표상되었다.

 

안석주의 만문만화에서 보듯이 한반도로 유입된 문화주택은 일제에 기생한 특권층이거나 고급관리 혹은 경제계층으로 본다면 상류에 속하는 부류가 향유하였음이 분명하다. 당시 조선은 부의 편중이 심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일제에 빌붙은 사람들이 문화주택을 향유할 수 있는 재력과 특권을 가졌던 바, 일반 대중들은 이들을 얼치기 서구문화 예찬론자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로 문화주택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주택은 모든 이들에게는 동경과 욕망의 구체적 대상이었다. 1930년대에 발간된 <신여성>, <신가정>, <여성> 등 여성잡지에서 문화주택을 방문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가정탐방기’, ‘가정태평기’, ‘당대여인생활탐방기’, ‘명사가정부엌참관기등이 독자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19379월호 잡지 朝光(조광)에는 음악가 계정식이 실제 지은 집이 묘사된다. 1936년에 신축한 이 집은 72평의 대지에 18칸의 공간으로 구성된 방 3개짜리 문화주택이었다. 방들 사이로 복도가 지나고 집안에 부엌과 목욕실이 있지만 부엌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없도록 집 뒤편에 두었으며 장독대와 김치를 저장하기 위한 지하실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를 소개한 기사를 살펴보자.

 

서대문 밖 연희장(延禧莊) 문 주택지 중에도 가장 아담한 곳! ... 남향한 문화주택 전면은 모두 분합을 드리고 유리창을 하여 창만 열어젖히면 바람과 일광이 맘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부엌은 뒤로 붙여서 보이지 않고 방 만이 순백의 커튼 아래 고요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뜰 앞 정원에는 조그마한 밭이 있어서 이집 주인들이 좋아하는 온갖 물건을 심어놓았다.오른쪽(右便) 방은 계씨의 방, 그 다음이 부인의 방이요 그 다음이 시어머니 방인데 가운데로 복도가 있고 뒤로는 부엌과 목욕실과 지하실이 있다. 그리고 시멘트로 장독대를 만들고 장독대 밑으로 지하실이 있는데 이 지하실은 김치광이라고 부인은 설명해 주신다. 이 집은 작년에 건축한 집으로 도합 4천원을 들여서 신축하였다고 한다.”

 

문화주택에 대한 대중적 비난은 1930년대 당시 경성의 인구가 40만 정도인데 흙이나 움막으로 비바람을 가린 토막민(土幕民)의 숫자가 16천에 달하는 상황에서 문화주택이 들어서면 주변의 땅 값이 급등하여 투기의 대상으로 변하고 그 지역에 살던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다시 변두리로 밀려나야만 했다는 사실에서도 수긍이 간다. 이러한 상황을 빌어 그로테스크한 대조라 언급한 신문기사도 등장한다. 1930822<조선일보> 기사를 보자. 아이러니도 가지가지 3-紅綠瓦(붉고 푸른 기와)의 문화주택, 토막민의 고열이 인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글이다,

 

남산 허리를 둘러 안은 왜성대와 욱정(倭城臺旭町, 지금의 중구 예장동과 회현동) 길야정(吉野町, 지금의 중구 도동) 일대에는 남촌 시민들의 부유한 근래적 저택의 빨간 지붕과 파랑 지붕이 나란히 하고 둘러졌다. 그러나 다시 시전이 길야정 이서북으로 터진 일대의 공지로 향하고.土窟(토굴)을 가린 토막민의 수십 채 움집이 언덕 위에 늘어선 이층 삼층의 산뜻한 문화주택 발아래 깔려있다. 내리 쪼이는 석양의 斜陽(사양)이 질서 없이 덮인 함석지붕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른다.이것이 현대가 꾸며놓은 너무나 심각하고 참담하고 그로테스크한 대조가 아니고 무엇이냐.”

 

문화촌과 문화아파트

문화주택과 식민지 백성의 빈민굴이 공존하는 상황은 당시의 빈부격차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자 풍경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문화주택은 다른 주택과 그 양식이나 내용이 다른 전형으로서의 주택이 아니라 결국 지식인층의 기호품이거나 권력자 혹은 부호들의 장신구쯤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957년 김용환 화백이 그린 즐거운 문화촌대한주택공사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친 이후에도 문화주택은 대중들의 이상향이었다. 대한주택공사가 분양한 단독주택지에는 문화촌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할부로 구입할 수 있는 아파트단지 분양광고물에도 문화촌이 내걸렸다. 뿐만 아니다. 1963년부터 1964년에 이르는 8개월 동안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손창섭의 장편소설 [인간교실]에서도 문화주택은 여전히 건재한 채 등장한다.

문화촌아파트 분양광고물 대한주택공사

 

주인갑 씨가 자기 집 옆방을 세놓기 시작한 것은 6.10 화폐개혁 이후부터의 일이다. 자유당 시절에 친구와 동업으로 시작했던 비닐 중심의 무역업이 들어가 맞아서 돈이 좀 돌 때, 손수 설계도 하고 꽤 공들여 지은 집이다. 한강이 눈 아래 굽어보이고 여름이면 아카시아 숲이 우거지는 속에 아늑히 자리 잡고 있다. 70평 남짓한 대지에 빨간 벽돌로 벽을 두껍게 쌓아올리고 특수한 청록색 기와를 얹은 25평짜리의 제법 아담한 문화주택인 것이다.... 한강 인도교 부근이나 노량진 쪽에서도 단박 눈에 확 띄도록 새뜻하고 이채로운 외풍을 갖추어야 한다면서 굳이 선혈색 빨간 벽돌 벽에 일부러 특수한 청록색 기와를 주문해다가 지붕을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현관 양쪽에 하얀 돌기둥을 세우고, 멋진 베란다를 만들고, 문틀에는 돌아가며 눈이 부시도록 하얀 페인트를 칠하고, 창문마다 화려한 색깔과 무늬의 커튼을 드리우게 했던 것이다.”

 

문화를 말하며 문명을 지시하는 일

문화란 일본인들이 독일어인 쿨투어(Kultur)를 번역해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중국에서 사용한 말이기도 하다. , 형벌이나 위력을 사용하지 않고 백성을 교화하는 것, 문치교화(文治敎化)를 줄여 이르는 말이다. 일본인들이 번역한 문화가 왠지 고급스럽고 우월한 의미를 말한다면 중국에서의 문화는 ()에 대립하는 ()‘으로 무력이나 형벌의 반대편에 서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가 문화에 녹아있는 셈이지만 주택과 결합하면서는 왠지 고급스럽고 우월한 주택이라는 뜻을 강하게 풍겼다. ’문화주택이나 문화촌이 왠지 고급스럽고 우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문화생활이란 단어를 심심치 않게 내뱉는 이유다.

 

, 문명은 물질이고, 문화는 정신인 까닭에 문화란 문명보다는 고차원의 것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채용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 정신의 기초를 이 땅이 아닌 다른 곳에 둔다면 그 앞날은 지극히 불투명하고, 푯대를 바로 세우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법 많은 관객을 불러보았던 <말하는 건축가>에는 죽음을 목전에 둔 건축가 정기용의 생생한 말이 담겨 있다. “문제도 이 땅에 있고, 해답도 이 땅에 있다는 것이니 문화융성의 시대라는 구호에 앞서 마음에 두고 곱씹어야 할 말이다. ‘문화를 말하며 문명을 지시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끝.

 

이 글은 야나부 아키라가 짓고 박양신이 옮긴 한 단어 사전, 문화(푸른역사), 권보드래 지음,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대한주택공사에서 발간한 대한주택공사 이십년사, 대한주택공사 삽십년사등을 참고하였다.




출처: https://salgustory.tistory.com/1040 [살구나무 아랫집]





【서울=뉴시스】근대기 잡지는 대중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미디어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대 개벽사(開闢社)가 발행한 여성잡지 『신여성』은 ‘교육을 받아 계몽된 새로운 여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신여성』의 표지는 신식 머리모양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을 등장시키며, 독자들을 ‘신여성 되기’로 독려했다.



【서울=뉴시스】박현주 기자 = '신여성'. 현 시대에서 올드한 느낌인 '신여성'은 국내 여성시대를 이끈 원조 '골드미스'이자 '파워걸'이었다.

1910~1920년 당시 ‘신여자’를 뜻하는 경향이 컸다. 여자 일본유학생들로부터 시작하여 1920년대 초중등교육을 받은 여학생들과 여성 민권과 자유연애를 주창하면서 나온 용어다.

조선의 경우, 근대 교육을 받고 교양을 쌓은 여성이 1890년대 이후 출현했으며 '신여성'이라는 용어는 주요 언론 매체, 잡지 등에서 191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하여 1920년대 중반 이후 1930년대 말까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점차 양장을 입고 단발을 한 채 일본을 경유해 들어온 서구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모던걸’이 등장했고, 시부모와 떨어져 단가살림을 하면서 문화적 상징으로 부상했다.


【서울=뉴시스】임군홍, 모델,1946, MMCA 소장
         


공통점은 도전적이고 독립적이라는 것. 근대적 지식을 소유한 신여성은 경제적 독립성과 함께 남성의 보살핌을 받는 존재를 벗어났다. 소비와 유행의 주역으로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추구했고, 이 때문에 이 여성들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있었다.

당시 신여성들은 식민 체제하 근대성과 전근대성이 이념적,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각축을 벌이며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전진했다.

세계사 차원에서 보면 신여성은 1890년대 영국의 ‘New Woman’ 열풍에서 시작하여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간 새로운 여성성의 아이콘이다.

'신여성'의 의미와 논란은 서구 사회와 서구 문물을 들여온 비서구식민지사회에서 그 내용과 초점이 다르게 나타났다.


【서울=뉴시스】안석주, '모-던 껄의 장신운동', 『조선일보』, 1928.2.5
         


영국에서는 치마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신여성을 기존의 남성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데 비해, 식민지 조선에서는 구조선 사회를 벗어나 근대적 이념과 문물을 추구하는 존재로 형상화했다.

그때 그 시절 우리나라를 뒤흔들며 여성시대를 나아가게 했던 '신여성'들이 서울에 도착했다.

21일 덕수궁미술관에서 개막한 '신여성 도착하다'전은 회화 사진 자수 잡지등 500여점을 작품을 통해 근대여성들의 활약상을 다시 보여준다.

이제까지 남성 중심적 서사로 다루어졌던 우리나라 역사, 문화, 미술의 근대성을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시다. 근대성의 가치를 실천하고자 했던 새로운 주체 혹은 현상으로서의 신여성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과 해석, 통시대적인 경험을 공유하고자 현대 작가들이 신여성을 재해석한 신작들도 소개된다.


【서울=뉴시스】나혜석, 자화상, 1928추정, 캔버스에 유채, 88x75cm,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전시는 총 3부로 열린다. 1부 '신여성 언파레-드', 2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근대의 여성 미술가들', 3부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 : 5인의 신여성'으로 선보인다.

1부는 주로 남성 예술가들이나 대중 매체, 대중가요, 영화 등이 재현한 ‘신여성’ 이미지를 통해 신여성에 대한 개념을 고찰한다.

2부는 창조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능력과 잠재력을 보여주는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기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은 상당히 희귀한데, 국내에서 남성 작가들에게 사사한 정찬영, 이현옥 등과 기생 작가 김능해, 원금홍, 동경의 여자미술학교(현 女子美術大學) 출신인 나혜석, 이갑향, 나상윤, 박래현, 천경자 등과 전명자, 박을복 등 자수과 유학생들의 자수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를 통해 근대기 여성 미술교육과 직업의 영역에서 ‘창작자’로서의 자각과 정체성을 추구한 초창기 여성 작가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3부는 남성 중심의 미술, 문학, 사회주의 운동, 대중문화 등 분야에서 선각자 역할을 한 다섯 명의 신여성 나혜석(1896~1948, 미술), 김명순(1896~1951, 문학), 주세죽(1901~1953, 여성운동가), 최승희(1911~1969, 무용), 이난영(1916~1965, 대중음악)을 조명한다. 당시 찬사보다는 지탄의 대상이었던 이들 신여성들은 사회 통념을 전복하는 파격과 도전으로 근대성을 젠더의 관점에서 다시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서울=뉴시스】이유태, <인물일대 (人物一對 ) : 탐구(探究)>, 1944, 종이에 채색, 212х15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여기에 현대 여성 작가(김소영, 김세진, 권혜원, 김도희-조영주)들은 5인의 신여성을 오마주한 신작을 통해 당시 신여성들이 추구했던 이념과 실천의 의미를 현재의 관점에서 뒤돌아본다.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가 한국 근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도전과 논쟁의 대상이었던 근대 식민기의 신여성을 통해 기존의 모더니즘 이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한국의 근대성을 온전하게 복원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 기간 'MMCA 토크'를 통해 사회학, 미술사, 영화사, 대중가요사의 관점에서 신여성을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이와 함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감독, 1934)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변사 상영(김태용 감독 기획)을 2018년 1월 6.일 오후 7시 서울관 멀티프로젝트홀에서 진행한다. 관람료 3000원


◆'신여성 도착하다' 참여작가(총 68명)


강대석, 구본웅, 김광배, 김규택, 김기창, 김능해, 김선낭, 김소판례, 김연임, 김용조, 김은호, 김인숙, 김인승, 김주경, 김중현, 김춘원, 김환기, 나상윤, 나혜석, 노수현, 마츠다 레이코, 문지창, 박래현, 박을복, 박흥순, 배정례, 서동진, 손응성, 손일봉, 심재순, 안석주, 안종화, 양주남, 오지호, 우메하라 류자부로, 원금홍, 유봉임, 윤정식, 윤효중, 이갑향, 이병일, 이순원, 이유태, 이인성, 이제창, 이중섭, 이쾌대, 이현옥, 임군홍, 장광길, 장선희, 장순린, 장우성, 장전문, 전명자, 정찬영, 정희로, 주경, 천경자, 최계복, 최근배, 함죽서, 후지이 코유(권혜원, 김도희, 김세진, 김소영, 조영주)

hyu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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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찬사의 한 형태는 ‘재미있다’는 말이다.

머리의 한 쪽 귀퉁이가 간지럽다는 뜻이나 지적인 숨바꼭질이 즐겁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머리 쪽을 건드리지 않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건드리지 않는 게 아니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라는 게 맞겠다.

 

(중략)

나는 속이 시원해지거나 가슴 한 구석이라도 따뜻해지거나 울렁거리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나는 한 때 ‘존재의 근거를 뿌리째 뒤흔드는’ 거창하고 대단한 그림을 꿈꾸었으나, 나는 변했다.

나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내 속에 있는 길들여지지 않는 불꽃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지만, 나는 변했다.

이제는 험한 세상 골치아픈 도시인들의 머릿속을 들쑤셔 더 이상 슬프고 외롭고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마티스가 말한 바 ‘편안한 소파’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마르크스처럼 ‘예술이 인민의 마약’이라도 상관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어디든 기대고 싶어하고, 지금의 삶이며 세상이 여전히 살아볼 만 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힘에 부치더라도 함께 손을 잡거나 함께 걸어가면서 노래라도 불러야만 마음이 놓이겠기에

아직 부끄럽고 미약하지만 감히 떨리는 손을 내밀어 본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그림이란, 한 눈에 알아보는 경우가 많고, 설명 필요없이 보는 그 자체로 눈이 시원해지면,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어지고, 오래 보아도 여전히 볼 게 남아있어 지루하지 않으며, 멀어져가면서 되돌아보게 되고,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자꾸만 떠오르고, 집에 돌아간 뒤에도 기분좋은 여운이 남아 묘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그런 그림이다.

  눈에 보이는 뭔가를 그리고 만들어 이 세계의 무늬를 짜는 일에 평생을 걸어본다는 것.
  심연가를 배회하다 눈 덮인 산을 넘어 별이 빛나는 밤을 지나 드디어 바다에 이르렀다. 
  이제는 어디서든 눈을 감으면 파도소리 들리는 아득한 바다가 보인다.
  가끔 꿈 속에서도 푸른 바다가 보인다. 나는 또 다시 바다로 가야겠다. 

                                                                                                            –오병욱(작가)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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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규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조양규 탄생90주년 기념전> 개최


* 전 시 명 : 조양규 탄생90주년 기념전 “조양규, 시대의 응시_단절과 긴장”         
 * 전시기간 : 2018.10.16. - 2019. 1. 20.
 * 개 막 식 : 2018.10.19.(금) 오후5시
 * 전시장소 : 광주시립미술관 분관 하정웅미술관(제4,5전시실)
 * 초대작가 : 조양규
 * 전시작품 : 회화 9점, 도서․사진․영상․작품복사본 등 아카이브 자료 
 * 주최·주관 : 광주시립미술관
-문의전화: 062-613-5390    



조양규, 목이 잘린 닭, 1955, oil on canvas, 45.5x53.0cm,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광주시립미술관(관장 전승보)은 하정웅미술관에서 전후 일본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았으나 1960년 북한으로 귀국한 후 행방을 알 수 없는 비운의 작가 “조양규 탄생90주년 기념전”을 개최한다. 전시는 2018년10월16일부터 내년 1월 20일까지이며 개막식은 10월19일(금)오후5시에 열릴 예정이다. 
 
○조양규(1928, 경남 진주 출생)는 해방 후 1948년 사상문제로 도일(渡日)하여 1960년까지 일본 미술계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60년 10월 재일조선인 북한 귀국사업으로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간 작가이다. 

○당시 신문기사와 잡지에 “맨홀 화가 북조선으로 돌아가는 기록”, “북으로 귀국하는 조양규”, “한 조선인 화가의 격투-북조선으로 돌아가는 조양규씨” 등 그의 귀국기사가 실렸을 정도로 당시 일본 화단의 주목을 받는 작가였다. 또한 귀국 한달 전에는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8명의 미술평론가들의 작품평론을 실은 화집이 발간되었고, 많은 미술인들이 그의 앞날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하는 등 조양규의 북한으로 귀국은 당시 일본 미술계의  최대 이슈였다.

○ 조양규는 1948년 일본에 정착 한 후,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3년 다니다 생계문제로 중퇴하였다. 1952년 데뷔와 함께 시대성이 반영된 설득력 있는 주제 의식과 밀도감과 긴장감 있는 표현력을 보여주며 일본 미술계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53년에는 미술비평가인 타카구찌 슈우죠의 기획으로 간다(神田) 다케미야(タケミ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신구상전>, <닛뽄전>, <43인전>, <46인전> 등에 출품하였다. 1955년 자유미술협회 회원으로 추대되고, 1958년에는 제2회 야스이상 상(安井賞) 후보, 1959년 제3회 야스이 상 후보 신인전 출품, 긴자(銀座) 무라마쓰(村松)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 개최, 요미우리(讀賣) 베스트 3에 선출, 1960년  미즈에 상(みづゑ賞) 선발전에 출품하는 등 급속한 성장을 이루며, 당시 전후 일본미술계를 견인하는 역할을 한다. 



 조양규, 도쿄 역, 1949~1952 추정, Aoil on canvas, 65.2x53.0cm, 하정웅컬렉션


○ 조양규는 하리우 이치로(針生一郞)와 오다 타츠로(織田達朗) 등 평론가들로부터 “전후 일본미술의 공백을 메운 중요한 작가”, “전후 일본미술의 중요한 일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1960년 10월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국내와 일본에 남겨진 작품이 10여점에 불과하지만, 전후 일본 리얼리즘미술 혹은 전위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나 연구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작가로 다뤄지고 있다. 

조양규의 작품세계는 자신이 거주했던 에다가와 조선인부락의 풍경과 사회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독일의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와 중국 장자오허(蔣兆和, 1904-1986)의 사상과 주제의식에서 영향 받은 인물상들, 현실과 인간사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담아낸 동물들, 남북전쟁과 분단의 조국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 혹은 조국의 향수를 담은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 전후 일본의 시대상과 사회구조의 모순을 표현한 창고시리즈와 맨홀시리즈 등이 있다. 



조양규(曹良奎), 밀폐된 창고(密閉せる倉庫), 1957, oil on canvas, 162.0x130.5cm, 도쿄국립근대미술관


○ 특히 <창고>시리즈에서는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모순과 인간소외의 다소 복잡한 대립구조를 “창고”와 “노동자”라는 대상(사물과 인간)으로 단순화시켜 제시하였다. 화려한 색채의 창고 벽면과 대조적으로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형상을 배치하거나 의도적 화면분할과 단절된 신체 등의 공간 구성을 통해 자본과 노동력 사이의 부조리한 관계, 즉 착취와 억압의 극명한 대립 관계를 드러냈다.



조양규, 맨홀 B(マンホ_ル B), 1958,oil on canvas, 130.3x97.0cm, 미야기현립미술관


○ 1958년부터는 주변 거리에서 자주 마주치는 광경인 맨홀을 자본주의 사회의 암흑면의 또 다른 상징으로 선택했다. 맨홀이라는 소재는 경제부흥기의 일본 시대상에서 발견한 일상의 소재로서, 경제성장이 가져다준 안정감과 잉여자본의 투자 속 긴장감이 공존하는 일본의 사회상을 상징한다. 실제와 거의 흡사한 땅과 사물들의 재질감, 곡선 형태의 맨홀이나 뚜껑, 구불구불한 호스가 널브러진 공사현장 등 그 자체로서 꿈틀거리는 역동감과 긴장감을 표출하며 격동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드러낸다.



조양규, 31번 창고, 1955, oil on canvas, 65.2x53.0cm,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 이번 전시작품은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31번 창고>, <목이 잘린 닭>, <창고지기>와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밀폐된 창고>, 미야기현립미술관의 <맨홀 B> 등 현존하는 조양규의 대표작이 모두 포함되었다.

○ 특별히 주목할 점은 하정웅 선생이 최근 수집한 <동경역>(1949~1951년 추정)과 조총련계 단체인 재일코리안미술작품보존협회가 소장하고 있는 북한에서 그린 <풍경 드로잉>(1965)이 최초로 공개된다. 이밖에도 <인물 소묘>(195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과 <농부와 소>(1957, 일본 Hino Gallery 소장) 등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어,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조양규의 전체 작품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조양규, 창고지기, 1956, watercolor 23.5×15.4cm,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전시를 기획한 광주시립미술관 김희랑분관장은 “해방 후 사상문제로 목숨을 건 일본으로의 도피,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차별과 가난, 미‧소 양국의 대리전으로 치러진 조국의 전쟁과 분단, 한국전쟁 특수로 경제부흥을 맞은 일본 자본주의사회의 모순 등 조양규가 겪은 20세기 중반의 역사는 몹시 가혹했다. 그러나 조양규는 상황에 굴복하기보다는 분단 조국의 문제, 노동자 계급으로서 느끼는 비참한 현실과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부조리 등 자신의 문제에서 발생한 자기 소외의 의식을 객관화해 문제 제기함으로써 사회 공동의 의식으로 환치시켰다.”라고 말했다. 

○ 이번 전시 <조양규 탄생 90주년기념전>은 전후 격동의 시대 누구보다 치열하고 뜨겁게 예술과 사상을 논한 조양규의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다. 이번 전시는 전후 일본미술의 공백을 매운 작가로 평가받았지만, 월북하여 1968년 이후 행적이 묘연해 안타까움을 주는 비운의 작가 조양규에 대한 조명과 활발한 연구의 계기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 전시는 내년 1월 20일까지 진행되며, 11월 10일(토)에는 1989년 조양규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윤범모 교수(동국대학교 석좌교수)를 비롯해 김영순(미술사가), 이미나(도쿄예술대 교수) 등이 참여하는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1959년 조양규(하정웅 제공)



< 조양규(曺良奎) 약력 >

   1928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
   1947  진주사범학교 졸업
   1948  일본으로 밀항, 
          도쿄 에다가와(枝川) 재일조선인 마을 거주
   1952  무사시노(武蔵野) 미술학교 중퇴
          일본 앙데팡당전 및 자유미술전 첫 출품
   1953  간다(神田) 다케미야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 개최
         <신구상전>, <43인전>, <46인전>, <닛뽄전> 등에 참가  
   1955  자유미술가협회 회원 추대
   1958  제2회 야스이 상(安井賞) 후보 신인전 출품 
   1959  제3회 야스이 상 후보 신인전 출품
         긴자(銀座) 무라마쓰(村松)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 개최
         요미우리(讀賣) 베스트 3 선출
   1960  미즈에 상(みづゑ賞) 선발전 출품
         조양규 화집 발간(9월),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귀국(10월)
   1968  이후 북한에서의 행적 묘연



 

                






4


서용선



소나무 / 22.5*58종이에 혼합재료 1983

 

서용선의 작품 중 소나무 연작은 한국인의 상징체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한국적 소재인 소나무를 소재로 하였다. 구체적인 소재를 통해 회화의 평면구조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면서 명증한 공간을 재구성해내는 작품들이다. 즉, 이 작품은 소나무가 있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지만 단순한 재현으로 획득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와 민족적 정서를 풍기며 전통산수의 공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본 작품은 그러한 소나무 연작을 제작하는데 바탕이 된 드로잉으로, 그 자체로도 미학적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다. 

 

 



계유정란 / 종이에 색연필 또는 연필 27*38 1988

 

<무제(계유정란)>은 우리가 이야기로 많이 전해들어 왔지만 회화 이미지로는 접하기 힘들었던 단종, 사육신 그리고 생육신에 얽힌 사건들을 다각도로 재구성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2011년도 미술관 전시기획 《올해의 작가 23인의 이야기》에 출품되어 전시의 맛을 더울 살려주고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 바 있다.



 

궁수 / 캔버스에 유채, 비닐기법 129.8x144.8  1986

 

서용선(1951- )은 역사화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해 온 작가로 이러한 시도는 1986년 이후의 작품들에서 본격화되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응축된 시간, 단순화된 역사 속으로 감도는 알 수 없는 침묵의 느낌은 한국인의 감각적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궁수(弓手)>(1985)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군사들의 뒷모습을 통해 역사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심문, 노량진, 매월당 / 230*180 캔버스에유채 1991

 


그가 역사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86년경부터이며, 강원도 영월에서 우연히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를 들른 후부터였고 단종에 대한 역사화 작업은 1993년 전시로 선보이게 된다. 한국현대미술 속에서 역사화라는 장르는 드물다. 비록 일부분의 역사화가 제작되었지만 순수한 예술적 가치를 가진 작가의 작업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데, 그 이유는 기존의 역사화는 국민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권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며, 작가의 의지나 해석력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문, 노량진, 매월당>(1990)은 단종일기에 등장하는 복합적인 상황을 한 화면에 집약 시켜 분할된 형태로 나타낸 작품이다. 사육신에 대한 심문과 노량진 포구에서의 처형장면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작가 서용선이 주제를 해석하고 집약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묵직한 색채의 강렬함과 인물의 표현은 역사화라는 작업에 대해 작가가 갖고 있는 집중과 관심, 주관적 해석과 감정이 첨가된 새로운 형태의 역사화이다. 

 



동학농민운동 / 200*350  캔버스 아크릴 2004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제1회 중앙미술대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하여 화단에 등단했다. 20여 년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역임했으며 , 2001년에는 독일 함부르크 국제미술아카데미 초대교수직을 맡았다. 2008년 전업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두고 현재 경기도 양평에서 살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30여 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9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서울대학교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사람은 참 흥미로운 존재다. 그 속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라고 말하는 서용선에게는 매일의 관찰이 되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거리의 사람들, 역사 속 사람들이 모두 중요한 그리기의 대상이다. 묵직한 필선과 강렬한 색감으로 그려진 역사화와 현대인의 삶을 다룬 그림은 서용선을 한국 화단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이 업적을 인정받아 그는 2009년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행사인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었다.

그가 처음 몰두한 주제는 단종에 관한 역사화다. 1986년 개인적으로 복잡한 일이 많았던 그는 마음을 달래러 떠난 여행길에 우연히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에 가게 된다. 평온한 풍경에는 숙부인 세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유배지에서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노산군 일기〉 연작이 시작되었다. 그는 정사에 입각한 이야기를 묘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단종 폐위를 둘러싼 역사적 인물들 간의 심리적 갈등과 더불어 관찰자의 심리적 긴장을 다양한 방법으로 오버랩시킨다. 이 연작 중 하나인 〈백성들의 생각〉은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주관적인 해석이 돋보인다. 정권찬탈자에 대한 백성들의 도덕적인 판단, 침묵하는 울분이 강렬한 색감으로 표현되어 있다. 세조를 비롯한 모든 정권찬탈자들에게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그림이다. 역사를 심리적으로 현재화하고 있는데, 이 점이 관변역사화를 제외하고 역사화의 전통이 전무한 한국 미술에서 서용선의 역사화가 갖는 중요한 의미다.


미술보다 문학에서 영향을 더 많이 받았죠.  
  서용선은 작업을 시작한 초창기에 미술보다 문학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문학은 결국 모두 사람 이야기 아닌가. 초기에는 추상적인 미니멀한 작업도 해보았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관계, 이야기의 중요성은 버릴 수 없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와 ‘이야기의 중요성’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다. 역사에 대한 관심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향한 것이다. “인간 사이의 관계가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주변 사람들의 입장, 태도, 말하는 습관, 표정 등이 매우 흥미롭다. 어떤 때 택시를 타면 운전기사들이 하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 녹음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사람들이란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우리다.


이런 인간에 대한 관심은 그의 남달랐던 청소년기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서울대 출신의 서울대 교수직을 역임한 작가라기에는 예상하지 못할 청년기를 보냈다. 중2 말에 집이 파산했고, 정릉으로 이사오면서 일곱 식구가 한방에서 생활했다. 산동네에서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난은 아이들을 길거리로 내몰았고, 악행을 일삼는 불량청소년으로 만들었다. 이 친구들과 함께 보낸 그의 청춘은 뜨겁고 아팠다. 공부는 뒷전이었고 외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연거푸 대학에 낙방하고 말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뒤늦게 미술을 시작한 그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한다. 곱게 자란 모범생이 우글대는 서울대에 입학하고 나서 오히려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혹독하게 사람을 겪었지만, 그래서 그는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지하철 속의 사람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는 간판과 거리풍경들을 그린 그림에는 서용선이 관찰한 우리 시대의 표정이 담겨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 생생한 과정이 좋다.”
 
  학고재갤러리 전시에서는 최근 뉴욕과 베를린을 여행하며 그린 그림들을 발표했다. 거기서도 그의 관심사는 지하철역이나 거리에서 만난 다양한 종류의 인간 군상이었다.

사람에 대한 진지한 애정은 그의 다른 프로젝트인 〈철암 그리기〉에서도 발휘된다. 2000년부터 10년 넘게 진행된 이 행사는 폐탄광촌에서 문화지구로 탈바꿈한 독일의 루르 탄전을 모델로 삼아 폐탄광촌인 태백시 철암지역을 보존하고 예술지구로 만들려는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서용선은 동료 화가들과 더불어 지금도 두 달에 한 번 정도 태백에 가고 1년에 두어 번 전시 기획을 한다. 이와 관련해서 꿈에 접근했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결과는 매우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문화에 눈 떠가는 느린 과정이다”라고 대답한다. 더디지만 진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독특한 풍광을 가진 폐광촌 철암지역의 일부가 보존되게 되었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번 가을에는 새로운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낯선 예술가들이 드나들면서 하던 일을 이제 폐탄광촌 지역 주민들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새로운 작품을 위한 캔버스들이 작업실에 도착하느라 어수선했다. 앞으로 더하고 싶은 작업을 물으니, 분단문제, 한국전쟁 등 역사적인 문제를 좀더 다루고 싶다고 한다. 올해 해외에는 독일 베를린과 일본의 오사카에서 개인전이 잡혀 있으며 국내에서는 지리산을 주제로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주 테마이긴 한데, 영호남을 아우르는 동시에 영남과 호남을 나누는 지리산에 담겨 있는 이야기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역사를 만들어낸 자연인 지리산이 그의 화폭에서 어떻게 탄생할지 궁금하다. 그는 말한다. “앞으로 할 것이 많다. 그릴 것은 너무 많다. 다만 시간이 모자랄 뿐이다.”

 

/ 이진숙  미술평론가




지리산 오도재에서, 121x91cm, Acrylic on Canvas, 2011

  

지리산 금대암, 71x71cm, Acrylic on Canvas, 2011 

 

반야봉, 116.5x90.5cm, Acrylic on Canvas, 2011 

  

청학동에서 1, 162x130.2cm, Acrylic on Canvas, 2011

  

천왕봉, 중산리에서 90.x 72.5 Acrylic on Canvas, 2011

 


 

지난 2009년에는 <山·水>전이라는 타이틀로, 작년에는 <풍경화>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었던 화가 서용선이 올 가을엔 또 다시 <지리산>전으로 내닫는다. 산수 혹은 풍경화 전시로만 이번으로 연이어 세 번째인 셈인데, 말 그대로 한국에서는 가장 덩치 크고 깊은 산인 <지리산>을 주제로 하고 있다.



山水든 풍경화이든 자연을 향한 서용선의 이러한 연 거푼 질주는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평생 사람살이의 호흡에 몰입해 온 작가 서용선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시도들이다. 지금까지 그의 작업세계에서 핵심적인 화두는 욕망이 들끓는 인간들의 역사나 삶의 현실에 있었을 뿐, 그 배경이나 혹은 그 너머 자연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서용선은 삶의 비극적 주제를 다룬 단종애사같은 역사화나 고대 신화 그림, 6·25나 남북, 동서 베를린 분단현실, 현대의 도시사람들을 그린 그림들로 알려진 작가다. 예술이 인간 세상을 탐구하는 방법이었던 작가 모습에 익숙하다면 이렇듯이 지리산으로까지 번져가는 화가 서용선의 山水 혹은 풍경 그림들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낯설음과 불편함에 대하여
서용선의 이 최근 그림들을 바라보는 어색함은 지난해 필자의 <서용선의 풍경화>전 카탈로그 서문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 태도가 얼마나 어정쩡한지는 다음 인용문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그가 마주한 풍경은 어떤 것들이고, 정작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화가는 풀, 잡초, 나무, 숲, 산, 바다, 하늘같은 자연 풍광들에 선입견 없이 몸을 내맡기는 듯하다. 그래서 무질서, 혼돈, 알 수 없는 에너지 등이 가로지르는 자연 풍광들에 자신의 감각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든가, 모처럼 자연에 격의 없이 감정이입충동을 발동시키는 듯도 하다. 그런가 하면 자연의 무위성(無爲性)이나 조야함에 섣부르게 개입하려 하거나 예술이라는 언어로 다가가는 것조차 무망하다는 듯이 머뭇거리고 주저하기도 한다. 그 결과 ‘불투명한 물질성’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언어는 시간 속에서 명확한 관념이 아닌데, 공간 속에서도 전혀 명확하지 않다.”는 소쉬르의 말을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같다. 이 풍경들은 마치 자연과 그 자연을 향한 작가 특유의 몸 감각을 다시 불러내어 역사나 예술에 대한 선입견이나 기억을 씻어내며, 뿌리 깊은 우리의 산수화 전통도, ‘그림 같은(picturesque) 풍경'이나 터너나 인상파화가들 혹은 세잔느 같은 빼어난 서구의 풍경화가들에 관한 기억마저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지워내는 것 같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건대, 필자가 지녔던 막막함으로 인해 결국 화가 서용선의 山水 혹은 풍경화 작업들 전시 카탈로그 서문은 그의 일련의 인간의 삶의 세계 관련 그림들과 희미하게 관련지어 이해하는 정도에서 멈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니 설혹 작가가 이 작업을 통한 새로운 시도와 모색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낯설음이나 불편함은 필자나 혹은 어느 관람객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여 위안이 된다. 카탈로그 인사말에 인용된 작가 서용선의 짧은 글에서 山水 혹은 풍경 그리기 프로젝트가 얼마나 ‘불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는지 하는 작가 스스로의 고백을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종래 사용해 온 ‘山水’라는 말이나 서구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번역어로 채택된 ‘풍경화(風景畵)’라는 용어가 안고 있는 어긋남에서부터 ‘우리가 처한 이 시대의 어려움’,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불편함’에 이르기까지, 거기에서 화가 서용선의 언급들은 그의 관심이 단순한 풍경 탐미가 아니라 화가로서 평생 품고 있던 숙제나 서구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한국 근현대사에 드리워진 문명사적 과제들까지도 끌어 안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작업들이 안겨주는 편치 않음은 상당 부분 그가 설정하고 있는 미술사적 문제의 진지성이나 심각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불편함이나 낯섦은 어디에서 기인하며, 그러한 도발이 지닌 설득력은 어떤 것일까? 환갑에 접어드는 나이에 도대체 화가 서용선이 산수 혹은 풍경을 그리며 왜 그러한 어려움을 애써 감수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새삼스럽게 그의 작업에서 어떤 이유에서 삶이 아닌 자연이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는 것일까?


이번 <지리산>전에서 돋보이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인공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자연 자체와 마주하려는 그이 충동과 열망이다. 그런 점에서 연이어지는 이러한 산수 혹은 풍경을 향한 시도나 ‘자연에 대한 강렬한 동경을 담은 작업들’은 일정한 방향성을 드러낸다. 강원도 철암 구와우, 중국의 돈황길, 낙산사, 지리산 계곡, 작가의 스튜디오가 있는 양평 산골짜기 등 말 그대로 삶을 찾아 ‘작가가 두발로 걸었던 산들과 숲들, 강들의 모습, 그 풍광들’로 구성된 첫 번째의 <山·水>전은 전시를 앞두고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린 것들이다 그런데도 1980년대 초 데뷔시절의 <소나무> 시리즈에서부터 그 이후 이어진 인간의 삶을 파고들던 일련의 작업들을 환기시킨다. 이어 <서용선의 풍경화>전이라는 타이들로 개최된 두 번째 전시는, 자연을 향한 지향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지를 향해 <山·水>라 내걸었던 첫 전시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느낌이 짙다. 강원도 태백, 경남 청송군, 강진만, 경기도 양평 등을 그린 유화와 드로잉 작업들이 대체로 인위적인 건물이나 역사적인 장소성에 연루된 것들이어서 더 그렇다.

두 가지 문제 설정 : 인간-자연, 山水-풍경 사이
이에 비해 이번 <지리산> 작업들에서는 두 가지 문제 설정이 두드러진다.
그 중 하나는 <지리산 오도재>, <웅석봉>, <반야봉> 등의 작품에서 확인되듯이 지금까지 몰입해 왔던 인간의 삶의 영역과 대칭을 이루는 자연 세계 그 자체로서 지리산에 대한 관심이다. 그런데 그에게서 인간의 삶의 세계와 그와 평행해서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깊고 큰 산인 지리산 사이를 오가는 길항작용을 읽기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고백하듯이, <지리산>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 계기는 수년 전 우연히 보게 된 TV의 지리산 산장지기의 은퇴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말이 흥미롭다. 산장지기의 삶과 함께 비쳐진 겨울 지리산이 그 어떤 인간의 삶보다도 더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는…


물론 이러한 이끌림은 더 근본적으로는 삶과 자연이 연접되었던 다양한 그의 생 체험들과 무관하지 않다. 유소년 시절 미아리고개, 정릉골짜기 같은 서울 외곽에 살며 드나들며 뒹굴던 삼각산의 숲과 시냇물, 오로지 새로움의 미학을 향해 질주하던 서울미대 조교 시절 존재를 향한 근원체험으로 그를 인도했던 창밖의 단풍에 대한 기억, 삶의 현실을 탐사할 때마다 매번 그들을 에워싼 삶의 공간과 장소들이 뿜어내며 그의 몸에 압도해 왔던 알 수 없는 기운과 에너지들에 대한 경외심이야말로 ‘삶의 화가’ 서용선을 크고 깊은 지리산으로 인도한 생 체험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인공적인 것을 피해서 지리산에 다가가지만 큰 산을 그리며 그가 실제로 확인하게 된 것은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풍경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것이 자연 자체로서 지리산이 아니라 인간들에 의해 이름 붙여지고 삶의 흔적들이 드리워진 역사화 된 지리산들이다. 화엄사등 골짜기 골짜기마다 사찰들의 장구한 세월의 두께뿐만 아니라, 가깝게는 빨치산부터 기묘사화 등 인간들의 삶의 상처가 깊이 각인된 곳, 마고신화 등 신화들이 겹겹이 누적되어 크고 깊은 삶의 지층을 이루는 지리산. 최치원, 매월당 김시습 등 숱한 시인 문객들의 시문이나 기행문, 그리고 최근의 대하소설 등 숱한 문학적 내러티브의 원천이자 동시에 그들에 의해 형상화된 지리산. 그러니 화가 서용선이 그린 지리산 숲과 능선들은 그들에 의해 각인된 집단적 무의식에 의해 역사화된 경관에 다름 아닌 셈이다. 실제로 그가 그린 <청학동>, <세진대>, <천왕봉>, <금대암> 등의 그림들에는 자연에 대한 인간 개입의 누적된 흔적들이 자연과 교직되는 가운데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서용선의 <지리산>은 자연에 대한 개인의 단순한 시각적인 체험 너머를 향하고 있다. 그의 세계 인식이자 자연 인식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지리산들은 집단 문화적 기억과 큰 산에 대한 몸체험, 자연 세계와 인간의 삶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며 어우러지는 바로 그곳이다.


서용선의 <지리산>전이 설정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같은 이 대지를 향해 작동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서세동점의 근대기 이래 山水-풍경(風景)이라는 뿌리가 다른 시각 형식들이 뒤얽혀 혼돈스럽기 그지 없었던 우리의 자연관, 더 나아가 자연을 바라보는 전근대와 근현대기의 시각의 분열에 대한 진지한 대응이다. 그러한 혼돈과 어긋남은 프로작가로서 살아가는 그에게 더 이상 비켜 지나칠 수만은 없는 실천적 과제가 이 <지리산>에서 설정되고 있다. 그래서 <지리산>에서의 그의 시도들은 자신이 미술에 입문한 이래 이 땅과 자연 앞에서 이질적으로 평행하는 두 관점들 즉, 전통적인 산수화와 근대 이래 서구로부터 수용된 풍경화 사이에서 우리 모두가 겪어야 했던 혼돈과 균열을 치유해내는 데로 향한다.


여기서 그가 채택하는 방식은 근현대기 한국화단에 풍미했던 인상주의 화풍의 성과들이나 서구의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이 명징하게 우리의 자연과 자연에 대한 이상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통 산수화 양식도 아니다. 그가 찾는 것은 이 시대의 삶을 구성하는 자연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찾는 일이다. 감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아크릴칼라를 사용하면서도 투명한 색가와 나무와 숲, 산의 능선 등 기운생동하는 산의 공간감과 동적인 에너지를 전통적인 산수화가 지닌 여백 효과를 구현해 내는 것은 그만의 성취이다.

‘山水’ 또는 ‘land·scape’를 향한 새로운 기획
서용선의 山水 혹은 풍경 그림은 우리에게 익숙하기는 하지만 산수와 풍경화로 분열된 자연관 속에서 형성된 상투적인 전형성을 거부한다. 그 작업들이 일견 낯섬, 불편함 혹은 모종의 도발로 여겨지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대지에 마주하며 랜드·스케이프(land·scape)할 새로운 시각과 언어를 모험적으로 탐색해 간다. 그런 점에서 시각적으로 낯선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단순한 문제의 차원을 넘어서 그의 ‘山水’ 또는 ‘land·scape’를 향한 새로운 기획은 매우 과제적이다.
요약컨대, 서용선이 <지리산>을 통해 기획하는 것은 우리와 더불어 장구한 세월을 함께 해온 크고 깊은 산인 지리산이라는 자연, 장구한 세월을 거치며 얽힌 겹겹의 내러티브들, 역사화되고 인간화된 집단 기억 속의 지리산을 만나며 그와 다른 새로운 지평에서 열어가는 ‘山水’ 또는 ‘land·scape’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 속에 그가 겨냥하는 것은 이 자연과 대지를 향한 삶과의 새로운 관계의 모듈이다. 욕망, 권력, 이데올로기, 소외, 갈등, 전쟁 등 지금까지 그가 평생토록 그려온 인간들의 삶의 역사나 현실, 그들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며 그들을 규율하는 알 수 없는 힘들을 시각적으로 탐구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화가 서용선에게서 그러한 삶의 세계는 다시 그 삶들의 거점이자 그를 에워싸는 공간으로서의 자연, 혹은 그 세계 너머 저편의 자연과 이렇듯이 <지리산>을 통해 서로 상호 조응하며 관계를 맺는다.


그런 점에서 <지리산>전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 산수와 풍경의 괴리를 넘어 새로운 관점을 구조화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가깝게는 <山·水>전에서 발표된 그림들이 지닌 막연한 자연 지향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멀게는 외견상 자연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일찍이 학창시절 그가 화가 장욱진의 아틀리에에서 받은 감동에서 그렸다는 몇 점의 자연 귀의적인 일월성신도와 결합된 산수화풍의 시도, 이어 화단 데뷔시절 자연 자체에 대한 경외심에서라기보다는 다만 사진이라는 매체가 지닌 현대성과 회화의 관계를 개념적으로 실험하며 서양과 다른 동양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향하고자 소재로 채택했던 일련의 소나무 그림 연작들과는 판이하다.


그에게서 <지리산>은 山水 혹은 랜드·스케이프는 인간 세상을 떠나 도달하고자 하는 자연이라는 또 다른 귀의처로서, 또한 동시에 자연을 통해 다시 사람들이 사는 깊고 큰 삶의 세계 어디인가에로 귀환하는 또 다른 통로인 듯하다. 자연을 마주해서나 인간의 삶의 세계를 향해서나 서용선의 <지리산>이 탈인위적 자연 지향과 또 다른 인간세계 귀의라는 양가적인 의미로 다가서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범(미학예술학, 상명대교수)

 






5


최호철





 [ 전남매일=광주 ] 이연수 기자 = “우리때는 만화로 핍박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나라에 혼란한 일이 생기면 만화를 타깃으로 삼았죠. 전두환 정권시절 중앙일보에서 만평을 그릴 때는 얼마나 압박이 들어오는지 심장이 웬만큼 튼튼하지 않으면 시사만화는 못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2일 광주시립미술관을 찾은 한국 만화계의 거장 박기정 작가는 요즘 한국 시사만화의 강도가 약해진 것 같다며 시사만화가로서 만평을 그리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고생고생하며 자라난게 우리나라 만화에요. 요즘 은퇴하고 나서 신문 보니까 시사만화의 강도가 약해진 것 같아요. 시사만화는 매서운 맛이 있어야 하는데 좀 새겨들었으면 좋겠어요.”

동아일보 인기만화 ‘386C’의 황중환 작가(조선대 미술대 교수)는 이에대해 “아직도 강력하게 주장하고 투쟁하고 싸우는 만화를 그려야 하는게 슬프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광주시립미술관이 5·18기념재단과 공동으로 마련한 2019 민주인권평화전 ‘만화로 보는 대한민국’ 개막식에 앞서 전시장을 찾은 박기정, 이현세, 박건웅, 최호철, 황중환 작가는 전시를 돌아보며 저마다의 소감을 전했다.

‘공포의 외인구단’의 인기작가 이현세씨(세종대 영상만화학과 교수)는 “내가 여기 와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며 “대중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왔는데 우연히 친구 찾아 구로동엘 갔다가 최루탄 가스속에 갖힌 적이 있다. 한 공간에 살며 전혀 다른 삶이 존재하구나 생각하게 됐고, 이전의 야구, 축구, 권투 만화 등에서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으로 작품을 하고 싶었다. 거기에 인연이 되어 전시초대를 받아 오게된 것 같아 감회가 깊다”고 소감을 밝혔다.

20여년만에 광주를 방문했다는 그는 “만화산업에는 메인일 수 있지만 독재와 억압, 민중항쟁 등의 작품 발표에는 항상 변방에 있었다. 여기 함께 초대된 선배, 후배들은 평생을 해 온 분들이라 저와는 감회가 다를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놀랍고 흥분되고, 죄스럽고 복잡하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독립운동가의 삶을 그린 ‘제시이야기’의 작가 박건웅은 “까치와 머털도사를 보며 자랐던 세대로서 선배님과 함께 전시에 참여하게 돼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저는 만화의 어려웠던 시절을 겪지 못했다. 소비자로서 만화를 보았기 때문에 힘든 고난의 시절을 바탕으로 오늘 이 좋은 공간에서 전시를 할 수 있다는 게 의미있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작가는 “대중매체이기도 하고 오락적인 소재인 만화가 역사, 인권, 평화 소재로 그리면 무겁고 막연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대중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소재를 다룸으로써 오히려 대중과 더 쉽게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가 대중과 소통의 자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삶을 그린 ‘태일이’의 최호철 작가(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콘텐츠스쿨 교수)도 “만화에 대한 친근함을 가지고 자랐다. 그림을 전공했는데 만화만큼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게 없었다. 미술관에서 전시한다는 것과 만화가가 된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닌가 생각하고 선택했는데 결국엔 이 자리에서 만난다는 것을 확인한다. 결국 다른게 아니었는데 뭐가 경계를 지었나 생각해 본다. 설레는 마음으로 전시를 볼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다른 재밌는 만화를 그릴 자신은 없었고, 감동받은 전태일 평전을 만화로 옮기는 일을 하고 싶었다. 만화로 옮기면서 가장 고민했던 건 이름을 어떻게 붙이나 했던 거였다. 아마 미술을 했으면 경외감을 담아 이름을 붙였을텐데 만화에서는 친구처럼 지어야 겠다는 생각에 태일이라 지었다. 만화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돌아봤다.

만화가로서의 고충도 들려줬다. 황중환 작가는 작품을 연재하며 분노할 때가 있었는데 만화가로 어떻게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좌절감이 들었고, 몇 년간 그리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일상에 공기처럼 흐르는 일상의 민주주주의가 됐으면 어떨까 생각해요. 그런 사회라면 좀 더 코믹하고 유머러스한 사회가 됐을 겁니다. 저는 일상에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것, 관계 속에 성숙해지는 것, 앞으로의 대한민국에 대한 바람의 메시지를 만화에 담아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민주·인권·평화 중 ‘평화’의 성격인데 시사만화에도 다양성이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눈 앞의 것들에 분노하고 화내는 것도 필요하고, 거시적으로 내다보며 제시하는 것도 필요하죠.”

그는 이어 “이번 전시를 보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다 담을 수 있는 결들이 있어야 하고, 그런 작가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치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며 “광주에서 느끼는 건 광주의 과거는 우리의 자산이고 우리의 에너지는 여기서부터 발산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평화와 존중, 배려, 내가 광주에서 활동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이야기들을 할 것이다”고 말을 맺었다.

광주시립미술관 개관 이후 처음으로 기획해 선보이고 있는 만화특별전 ‘만화로 보는 대한민국’은 오는 6월 30일까지 미술관 본관 제3, 4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이 편평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굴곡의 도시, 주름마다 저장된 기억


 ● 화가는 스쳐가는 사람들을 종이 위로 옮기는 일을 좋아했다. 수십 년 간 그 일 하나로 수백 권의 스케치북을 채워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냥 서 있지 않았다. 무언가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화가는 그 사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더 큰 무엇을 그리게 되었다. 그것은 서울이라는 거대한 얼굴, 그리고 주변으로 뻗은 손들. 화가는 그 얼굴의 굴곡, 무수한 손들의 주름을 그리지 않고서는 배겨 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큰 화폭이 필요했다.




최호철_1970년 청계고가도로_종이에 디지털 프린트_105×222cm_2018



최호철_1970년 청계고가도로_종이에 디지털 프린트_105×222cm_2018_부분

최호철은 오랫동안 서울과 그 주변을 그려온, 로컬 그 자체의 작가다. 그는 「와우산」이라는 평화로운 동네에서 자라나, 「을지로 순환선」이라는 복작이는 생명력의 길을 오갔다. 그리고 이제는 「동자동 쪽방」 「한남동 골목」 「경기광주송정동」라는 공간의 파노라마, 「1970년 청계고가도로」 「2005년 판교택지개발지구」 그리고 지금 이순간의 「동호대교」라는 시간의 스펙터클 속을 헤엄치고 있다.




최호철_을지로순환선 VR_캔버스에 혼합재료_120×240cm_2017



최호철_을지로순환선 VR_캔버스에 혼합재료_120×240cm_2017_부분



최호철_동호대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91×197cm_2018

화폭 앞에 선 사람들은 금세 마법의 퍼즐 속으로 빠져든다. 그 안에서 자신의 거처를 확인하고, 자신이 아는 장소를 호명하고, 매일 지나치면서도 보지 못했던 것을 찾아낸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논밭, 개울, 건물에 얽힌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그림은 그들의 눈과 접촉하자마자 줄줄이 사연의 실을 뽑아낸다. 그리하여 최호철의 그림은 저마다의 증강현실, 증강하여 현재를 만들어내는 실이 된다.




최호철_판교택지개발지구_종이에 혼합재료_60×40cm_2016



최호철_판교택지개발지구_종이에 혼합재료_60×40cm_2016_부분

또한 사람들은 이 도시의 집단적인 체험, 그러니까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청계고가의 그림자 아래엔 저렇게 허리 숙인 자들의 생태계가 있었구나. 판교의 소나무 밭은 땅과 돈의 불륜 속에 불도저로 뒤집혔구나. 도시를 성형한다며 올라갔던 고층 빌딩들은 간판을 덕지덕지 붙인 흉물이 되어 버렸구나. 그런데 어디에도 직선은 없네. 높은 곳에 서서 명령하던 자들의 반듯한 계획은 속절 없이 무너졌구나. 세상은 여전히 꼬부라진 언덕길 투성이인데, 모두가 올라가기 싫어하는 그 길이 가장 아름다운 주름이구나.




최호철_서울역 건너 동자동_종이에 혼합재료_79×110cm_2018



최호철_서울역 건너 동자동_종이에 혼합재료_79×110cm_2018_부분

「동호대교」는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스펙터클이다. 경기도로 거처를 옮긴 화가는 자신이 태어나 자란 서울로 들어설 때마다 이 장면들을 보게 된다고 한다. 동호대교 건너편에서 바라본 도시는 폭염에 녹고 폭우에 비틀리고 폭풍에 뒤집어진 뒤 스스로 재접합한 듯하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어지럽지만 그 안에는 놀라운 질서가 있다. 그의 충실한 리얼리즘이 끝없이 변화하는 도시와 만나 만들어낸 절경이다.




최호철_북아현동 뉴타운 개발 지구_종이에 디지털 프린트_90×40cm_2016



최호철_북아현동 뉴타운 개발 지구_종이에 디지털 프린트_90×40cm_2016_부분



최호철_북아현동 뉴타운 개발 지구_종이에 디지털 프린트_90×40cm_2016_부분

최호철의 그림은 VR 파노라마 증강현실 풍속화다. 그는 드론, VR, 액션캠, CCTV가 없었을 때에도, 수만 개의 렌즈를 장착한 채 하늘을 날고 버스에 매달리고 지하철에 숨어 그림을 그렸다. 다중적인 시점, 산개하는 프레임, 그러면서 기묘하게 접합되어 충실하게 재현되는 원근은 다음과 같은 장면들을 위화감 없이 섞어 놓는다. 한가롭게 옥상에서 빨래 터는 할머니, 점심 직후 건물 옥상에 모여 담배 피는 직장인들, 청계천 변의 공장에서 촌각을 다투며 마감을 치는 패션 노동자들... 그의 그림은 유치원생부터 80대 노인까지 손 안에 카메라와 모니터를 들고 있는 이 시대의 정서적 재현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게 오랜 회화의 정위치라고 한다. "마음의 눈으로 평면에 그린다."


이명석


Vol.20190111c | 최호철展 / CHOIHOCHUL / 崔皓喆 / painting








6


최욱경



최욱경 자화상, 푸른 모자를 쓰고 / 종이에 파스텔 61×46cm 1967

 

 

나는 세 개의 눈을 가졌다 / 106x106  종이꼴라쥬, 잉크, 1966

 

<나는 세 개의 눈을 가졌다>(1966) 작품은 캔버스 위에 종이를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하였다.

작품의 제목이나 자신의 이름이 화면의 여기저기에 분산되어 붙여있다.

 

 

 

시작이 결론이다 / 134x41x(3)  나무판에 유채, 병풍형식의 틀 1968

 

<시작이 결론이다>(1968)가 제작된 시기는 최욱경(1940-1985)이 미국에서 수학을 마치고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Franklin Pierce University)에 취직하여 드로잉과 페인팅 등을 가르치게 되어,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때로 짐작된다. 이 작품은 당시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젊은 미술학도들에 의해 추앙받던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양식을 그녀가 작품 속에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에는 빨강, 노랑, 파랑의 강한 원색들이 격렬하게 부딪히고 있으며, 면과 면을 구성하는 선들이 서로 침투하고 가로지르면서 화면에 격동적인 에너지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특징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중 한 명인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의 올오버 페인팅(All-over Painting) 작품경향과 호흡을 같이하고 있다.
최욱경은 그녀의 1960년 중반 이후의 작품들에서 화면을 넓은 색면으로 먼저 나누고, 다시 자유스럽고 활달한 붓질로 채워진 작은 색면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 각각의 면들은 크기, 형태, 색감에 따라 전진하고 후퇴하는 느낌을 주며, 화면에서의 공간감과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다.

만개 / 99x74 종이에 색연필 1981

 

1980년대에 제작한 꽃 그림 연작 중 한 점인 <만개>(1981)는 꽃이 봉오리에서 시작하여 만개하는 과정까지의 절정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꽃의 구조적 배열과 질서, 꽃잎의 형태, 강렬한 색상을 1970년대의 색면 회화와의 연관을 잃지 않으면서 제작하였다. 추상적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여성적 소재를 찾으려는 작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여성주의 미술의 한 경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꽃의 개화과정을 소재로 한 것은 미국의 작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역시 강한 에로티시즘을 느낄 수 있다.

 

열리기 시작 / 99x74 종이에 색연필 1978

 

 

실험 제 1번 / 80x134 패널에 종이 꼴라쥬 1968

 

 

실험 제2번 / 패널에 종이 꼴라쥬

 

 

실험 제3번 /  패널에 종이 꼴라쥬 1968

 

 

최욱경(崔郁卿, 1940-85)의 작품을 알 기 이전 그녀에 대해 들은 여러 이야기들 은 자못 흥미로운 것이었는데, 그것은 무 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항상 부릅 뜬 눈의 특징적인 외모와, 예술에 대한 순수 한 열정으로 인해 그녀의 몸 전체에서 뿜 어나오는 치열한 삶에의 열기가 대하는 사람들을 집중시키며 진지하게 만드는 여 자라는 것이었다.

비로소 최욱경의 작품과 대면한 것은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 유작전과 이어 1989년 호암갤러리 전시에서 였는데, 작 품을 통해 다시 그녀의 실체에 다가서는, 새삼 "작품=작가" 라는 공싱을 학인한 순간 이었다.

 

사실, 그 연배의 작가중에 최욱경만큼 탄 탄한 학력과 경력을 쌓은 사람도 드물다. 1963년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를 졸업한 최욱경은 바로 그해 도미하여 크렌브죽 미술아카데미, 브룩클린 미술관 미술학 교, 스코히간 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78년 귀국할때까지 프랭클린 피어스 대 학, 뉴햄프셔 대학, 아틀란타 대학에서 교 편을 잡기도 하였다.

 

미국에서의 작업을 대체로 두시기로 나 누어 보면, 상반기에 해당하는 1960년대 작품들은 1940년대에 잭슨 폴록, 한스 호 프만, 월램 드 쿠닝등에 의해 시작되어 이 미 1950년대에 세계적인 미술 흐름으로 부상한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 ssionism)의 영향이 나타난다. 미국생활 의 하반기인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로 소 최욱경은 자심만의 독자적인 조형세계 를 구축하게 되는데, 귀국 전해에 제작한 (미처 못 끝낸 이야기(1977)는 꽃봉오 리, 꽃잎같은 형상적 요소가 보여지며, 이 전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식의 거칠고 격렬한 획에서 벗어나 우아하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선들과 중간톤이 많이 가미된 색면들이 서로 조화로이 교 차하고 있어, 60년대의 방만한 감정분출 에서 좀 더 걸러지고 절제된 감성을 보여 준다.

귀국후 영남대에 재직하면서 경상도 지 방의 산의 능선에서 받은 감명을 화폭에 옮긴 (경신산에 경의를 표하며(1981))도 최욱경 특유의 섬세하고 여성적인 감성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안정된 수평구도를 바탕으로 한 간결하고 압축된 화면구성에 유려한 선의 흐름과 共鳴하는 색채가 매 우 시적인 감흥 자아낸다.

 

최욱경이 귀국한 1978년에서 사망한 1985년까지 최욱경 자신 그녀의 작품상 에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는 '여성으로서 의 자각'과 그것을 작품에 반영하는 문제 였다. 최욱경은 자신이 작가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음을 시 인하면서" ‥‥나 여자로서의 감성과 체험 에서 걸려져 나온, 여성의 의식에 관련된 표상을 창출시켜 직접적으로 구사한 시각 적 용어로 표현, 전달하고 싶다."(공간 '82/2)고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욱경 이 1979년 부터 재직하던 영남대에서 1981년 덕성여대로 옮긴것도 여자들만의 세계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고자 했기 때 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남성에 대한 여성 고유의 성징을 소재로 하여 표현하려는 페미니즘 아트(Fem- inism Art)는 1970년대 미국에서 성행하 였는데, 최욱경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관 심과 그것의 조형언어로의 표출은 일련의 시리즈 (열리기전(1978)), (열리기시작 (1978), (만개(1981))에서 볼 수 있다. 여러겹으로 된 타원형이 미묘하게 변형되 어 가는 형상은 여성의 생식기의 변화나 마치 꽃붕오리가 터지는 과정을 그린 듯 한 이중 이미지를 띠고 있다.

 


이 시리즈들과 관련, 실제로 최욱경은 그 녀가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미국 여권 운 동의 기수이며 페미니즘 야트의 대표적 작가로 성기를 형상화시키는 그림을 그렸 던 주디 시카고(Judy Chicago)의 자전적 저서 「화녀(ft女)」 (원제:Through the Flower, My Struggle as a Woman Artist, 1980 문학예술사)를 읽을 것을 권유했다고 하는데, 이 책은 작가가 성 (性)에 눈을 뜬 이후 그것이 작품에 반영 된 것을 서술한 것으로, 이 책의 내용중에 "나는 작품속에서 내가 여성임을 나타낼 만한 것은 전부 부정하려고 안간힘 썼지 만, 나의 여성성에 대한 어떤면은 본질적 으로 예술가로서의 일상적 활동과 성장하 고 있는 미의식의 양쪽에 관련돼 있는 것 이었다."라는 구절은 매우 시사적이다.

 

한편 최욱경은 꽃을 즐겨 작품의 소재로 삼았는데 죽기 일년전 제작한 <빨간꽃 (1984)은 그 중 하나로, 꽃을 크게 확대 시킨 점에서 1920대부터 여성 인체를 상기시키는 곡선을 사용하여 꽃을 그린 역시 미국 페미니즘 작가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ee)를 연상 시킨다. 이 그림에서 화면을 꽉 채운 한 송이의 꽃은 그 살아 움직이는 색채가 압도적이어서, 색채화가로서 최욱경의 면모를 엿보이게 한다. <빨간꽃>의 작열하는 색채는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최욱경의 상태를 말해주는 듯한데, 그 즈음 최욱경은 매우 외로워했 으며, 주변상황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 롯된 깊은 침체에 빠져 심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잠재된 여성으로서의 가능성을 표출하고자 했던 그녀의 조형관에 있어서 도 흔들림을 보여, 자신의 작품이 20, 30 대에 비해 40대에 이르러 여성적이고 섬 세해졌다는 말에 묘한 씁씁함을 느끼는 아이러니를 보이기조차 했다. 최욱경은 그 상황에서 탈피하려고 한국에서의 교수 직을 그만두고 다시 미국으로 가 작업하 기를 희망하였으나, 그 결심은 어머니의 만류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여성에 대한 자각이 그녀안에 잠작고 있던 인간 적인 번민과 고독, 상실감을 일깨운 한 요 소로서 작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그 녀에게 끝내 부수지 못할 벽(壁)이었던가.

 

최욱경은 이 <빨간꽃>을 그린 그 이듬해 생을 마감됐다.

 


- 서양화가, 강승완

 






 

 7


손응성


 

 

 

 손응성, 베냇저고리, 연도미상, Oil on Canvas, 38x46cm, 개인소장

 

 

 

총을 멘 병사

 

 


 









8


한운성



미술에 있어서 작가로서의 행위나 그 결과물로서의 작품에 지나치게 감각과 감성을 우위로 생각했던 미술계의 풍토에 한운성은 이성과 지성으로서의 미술이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었을 뿐 만 아니라 판화의 불모지였던 한국 현대미술에 판화를 일반적인 회화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 준 작가이다.

시류에 연연함 없이 어느 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는 기량의 소유자로서 자신의 장인적 기질과 인문학적 지성으로서 독보적인 스타일을 성실한 노력과 진지한 태도로 꾸준히 개척해 나간 대표적인 화가이다. 

 타고난 감수성과 그 감수성을 끊임없이 연마하는 것에 적어도 화가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그가 보여 준 성실성과 진지함, 그것이 반영된 그의 작품은 한국현대미술의 메인스트림에 하나의 전환을 이룩했다고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특히, 미술도 이성과 지성으로서 보편적인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여타 학문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 한운 성은 장인과 지성인으로서의 휴머니스트 작가이다.




 

 

 

 

 

 

 

 

 

 

 

 

 

 

 

 

 

 

 

 

 

 

 

 

 

 

 

 







9



이광호

1967년 충북 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판화 전공). 1996년부터 현재까지 국제갤러리와 조현갤러리 등에서 8회 개인전, 프라하 비엔날레, 자하미술관, 예술의전당, Domus Artium 2002(DA2, 스페인), 국립현대미술관, 성곡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카스텔론 뮤지엄, 금호미술관, 사비나미술관, 세종문화회관미술관 등에서 주요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6년 스페인에서 개최하는 제3회 Castellon 국제회화공모전 후보자에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에 중앙미술대전 우수상과 인기작가상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Posco 등 주요 기관과 개인들에게 소장되어 있다.

뾰족한 가시들이 엉클어져 있는 선인장 그림 앞에서 화가 이광호의 설명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반드시 해야 하는 한 가지 일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가는 것이며, 인생의 최대 목표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적・촉각적인 욕망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화가 이광호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 되기’에 근접해 있는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작은 식물인 선인장은 그의 화면에서 거대하게 자리를 잡았다. “선인장은 촉각적인 그림이다. 그것은 나에게 애무의 대상이다.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지고 싶은 끊임없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인정하게 되었다”고 그는 덧붙인다. 그림 속 선인장은 남근 같기도 하고 때로는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연상케도 하면서 두려움과 유혹이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날카로운 가시들 때문에 선인장은 다양한 형태론적인 흥미를 유발할 뿐 아니라 접근하기 용이치 않음, 그럼으로써 더 고조되는 매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무수히 많은 붓질과 나이프의 흔적, 문지르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한 다양한 작가의 작업의 흔적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언어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일도, 고백하는 일도 서툴렀다. 언변이 부족하다는 것이 콤플렉스가 되어 점점 더 위축되어갔다. 그림은 말로 못 하는 것을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Cactus No.57, Oil on Canvas, 189.5×190cm, 2011

5년 동안의 긴 짝사랑을 후일담처럼 말하게 된 것도 그림을 다 그린 후 발표하는 전시장에서였다. 화가 이광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거창하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것”을 작품의 대상으로 삼아나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과 눈 맞추기였다. 2005년 이전까지 그의 작품은 그림으로 그려진 사적인 독백이자, 세상과의 눈 맞추기 과정이다. 친구, 아내 등 그의 지인들이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 〈재연-어머니로부터 그 의미를 마음에 새겼을 말들〉이라는 작품의 주인공인 ‘재연’은 그의 친구다. 당시 그는 영화와 소설 등에서 많은 자양분을 흡수했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림 속에 의미 있는 이야기로 담아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특히 《경마장 가는 길》을 쓴 소설가 하일지의 소설을 좋아했다. 후에 소설가 하일지는 그의 작품 평을 써주기도 하였다.



머리깎기, Oil on Canvas, 130×193cm, 2001

1997년 결혼한 그의 아내는 그림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고 마주 보고 관찰했다. 아내를 처음 그린 그림에서 그는 손을 꼭 잡고 마주 보고 있다. 마주 보는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2001년작 〈머리깎기〉는 힘겨웠던 아내(푸른 옷을 입은 여인으로 그려져 있음)의 첫 임신과 젊은 남편 이광호의 이야기가 전기 르네상스 작가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라는 작품의 틀을 빌려서 표현하고 있다. 손녀의 태몽을 꾼 어머니도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한다. 이 작품은 〈회화의 확장〉 표제 하에서 해마다 이루어지는 스페인 카스테롤 회화 공모전에서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다. 이 상을 계기로 그의 작품의 국제적인 가능성을 알아본 국제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이 작품은 Domus Artium 2002라는 스페인 미술관에서 다시 전시되기도 했다.


재연-어머니로부터 그 의미를 마음에 새겼을 말들, Oil on Canvas, 193×130cm, 2001

그가 세상과 본격적으로 눈을 맞추고 자신감 있게 마주 본 흔적은 2005년 창동 스튜디오에서 머물면서 1년간 75점을 그린 초상화들이다. 이 작품들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이 마음에 드는 모델을 직접 선정할 것, 그림의 모델에게는 초상화를 팔지 말 것, 누구든 정해진 의자에 앉아서 포즈를 취할 것, 어떤 모델이건 같은 크기의 그림으로 그릴 것 등 초상화를 그리는 데 그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그림이 마무리될 때쯤 편안하게 수다를 떠는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해서 함께 전시했다. 처음에는 20명 정도만 해야지, 했던 작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100명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2005년 한 해만 75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국제갤러리 on Painting 전시 광경, 2007

수줍음 많던 그는 화가가 되어서 마침내 수많은 사람과 마주 보게되었다.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동료 작가, 친구 등 다양한 사람이 그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마주 봄은 화가와 모델이라는 관계에서 화가가 갖는 우월적인 지위가 아니라 ‘사랑’의 시선이었다. 그는 대상을 눈으로 어루만지고 그 느낌을 잡아내서 빠르게 그려나갔다. 그리는 방식도, 표현 방식도 누구를 그리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그렸다. 너무 사랑해도 그림은 뜻하는 대로 나오지 않았다. 집착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기술도 그는 배워나갔을 것이다. 딸아이의 초상화는 네 번을 그렸다. 그림속에는 딸 윤서가 자라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김여운2, Oil on Canvas, 80.3×60.6cm, 2006

후에 사람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 그 인물을 나타낼 수 있는 물건과 병치하는 작품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 선인장으로 상징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초상화를 거쳐 온 선인장 그림이기에 이 선인장 그림들은 단순한 정물화가 아니라 인간을 의태하고 인간과 자신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비록 관찰의 대상이지만, 선인장은 화가의 시선 앞에 굴복하지 않으며 그 장대한 내적인 힘을 자랑하는 존재가 된다. 눈 빠른 사람은 이미 초창기 인물화를 그리던 시절부터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으며, 선인장 그림은 그에게 상업적인 성공을 안겨주었고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Cactus No.69, Oil on Canvas, 162.1×130.3cm, 2011


Cactus No.59, Oil on Canvas, 259.1×170cm, 2011


Cactus No.58, Oil on Canvas, 150×150cm, 2011


Cactus No.72, Oil on Canvas, 179.5×120cm, 2011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0월 2일 부산 조현화랑에서 있었던 개인전을 포함해 최근의 몇몇 전시에서 풍경화를 시도하고 있다. 아직 풍경화를 설명할 충분한 틀이 자신의 안에 마련되지 않았다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미 선인장 그림 속에 풍경화로 나갈 수 있는 근거가 충분히 마련되고 있었다.


Sobaeksan, Oil on Canvas, 120×100cm, 2010

선인장 그림 중에서 하나의 중심점이 있는 구성을 가진 그림이 아니라, 〈선인장 No.57〉처럼 선인장이 만개해서 무한히 펼쳐나가는 장면은 풍경화로 더 나아가 추상화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주 중산을 지나다 본 무심히 방치된 덤불더미, 서산의 야산 풍경 등은 중앙집중적인 구도를 갖춘 상식적인 풍경화가 아니다. 무심히 던져진 풍경 위에 스쳐 지나간 시선의 흔적을 그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초기의 〈동물원〉이라는 그림에서 그는 다양한 시선의 움직임 자체를 작품으로 보여준 바 있다. 그 결론은 “타자의 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 역시 나의 시선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대상에, 다른 사람에 보내던 시선을 다시 자기로 되돌리는 것은 정신적으로 더욱 성숙한 단계를 의미한다. 나는 유심히 그의 풍경화를 바라본다. 화가 이광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간절함이 있으면 영감이 스쳐 지나간다. 그림이 되려면 모든 우연이 필연이 된다”는 그의 말이 떠오른다. 그가 그림 속에서 바라본 그 필연의 장면은 무엇일까. 다음 전시가 우리에게 답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