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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예술의 사생활 : 비참과 우아』

 

 

 

평점 : ★★★★★

노승림(女)이란 저자가 아주 아주 해박한 사람이구만요.

 

 

 

예술의 사생활 2017. 10. 10

 

 

 

영리한 조작, 대중의 오해 그리고 운명이 선사한 의도치 않은 행운이 숨어 있는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아름답고 치열하며 비루하고 소소한 이야기 『예술의 사생활: 비참과 우아』는 예술가들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파편들을 모은 에피소드 모음집이다. 졸작으로 역사에 가려질 뻔한 작품들이 사소한 계기로 명작으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이었던 관계가 아름다운 우정 또는 로맨스로, 베토벤처럼 성마르고 인간적으로 존경하기 힘들었던 예술가가 신에 버금가는 완벽한 인격체로 승화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가벼운 터치로 짚었다. 여러 문헌들을 살펴볼수록, 처음 완성된 순간부터 명작으로 인정받은 예술품은 생각보다 드물었고, 작품만큼 고귀한 인품을 소유한 예술가는 더더욱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영리한 조작, 대중들의 오해, 그리고 운명이 선사한 의도치 않은 행운이 숨어 있다.

 

저자 노승림

저서(총 7권)
현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자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공연예술학 협동과정 석사(수료)를 거쳐 영국 워릭대에서 문화정책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공연예술전문지 『월간 객석』에서 음악 담당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나와 당신의 베토벤』 (공저), 옮긴 책으로는 『페기 구겐하임』, 『음악과 권력』, 『평행과 역설』이 있다.

 

 

 

 

목차

 

 

들어가며

 

1812년 7월, 온천도시 테플리츠에서 괴테와 베토벤이 만났다. 서로를 이름과 작품으로만 접하던 두 거장이 마주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에술세계를 논하며 함께 산책하던 중 멀리서 황후와 귀족 일행이 다가왔다. 괴테는 으례 그렇듯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격식을 갖추어 인사를 하자, 그러한 괴테의 모습에 베토벤은 마음이 상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지위나 명예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20살 연상인 괴테의 비굴한 태도를 책망했다. "선생님은 저들을 지나치게 존경하시는군요."

로망롤랭의 저서 『괴테와 베토벤』을 통해 유명해진 이 일화는 신분계급에 반대하던 베토벤의 정신을 상징하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합창>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 가사와 겹쳐진 베토벤의 이미지는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시민주의 정신의 화신이다.

실제로 베토벤은 어땠을까? 베토벤이 귀족들과 사사건건 시비가 붙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역정이었지 신분제를 향한 반발은 아니었다. 그는 귀족처럼 대접받고 싶어 했고 최종 목표는 오스트리아 황제를 섬기는 궁정악장이었다.

그가 평민을 대하던 태도를 보면 좀 더 분명해지는데, 특히 가난한 고용인들에 대한 애정이나 존중을 찾아볼 수 없었고 돈을 훔쳐갈까 늘 의심했다. 베토벤에게 고용된 하녀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걸핏하면 해고되거나 못 견디고 도망치곤 했다. 그는 귀족뿐 아니라 평민에게도 무례했다.

 

 


단테 (1265-1321)

_ 베아트리체의 이름으로 중세를 종결하다


미켈란젤로 (1475-1564)

_ 그에게는 육체의 조화가 신앙에 우선했다


셰익스피어 (1564-1616)

_ 희곡을 부랑자의 유희에서 순수 문학으로

 

 

셰익스피어는 유명 극단의 일원으로서 타고난 정치감각을 지닌 사업가였다. 그는 체임벌린 등 귀족과 접촉해 그들로부터 후원을 얻어내는 한편 궁정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하여 엘리자베스1세女王과 직접 소통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햄릿 오델러 맥베스 등의 배경을 왕궁이나 귀족으로 한 것도 궁정 진출을 위해서였다. 이를 통해 셰익스피어는 귀족과 서민의 중간계급인 '젠틀맨'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극장을 벗어난 사적인 영역의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이 무색할 만큼 수전노였다. 당시 세금기록부나 각종 소송문서들을 보면 채무자를 무자비하게 채근해 돈을 받아내는 집요함을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유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살아생전에 지금처럼 '문학 거장'으로 대접받은 것은 아니었다. 희곡작가는 점잖은 신사가 가질 만한 직업이 아니었다. 당시의 희곡은 진정한 문학장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돈벌이를 위한 천박한 대중 유희의 도구 정도로 취급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곡 작품을 출판하지도 못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작가와 함께 죽음을 맞으며 수백 년 동안 무덤에 갖혀 있다가, 19세기 국가적인 후원과 맞물리면서 갑자기 불어닥친 셰익스피어 숭배 열풍에 연극의 전설로 부활하였다.

 

 


렘브란트 (1606-1669)

_ 조연들을 향한 한 천재의 시선

 

 

 

 

「튈프의 해부학 강의」는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묘한 위화감이 감돈다. 튈프의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의 시선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렘브란트는 의뢰인인 중심인물 만큼이나 집단에 비중을 두었다. 조연에 불과한 인물들 하나하나에 디테일을 더해 군중에 생기를 부여했다.

 

 

 

 

1642년 네덜란드의 반닝 코크 대장은 휘하의 부하 장교들을 거느린 단체 초상화를 의뢰한다. 렘브란트는 한낮에 성벽 경계를 위해 부대를 나서는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코크 대장의 거실에 걸기에는 그림이 너무 컸다. 코크는 화가의 동의도 구하지도 않은 채 그림의 일부를 잘라내 태워버렸다. 코크 대장의 거실에는 석탄난로가 있었다. 겨울이면 검댕이 묻었고 세월이 흘러 이 그림은 까맣게 변해버렸다. 그리하여 한낮의 정경을 묘사한 이 작품에는 '야경'이라는 해괴한 제목이 붙었다.

 

 


페르메이르 (1632-1675)

_여전히 모호한 위작과 진품의 경계


륄리 (루이14세 궁정악장)

_ 자기 발등을 찍은 어느 난봉꾼의 일생


루이 14세 (1638-1715)

_ 72년간 왕좌를 지킨 최초의 발레리노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군주나 정치가는 동시에 빼어난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권력과 교양의 상부상조는 오늘날에도 대세를 이루는 경향이다.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고전음악이나 미술감상 모임을 갖고, 기부하고, 교양강좌에 열올리는 모습은 서구 사회의 오랜 전통이다.

심미안을 지닌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서 익히 파악하고 있다. 美를 앞세운 권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단히 위력적이다. 그 어떤 합리적인 이성이나 도덕심도 감각적인 것에 직접 호소하는 정치 앞에 무력해지곤 한다. 이같은 에술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가장 스케일 크게 활용했던 인물이 루이 14세다.

 

 


(1632-1723)

_ 폐허 위에 꽃핀 전화위복의 예술


헨델 (1695-1759)

_ 허세로 시대를 거머쥔 타고난 승부사


하이든(1732-1809)

 _ 수준 높은 파격은 전통이 되었다


고야 (1746-1828)

_ 걸어 다니는 색마, 신이 아닌 인간의 알몸을 그리다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스페인 미술계의 베토벤이라 할 수 있다. 공화주의적 성향과 현세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는 기질, 시대를 초월한 특출난 재능, 중년 이후에 청력을 잃은 것까지도. 그러나 베토벤이 소리를 잃은 불행 속에서도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낙천주의자였던 반면, 고야는 비관주의자에 가까웠다. 이러한 비관주의는 삶이 밝았던 시절에는 쾌락과 냉소로, 훗날 어두운 시절에는 잔인한 공포로 묘사되었다.

 

 


Francisco de Goya.[카를로스 4세와 가족]Charles IV and His Family. c. 1800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고야는 민족주의자라기보다 인류의 보편적 이성을 믿는 공화주의자에 가까웠다. 전쟁의 참상을 그리 이 작품은 침략당한 조국의 아픔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인권을 유린하는 전쟁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스페인 완정을 불신하는 그에게 나폴레옹의 공격은 반드시 나쁜 소식이 아니었고, 나폴레옹을 격퇴하고 스페인 국왕이 되어 돌아온 페르난도 또한 달갑지 않았다.

국왕은 고야의 불충한 신념을 눈치채고 그를 경계하고 불신했다. 여기에 운신의 자유를 얻고 국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국'으로 읽힐 여지가 있는 「5월 2일」 「5월 3일」, 두 편의 작품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호의를 얻지 못해 1872년까지 전시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게르니카>처럼 군대의 민중 학살을 그린 그림으로만 알려졌다가, 한참 후 6.25 전쟁 동안 신천군에서 수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신천군 학살은 수만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는 것만 확실할 뿐, 대체 누가 무슨 명분으로 죽였는지조차 불확실합니다.

 

 


다비드(1748-1825)

 _ 그의 그림에서는 권력의 냄새가 난다

 

 

 

 
블레이크(1757-1827)

 _ 나의 편이 아니라면 나의 적이다


모차르트(1756-17910 / 베토벤(1770-1827)

 _ 같으면서 달랐던 두 예술가

 

 

 요제프 하이케,「모짜르트의 관」(1860년)

 

 

프란츠 슈퇴버, 「베토벤 장례식」

 

 

 


파가니니(1782-1840)

 _ 스스로 소문을 만들어 셀러브리티가 되다


바이런(1788-1824)

 _ 그의 미모와 함께라면 비극조차도 아름다웠다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비극이 끝나고, 결혼으로 모든 희극이 끝난다.

 

 

 



 

바이런의 조각상.
그리스에 있는 바이런의 조각상.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죽었지만 바이런이 가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리스의 독립전쟁은 전 유럽의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의 미모와 함께라면 비극조차도 아름다웠다

 

베토벤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교두보에 서 있던 예술가였다. 그에게서 가장 낭만주의답지 못한 점을 꼽으라면, 수많은 고통과 비극 속에서도 결국에는 희망을 가지고 삶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는 최악의 순간에도 그는 온 세상 사람들이 신의 날개 안에 천국에서 하나가 될 거라 노래했다. 어쨌거나 그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자유를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절망에 중독된 사조였다. 그 절망이란 이름의 독은 현실세계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즈음만해도, 시민들은 이 폭풍우만 지나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올 거라고, 과학의 발전은 우리를 보다 현명하게 이끌 것이라고, 산업화는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권, 과학, 산업화, 이 모든 낙천적인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판으로 증명되었다. 혁명으로 쟁취한 자유는 곧바로 반 혁명파에게, 또는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독재자에게 무력하게 강탈당했다.

 

그러나 실망이 되풀이되면, 사람이란 그에 익숙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듯이, 사람들은 당연한 듯 또다시 현실의 불행에 무감각해졌다. 이러한 무감각을 인식의 표면 위로 끌어올린 최초의 인물이 다름 아닌 시인 바이런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보아도 이기적이리만큼 비관주의의 정수를 달리는 인물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과 불행에 대한 감각을 애써 일깨우고, 현실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며, 바이런은 나폴레옹에 이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괴테나 푸시킨처럼 최고 명성의 작가에서부터 비스마르크와 같은 위대한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가장 세상물정에 관심이 없을 법한 십대 소녀조차도 바이런의 작품이라면 히스테리에 가까운 열광을 보였다.

 

 

 

 

바이런의 작품들.
출판되는 그날로 매진을 기록했던 바이런의 작품 초판본들.
차례로 ‘돈 주앙’, ‘마제파’, 차일드 해럴드의‘편력’

 

어떻게 조지 고든 바이런과 같은 인간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는 그의 직계 조상들을 살펴보면 파악 가능하다. 바이런 가문은 귀족 집안이었지만 다혈질로 명성이 자자했다. 큰할아버지는“악당 바이런” 으로 불리는 살인 전과의 소유자였고, 해군제독을 지낸 친할아버지는 부하들 사이에서“악천후 잭” 이라 불리었으며, 아버지는“미치광이 존”으로 통했다. 특히 “미치광이 존” 은 남달리 복잡한 여자 관계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조지 고든 바이런은 그가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독자였다. 이 결혼은 애정보다는 경제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바이런의 어머니 캐서린 고든은 스코틀랜드 출신 부호의 상속인이었으며, “미치광이 존”은 귀족 명패만 달고 있는 빚에 시달리는 가난뱅이였다. 정략결혼이었던 만큼 결혼 생활은 평탄치 못했고,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며 아내의 재산마저 몽땅 탕진한 존은 집을 나가 프랑스를 방랑하다 객사했다.

이런 남편에 대한 아내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그녀가 분노의 표적을 아들에게 돌렸다는 데 있었다. 만만치 않을 만큼 격렬하고 변덕스런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아들 바이런에게 냉담했으며 때로
는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기형인 아들의 오른쪽 다리를 가지고 인신공격성 발언도 했다. 유모 메이 그레이 또한 독실한 청교도여서 언제나 엄격한 기준을 들이댔다. 어디에도 안주할 수 없는 유년기를 보낸 바이런이 궁극적 비관주의자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비극은 끝나고, 결혼으로 모든 희극은 끝난다” 라는 그의 명언은 염세적인 삶의 관점을 대변한다.

 

그렇다고 바이런의 삶이 전적으로 비극적이지만은 않았다. 큰할아버지에게서 남작 지위를 물려받고 어머니로부터 독립한 뒤로는 오히려 행복에 가까운 인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그는 빛나는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물려받은 유산으로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유럽을 2년간 여행하고 이를 토대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12)라는 장편 시를 발표했다. 이 시집에 대한 찬사와 인기는 당시 바이런의 저 유명한 소감으로 알 수 있다.

“ 어느날 아침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져 있었다(I awoke one morning and found myself famous).”

바이런의 이름을 단 신작은 나왔다하면 수 만부가 며칠만에 동이 났다.

“ 나는 절대로 글을 두 번 고치지 않는다”라고 공언할 만큼 그는 자신의 문학적 영감과 직관에 남다른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바이런에게는 글만큼이나 자신 있는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외모였다.

미적 기준이 다른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바이런의 초상화는 상당한 수준의 미남을 묘사한다. 실제로 동
시대에 그는 ‘그리스 조각상 같은 얼굴’로 명성이 높았다. 심지어 그의 얼굴을 실물로 보고 감격해서 기절하는 여성까지 있었다고 한다. 바이런의 문학이 비현실적이리만큼 신속하게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외모에 대한 명성도 한몫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이런의 모습.
실물을 보고 혼절하는 여성이 있을 정도로 바이런의 외모는 출중했다. 수많은 화가들이 그의 초상화를 앞다투어 그렸다.

그는 시대의 지성인이자 또한 일거수일투족 주목받는 연예인이었다.

 

역사상 최초의 다이어트 아이콘


타고난 미모의 소유자였던 바이런에게도 두 가지 신체적 약점은 존재했다. 하나는 오른쪽 다리가 기형이라는 점이었다. 심지어 모친까지도 비열하게 놀려대던 기형 다리는 그에게 일생일대의 콤플렉스였다. 자신을 지칭
하건 아니건 어디서 “절름발이”라는 소리가 들려오면 한없이 예민하게 반응할 정도였다. 이런 신체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체력 단련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승마·크리켓·수영·펜싱·사격에 이르기까지 당시 유행하던 종목은 대부분 섭렵한 만능스포츠맨이었으니, 거리가 무려 61킬로미터나 되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한숨에 헤엄쳐 건널 정도였다. 그가 운동에 집착했던 이유는 또 하나의 약점인 살찌기 쉬운 체질 때문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뚱보가 될까봐 노심초사한 바이런은 운동 이외
에도 충격적이리만큼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시도했다. 조금만 군살이 늘었다 싶으면 식초에 절인 감자와 소량의 비스킷만 먹으며 근근이 연명했고, 일부러 엄청나게 두꺼운 털스웨터를 입고 땀을 냈다. 그러다 얼마 안있어 보상심리로 흥청망청 먹어대다가 소화불량 때문에 제산제를 복용하곤 했다.

1816년 제네바 호수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셸리 일행과 머물 때에는 아침은 차 한 잔에 얇은 빵 한 조각, 저녁은 가벼운 채소와 와인을 탄 탄산수로 끝냈다. 차를 마실 때는 절대로 우유나 설탕을 넣지 않았다고 한다. 참을 수 없는 공복감을 억제하기 위해 그의 손에서는 담배가 떠날 날이 없었다.

 

 

당시 런던의 한 와인상은 신사들의 체중을 달아주고 이를 장부에 기록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1806년 바이런의 몸무게는 88킬로그램에 육박했지만, 그로부터 5년 뒤인 1811년에는 57킬로그램에 불과했다. 5년간 거의 32킬로그램에 가까운 감량을 한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혹사시키는 이유에 대해 바이런은 “날카로운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바이런 개인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최고로 유명한 연예인이었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대중의 모범이자 모방의 대상이었다.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다이어트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위에 언급한 와인상에는 댄디룩을 창시한 남성 정장의 선구자 보 브러멜도 자주 와서 체중을 재곤했다. 그는 1815년부터 1822년까지 40번이나 다녀갔는데, 이 기간 중 그의 체중은 81킬로그램에서 69킬로그램으로 줄어들었다.

바이런의 몸매에 대한 강박은 그를 추종하는 여성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바이런 덕분에 빅토리아 시대에는 연약한 몸매와 (영양실조로) 창백한 뺨이 날카롭고 예민한 지성과 동의어로 취급됐다. 십대에서부터 환갑에 이르는 수많은 여성들이 식초와 밥만으로 생명을 유지하다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바이런은 “진정한 여성이라면 먹거나 마시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오직 랍스터 샐러드와 샴페인만이 예외가 될 수 있다” 라며 이런 병폐를 부추겼다.

 

 

그리스에 막 도착한 바이런을 환영하는 그리스인들.
당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독립전쟁 중인 그리스에 대한 지지운동이 벌어졌다.

 

 

타고난 필력과 미모, 그리고 후천적으로 단련한 신체로 바이런은 여성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그가 여성들과 뿌린 염문은 아버지 못지않게 화려하고 또 방탕했다.

1815년 첫 번째 아내였던 밀뱅크는 “남편은 정신적으로는 정상일지 몰라도 도덕적으로는 비정상”이라며 남편의 방탕함을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떠났다. 이복누이인 어거스터와 근친상간 관계라는 소문도 나돌았으며, 동성애자라는 의심도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대중적인 명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보수 언론을 포함한 반대편 안티 세력들의 공격도 거세졌다. 결국 28세가 되던 1816년 그는 수많은 명성과 오명을 뒤로 하고 영국을 떠났다.

 

바이런의 여성편력은 영국을 떠나 유럽을 여행하면서도 그칠 줄 몰랐다. 베네치아에서는 스스로 200명이나 되는 여성과 사귀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사귀는 여성이 늘면 늘수록 그의 문학적 영감은 빛을 발했다.
훗날 슈만을 위시한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 깊고 진한 영감을 남긴 <돈 주앙>과 <만프레드>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온 유럽을 떠돌아다니던 바이런은 1823년 그리스의 메솔로기온으로 향했다. 이 시기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한창 독립운동 중이었다. 팔이 안쪽으로 기울 듯이 서양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고, 바이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다혈질이었던 그는 한술 더 떠서 군대 경험도 전혀 없는 주제에 그리스 반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첫 전투를 치
르기도 전 다이어트에 오랫동안 혹사당한 그의 몸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고, 그로부터 두 달 뒤 서른여섯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8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퇴폐적인 사생활로 악명이 높았던 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문의 영지에 매장되어 있던 그의 시신이 오늘날처럼 웨스트민스터 지하에 입성한 것은 20세기인 1969년의 일이다.

글·::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로시니(1792-1868)

 _ 트러플(송로버섯)을 보면 떠오르는 음악가


슈베르트(1797-1828)

 _ 왜 좀 더 일찍 그를 알지 못했던가


들라크루아 (1798-1863)

_ 동쪽을 바라보는 일그러진 시선

 

 

 

 

 

1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2

 

 

3

 

 

4

 

 

5

 

 

6

 

 

 

 

 


베를리오즈 (1803-1869)

_ 음악의 역사를 바꾼 첫사랑의 힘


탈리오니

_ 혼자만의 개성이 세계의 정석이 되다


슈만(1810-1856) / 클라라(1819-1896)

 _ 과장된 순애보


리스트 (1811-1886)

_ 하인에서 친구로 음악가의 지위를 끌어올리다


리하르트 바그너 (1813-1883)

_ 사랑할 수 없는 인격과 부정할 수 없는 예술의 슬픈 결합


러스킨(1819-1900) / 휘슬러(1834-1903)

_ 한 치의 물러섬이 없던 창과 방패의 싸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 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이며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그런 그림들이 귀족은 물로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개방되었다. 그림 내용은 고사하고 앞뒤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는 그림들을 보며 그들이 느낀 혼란은 십분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하여 작품을 알기 쉬게 설명해주는 해설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해설자들이 설명의 차원을 넘어 그림의 가치를 평가하는 권위를 누리게 되었으니 그것이 근대 예술 평론가가 등장하는 계기였다.

 

 


쿠르베 (1819-1877)

_ 평범함이 전략이다


나다르 (1820-1910)

_ 초상사진의 일인자 또는 포토샵의 원조

 

 

 

 


로세티 (1828-1882)

_ 뮤즈를 불행하게 만든 예술가의 이기심

 

 


 

1851년 로세티의 연인이 된 리치(엘리자베스 시덜)는 당시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던 혼전동거를 하며 오로지 로세티를 위해서만 모델로 섰다. 리치와 함께 지내는 동안 로세티의 창작력은 화려하게 피어났고 그녀를 모델로 한 수많은 작품들이 호평을 얻었다. 하지만 리치는 갈수록 불행해졌다. 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져 점차 많은 그림을 의뢰받기 시작한 로제티는 리치 외의 다른 모델을 기용하기 시작했으며 그들과 염문을 뿌렸다.

 

결국 리치는 약혼, 파혼, 결별을 반복하며 우울증과 아편중독으로 정신이상 증세로 이어지다가 32살의 나이로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맞았다. 리치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주변의 비난을 염려한 로세티는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자책의 의미로 자신이 평생 쓴 자필 시집을 리치의 관과 함께 묻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7년 뒤, 시집 출판을 제안받은 로세티는 오밤중에 몰래 묘지를 찾아가 리치의 무덤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르며 끝까지 자신의 이기심에 충실했다.

 

 

라파엘 전파(-前派, Pre-Raphaelite Brotherhood)은 1848년 영국에서 시작한 예술운동이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처음 명칭은 Pre-Raphaelite)는 1848년에 윌리엄 홀맨 헌트, 존 에버렛 밀레이, 그리고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에 의해 창설된 영국의 화가, 시인, 비평가의 모임이다. 세 설립자들은 곧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 제임스 콜린슨, 프레드릭 조지 스테판스, 그리고 토머스 울너를 받아들여 일곱 회원의 'Brotherhood'가 형성되었다.

이 모임의 의향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뒤를 잇는 매너리즘의 화가들에 의한 기계적이고 이상화된 예술을 거부하고 새로이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특히 라파엘의 고전적인 인물의 포즈와 고상한 구조가 미술 이론에 퇴폐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이런 까닭에 'Pre-Raphaelite'란 명칭이 붙었다. (여기서 앞에 붙은 'pre'는 '전(前)'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라파엘 전파가 르네상스 이전의 고전주의에 기초를 둔 모임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라파엘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된다) 특히, 그들은 '슬로슈아 경'이라 부르는 영국 왕립 미술원의 창립자인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영향력에 반기를 들었다.

 

 

 

 


가우디 (1852-1926)

_ 신성과 세속 사이에 세워진 다리

 

 

교장은 유남히 못마땅했던 가우디에게 최종 졸업시험에 불합격으로 보복했다. 그러나 가우디를 아끼던 선생들의 중재로 재시험을 치룬 뒤 간신히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졸업식장에서 ─

"여러분, 지금 내가 이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치광이에게 주는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진짜 건축가가 누구인지는 이제부터 알게 되겠지요."

 

 


고갱(1848-1903) / 반 고흐(1853-1890)

_ 막장 드라마로 끝난 동시대 천재들의 동거

 

브뤼셀 왕립 미술원 -> 누에넨에서 드로잉 공부 -> 안트베르펜 예술 아카데미 --->> 파리, 테오의 화방을 통해서 로트레크, 모네, 드가, 피사로 고갱을 사귐.

 

 


파블로바 (1881-1931)

_ 80만 킬로미터를 날아다닌 빈사의 백조

 

 

어느 귀족 별장에 초대받은 파블로바는 모여든 손님들의 부탁에 못이겨 「빈사의 백조」를 추게 되었다. 발레 슈즈가 아닌 일반 드레스에 구두를 신고 추는 춤이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파블로바의 춤을 감상했다. 한참 춤을 추던 그녀는 갑자기 멈추더니 피아니스트에게 불평했다. "거기서 한번 끊어주셔야죠. 쉼표가 있잖아요. 음악하시는 분이 그것도 제대로 연주를 못하세요?"  노년의 피아니스트는 그녀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부인, 단언컨대 악보상 이 부분에 쉼표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넣어드리죠." 그는 바로 그 음악을 작곡한 생상스였다.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던 극장은 공연을 취소하는 대신, 생상스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스퐅,라이트 만으로 '빈사의 백조' 동선에 따라 빈 무대를 비추는 처모공연을 펼쳤다. 음악이 멎고 스포트라이트가 꺼지자 관객들은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며 파블로바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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