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22. 14:16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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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와 나르키소스
에코(Echo)는 숲의 요정이다. 그녀는 숲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흠모하며 울창한 숲 속에서 자연과 함께 팔팔하게 뛰노는 아리따운 아가씨다. 소문난 수다쟁이기도 하다. 생동하는 숲에서 온갖 새들과 상대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촉새가 된 것이다. 에코는 일단 한번 입을 열었다 하면 상대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폭포처럼 말을 쏟아 부어 누구든 혼을 빼어놓기 일쑤다.
어느 날 바람둥이 제우스가 요정들을 희롱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질투의 화신 헤라가 불륜의 현장을 추적하던 중 에코를 만난다. 헤라는 그녀에게 난봉꾼의 행방을 물으려 한다. 그런데 에코는 헤라가 입도 뻥끗하기 전에 특유의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종알종알, 재잘재잘, 지지배배…….”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1903. 캔버스에 유채』
헤라는 넋을 잃고 만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 중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한참 동안 에코의 수다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문득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상황이 이미 끝나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헤라는 에코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이 수다꾼아, 너 때문에 난봉 서방 길들일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잘난 혓바닥에 저주를 내려주마. 마음 같아선 세치 혀를 완전히 굳어버리게 하고 싶다만 그래도 불쌍한 생각이 들어 반만은 살려두마. 이제부터 너는 남이 말을 꺼내기 전엔 절대 혀를 놀릴 수 없고 말대답만 할 수 있으리라!”
헤라의 저주로 상대가 말을 걸어오기 전에는 먼저 입을 열 수 없게 된 에코는 어느 날 사냥을 나온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년 나르키소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어쩌랴. 당장 그에게로 달려가 사랑을 속삭이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에코는 나르키소스 곁을 배회하며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다.
나르키소스는 동료들을 잃어버렸는지 큰 소리로 “근처에 누구 없나?”라고 외친다. 그러자 에코가 말을 받아 “없나?”라고 대꾸한다. 그 소리에 나르키소스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다. 나르키소스가 다시 “있거든 이리로 나와!” 하니까, 에코도 “나와!”라고 맞받는다. 그러자 나르키소스는 더 큰 소리로 “다들 나와 함께 가자!”라고 외친다. 이 말에 에코는 “함께 가자!”라고 화답하며 나르키소스에게 달려가 목을 끌어안는다. 나르키소스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는 “놓아라, 너 같은 것에게 안기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고 소리친다. 에코는 “죽어버리겠다!”라고 외치며 물러난다. 나르키소스가 매몰차게 발길을 돌려 사라지자 에코는 부끄러움에 낯을 붉히며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든다.
이때부터 에코는 눈에 띄지 않는 동굴이나 계곡에서만 살았으며 실연의 아픔 때문에 날로 여위어 가다가 마침내 육신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메아리’로 남게 된다.
에코의 마음을 빼앗은 미남 청년 나르키소스(Narkissos)는 강의 신 케피소스(Kephisos)의 아들로서 빼어난 미모를 갖고 태어난다. 그런데 태어나서 얼마 후에 장님 예언가 테이레시아스가 지나가다 나르키소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이 아이는 자기 얼굴을 보지 않아야 오래 살겠다”라는 요상한 말을 던지고 갔다. 테이레시아스는 목욕하는 아테나의 알몸을 훔쳐본 죄로 장님이 되었으며, 보상으로 아테나로부터 예언력을 선사받은 인물이다. (제우스와 헤라가 섹스할 때 남녀의 만족도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던 와중에 여성이 더 많은 쾌락을 느낀다는 제우스의 편을 든 탓으로 헤라의 화를 불러 눈이 멀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예언력은 물론 제우스의 포상이라는 설명이다.
불길한 예언을 염려한 나르키소스의 부모는 집안의 거울을 모두 치워버리는 한편, 물의 요정들에게 명하여 나르키소스가 접근하면 수면을 흔들어버리게 한다. 그래서 그는 청년이 될 때까지 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란다.
나르키소스의 얼굴은 갈수록 아름다움을 더해, 보는 이의 마음을 빼앗아 갔다. 그런데 에코를 비롯한 숱한 요정들이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때마다 쌀쌀맞게 뿌리치곤 한다. 여자의 마음에 한을 남기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낀다고 했던가 사랑을 응답받지 못한 요정들이 기도를 올린다. 그에게도 짝사랑의 아픔이 뭔지를 깨닫게 해달라고.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기도에 응답한다.
어느 더운 여름날 나르키소스는 홀로 사냥에 나섰다가 목이 말라 깊은 산중의 맑은 샘물을 찾아 물을 마시려고 몸을 숙인다. 그런데 수면 위에서 웬 아름다운 사람이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하고 넋을 잃는다. 아폴론을 닮은 금발의 고수머리, 맑고 커다란 눈동자, 갸름한 장밋빛 볼, 오뚝한 코, 타는 듯한 붉은 입술, 그리고 사슴처럼 가늘고 긴 목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던 나르키소스는 그것이 샘의 요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키스하려고 입술을 수면에 갖다 댄다. 그러자 요정은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어버린다. 당황한 나르키소스가 황급히 얼굴을 들자 어느새 요정은 다시 나타나 그의 가슴을 애타게 한다.
나르키소스는 샘가를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수면에 비친 요정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짝사랑하다 육신이 사라져 간 에코와 같이 상사병의 아픔으로 나날이 야위어 간다. 나르키소스는 마침내 샘가에서 흔적도 없이 말라 죽는다. 얼마 후 그 자리에 가련한 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그의 이름을 딴 꽃인 수선화(narcissus)이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1597-99, 캔버스에 유채』
나르시시즘
나르키소스는 저승으로 건너가는 스틱스 강을 지나면서도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뱃전에서 몸을 굽혔다고 한다.이처럼 자신에게 지독한 사랑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나르키소스의 운명에서 ‘자기도취증’을 뜻하는 심리학 개념인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비롯된다. 나르키소스에 관한 신화를 심리적 장애와 연관 지어 설명한 최초의 인물은 19세기 성의학자인 엘리스(H. Ellis)다. 그는 자기 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적 현상을 동성애를 설명하는 이론적 배경으로 삼았다. 즉 남성이나 여성이 이성을 사랑하지 않고 동성에게 애착을 느끼는 행위는 대상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시키는, 일종의 자기 사랑의 병리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나르시시즘’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내케(W. Näcke)다. 그는 이것으로 일종의 성적 도착증, 즉 스스로의 육체에 대해 성적인 충동을 느끼는 이상 심리를 설명하려 했다.
‘나르시시즘’을 육체에 대한 성적 도착 상태를 넘어 포괄적인 정신분석학 개념으로 확장시킨 인물은 프로이트다. 그는 성적 충동 에너지인 리비도(libido)로서 이 개념을 설명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은 리비도가 대상을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집중된 상태를 가리킨다. 『정신분석 입문』에서 프로이트는 자아를 향한 ‘자아 리비도’와 대상을 향한 ‘대상 리비도’의 관계를 아메바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메바는 위족(僞足)이라고 알려진 돌기를 내밀어 그 방향으로 자신의 신체 물질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그것은 필요에 따라 돌기를 철수시켜 자신을 원래의 둥근 덩어리로 만들 수 있다. 아메바가 이처럼 돌기를 내밀었다 철수시켰다 하듯이 정상적인 자아 리비도는 아무런 장애 없이 대상 리비도로 변형될 수 있으며, 대상 리비도 역시 자아 리비도로 되돌아 올 수 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일차적 나르시시즘’과 ‘이차적 나르시시즘’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갓난아이는 자기와 세상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 시기에 아이는 자아 리비도를 대상 리비도로 전환하는 활동 능력 이전에 머물러 있어서 자신이 세상과 ‘하나’임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이는 성장하면서 점차 자아 리비도를 대상 리비도로 전환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더불어 세상과 적절한 교감을 이루며 자기와 세상 간의 긴장 관계를 형성해 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어떤 심리적 요인이나 환경에 의해 리비도가 대상에서 자아로 전면 철수하면서 나타나는 퇴행 현상이 이차적 나르시시즘이다. 프로이트는 편집증이나 정신분열증 혹은 자신의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심기증 등의 환자들이 상실감에 젖게 되면 이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도하지 않은, 절제된 자기 사랑은 자신감, 자존심, 명예 의식, 희망, 이상을 낳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것을 건강한 나르시시즘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지나치면 병적인 나르시시즘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대상 앞에서 자기를 지나치게 드러내기도 하고, 지나치게 움츠러들기도 한다. 전자는 ‘파괴형 나르시시즘’, 후자는 ‘리비도 나르시시즘’으로 각각 분류된다. 전자는 자신의 능력과 특수성을 과대평가하는 한편 타인의 입장과 감정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성향으로 나타난다. 또한 자신의 장점에는 거만함을, 타인의 장점에는 강한 질투심을 드러내며 항상 과장되고 과시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반면 후자는 타인의 거절이나 비판에 민감할 뿐 아니라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감정이 지나치게 연약하여 쉽게 상처받기 때문에 자아 속으로만 점점 더 깊이 후퇴하는 성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양자의 밑바닥에는 심리적 공허와 절망이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아 리비도와 대상 리비도 간의 건강한 공존이 선사하는 참된 자기 사랑과 자기 확신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병적인 나르시시즘은 닫힌 마음에서 온다. 외부로 향하던 아메바의 돌기가 안으로 전면 철수하여 문을 꽁꽁 닫아버리듯이 세상과 타인으로 향하는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그는 사람은 병적인 나르시시즘에 갇혀버린다. 극단적인 자기 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의 비극은 에코를 비롯한 수많은 요정들의 마음을 철저히 외면한 닫힌 마음에서 출발한다.
역설적이지만, 예언을 피해 가기 위하여 주변의 거울을 모두 치워버린 조치가 오히려 나르키소스의 운명을 재촉했다고 볼 수 있다. 거울은 타인의 시각으로 자기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주관에 함몰되는 것을 방지하고 객관화를 실현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자신을 거울에 비쳐 볼 기회를 갖지 못한 나르키소스는 객관화의 길을 상실하고 주관 속에 갇혀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에 대한 철저한 무지로 귀결된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쏟아 붓는 수다쟁이 에코도 일종의 나르시스트다. 그녀는 자신이 항상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말대답’으로 제한시킨 헤라의 저주가 시사적이다. 그것은 주관성의 상실을 뜻한다. 에코는 남이 말을 꺼내기 전에는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그녀는 타인에게 철저히 종속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운명에서 보듯이 자아의 울타리에 갇힌 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몰두하는 것은 오히려 ‘자아상실’과 ‘자아에 대한 무지’를 낳을 따름이다. 폐쇄된 공간은 곰팡이가 끼고 녹이 슬게 마련이다. 세상과 타인으로 통하는 문을 꽁꽁 잠그는 닫힌 마음은 자아를 병들게 하고 질식시킬 뿐이다. 자아의 울타리를 허물고 세상과 타인을 향한 문을 활짝 열어 젖히자. 그리고 바깥의 신선하고 건강한 기운을 마음껏 들이 마시자. 열린 마음이 자아를 강건하게 해주리라. |
나르키소스와 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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