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가 사랑한 여인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때, 빠짐 없이 그가 사랑했던 7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는 열정적으로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은 피카소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23세 때 만난 첫 애인을 시작으로 피카소는 만나는 여인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고 두 번 결혼했다. 여러 여인들 가운데 특히 7명은 피카소의 작품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현대미술의 커다란 기둥인 피카소는 여인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던탓인지 그의 작품수는 무려 4만 5000점으로 회화 1885점, 조각 1228점, 도자기 2280점, 스케치 4659점과 3만 점에 달하는 판화 작품 등을 남겼다. 피카소가 사랑했던 여인과 작품속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
첫번째 연인 - 페르낭드 올리비에 (Fernande Olivier)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유부녀였다.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1904년(23세)에 만났다. 검붉은 머리에 키가 크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육감적인 여인 올리비에는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절박한 생활을 묘사하던 "청색 시대"에 올리비에를 만난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색 시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백미가 "아비뇽의 처녀들"로 이 작품으로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했다. 그러나,이 시기에 피카소는 올리비에에게 등을 돌렸고 덕분에 올리비에는 피카소와의 모든 것을 청산해야 했다.
올리비에는 회고록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 Picasso et ses amis>에서 피카소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적었다. "그를 모른다면 피카소는 그리 특별나게 유혹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의 수상쩍게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때문에 집중이 되긴 했다. 여러분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에게서 감지하는 이러한 열정, 내면의 불꽃은 그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석처럼 작용했다. 그리고 나를 알고 싶어 하자, 나 역시 그를 알고 싶어졌다." |
두번째 연인 - 에바 구엘 (Eva Gouel)
피부가 무척 하얗던 여인. 피카소는 구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녀를 선택한다. 유달리 몸이 약했던 에바. 1차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12월 14일 이 젊은 여인은 결핵으로 죽는다. |
세번째 연인 - 올가 코클로바 (Olga Kokhlova)
<퍼레이드> 공연 때 만난 러시아 무용수, 피카소가 서른 여섯 살 때 처음으로 결혼을 한 여인이다. 올가는 서민적이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 달리 깔끔하고 상류사회적인 기질을 가졌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가 소원해진다. |
네번째 연인 - 마리 테레즈 발터 (Marie Therese Walter)
피카소가 마흔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27년 당시 열일곱 살의 건강하고 관능미 넘쳤던 소녀 마리를 6개월동안 쫒아 다닌 끝에 작업실로 데려와 초현실주의때의 걸작 <거울앞에 선 처녀>의 모델로 세울 수 있었다. 페르낭드와 에바, 올가가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던 것과 달리 그녀는 금발이였다. 그녀가 스물두살 때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 딸 마리야를 낳는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가 죽었을 때 저승에서도 피카소를 보살펴야한다며 자살한 여인이 바로 마리테레즈였다. |
다섯번째 연인 - 도라 마르 (Dora Maar)
1936년 피카소는 친하게 지내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로부터 사진작가 도라 마르(본명 마르코비츠 앙리에뜨)를 소개 받는다. 피카소의 모국어인 에스파냐어로 몇시간 그와 예술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이었다. 936년(55세) 피카소가 '파시즘 광기와 싸우던 시절'에 만났다. 그녀는 카소의 ‘게르니카’ 시대를 함께 했으며, 이 작품의 제작 과정 전체를 진으로 기록했다. 우울한 2차대전의 시기를 함께 한 마르는 피카소 작품에서 주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도라 마르는 우울증 때문에 심리 치료를 받아야만 했는데, 피카소의 친구이자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의 정신 분석을 오랫동안 받게 되었다 |
여섯번째 연인 - 프랑스와즈 질로 (Françoise Gilot)
2차 세계대전 중에 만난 그녀는 아주 젊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류화가이다. 피카소가 예순세 살 때인 1945년부터 함께 살게 되는데 이 때, 그녀는 스무 살이었다. 완벽주의자이고 독점력이 강했던 프랑스와즈는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는 이대에 자신의 아이들을 소재로 해 매혹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들을 남겼다. 여기서 아이들은 때로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모습으로, 때로는 자기들끼리 놀이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훗날 프랑스와즈는 당시를 솔직하게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이렇게 올가,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와 관계가 계속되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피카소와 나의 삶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나는 그들이 피카소의 '푸른 수염 콤플렉스'의 표현이며, 그것이 또 자신이 수집한 이 모든 여자들을 개인 소유의 작은 박물관에 전시하고자 하는 피카소의 욕망에 불을 지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피카소는 그녀들의 머리를 완전히 베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삶이 계속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한 때 그와 함께 살았던 여자들은 나약하게 기쁨과 고통의 소리를 질러댔고, 부서진 인형들처럼 발작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에게 여전히 생명의 숨결이 이어진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될 수 있었다. 그녀들의 생명은 피카소의 손이 잡고 있는 끈에 매달려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희극적인, 또는 비극적인 허영을 보탰고 피카소는 그것을 이용했다." |
일곱번째 연인 - 자클린 로크 (Jacqueline Roque)
피카소의 말기 작품들은 외재적으로나 내재적으로 성애가 두드러진다.이 때 피카소가 도자기 예술과 '고전 작가의 재해석'에 심취한 시기였다. 피카소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해준 마지막 여자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가 72세 되던 해 만난 여인이다. 그녀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는 이혼녀로, 피카소와 8년간 동거한 뒤 결혼했다.
자클린은 요리를 잘하고 가사일도 잘 돌보았으며 피카소와 에스파냐어로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또한 피카소를 돌보며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는 매력적인 안주인 역할을 했다. 자클린은 피카소보다 13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그동안 사심 없이 피카소의 복잡한 재산 문제들을 처리했다. 1986년 10월 15일 피카소의 105번째 생일을 열흘 앞두고 그녀는 피카소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자 그가 만났던 수많은 여인들과 후손들은 한결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목을 매달았으며 자클린은 1986년 마드리드 전시회를 앞두고 권총 자살을 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 난 아들 파울로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고, 피카소의 손자 파블리토는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자클린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피카소와 연인들에 관한 내용은 2편의 영화로도 나왔다. 첫번째는 1956년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다큐멘트리 The Mystery of Picasso (피카소 출연)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베니스영화제 최우수다큐상을 받았으며, 두번째 영화는 1996년 제임스 아이버리 감독의 Surviving Picasso (안소니홉킨스 출연) 이다.
"피카소에게 여자들이란 회화에서 붓과 같은 것, 즉 없어서는 안 되며,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것이었다." 첫연인이었던 올리비에 비드마이어 피카소는 훗날 이렇게 회고 했다고 한다. 과연 피카소의 연인들은 피카소의 회화에서 붓과 같은 존재였을까....
< 자료출처 : 중앙일보기사(20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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