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누가 15:20).”
자주색 망토를 넉넉하게 걸친 노인이
남루한 차림으로 무릎꿇은 사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핏줄의 온기, 붉은 망토의 온화한 톤,
사내의 겉옷에 반사되는 황금빛, 사내의 어깨를 감싸쥔 노인의 두 손… .
렘브란트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蕩子) 이야기를 신앙의 물감으로 고스란히 화폭에 옮겼습니다.
집을 나가 재산을 탕진한 뒤 모든 것을 뉘우치며 거지 꼴로 돌아온 아들을
말 없이 어루만져주며 눈을 지긋이 감은 아버지.
그림이 쏟아내는 은혜와 묵상의 힘에 압도돼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거장,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1606~1669)의 '돌아온 탕자'(1669년)입니다.
그가 예순셋에 세상을 뜨던 해 마지막 작품이지요.
하지만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유작이라는 의미를 넘어 더 깊은 뜻과 내력과 깨달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1659년부터 이 작품을 시작하고도 결국엔 미완성인 채로 떠났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은 반대편 창에서 들어와 반사되는 빛을 피할 수가 없어서
아래에 제대로 된 자료 사진을 빌려와 올립니다.
'돌아온 탕자'는 겉으론 하느님 세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실제로는 렘브란트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 어린 고백입니다.
렘브란트는 유복한 제분업자 아들로 태어나 잘 배웠고 20대 중후반에 명성 자자한 화가가 됐습니다.
스물여섯 살 때 여섯 살 아래 집안 좋고 부유하고 아름다운 사스키아와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생전에 암스테르담은 물론 유럽 최고 작가로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부와 성공 뒤로 절망과 고독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렘브란트는 두 아들과 딸을 생후 얼마 안 돼 잃었고요.
세째 아들 티투스는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결국엔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아내 사스키아는 4만길더의 유산을 렘브란트와 티투스에게 반반씩 남기고 서른 살에 병으로 떠났습니다.
렘브란트는 몇 차례 파산하다가 1658년 마지막 파산을 했습니다.
돈 관리에 실패하고 씀씀이가 컸기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아내의 묏자리까지 팔아야 했지요.
그렇게 엄청난 상실과 쓰라린 아픔을 겪은 뒤 만년에 그린 것이 '돌아온 탕자'입니다.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가 위대한 것은 한 인간으로서 패배를 아주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아버지 같은 신에게 고해하고 안기는 것으로
인생의 실패를 인정하고 선언해 비로소 패배를 끝냈습니다.
이 작품을 그리다 숨지면서 그는 편안했을 겁니다.
이 작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들의 어깨 위에 얹힌 아버지의 두 손입니다.
왼손은 투박하고 힘줄이 울퉁불퉁 솟은 노인의 것인데
오른손은 가늘고 여린 여인의 것입니다.
렘브란트는 화가의 상식적 사실성을 무시하고
아들을 어루만지는 손에 무뚝뚝한 듯 은근한 아버지의 사랑과
한없이 따스한 어머니의 자애를 한꺼번에 담았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엔 모성과 부성이 함께한다는 종교적 의미도 겸하고요.
'돌아온 탕자'는 많은 사람들이 에르미타주의 소장 작품 가운데 최고로 꼽는 걸작입니다.
렘브란트의 위대한 양대 작품으로도 '야경'(1642년)과 함께 손꼽습니다.
하지만 그림이 관람자에게 주는 감동의 힘을 생각하면 '아경'보다 몇 수 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때 네덜란드는 러시아 측에 ‘돌아온 탕자’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러시아가 이 그림을 사 갔다는 사실이 증명됐고
대신 러시아가 네덜란드에서 1년 동안 순회 전시를 하도록 무료 임대해줬다고 합니다.
또 하나 눈여겨본 것이 아들의 발바닥과 신발입니다.
아들이 얼마나 곤궁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았는지 보여줍니다.
맨발바닥엔 렘브란트가 자기 지문을 그려넣었다고 하는데요,
제 눈엔 보이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북구 여행 사흘째 날 6월 28일
오전에 바삐 둘러본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세 번째 이야기는
렘브란트 감상기입니다.
앞 포스트에서 봤던 소에르미타주의 이층 체크 표시한 파빌리온홀을 나와
동쪽 복도를 통해 대에르미타주로 건너간 뒤
다시 남쪽으로 꺾어 들면 신에르미타주 254번 방에 렘브란트 전시실이 있습니다.
복도 층계 곁에 높이가 2.7m나 되는 녹색 화병이 놓여 있습니다.
우랄산맥 동쪽 기슭 예카테린부르크의 라리 코에스터라는 석공이
1843년에 만든 작품입니다.
전체가 한 덩어리는 아닐 테지만
금속 손잡이를 빼고는 모두 한 가지 재질입니다.
준보석 공작(孔雀)석 말라키트입니다.
재질이 연하고 광을 내기도 쉬워서 반지 구슬 장식함부터 큰 화병까지
다양하게 가공해낸다고 합니다.
돌이 지닌 무늬결이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렘브란트 방에 들어가 천장도 찍고,
벽에 붙은 천사 부조상도 찍었는데요,
정작 전시실 전경 사진을 빠뜨렸습니다.^^;;
그래서 에르미타주 홈페이지에서 한 장 빌려 왔습니다.
오른쪽에 '돌아온 탕자'가 걸려 있습니다.
에르미타주는 렘브란트 작품 서른아홉 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고국 네덜란드를 제외하면 규모와 수준에서 세계 최고 컬렉션입니다.
1815년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 아내 조세핀으로부터 한꺼번에 사들인 덕분이지요.
렘브란트는 성화가, 초상화가입니다.
르네상스도, 근대 미술도 아닌 바로크 화가이지요.
명암 살리는 기법을 탁월하게 구사해 '빛의 화가'라고 부릅니다.
위 전시실 사진 맨 왼쪽 벽에 붙은 작품은
'어떤 남자의 초상'이라고만 돼 있을 뿐 기본 정보조차 찾을 수가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 예술이 구약성서를 주제로 교리를 위한 것과 달리
렘브란트는 주로 신약에서 주제를 얻어 인간을 향한 신의 의도를 표현하려 했고
기계적이고 전형적인 수법을 피해 빛의 음영을 통한 새로운 구도를 시도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Descent from the cross/ 1633년)에서도
그리스도의 시신을 밝고 고요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물 다루듯 내려 안는 남자는 복음서에 나오는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반대했던 의원이었고 자기를 위해 준비했던 무덤을 예수에게 내준 부자였습니다.
요셉 아래서 예수를 떠받칠 준비를 하는 흰 수염 노인은 니고데모입니다.
그 역시 예수를 만나 삶이 바뀐 남자였지요.
사다리 오른쪽에서 예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남자는 ‘예수가 사랑한 제자’ 요한이고요.
오른쪽엔 비탄에 잠긴 성모 마리아가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있습니다.
왼쪽 아래엔 여인들이 그리스도 누울 자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평온하고 그가 누울 자리는 아늑해 보입니다.
렘브란트는 엄청난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불행의 강을 건너고
침착하게 고통의 산을 넘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인 그리스도의 최후를 잘 담아냈습니다.
반사광을 최소화하려다보니 그림 사진이 반듯하지 않고
그래도 오른쪽엔 반사된 빛이 푸르스름하게 남아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부유한 첫 아내 사스키아는 서른 살에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큰 유산을 남겼습니다.
다만 유언장에 남편에게 아들 티투스의 영혼을 지켜주기를 바라며
티투스를 고아원에 맡기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렘브란트가 재혼하면 유산이 무효가 된다는 조건도 붙였지요.
렘브란트는 티투스의 유모로 들인 게르티와 동거했지만
소송을 걸어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모는 치사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결별했습니다.
그 다음엔 헌신적인 하녀 헨드리키에와 살았지만 혼인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스키아가 유언장에 남긴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렘브란트 인생의 세 여자 가운데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물론 첫 아내 사스키아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이젤 앞에서 여러 작품의 모델이 돼줬습니다.
화관을 쓰고 꽃 지팡이를 든 꽃의 여신, '플로라(플로라의 모습을 한 사스키아의 초상/ 1634년)'은
사스키아가 모델로 선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르네상스 이래 여러 화가가 즐겨 그린 누드 또는 세미누드의 관능적 플로라와 달리
거추장스러울만큼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어 소녀상에 가깝습니다.
전문 모델이 아니라 아내이기 때문이겠지요.
렘브란트는 플로라를 소재로 한 작품 석 점을 더 남겼습니다.
1년 뒤 다시 사스키아를 모델로 세워 그린
'아카디아 의상을 입은 사스키아'(Saskia in Arcadian Costume/1635년/ 런던 내셔널갤러리)입니다.
역시 호화로운 무늬와 자수가 들어간 옷 차림입니다.
세 번째 그림부터는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6년 뒤 '플로라로 나선 사스키아'(Saskia-as-Flora/ 1641년/ 드레스덴미술관)에선
차림이 훨씬 단순 소박할 뿐 아니라
꽃도 딱 한 송이만 들고 있습니다.
그림 속 사스키아는 이듬해 세상을 뜨는 운명을 예감한 듯 표정이 어둡습니다.
마지막 '플로라'(1654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선 모델도 바뀝니다.
하녀로 들어와 사실상 세 번째 아내로 살다 역시 먼저 간 헨드리키에입니다.
얌전했던 그녀는 렘브란트의 정식 아내가 되지 못한 서러움을 내색하지 않고
그를 내조하며 모델이 돼주는 것에 만족했다고 합니다.
렘브란트의 인생 전반기가 밝고 자신에 넘쳤던 것처럼
'플로라' 넉 점 가운데 1930년대 두 점은 화려하고
사스키아의 죽음 이후 급격히 쇠락한 인생 후반기의 두 '플로라'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어
그의 삶을 압축해 보여주는 연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백 살에 아들 이삭을 얻어 애지중지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번민을 거듭하던 아브라함은 결국 아들을 향해 칼을 빼듭니다.
그때 "네 후손이 한껏 번성하게 해주겠다"는 신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아들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신의 축복이 내리고, 집착이 무너질 때 하느님 나라가 드러납니다.
'이삭의 희생'(Sacrifice of Issac/ 1635년)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천사가 말리는 모습을 잡아냈습니다.
이삭은 손을 뒤로 묶인 채 장작 더미 위 제단에 누워 있고
빛은 모두 이삭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옛 화가들의 관심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었던 것과 달리
렘브란트의 관심은 이삭의 인간적 두려움으로 옮겨 갔음을 알 수 있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아크리시오스왕은 외손자에게 죽게 된다는 신탁(神託)을 듣고
사랑하는 딸 다나에를 청동 탑 속에 가둡니다.
하지만 제우스는 황금의 비로 변해 공주 다나에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영웅 페르시우스가 태어납니다.
다나에도 오랜 시대,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인데요,
렘브란트는 '다나에'(1636~1647) 역시 관능적이지 않고 절제되게 묘사했습니다.
이미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들인 다나에의 몸은 신비롭게 황금빛으로 빛납니다.
사슬에 묶여 울부짖는 큐피드는 다나에의 처지에 공감하며 탄식합니다.
렘브란트는 다나에의 인간적 내면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 작품은 1985년 정신이상자가 황산을 뿌리고 칼로 두 조각 냈던 것을
9년 작업 끝에 되살려내 회화 복원의 세계적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성가족' 또는 '축복받은 가족'(Holy family/ 1645년)은
가난한 목수의 집에 잠든 아기와
아기를 보살피는 어머니를 따스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아기가 누운 요람을 비롯한 집 안 생활용품은 소박하지만 밝게 빛나는 듯 표현됐고
천사는 가정의 평화로움을 상징합니다.
렘브란트는 파산의 모진 고통과 좌절을 겪던 1650년대 중반
늙은 남자와 여자를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연륜과 경험이 지닌 긍정적이고 영속적인 이미지를 찾아내려 했습니다.
아마도 늙어 가면서 초라하고 비참해지는 자신에 대한 격려로 삼으려 했던 것이 아닐지요.
일련의 노인 초상 가운데 대표작이 '붉은 옷을 입은 노인'(Portrait of an old man in red/ 1654년)입니다.
이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빵처럼 생긴 작은 모자 키파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입니다.
조용하고 단순한 포즈는 노인의 미덕을 암시하고
일상의 풍파를 견뎌내 영적 고요함을 얻었음을 표현했습니다.
같은 사람을 그린 초상으로 런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한
'팔걸의 의자에 앉은 노인'(An Old Man Sitting in an Armchair/ 1654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같은 해에 그린 '늙은 유대인의 초상'(Portrait of an old Jew) 역시
노인들이 지닌 인간 영혼의 힘을 표현하고 있고요,
'늙은 여인의 초상'(Portraiit of an old woman/ 1654년)에도
고요한 노년의 평정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구약 에스테르기에 유대인을 몰살하려던 페르시아 재상 하만이 나옵니다.
그는 왕비 에스테르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모른 채 음모를 꾸미다
에스테르의 기도를 아하수에로 왕이 알게 되면서 추락합니다.
'하만 자신의 운명을 깨닫다'(Haman recognizes his fate/1665년)는
하만이 자신의 파멸을 깨닫는 순간을 잡아내고 있습니다.
강렬한 붉은빛 옷을 입은 하만의 얼굴엔
죽음을 눈앞에 둔 고통과 무거운 절망의 표정이 가득합니다.
렘브란트가 이 구약 이야기를 그려낸 몇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레미아스 데커의 초상화'(Portrait of the poet Jeremias de Decker/ 1666년)도
낯익은 작품입니다.
데커(1610~1666)는 네덜란드 시인이자 렘브란트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렘브란트의 작품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시를 썼고
'위대한 렘브란트에 경배'라는 시도 남겨
렘브란트의 붓질을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에 비유했습니다.
렘브란트는 평생에 걸쳐 100점 넘는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초상화가로 명성과 부를 누리던 젊은 날부터 가난과 소외에 시달리던 마지막 해까지
삶의 궤적과 감정의 부침(浮沈)이 고스란히 자화상들에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 한 점, 파산 선고를 받아 집과 소장품이 경매에 붙여지던 1658년 '자화상'(뉴욕 프릭컬렉션)을 골라 올립니다.
그는 이제 곧 경매로 팔릴 화려한 옷을 차려 입고 포즈를 잡았습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패 있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서려 있습니다.
왼손에 지팡이를 쥔 채 차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고독과 파멸 속에서도 여전히 자기 확신과 자부심을 드러냅니다.
경제적으로는 파산 상태였지만 자신의 힘은 파괴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일까요.
물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도 화가로서 렘브란트는 결코 죽지 않았다고요.
[출처] 에르미타주미술관 최고 걸작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앞에 서다|작성자 비니버미
'책 · 펌글 · 자료 > 예술.여행.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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