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송성영, 김남희 外
2016. 8. 30. 13:04ㆍ내 그림/(유화 소재)
대충 됐겠다 싶어서 액자 만들어 넣으려고 가져왔는데, 아니네 아니야,,
좀 더 손을 봐야겠구만. 영~' 의도완 다르네.
이건 일부러 천천히 그리는 중인데, 속도를 내서 마무리져버려야겠구만.
너무 오래 걸어놨더니 식상하네.
네팔 안나푸르나에 산다는 것
란드룩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에게 안나푸르나는 생활이다 눈빛 초롱초롱한 네팔 아이가 받아내는 물줄기가 성수처럼 느껴져 '생수를 사서 먹어라'는 여행 안내서를 어기고 벌컥벌컥 그 물을 마셨다.ⓒ 송성영란드룩에서 둘째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 평소처럼 아침 겸 점심을 간단하게 마치고 게스트하우스를 빠져 나왔다. 한 아이가 란드룩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 수돗가에서 작은 청동 항아리를 씻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자 빙그레 웃는다.
아이는 청결하게 씻은 청동 항아리에 물을 담는다. 마치 성수라도 담아내듯 정성스럽다. 작은 항아리로 쏟아져 내리는 맑은 물이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빛을 닮았다.
"이 물 먹어도 되니?"
내가 물 마시는 시늉을 하며 아이에게 물었더니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항아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힐긋힐긋 쳐다본다. 내가 함박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부끄러운지 히죽 웃는다. 아이가 저만치 골목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대 본다. 차갑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줄기에 입을 댄다. '자칫하면 배탈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을 접어 두고 벌컥벌컥 마신다. 란드룩에 오기 전 톨카에서 마신 물 때문에 배가 살살 아파왔지만 반나절 만에 잠잠해졌다. 인도나 네팔의 도심에서 석회질 성분이 많은 물을 잘못 마셨다가는 큰일을 치룰 수도 있지만 여기는 청정한 히말라야 기슭이 아니던가.
반드시 생수를 사서 마시라는 여행 경고장을 어기고 내 몸을 믿고 싶어졌다. 북인도 코사니의 시골 의사가 수술대에 올라야 될지도 모른다 했던 다친 무릎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처음에는 도무지 걷지 못할 것만 같았지만 1개월도 채 안돼서 어제 톨카에서부터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1시간 거리를 걷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인도를 거쳐 이곳 네팔에 오기까지 3개월 동안 낯선 사람들이 친절하게 건네는 음식을 입에 대지 말라는 경고장을 수없이 어겨왔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두려움은 내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형체 없는 귀신과 다름없다. 두려움은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다. 여행길도 마찬가지다. 낯선 것에 대한 경이로움을 만끽하기 보다는 두려움에 휩쓸려 여행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홀로 떠나는 여행길은 익숙한 것들로부터 결별하고 낯선 것들과의 끊임없는 만남이다.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면 병든 몸과 마음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이 내 오랜 믿음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 성수처럼 다가왔던 물을 마시기 전에 망설였다. 두려움으로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낯선 나라를 홀로 떠돌아다니는 것은 내 오랜 믿음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두려움에 휩쓸려 여행을 망치지 않기를... 물을 긷던 한 네팔 여인이 넋을 놓고 안나푸르나를 바라보고 있다.ⓒ 송성영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 북인도 시골 마을 코사니에서처럼 이곳 란드룩에서도 밭일은 여자들 몫인가 보다.ⓒ 송성영이른 아침부터 수돗가에서 아낙네가 양동이에 물을 긷다 말고 안나푸르나를 넋놓고 바라보고 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안나푸르나를 평생 동안 바라보고 살아왔을 아낙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 같은 배낭객들은 평생 한두 번 볼까말까 하는 저 안나푸르나에서 벗어나 화려한 도시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어젯밤 남편과 대판 싸우고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가슴이 아파온다.
아니다. 나는 불경한 생각들을 접어둔다. 저 아낙네는 신처럼 변함없는 저 안나푸르나를 향해 마음속으로 행복한 뭔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온갖 상상을 해가며 좀 더 마을 아래로 내려섰다.
밭일을 마치고 빈 대바구니를 가볍게 이고 걸어가는 아낙네를 뒤따라가 본다. 북인도 시골 마을 코사니에서처럼 이곳 란드룩에서도 밭일은 여자들 몫인가 보다. 아낙네가 들어선 낡은 집은 란드룩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지붕들을 전시해 놓은 듯 초가지붕과 함께 납작한 돌과 양철을 얹힌 지붕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아낙네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본다. 나는 아낙네에게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며 몸짓으로 말을 건네 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돌아서 나왔다. 안나푸르나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 저 계곡 반대편 마을을 향해 걸었다. ⓒ 송성영 계곡 반대편에 자리한 주변에 다랭이밭이 널려 있는 작고 아담한 마을에서 한 세월을 보내고 싶었다.ⓒ 송성영란드룩 마을 저 아래로 안나푸르나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계곡이 있다. 저 안나푸르나를 향해 모든 잡생각을 버리고 걷고 또 걷고 싶었지만 무릎 통증 때문에 트레킹은 접어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 계곡 건너 마을까지라도 가볼 작정이다. 거기에 안나푸르나를 조망할 수 있는 적당한 민가를 찾아 사나흘 보낼 생각으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계곡으로 내려서는 돌길이 급경사다. 30분도 채 내려서지 못했는데 고장난 무릎에서 불편한 신호를 보내왔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발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무릎이 욱신거린다. 무릎 관절이 기름칠하지 않은 기계처럼 뻑뻑하다. 어제는 적당한 경사의 산길과 평지를 걸었기에 한 시간을 족히 걸었지만 이 길은 다르다. 한 걸음 한 걸음 급경사를 내려설 때마다 고통이 밀려온다.
마을을 건너는 다리가 눈앞에 보인다. 안나푸르나에서 내려오는 계곡물 사이에 놓여진 저 다리를 건너면 올망졸망 들어서 있는 작은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멀리서 본 것과 달리 마을은 평화로움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마을 주변 산비탈에는 온통 다랑이밭이 널려 있다. 열 가구가 채 안 돼 보이는 저 작고 아담한 마을에 머물면서 어떤 작물을 심고 또 어떤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지 알고 싶다.
하지만 고지를 코앞에 두고 무릎 통증과 함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갑자기 무릎이 뚝 꺾이는 느낌이다. 숙소로 향해 다시 비탈길을 올라갈 일이 까마득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 다리를 건너 마을로 내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아 나가기 위해 돌계단에 앉아 명상을 하듯 눈을 감았다. 애초에 사나흘을 머물고 싶다는 생각의 날개는 점점 더 창공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여권이고 비자고 다 팽개쳐 버리고 저 아담한 마을에서 농사를 지어가며 한 세월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슬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처음 히말라야 설산을 만나 그 아래 까마득한 암자를 바라보면서 고민 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내 고민을 말끔히 씻어 주는 비가 내렸다. 나를 보호해 주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비를 통해 내게 메신저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현실적인 상상을 접고 얼른 돌아가라. 어제는 돌아갈 곳이 없어 막막했는데 오늘은 분명 돌아갈 곳이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고지를 코앞에 두고 몰려온 무릎 통증 토마토를 저울에 달아 주는 란드룩의 네팔 사내. ⓒ 송성영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에 절어 숨을 헉헉 몰아쉬며 다시 비탈진 돌길을 올라설 무렵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저만치 산비탈에 돌집을 짓고 살아가는 한 사내가 대바구니에 토마토와 자두를 챙기고 있다.
하루에 한 끼 정도를 과일로 때우고 있던 나는 사내에게 다가가 손짓 발짓으로 토마토 1킬로를 달라고 했다. 내가 돈을 내밀자 사내 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아낙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사내는 대바구니에 실려 있는 저울을 꺼내 꼼꼼하게 달아 준다.
"아이들은 없나요?"
그는 영어를 할 줄 모른다. 손짓으로 요만한 아이가 없냐고 했더니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이 그제서 씨익 웃는 표정이 된다. 사내는 아내의 불룩한 배를 손짓한다. 아내가 임신 중이라는 것이다. 사내가 대바니구를 챙겨 어깨에 걸쳐 메고 집을 나선다. 아내는 집 나서는 남편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배웅을 한다.
사내는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돌며 과일 행상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트레킹족들이 뜸한 비수기라서 장사가 시원치 않을 것이다. 조만간 세상에 태어날 아기를 위해 사내는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과일 장사 나서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송성영충남 공주 산골에 살 때 시를 쓰는 한 후배가 '문학소녀'를 꿈꾸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을 몰고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사진기를 앞장세워 우리 집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이며 대나무 숲을 둘러보면서 참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있다며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다 쓰러져가는 사랑채며 비가 오면 질퍽거리는 흙 마당,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고 여름이면 감질나게 흐르는 산기슭의 식수, 거기다가 장마철이 돌아오면 똥물이 튀기는 재례식 화장실이며 온갖 생활의 불편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떠난 뒤 아이들 엄마의 눈치를 살펴가며 '그렇게 아름답다면 여기서 한번 살아봐라 그 소리가 나오는지...' 참 진상들이라고 비난했는데 지금 내가 그 꼴이었다.
멀고 먼 길 따라 안나푸르나를 찾아와 감탄을 자아내며 사진을 찍어대고 있는 내게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위해 삶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과일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행상을 나서는 저 사내는 뭐라 말할까.
누군가를 비난하는 손가락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저들 앞에서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성수니 뭐니 해가며 그 물을 받아 농사를 지어가며 한 세월을 보내고 싶다는 내 생각은 사치였다. 삶은 행복한 순간보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더 많다.
때로는 행복한 순간들이 찾아오겠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그렇듯이 히말라야 설산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저들 또한 대부분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은, 저 안나푸르나는 나의 사치스런 생각을 질타하며 비를 통해 내 자신을 직시하라 일렀던 것이다. 어리석은 내 마음을 되돌아 보자 무거웠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문득 고행길은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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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 초롱초롱한 네팔 아이가 받아내는 물줄기가 성수처럼 느껴져 '생수를 사서 먹어라'는 여행 안내서를 어기고 벌컥벌컥 그 물을 마셨다.ⓒ 송성영
란드룩에서 둘째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 평소처럼 아침 겸 점심을 간단하게 마치고 게스트하우스를 빠져 나왔다. 한 아이가 란드룩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 수돗가에서 작은 청동 항아리를 씻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자 빙그레 웃는다.
아이는 청결하게 씻은 청동 항아리에 물을 담는다. 마치 성수라도 담아내듯 정성스럽다. 작은 항아리로 쏟아져 내리는 맑은 물이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빛을 닮았다.
"이 물 먹어도 되니?"
내가 물 마시는 시늉을 하며 아이에게 물었더니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항아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힐긋힐긋 쳐다본다. 내가 함박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부끄러운지 히죽 웃는다. 아이가 저만치 골목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대 본다. 차갑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줄기에 입을 댄다. '자칫하면 배탈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을 접어 두고 벌컥벌컥 마신다. 란드룩에 오기 전 톨카에서 마신 물 때문에 배가 살살 아파왔지만 반나절 만에 잠잠해졌다. 인도나 네팔의 도심에서 석회질 성분이 많은 물을 잘못 마셨다가는 큰일을 치룰 수도 있지만 여기는 청정한 히말라야 기슭이 아니던가.
반드시 생수를 사서 마시라는 여행 경고장을 어기고 내 몸을 믿고 싶어졌다. 북인도 코사니의 시골 의사가 수술대에 올라야 될지도 모른다 했던 다친 무릎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처음에는 도무지 걷지 못할 것만 같았지만 1개월도 채 안돼서 어제 톨카에서부터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1시간 거리를 걷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인도를 거쳐 이곳 네팔에 오기까지 3개월 동안 낯선 사람들이 친절하게 건네는 음식을 입에 대지 말라는 경고장을 수없이 어겨왔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두려움은 내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형체 없는 귀신과 다름없다. 두려움은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다. 여행길도 마찬가지다. 낯선 것에 대한 경이로움을 만끽하기 보다는 두려움에 휩쓸려 여행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홀로 떠나는 여행길은 익숙한 것들로부터 결별하고 낯선 것들과의 끊임없는 만남이다.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면 병든 몸과 마음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이 내 오랜 믿음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 성수처럼 다가왔던 물을 마시기 전에 망설였다. 두려움으로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낯선 나라를 홀로 떠돌아다니는 것은 내 오랜 믿음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두려움에 휩쓸려 여행을 망치지 않기를...
아이는 청결하게 씻은 청동 항아리에 물을 담는다. 마치 성수라도 담아내듯 정성스럽다. 작은 항아리로 쏟아져 내리는 맑은 물이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빛을 닮았다.
"이 물 먹어도 되니?"
내가 물 마시는 시늉을 하며 아이에게 물었더니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항아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힐긋힐긋 쳐다본다. 내가 함박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부끄러운지 히죽 웃는다. 아이가 저만치 골목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대 본다. 차갑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줄기에 입을 댄다. '자칫하면 배탈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을 접어 두고 벌컥벌컥 마신다. 란드룩에 오기 전 톨카에서 마신 물 때문에 배가 살살 아파왔지만 반나절 만에 잠잠해졌다. 인도나 네팔의 도심에서 석회질 성분이 많은 물을 잘못 마셨다가는 큰일을 치룰 수도 있지만 여기는 청정한 히말라야 기슭이 아니던가.
반드시 생수를 사서 마시라는 여행 경고장을 어기고 내 몸을 믿고 싶어졌다. 북인도 코사니의 시골 의사가 수술대에 올라야 될지도 모른다 했던 다친 무릎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처음에는 도무지 걷지 못할 것만 같았지만 1개월도 채 안돼서 어제 톨카에서부터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1시간 거리를 걷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인도를 거쳐 이곳 네팔에 오기까지 3개월 동안 낯선 사람들이 친절하게 건네는 음식을 입에 대지 말라는 경고장을 수없이 어겨왔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두려움은 내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형체 없는 귀신과 다름없다. 두려움은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다. 여행길도 마찬가지다. 낯선 것에 대한 경이로움을 만끽하기 보다는 두려움에 휩쓸려 여행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홀로 떠나는 여행길은 익숙한 것들로부터 결별하고 낯선 것들과의 끊임없는 만남이다.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면 병든 몸과 마음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이 내 오랜 믿음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 성수처럼 다가왔던 물을 마시기 전에 망설였다. 두려움으로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낯선 나라를 홀로 떠돌아다니는 것은 내 오랜 믿음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두려움에 휩쓸려 여행을 망치지 않기를...
물을 긷던 한 네팔 여인이 넋을 놓고 안나푸르나를 바라보고 있다.ⓒ 송성영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 북인도 시골 마을 코사니에서처럼 이곳 란드룩에서도 밭일은 여자들 몫인가 보다.ⓒ 송성영
이른 아침부터 수돗가에서 아낙네가 양동이에 물을 긷다 말고 안나푸르나를 넋놓고 바라보고 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안나푸르나를 평생 동안 바라보고 살아왔을 아낙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 같은 배낭객들은 평생 한두 번 볼까말까 하는 저 안나푸르나에서 벗어나 화려한 도시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어젯밤 남편과 대판 싸우고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가슴이 아파온다.
아니다. 나는 불경한 생각들을 접어둔다. 저 아낙네는 신처럼 변함없는 저 안나푸르나를 향해 마음속으로 행복한 뭔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온갖 상상을 해가며 좀 더 마을 아래로 내려섰다.
밭일을 마치고 빈 대바구니를 가볍게 이고 걸어가는 아낙네를 뒤따라가 본다. 북인도 시골 마을 코사니에서처럼 이곳 란드룩에서도 밭일은 여자들 몫인가 보다. 아낙네가 들어선 낡은 집은 란드룩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지붕들을 전시해 놓은 듯 초가지붕과 함께 납작한 돌과 양철을 얹힌 지붕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아낙네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본다. 나는 아낙네에게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며 몸짓으로 말을 건네 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돌아서 나왔다.
나 같은 배낭객들은 평생 한두 번 볼까말까 하는 저 안나푸르나에서 벗어나 화려한 도시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어젯밤 남편과 대판 싸우고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가슴이 아파온다.
아니다. 나는 불경한 생각들을 접어둔다. 저 아낙네는 신처럼 변함없는 저 안나푸르나를 향해 마음속으로 행복한 뭔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온갖 상상을 해가며 좀 더 마을 아래로 내려섰다.
밭일을 마치고 빈 대바구니를 가볍게 이고 걸어가는 아낙네를 뒤따라가 본다. 북인도 시골 마을 코사니에서처럼 이곳 란드룩에서도 밭일은 여자들 몫인가 보다. 아낙네가 들어선 낡은 집은 란드룩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지붕들을 전시해 놓은 듯 초가지붕과 함께 납작한 돌과 양철을 얹힌 지붕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아낙네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본다. 나는 아낙네에게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며 몸짓으로 말을 건네 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돌아서 나왔다.
안나푸르나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 저 계곡 반대편 마을을 향해 걸었다. ⓒ 송성영
계곡 반대편에 자리한 주변에 다랭이밭이 널려 있는 작고 아담한 마을에서 한 세월을 보내고 싶었다.ⓒ 송성영
란드룩 마을 저 아래로 안나푸르나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계곡이 있다. 저 안나푸르나를 향해 모든 잡생각을 버리고 걷고 또 걷고 싶었지만 무릎 통증 때문에 트레킹은 접어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 계곡 건너 마을까지라도 가볼 작정이다. 거기에 안나푸르나를 조망할 수 있는 적당한 민가를 찾아 사나흘 보낼 생각으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계곡으로 내려서는 돌길이 급경사다. 30분도 채 내려서지 못했는데 고장난 무릎에서 불편한 신호를 보내왔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발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무릎이 욱신거린다. 무릎 관절이 기름칠하지 않은 기계처럼 뻑뻑하다. 어제는 적당한 경사의 산길과 평지를 걸었기에 한 시간을 족히 걸었지만 이 길은 다르다. 한 걸음 한 걸음 급경사를 내려설 때마다 고통이 밀려온다.
마을을 건너는 다리가 눈앞에 보인다. 안나푸르나에서 내려오는 계곡물 사이에 놓여진 저 다리를 건너면 올망졸망 들어서 있는 작은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멀리서 본 것과 달리 마을은 평화로움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마을 주변 산비탈에는 온통 다랑이밭이 널려 있다. 열 가구가 채 안 돼 보이는 저 작고 아담한 마을에 머물면서 어떤 작물을 심고 또 어떤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지 알고 싶다.
하지만 고지를 코앞에 두고 무릎 통증과 함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갑자기 무릎이 뚝 꺾이는 느낌이다. 숙소로 향해 다시 비탈길을 올라갈 일이 까마득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 다리를 건너 마을로 내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아 나가기 위해 돌계단에 앉아 명상을 하듯 눈을 감았다. 애초에 사나흘을 머물고 싶다는 생각의 날개는 점점 더 창공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여권이고 비자고 다 팽개쳐 버리고 저 아담한 마을에서 농사를 지어가며 한 세월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슬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처음 히말라야 설산을 만나 그 아래 까마득한 암자를 바라보면서 고민 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내 고민을 말끔히 씻어 주는 비가 내렸다. 나를 보호해 주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비를 통해 내게 메신저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현실적인 상상을 접고 얼른 돌아가라. 어제는 돌아갈 곳이 없어 막막했는데 오늘은 분명 돌아갈 곳이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고지를 코앞에 두고 몰려온 무릎 통증
계곡으로 내려서는 돌길이 급경사다. 30분도 채 내려서지 못했는데 고장난 무릎에서 불편한 신호를 보내왔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발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무릎이 욱신거린다. 무릎 관절이 기름칠하지 않은 기계처럼 뻑뻑하다. 어제는 적당한 경사의 산길과 평지를 걸었기에 한 시간을 족히 걸었지만 이 길은 다르다. 한 걸음 한 걸음 급경사를 내려설 때마다 고통이 밀려온다.
마을을 건너는 다리가 눈앞에 보인다. 안나푸르나에서 내려오는 계곡물 사이에 놓여진 저 다리를 건너면 올망졸망 들어서 있는 작은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멀리서 본 것과 달리 마을은 평화로움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마을 주변 산비탈에는 온통 다랑이밭이 널려 있다. 열 가구가 채 안 돼 보이는 저 작고 아담한 마을에 머물면서 어떤 작물을 심고 또 어떤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지 알고 싶다.
하지만 고지를 코앞에 두고 무릎 통증과 함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갑자기 무릎이 뚝 꺾이는 느낌이다. 숙소로 향해 다시 비탈길을 올라갈 일이 까마득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 다리를 건너 마을로 내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아 나가기 위해 돌계단에 앉아 명상을 하듯 눈을 감았다. 애초에 사나흘을 머물고 싶다는 생각의 날개는 점점 더 창공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여권이고 비자고 다 팽개쳐 버리고 저 아담한 마을에서 농사를 지어가며 한 세월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슬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처음 히말라야 설산을 만나 그 아래 까마득한 암자를 바라보면서 고민 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내 고민을 말끔히 씻어 주는 비가 내렸다. 나를 보호해 주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비를 통해 내게 메신저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현실적인 상상을 접고 얼른 돌아가라. 어제는 돌아갈 곳이 없어 막막했는데 오늘은 분명 돌아갈 곳이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고지를 코앞에 두고 몰려온 무릎 통증
토마토를 저울에 달아 주는 란드룩의 네팔 사내. ⓒ 송성영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에 절어 숨을 헉헉 몰아쉬며 다시 비탈진 돌길을 올라설 무렵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저만치 산비탈에 돌집을 짓고 살아가는 한 사내가 대바구니에 토마토와 자두를 챙기고 있다.
하루에 한 끼 정도를 과일로 때우고 있던 나는 사내에게 다가가 손짓 발짓으로 토마토 1킬로를 달라고 했다. 내가 돈을 내밀자 사내 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아낙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사내는 대바구니에 실려 있는 저울을 꺼내 꼼꼼하게 달아 준다.
"아이들은 없나요?"
그는 영어를 할 줄 모른다. 손짓으로 요만한 아이가 없냐고 했더니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이 그제서 씨익 웃는 표정이 된다. 사내는 아내의 불룩한 배를 손짓한다. 아내가 임신 중이라는 것이다. 사내가 대바니구를 챙겨 어깨에 걸쳐 메고 집을 나선다. 아내는 집 나서는 남편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배웅을 한다.
사내는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돌며 과일 행상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트레킹족들이 뜸한 비수기라서 장사가 시원치 않을 것이다. 조만간 세상에 태어날 아기를 위해 사내는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하루에 한 끼 정도를 과일로 때우고 있던 나는 사내에게 다가가 손짓 발짓으로 토마토 1킬로를 달라고 했다. 내가 돈을 내밀자 사내 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아낙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사내는 대바구니에 실려 있는 저울을 꺼내 꼼꼼하게 달아 준다.
"아이들은 없나요?"
그는 영어를 할 줄 모른다. 손짓으로 요만한 아이가 없냐고 했더니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이 그제서 씨익 웃는 표정이 된다. 사내는 아내의 불룩한 배를 손짓한다. 아내가 임신 중이라는 것이다. 사내가 대바니구를 챙겨 어깨에 걸쳐 메고 집을 나선다. 아내는 집 나서는 남편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배웅을 한다.
사내는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돌며 과일 행상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트레킹족들이 뜸한 비수기라서 장사가 시원치 않을 것이다. 조만간 세상에 태어날 아기를 위해 사내는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과일 장사 나서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송성영
충남 공주 산골에 살 때 시를 쓰는 한 후배가 '문학소녀'를 꿈꾸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을 몰고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사진기를 앞장세워 우리 집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이며 대나무 숲을 둘러보면서 참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있다며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다 쓰러져가는 사랑채며 비가 오면 질퍽거리는 흙 마당,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고 여름이면 감질나게 흐르는 산기슭의 식수, 거기다가 장마철이 돌아오면 똥물이 튀기는 재례식 화장실이며 온갖 생활의 불편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떠난 뒤 아이들 엄마의 눈치를 살펴가며 '그렇게 아름답다면 여기서 한번 살아봐라 그 소리가 나오는지...' 참 진상들이라고 비난했는데 지금 내가 그 꼴이었다.
멀고 먼 길 따라 안나푸르나를 찾아와 감탄을 자아내며 사진을 찍어대고 있는 내게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위해 삶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과일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행상을 나서는 저 사내는 뭐라 말할까.
누군가를 비난하는 손가락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저들 앞에서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성수니 뭐니 해가며 그 물을 받아 농사를 지어가며 한 세월을 보내고 싶다는 내 생각은 사치였다. 삶은 행복한 순간보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더 많다.
때로는 행복한 순간들이 찾아오겠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그렇듯이 히말라야 설산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저들 또한 대부분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은, 저 안나푸르나는 나의 사치스런 생각을 질타하며 비를 통해 내 자신을 직시하라 일렀던 것이다. 어리석은 내 마음을 되돌아 보자 무거웠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문득 고행길은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들은 다 쓰러져가는 사랑채며 비가 오면 질퍽거리는 흙 마당,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고 여름이면 감질나게 흐르는 산기슭의 식수, 거기다가 장마철이 돌아오면 똥물이 튀기는 재례식 화장실이며 온갖 생활의 불편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떠난 뒤 아이들 엄마의 눈치를 살펴가며 '그렇게 아름답다면 여기서 한번 살아봐라 그 소리가 나오는지...' 참 진상들이라고 비난했는데 지금 내가 그 꼴이었다.
멀고 먼 길 따라 안나푸르나를 찾아와 감탄을 자아내며 사진을 찍어대고 있는 내게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위해 삶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과일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행상을 나서는 저 사내는 뭐라 말할까.
누군가를 비난하는 손가락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저들 앞에서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성수니 뭐니 해가며 그 물을 받아 농사를 지어가며 한 세월을 보내고 싶다는 내 생각은 사치였다. 삶은 행복한 순간보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더 많다.
때로는 행복한 순간들이 찾아오겠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그렇듯이 히말라야 설산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저들 또한 대부분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은, 저 안나푸르나는 나의 사치스런 생각을 질타하며 비를 통해 내 자신을 직시하라 일렀던 것이다. 어리석은 내 마음을 되돌아 보자 무거웠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문득 고행길은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나푸르나는 왜 푸르나
▲ 내가 유일한 객손인 숙소를 홀로 지키고 있는 젊은 엄마의 딸아이와 조카 | |
ⓒ 송성영 |
란드룩에서 사흘째, 아침나절 오락가락하던 비가 그치고 방문 앞에 납작 엎드려 있던 멍멍이가 어디론가 떠났다. 어제 오후 길에서 만난 녀석인데 이층에 있는 숙소 방문 앞까지 따라왔었다. 먹을거리를 요구하지 않고 비가 오는 내내 내 방문 앞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네팔에서도 인도처럼 끈 풀린 개들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다가 인연 닿는 사람을 만나면 잠시 따라나서곤 한다. 먹을거리와 상관없이 따라나서면서 그 인연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뭔가를 먹어야 할 시간이다. 방문 앞에 있던 멍멍이 녀석 역시 어디론가 먹을거리를 찾아 나선 모양이다. 아래층으로 내려서자 꼬마 아이 둘이 사진기를 들고 있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내가 합장을 하며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자 녀석들이 부끄러운지 몸을 비틀며 머뭇거린다. 손님이라곤 내가 전부인 텅 빈 숙소를 외롭게 지키고 있는 젊은 여자가 그 뒤에서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에게 답례 하라는 손짓을 보낸다. 아이들이 말없이 합장을 한다.
"이 아이들은 누구입니까?"
"내 딸입니다. 남자아이는 조카입니다."
"예? 결혼 했습니까?"
"단맛 나는 빵 종류를 먹고 싶습니다. 이 근처에 케이크를 파는 상점이 없습니까?"
"뒤편에 있는 상점에 가보세요. 그곳에서 팔 것입니다."
날줄과 씨줄이 준 교훈
▲ 옷감 재료인 삼실을 길게 늘어놓고 있는 란드룩 아낙네. 뒷편에 구름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안나푸르나가 보인다. | |
ⓒ 송성영 |
그녀는 자신의 속소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내게 구김살 없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돌계단을 밟고 숙소 뒤편으로 오르자 저 만치 안나푸르나 주변으로 흰 구름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식당을 겸하고 있는 상점 앞마당에서 한 아낙네가 대마(삼베)에서 뽑은 것으로 보이는 실을 길게 늘어놓고 옷감을 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케이크 있습니까?"
"아니요."
"빵은 있습니까?"
"아니요."
그녀가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빙그레 웃으며 무조건 "노"라고 대답한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그녀는 아무도 없다는 손짓을 한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짜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대화를 할 수 없어 사진기를 꺼내 들고 저만치 쪼그려 앉아 그녀의 일손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옷감은 날줄과 씨줄로 짜여 진다. 날줄은 세로로 놓인 실이고 씨줄은 가로로 놓은 실이다. 어느 한 줄이라도 없으면 옷감을 짤 수 없다. 사람살이도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안나푸르나 기슭에 살아가고 있는 네팔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애시 당초 이곳에 올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언어든 몸짓이든 이들과 소통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날줄과 씨줄을 조화롭게 짜지 않으면 뒤 엉키듯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제 욕심만 챙긴다면 사람살이는 엉망진창이 된다. 날줄과 씨줄의 조화로움 속에서 아름다운 비단이 짜지듯 성인들의 지혜로운 가르침에 따라 사람과 사람이 서로 조화롭게 살다보면 사람살이 또한 비단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경천위지'(經天緯地)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보통 하늘과 땅을 다스려 온 천하를 다스린다(얻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경천위지의 경(經)은 날줄, 위(緯)는 씨줄을 뜻한다. 날줄과 씨줄은 조화다. 하늘과 땅은 누군가가 다스릴 대상이 아니다. 다스리는 게 아니라 조화 그 자체다. 하늘과 땅은 상생한다. 지혜로운 성인들이 그랬듯이 그 이치를 깨달을 때 비로소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천하를 얻는 것은 다스리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데 있다.
▲ 안나푸르나와 빨래. 그동안 사진기 렌즈를 통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다. | |
ⓒ 송성영 |
▲ 안나푸르나와 전기 줄. | |
ⓒ 송성영 |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뗀둑(수제비 종류)으로 요기를 하고 있는데 창문 사이로 안나푸르나 앞에 걸려 있는 빨래 줄과 저만치 전기 줄이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사진이 찍고 싶어졌다. 그동안 눈에 거슬리는 것을 거부하고 순백의 안나푸르나를 찍으려 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들, 안나푸르나와 함께 잡혀 오는 저 빨래와 전기 줄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겠는가. 저 사람살이의 흔적인 빨래줄과 전기줄이 없었다면, 거기에 기대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저 안나푸르나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동안 거부해왔던 빨래줄과 전기줄이 걸려 있는 안나푸르나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이곳 사람들에게 안나푸르나는 단지 생활의 일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킹을 즐기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산이거나 또 어떤 등반가들에게는 그 어떤 산보다 높은 산봉우리, 안나푸르나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히말라야 기슭에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그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이 거처하는 다가갈 수 없는 산, 생명수를 내려주는 산이거나 늘 곁에 있는 눈 덮인 높다란 뒷산이나 앞산일 것이다.
밤길 떠나는 청춘남녀를 떠올리다
▲ 숙소의 젊은 엄마와 그녀의 동생이 손가락만한 굵기의 삶은 고사리를 말리기 위해 반으로 쪼개고 있다. | |
ⓒ 송성영 |
마을을 벗어나 전기 줄이 걸려 있는 안나푸르나 사진을 찍고 돌아올 무렵 숙소를 지키는 젊은 아줌마가 동생과 함께 고사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이곳 고산지대의 고사리는 한국의 고사리와는 달리 손가락 굵기 만하다. 그 삶은 고사리를 쉽게 말리기 위해 반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나는 고사리라는 영어 단어를 알지 못해 손짓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북인도 코사니라는 마을에서는 저걸 먹지 않던데 여기 사람들은 먹나요?"
"예, 끓는 물에 삶아 요리합니다."
"한국 사람들도 즐겨 먹습니다."
북인도 코사니 사람들은 독성이 강해 먹으면 큰일 난다고 했지만 이곳 란드룩 사람들은 한국에서처럼 독성을 제거하기 위해 끓는 물에 삶는다. 그 삶은 고사리를 바싹 말려 보관해놨다가 물에 부풀려 요리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한국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요리해 먹는다고 했더니 먹거리가 같다는 것에 동질감을 느꼈는지 반겨 웃는다. 내친김에 그녀에게 내가 알고 있는 영어를 총동원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실례지만 몇 살입니까?"
"스물 넷입니다."
"네팔 여자들은 보통 몇 살에 결혼 합니까?"
"보통 열여덟이면 결혼하는데 저는 열아홉에 결혼했습니다."
인도의 시골에서처럼 네팔 시골에서도 대부분 중매결혼을 한다고 하는데 그녀는 란드룩 마을 청년과 연애결혼을 했다고 한다.
"네팔 시골에서도 연애결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까?"
"아니요. 대부분 부모가 짝을 맺어 줍니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데 집안에서 반대하면 어떻게 합니다."
"우리 부모 세대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도시로 나가 살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눈 맞은 청춘남녀들이 도시로 야반도주해 살림을 차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눈을 피해 짐 가방을 챙겨 동구 밖 어딘가에서 만나 두 손 꼬옥 잡고 밤길을 떠나는 애뜻한 청춘 남녀를 상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오래전 한국에서도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말했더니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다가 어쩌면 저 젊은 엄마도 열아홉, 아리따운 나이에 죽고 못 사는 동네 청년과 야반도주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크나큰 불행이다. 사랑을 쫓아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일이다.
"남편이 보이지 않던데... 어디에 있습니까?"
"포카라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옵니다."
인도 시골과는 달리 네팔 시골에서는 보통 부부가 함께 농사일을 하는데 이곳 남자들은 대부분 포카라와 같은 대도시에 나가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양철 지붕 위에 손질한 고사리를 펼쳐 놓고 있다. | |
ⓒ 송성영 |
그녀의 동생이 손질한 고사리를 양철 지붕 위에 펼쳐 놓는 것을 보면서 내가 '나마스테' 합장을 하며 일어서자 그녀의 딸아이가 엉겁결에 합장을 한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자 녀석이 배시시 웃는다. 젊은 엄마도 흡족한 표정으로 따라 웃는다. 우리 모두가 기분 좋게 웃는다.
숙소 2층으로 올라가면서 딸아이의 순박한 미소를 떠올리다가 문득 내가 그토록 저 순백의 안나푸르나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란드룩에서의 사흘 내내 나는 이곳 어린 아이처럼 순박한 미소를 닮은 란드룩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다. 내가 안나푸르나를 만나러 온 것은 그 순박한 사람들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안나푸르나가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깃들어 살아가고 있는 순박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빼어난 경관의 명당자리라 한들 거기에 깃들여 사는 사람들의 심성이 고약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청와대라는 좋은 명당자리를 꿰차고 앉아 온갖 색동옷으로 패션쇼나 벌여가며 제 나라 국민들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하고 다른 나라의 비위나 맞춰 가며 제 민족과 벽을 쌓아 가고 있다면? 청와대의 명당자리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이곳 란드룩 사람들처럼 순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깃들어 살아간다면 혼잡한 서울 또한 아름다운 도시가 될 것이다. 안나푸르나 기슭에 사람이 없거나 자본에 찌들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면 안나푸르나는 그저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삭막한 불모의 산, 단지 눈 덮인 높은 산봉우리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란드룩 마을의 옥수수 밭과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람살이가 있기 때문이다. | |
ⓒ 송성영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홀로 배낭여행 초보자의 인도 네팔 여행기
산 중에서 만난 네팔 사내와 안나푸르나.ⓒ 송성영
지프차에서 내린 곳에 점포가 하나 있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지프차가 다닐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가파른 산악길, 하루에 몇 사람이나 지나칠까 싶을 정도로 외진 곳이다. 그럼에도 점포 앞에 음료수와 목도리, 염주를 비롯한 간단한 종교용품들을 말끔하게 펼쳐 놓고 있다. 지프차에서 내린 손님은 나 혼자였다. 점포 청년이 지프차 도착을 기다렸다는 듯 배낭을 걸쳐 메고 머뭇거리는 내게 다가온다.
"어디로 가려하십니까?"
"톨카 마을로 가려 합니다."
"여기가 톨카 마을입니다."
"하루 이틀 머물 숙소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도 숙소가 있습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안나푸르나가 보이지 않았다. 점포청년은 언덕길 너머 안나푸르나 설산 쪽을 손짓하며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그렇다고 한다. 내일 아침에는 잘 보일 것이라고 한다.
"나는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숙소를 원합니다."
"저 언덕 위에 올라가면 잘 보입니다."
구름 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는 안나푸르나
"어디로 가려하십니까?"
"톨카 마을로 가려 합니다."
"여기가 톨카 마을입니다."
"하루 이틀 머물 숙소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도 숙소가 있습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안나푸르나가 보이지 않았다. 점포청년은 언덕길 너머 안나푸르나 설산 쪽을 손짓하며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그렇다고 한다. 내일 아침에는 잘 보일 것이라고 한다.
"나는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숙소를 원합니다."
"저 언덕 위에 올라가면 잘 보입니다."
구름 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는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 가는 길목에 자리한 톨카 숙소.ⓒ 송성영
점포 청년이 손짓하는 언덕은 불과 백여 미터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뜻하지 않게 50루피에 방을 내주겠다고 한다. 귀가 솔깃해 졌다. 본래 150루피인데 비수기라 사람이 없어 싸게 내주겠다며 이층으로 올라와 보라고 손짓한다. 점포 주인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그래, 내리라면 내리고 있으라면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청년을 따라나섰다.
단 한 명의 손님도 없는 숙소는 턱없이 싼 가격에 비해 의외로 깨끗했다. 네팔 국립공원의 450루피짜리 방보다 깔끔했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따로 있었지만 본래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는 내겐 문제가 되질 않았다.
짐을 풀어 놓고 여권을 챙겨 간단한 인적 사항을 기재하기 위해 점포 안으로 들어서자 중년 부부가 반긴다. 점포청년의 부모라고 한다.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중년의 점포주인이 점포 옆에 풍성하게 매달려 있는 자두를 따와 내게 건넨다. 점포 앞에는 소쿠리에 자두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내다 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얼마를 드려야 하죠?"
그가 빙그레 웃으며 돈을 받지 않으니 그냥 먹어도 된다고 한다. 약간 새콤한 맛에 달콤하니 맛이 있다. 옆에 있던 중년 사내의 아내가 손가락을 내 보이며 열 개에 5루피 한다고 말한다. 순박하게 웃고 있는 그에 반해 그의 아내는 어딘가 모르게 강인함이 있다. 생활력이 강한 한국 여성을 닮아 있다.
열 개의 자두를 사들고 방안으로 들어와 누웠다. '왜 여기에 와 있는 것이지. 왜 이 외딴 곳에 홀로 와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반복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려, 타라고 하면 타고 내리라 해서 내려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숙소에 잠시 누워 있다가 밖으로 나섰다. 중간에 한국인 여성이 일본인 여성과 네팔 안내원을 앞장세워 트래킹을 하고 있다. 거의 두 달 만에 한국어로 그녀와 말 몇 마디 나눈다. 갑자기 한국말이 잘 안 나오는 것 같다. 한국어가 이상하게 발음이 되었다. 그녀는 저만치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이 있어 몇 마디 주고받고 떠났다. 하지만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가 기억나질 않는다.
단 한 명의 손님도 없는 숙소는 턱없이 싼 가격에 비해 의외로 깨끗했다. 네팔 국립공원의 450루피짜리 방보다 깔끔했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따로 있었지만 본래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는 내겐 문제가 되질 않았다.
짐을 풀어 놓고 여권을 챙겨 간단한 인적 사항을 기재하기 위해 점포 안으로 들어서자 중년 부부가 반긴다. 점포청년의 부모라고 한다.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중년의 점포주인이 점포 옆에 풍성하게 매달려 있는 자두를 따와 내게 건넨다. 점포 앞에는 소쿠리에 자두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내다 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얼마를 드려야 하죠?"
그가 빙그레 웃으며 돈을 받지 않으니 그냥 먹어도 된다고 한다. 약간 새콤한 맛에 달콤하니 맛이 있다. 옆에 있던 중년 사내의 아내가 손가락을 내 보이며 열 개에 5루피 한다고 말한다. 순박하게 웃고 있는 그에 반해 그의 아내는 어딘가 모르게 강인함이 있다. 생활력이 강한 한국 여성을 닮아 있다.
열 개의 자두를 사들고 방안으로 들어와 누웠다. '왜 여기에 와 있는 것이지. 왜 이 외딴 곳에 홀로 와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반복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려, 타라고 하면 타고 내리라 해서 내려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숙소에 잠시 누워 있다가 밖으로 나섰다. 중간에 한국인 여성이 일본인 여성과 네팔 안내원을 앞장세워 트래킹을 하고 있다. 거의 두 달 만에 한국어로 그녀와 말 몇 마디 나눈다. 갑자기 한국말이 잘 안 나오는 것 같다. 한국어가 이상하게 발음이 되었다. 그녀는 저만치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이 있어 몇 마디 주고받고 떠났다. 하지만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가 기억나질 않는다.
양떼를 몰고 가는 사내. 안나푸르나 가는 이 길은 5년 전까지만 해도 지프차가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 송성영
화덕에 불을 피워 요리를 하고 있는 숙소 부부.ⓒ 송성영
그녀가 사라진 언덕 아래로 한 네팔 사내가 양떼를 몰고 내려서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나푸르나가 보인다는 언덕길을 나서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뭔가 먹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종일 과자 몇 개 먹은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안나푸르나는 구름이 걷힌 내일 아침에 만나도 된다. 숙소로 돌아와 메뉴판을 들여다본다. 방세를 싸게 내준 이유가 있었다. 메뉴판에 적혀 있는 식사들이 200루피가 넘는다. 먹을 만한 음식은 300루피 가까이 된다.
부엌에서 무언가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중년 부부에게 모모와 파이를 시켰다.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파이를 화덕에 굽는다며 손짓을 한다. 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켜놓고 사진과 원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청년이 파이를 들고 왔다. 화덕에 구운 파이가 뜨겁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모모와 파이의 맛이 일품이다. 6개의 모모를 다 먹고 나서 파이 몇 조각을 먹고 내일 아침 산행을 위해 몇 조각을 남겼다.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오후 8시도 채 안 됐는데 정전이다. 조금 기다리면 전기가 들어오겠지 했는데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깜깜 무소식이다. 멀뚱멀뚱 누워 있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악몽을 꾸다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누군가가 독사처럼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쫒아오는 꿈속의 기운이 여전히 온몸을 휘감고 있다.
부엌에서 무언가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중년 부부에게 모모와 파이를 시켰다.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파이를 화덕에 굽는다며 손짓을 한다. 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켜놓고 사진과 원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청년이 파이를 들고 왔다. 화덕에 구운 파이가 뜨겁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모모와 파이의 맛이 일품이다. 6개의 모모를 다 먹고 나서 파이 몇 조각을 먹고 내일 아침 산행을 위해 몇 조각을 남겼다.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오후 8시도 채 안 됐는데 정전이다. 조금 기다리면 전기가 들어오겠지 했는데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깜깜 무소식이다. 멀뚱멀뚱 누워 있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악몽을 꾸다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누군가가 독사처럼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쫒아오는 꿈속의 기운이 여전히 온몸을 휘감고 있다.
톨카 마을 사이로 보이는 안나푸르나. ⓒ 송성영
숲 길 사이로 보이는 안나푸르나.ⓒ 송성영
눈을 뜨고 손전화기를 켰더니 오전 5시가 조금 넘어 있다. 아직 사위는 어둠이다. 몸이 쉽게 일으켜지지 않는다.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뚜렷한 목적지도 없지만 일어나야 한다.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다친 무릎 통증을 이를 악물고 견뎌가며 반가부좌를 틀고 침대 위에 앉았다. 긴 호흡으로 불처럼 치솟아 오른 마음을 물처럼 가라앉힌다. 몸과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면 길을 나설 수 없다. 불처럼 솟구쳐 있는 마음자리를 다스리지 못하면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게 된다.
작은 창틈으로 새벽 기운이 감지된다. 발가벗은 육신에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선다. 언덕길을 오르자 길 양옆으로 몇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 사이로 저 멀리 안나푸르나가 오락가락하는 구름 사이로 묵직하게 들어서 있다. 그때서야 여행의 목적을 감지하고 사진기를 꺼냈다.
마을을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숲 사이로 해맑은 기운이 감지된다. 안나푸르나 설산이 언듯 언듯 보인다. 몇 걸음 옮기는데 뱃속에서 요동을 친다. 어제 저녁 게스트하우스의 식수를 끓이지 않고 그냥 먹어서 그런지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한다. 산물은 괜찮겠지 싶어 몸을 실험 삼아 벌컥벌컥 서너 모금 마셨다. 이제 네팔의 기운에 익숙해지려나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내 몸이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마음을 잘못 쓰니 몸이 고생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꼭 필요한 만큼의' 날개를 다는 것
다친 무릎 통증을 이를 악물고 견뎌가며 반가부좌를 틀고 침대 위에 앉았다. 긴 호흡으로 불처럼 치솟아 오른 마음을 물처럼 가라앉힌다. 몸과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면 길을 나설 수 없다. 불처럼 솟구쳐 있는 마음자리를 다스리지 못하면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게 된다.
작은 창틈으로 새벽 기운이 감지된다. 발가벗은 육신에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선다. 언덕길을 오르자 길 양옆으로 몇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 사이로 저 멀리 안나푸르나가 오락가락하는 구름 사이로 묵직하게 들어서 있다. 그때서야 여행의 목적을 감지하고 사진기를 꺼냈다.
마을을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숲 사이로 해맑은 기운이 감지된다. 안나푸르나 설산이 언듯 언듯 보인다. 몇 걸음 옮기는데 뱃속에서 요동을 친다. 어제 저녁 게스트하우스의 식수를 끓이지 않고 그냥 먹어서 그런지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한다. 산물은 괜찮겠지 싶어 몸을 실험 삼아 벌컥벌컥 서너 모금 마셨다. 이제 네팔의 기운에 익숙해지려나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내 몸이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마음을 잘못 쓰니 몸이 고생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꼭 필요한 만큼의' 날개를 다는 것
안나푸르나가 훤히 보이는 산길에서 한 아낙네가 춤을 추고 있다.ⓒ 송성영
안나푸르나가 훤히 보이는 산길에서 한 아낙네가 춤을 추고 있다. 이른 새벽부터 춤을 추고 있다. 걸음을 멈춰 그녀를 바라본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에게 온몸을 공양하는 듯 보인다. 그녀에게 신은 안나푸르나, 대자연일지도 모른다.
대자연 앞에 그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보인다. 그녀의 믿음은 하늘과 땅 대자연이다. 대자연은 신이 거주하는 그녀의 사원이다. 신을 향한 그녀의 춤사위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녀의 내면에 신이 내린다. 문득 그녀의 춤사위는 자기 자신에게 공양하는 춤사위처럼 다가온다.
수행자가 따로 없다. 그녀는 수행자다. 수행자들이 다스린 마음자리로 자비를 베풀며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녀는 춤사위로 수행을 하며 뭇 중생들에게 자비심을 베풀고 있는 듯 보인다. 춤추는 아낙네가 사라지고 나뭇가지 위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노래를 하고 있다.
대자연 앞에 그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보인다. 그녀의 믿음은 하늘과 땅 대자연이다. 대자연은 신이 거주하는 그녀의 사원이다. 신을 향한 그녀의 춤사위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녀의 내면에 신이 내린다. 문득 그녀의 춤사위는 자기 자신에게 공양하는 춤사위처럼 다가온다.
수행자가 따로 없다. 그녀는 수행자다. 수행자들이 다스린 마음자리로 자비를 베풀며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녀는 춤사위로 수행을 하며 뭇 중생들에게 자비심을 베풀고 있는 듯 보인다. 춤추는 아낙네가 사라지고 나뭇가지 위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노래를 하고 있다.
산중에서 만나 낫을 꺼내들었던 네팔 사내와 안나푸르나. ⓒ 송성영
오만가지 표정 속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사진, 내 입맛에 맞는 사진을 선택할 것이다.ⓒ 송성영
그녀가 춤을 추었던 산길을 지나 한참을 오르자 안나푸르나가 훤히 반긴다. 턱하니 들어서 있는 안나푸르나 설산 앞에 넋을 놓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바랑처럼 포대자루를 등에 메고 있다. 심마니처럼 보인다. 그를 따라 가고 싶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약초를 캐러 가십니까?"
그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대답 대신 그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낫을 꺼내든다. 잠시 두려움 몰려온다. 이 깊은 산중에 그와 단둘이다. 그가 낫을 꺼내들고 나뭇가지를 쳐대는 시늉을 한다. 낫은 나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낫을 든 사내가 다시 양손을 머리위에 얹고 소뿔처럼 흉내를 낸다. 그리고 먹는 시늉을 한다. 소먹이를 위해 나뭇가지를 베러온 것이다.
머릿속에 외진 곳에서 불상사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안내서나 뉴스, 소문 따위가 입력된 두려움이었다. 사내가 낫을 꺼내드는 순간 나를 해칠 것이라는 조작된 기억의 작용이다. 본래 내 자신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없다.
내 기억 속에 두려움이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입력되어 있는 것이다. 그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는 치료제는 자신이다. 나는 한껏 웃으면서 사진기를 꺼내 그 앞에 내밀었다. 그가 사진을 찍어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가 떠나고 나는 오만가지 표정을 지어가며 내 자신에게 사진기를 들이댄다. 오만가지 표정 속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사진, 내 입맛에 맞는 사진을 선택할 것이다. 당당한 모습이 찍힌 사진 뒷면에는 온갖 번뇌가 숨겨져 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는 탐진치의 모습이 감춰져 있다.
"약초를 캐러 가십니까?"
그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대답 대신 그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낫을 꺼내든다. 잠시 두려움 몰려온다. 이 깊은 산중에 그와 단둘이다. 그가 낫을 꺼내들고 나뭇가지를 쳐대는 시늉을 한다. 낫은 나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낫을 든 사내가 다시 양손을 머리위에 얹고 소뿔처럼 흉내를 낸다. 그리고 먹는 시늉을 한다. 소먹이를 위해 나뭇가지를 베러온 것이다.
머릿속에 외진 곳에서 불상사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안내서나 뉴스, 소문 따위가 입력된 두려움이었다. 사내가 낫을 꺼내드는 순간 나를 해칠 것이라는 조작된 기억의 작용이다. 본래 내 자신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없다.
내 기억 속에 두려움이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입력되어 있는 것이다. 그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는 치료제는 자신이다. 나는 한껏 웃으면서 사진기를 꺼내 그 앞에 내밀었다. 그가 사진을 찍어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가 떠나고 나는 오만가지 표정을 지어가며 내 자신에게 사진기를 들이댄다. 오만가지 표정 속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사진, 내 입맛에 맞는 사진을 선택할 것이다. 당당한 모습이 찍힌 사진 뒷면에는 온갖 번뇌가 숨겨져 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는 탐진치의 모습이 감춰져 있다.
구름 걷히고 해맑게 열린 안나푸르나. ⓒ 송성영
나의 겉모습은 가식으로 가려져 있지만 저 안나푸르나는 구름이 걷히자 해맑은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가식과 탐진치를 거둬낼 수 있다면 저 설산처럼 나의 내면에도 해맑은 그 무엇이 드러날 것이다. 내가 그토록 저 안나푸르나를 만나러 온 이유는 안나푸르나를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식과 탐진치에 가려져 있는 그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 설산 가까이 오르기 위해 인도로 떠나오기 전, 일 년 내내 매일 아침 서너 시간씩 산행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인도에서 다친 무릎 때문에 설산을 오를 수 없다. 무엇인가 이루겠다는 목적을 정해 놓으면 고통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삶이란 그 어떤 목적 없이 저 우뚝 솟아 있는 설산, 안나푸르나처럼 있는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 숨겨져 있는 탐진치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 내 안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름 걷힌 저 안나푸르나처럼.
안나푸르나를 등지고 산을 내려서는데 숲 속 아름드리나무에 온통 이끼가 끼어 있었고 거기에 꽃씨가 내려앉아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무가 또 다른 생명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그 나무를 껴안고 싶어졌다. 차갑게 다가왔던 나무가 잠시 후 내게 온기를 내주었다. 그리고 나무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그대 나무를 품어보라
살아있는 그대의 온기가
얼마나 따듯한 기운을 품고 있는지
그대 나무를 품어 보라
얼마나 향기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다네
저 설산 가까이 오르기 위해 인도로 떠나오기 전, 일 년 내내 매일 아침 서너 시간씩 산행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인도에서 다친 무릎 때문에 설산을 오를 수 없다. 무엇인가 이루겠다는 목적을 정해 놓으면 고통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삶이란 그 어떤 목적 없이 저 우뚝 솟아 있는 설산, 안나푸르나처럼 있는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 숨겨져 있는 탐진치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 내 안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름 걷힌 저 안나푸르나처럼.
안나푸르나를 등지고 산을 내려서는데 숲 속 아름드리나무에 온통 이끼가 끼어 있었고 거기에 꽃씨가 내려앉아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무가 또 다른 생명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그 나무를 껴안고 싶어졌다. 차갑게 다가왔던 나무가 잠시 후 내게 온기를 내주었다. 그리고 나무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그대 나무를 품어보라
살아있는 그대의 온기가
얼마나 따듯한 기운을 품고 있는지
그대 나무를 품어 보라
얼마나 향기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다네
나무 이끼에 핀 꽃.ⓒ 송성영
스스로 크는 나무가 제 몸에 이끼를 키워 꽃을 피우게 하듯이 너의 마음에 꽃씨를 발아시켜 꽃을 피우라 이르는 듯했다. 나무는 하늘과 땅에 의지해 스스로 제 몸을 키운다.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만큼의 기운을 빨아들여 제 몸을 불리고 키를 키우고 살아간다. 사람은 필요이상을 섭취한다. 다른 사람의 기운까지 빨아드리고자 한다. 그렇게 제 몸을 필요이상으로 불리다보니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산길 옆, 발아래로 고사리가 널려 있다. 거의 손가락 굵기와 맞먹을 정도다. 지천에 널려 있다. 나는 본능처럼 고사리의 허리를 뚝뚝 잘라 천 가방에 넣는다. 그러다가 잠시 손을 멈춘다. 여린 생명의 허리를 툭툭 분질러 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손을 멈추고 귀 기울여 보세요. 나를 꺾어주세요 라고 말하는 꽃은 없어요. 제발 나를 내버려 두세요라고 하소연 할 거에요. 고사리도 마찬가지랍니다. 모든 생명들은 똑같은 목소리를 낼 거에요.' 잎사귀도 피기도 전에 허리가 툭툭 잘려나가는 여린 고사리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살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살생하지 말라는 것은 필요 이상의 살생으로 욕망을 채우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먹고 먹히고, 죽이고 죽는다. 인간은 채식과 육식으로 나눠 살생, 불살생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동물들은 필요이상으로 살생하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 살생한다. 인간은 저장기술을 통해 좀 더 많은 무자비한 살생을 하고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에게 살생하지 말라 가르치면서 좋은 음식을 탐하는 수행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명 유지는 살생과 불살생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살생의 그물을 피해갈 수 없다. 다만 살생으로 얻은 기운을 어떻게 쓰는가. 어떻게 되돌려 놓는가 그것이 문제다. 생명 유지를 위해 살생을 하여 그 기운을 대자연 속으로 되돌려 놓는 것은 자연의 순환 고리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의 연장이다. 불필요한 살생은 자신을 갉아 먹는 것이다.
한꺼번에 수십만, 수백만의 생명을 처참하게 죽일 수 있는 살상 무기를 가진 사람들은 꽃이며 고사리가 뭔 대수냐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그 말에 답할 수 없다. 생명 연장을 위해 먹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처럼 참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산길 옆, 발아래로 고사리가 널려 있다. 거의 손가락 굵기와 맞먹을 정도다. 지천에 널려 있다. 나는 본능처럼 고사리의 허리를 뚝뚝 잘라 천 가방에 넣는다. 그러다가 잠시 손을 멈춘다. 여린 생명의 허리를 툭툭 분질러 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손을 멈추고 귀 기울여 보세요. 나를 꺾어주세요 라고 말하는 꽃은 없어요. 제발 나를 내버려 두세요라고 하소연 할 거에요. 고사리도 마찬가지랍니다. 모든 생명들은 똑같은 목소리를 낼 거에요.' 잎사귀도 피기도 전에 허리가 툭툭 잘려나가는 여린 고사리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살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살생하지 말라는 것은 필요 이상의 살생으로 욕망을 채우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먹고 먹히고, 죽이고 죽는다. 인간은 채식과 육식으로 나눠 살생, 불살생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동물들은 필요이상으로 살생하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 살생한다. 인간은 저장기술을 통해 좀 더 많은 무자비한 살생을 하고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에게 살생하지 말라 가르치면서 좋은 음식을 탐하는 수행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명 유지는 살생과 불살생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살생의 그물을 피해갈 수 없다. 다만 살생으로 얻은 기운을 어떻게 쓰는가. 어떻게 되돌려 놓는가 그것이 문제다. 생명 유지를 위해 살생을 하여 그 기운을 대자연 속으로 되돌려 놓는 것은 자연의 순환 고리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의 연장이다. 불필요한 살생은 자신을 갉아 먹는 것이다.
한꺼번에 수십만, 수백만의 생명을 처참하게 죽일 수 있는 살상 무기를 가진 사람들은 꽃이며 고사리가 뭔 대수냐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그 말에 답할 수 없다. 생명 연장을 위해 먹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처럼 참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 송성영
고사리를 꺾던 손을 놓고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지렁이들이 맨 바닥 위로 기어 나와 몸을 뒤틀고 있다. 메마른 대지에 푸석푸석한 흙을 뒤집어쓰고 있다. 새 한 마리가 나무 끝에 앉았다. 내가 사진기를 꺼내 다가가자 나뭇가지를 박차고 자유롭게 날아간다.
자유롭다는 것은 꼭 필요한 만큼의 날개를 다는 것이다. 작은 깃털에 몸집을 너무 불리면 날지 못한다. 날아가지 못하는 닭 신세가 될 것이다. 나는 닭처럼 퇴화된 날개를 달고 있다. 자유를 목말라 하면서도 물욕의 몸집을 불려 날개를 퇴화시키고 있다.
퇴화된 날개는 두려움이다. 닭장을 벗어나면 먹이를 찾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래도 어쩌랴. 이 퇴화된 날개로 지붕 위나 최소한 나뭇가지 위라도 날아야 하질 않겠는가. 창공을 높이 날아 세상을 내려다 볼 수는 없어도 마당이나 닭장에 갇혀 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그 어떤 시도를 해봐야 하질 않겠는가. 수염발 허연 중년의 내가 퇴화된 날개를 펼쳐 안나푸르나를 만나러 온 이유이기도 했다.
자유롭다는 것은 꼭 필요한 만큼의 날개를 다는 것이다. 작은 깃털에 몸집을 너무 불리면 날지 못한다. 날아가지 못하는 닭 신세가 될 것이다. 나는 닭처럼 퇴화된 날개를 달고 있다. 자유를 목말라 하면서도 물욕의 몸집을 불려 날개를 퇴화시키고 있다.
퇴화된 날개는 두려움이다. 닭장을 벗어나면 먹이를 찾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래도 어쩌랴. 이 퇴화된 날개로 지붕 위나 최소한 나뭇가지 위라도 날아야 하질 않겠는가. 창공을 높이 날아 세상을 내려다 볼 수는 없어도 마당이나 닭장에 갇혀 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그 어떤 시도를 해봐야 하질 않겠는가. 수염발 허연 중년의 내가 퇴화된 날개를 펼쳐 안나푸르나를 만나러 온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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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짐지고 산길 오른 조랑말들 "수고했어, 오늘도"
무거운 등짐을 지고 히말라야 산악지대를 오르내리는 조랑말들.ⓒ 송성영
안나푸르나를 멀뚱멀뚱 올려다보며 란드룩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와 무거운 몸을 내려놓고 있는데 어디선가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와 보니 무거운 등짐을 진 조랑말들이 비탈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조랑말들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목에 매달려 있는 방울들이 힘없이 달랑거린다.
히말라야 산악지대를 오가며 짐을 실어 나르는 조랑말들이다. 녀석들은 제법 규모가 큰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어 놓고 풀밭에서 달콤한 휴식 시간을 갖는다. 등짐을 벗어놓은 녀석들은 마치 장거리 행군 도중에 무거운 군장을 풀어놓고 잠시 휴식을 취한 군사들 같다.
양 뒷다리로 엉거주춤 버티고 서서 오줌보를 풀어놓거나 풀을 뜯고 더러는 쪼그려 앉은 채로 풀을 뜯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녀석들은 먹는 것조차 힘든 모양이다. 졸다가 먹고 졸다가 먹고를 반복한다. 성기를 길게 늘어뜨린 놈도 있다.
무거운 등짐지고 올라와 서로 위로하는 조랑말들
히말라야 산악지대를 오가며 짐을 실어 나르는 조랑말들이다. 녀석들은 제법 규모가 큰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어 놓고 풀밭에서 달콤한 휴식 시간을 갖는다. 등짐을 벗어놓은 녀석들은 마치 장거리 행군 도중에 무거운 군장을 풀어놓고 잠시 휴식을 취한 군사들 같다.
양 뒷다리로 엉거주춤 버티고 서서 오줌보를 풀어놓거나 풀을 뜯고 더러는 쪼그려 앉은 채로 풀을 뜯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녀석들은 먹는 것조차 힘든 모양이다. 졸다가 먹고 졸다가 먹고를 반복한다. 성기를 길게 늘어뜨린 놈도 있다.
무거운 등짐지고 올라와 서로 위로하는 조랑말들
무거운 등짐을 풀어놓고 풀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조랑말들.ⓒ 송성영
머리 맞대고 서로의 얼굴을 비벼대는 조랑말들ⓒ 송성영
눈썹이 유난히 길어 순하디 순해 보이는 녀석들, 그중에 몇몇은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듯 얼굴을 비벼댄다. 녀석들은 자식과 어미 혹은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암수 한 쌍인지도 모른다.
한 녀석이 무리에서 외떨어져 뜯어 먹을 풀도 별로 없는 곳에서 겨우 풀을 뜯다가 이따금씩 몸 굴리기를 한다. 가만 보니 발라당 나자빠져 있는 녀석의 배 부위에 상처가 보인다. 다른 녀석들은 짤랑 짤랑 경쾌한 방울소리를 내며 생기 넘치게 풀을 뜯고 있는데 녀석은 식욕도 없어 보인다.
방울소리는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는 소리다. 하지만 외톨이 녀석의 목에서는 방울소리가 나질 않는다. 풀을 뜯다말고 껌뻑껌뻑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감당 못하며 졸고 있다. 방울소리를 꺼놓고 아무렇게나 누워 잠들어 있는 녀석의 발굽에도 피멍이 보인다. 종일토록 등에 진 짐만큼이나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고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한 녀석이 무리에서 외떨어져 뜯어 먹을 풀도 별로 없는 곳에서 겨우 풀을 뜯다가 이따금씩 몸 굴리기를 한다. 가만 보니 발라당 나자빠져 있는 녀석의 배 부위에 상처가 보인다. 다른 녀석들은 짤랑 짤랑 경쾌한 방울소리를 내며 생기 넘치게 풀을 뜯고 있는데 녀석은 식욕도 없어 보인다.
방울소리는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는 소리다. 하지만 외톨이 녀석의 목에서는 방울소리가 나질 않는다. 풀을 뜯다말고 껌뻑껌뻑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감당 못하며 졸고 있다. 방울소리를 꺼놓고 아무렇게나 누워 잠들어 있는 녀석의 발굽에도 피멍이 보인다. 종일토록 등에 진 짐만큼이나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고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상처투성이의 외톨이 조랑말. 지친 몸으로 식욕조차 잃어버린 녀석이 나를 닮았다.ⓒ 송성영
저 상처투성이의 조랑말처럼 내 몸에서도 방울소리가 나지 않는다. 토마토 두 개와 빵 한 개가 전부였지만 식욕이 없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고사하고 한두 시간 정도 란드룩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와 다친 무릎을 감싸 안고 축 늘어져 있다.
잠들어 있는 외톨이 조랑말을 지켜보다가 공동화장실에서 누런 오줌 줄기를 내리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일주일 내내 세수를 하지 않은 것 같다. 긴 수염에 햇볕에 검게 그을린 것인지 때인지 거무스름한 얼굴이 뻣뻣하다.
외톨이 조랑말처럼 몸은 만신창이로 지쳐 있지만 어둠이 깊을수록 작은 불씨가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정신은 또렷해진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키듯 땟물에 절은 옷을 홀라당 벗어놓고 샤워 꼭지를 틀어 찬물을 온몸으로 으스스 받아드린다.
잠들어 있는 외톨이 조랑말을 지켜보다가 공동화장실에서 누런 오줌 줄기를 내리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일주일 내내 세수를 하지 않은 것 같다. 긴 수염에 햇볕에 검게 그을린 것인지 때인지 거무스름한 얼굴이 뻣뻣하다.
외톨이 조랑말처럼 몸은 만신창이로 지쳐 있지만 어둠이 깊을수록 작은 불씨가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정신은 또렷해진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키듯 땟물에 절은 옷을 홀라당 벗어놓고 샤워 꼭지를 틀어 찬물을 온몸으로 으스스 받아드린다.
갑자기 구름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란드룩 마을.ⓒ 송성영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구름이 내려 앉기 시작하고 멀쩡한 사위가 어두워져 가더니 이슬비가 내린다. 게스트하우스 아가씨 말대로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린다는 몬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양이다. 풀밭에 쓰러져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외톨이 조랑말이 빗줄기에 정신이 번쩍 드는지 몸을 벌떡 일으켜 풀을 뜯는다.
본능적으로 풀을 뜯고 있는 녀석을 보다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는 시 구절을 떠올린다. 조랑말은 '비가 온다. 살아야 한다.'라는 의지로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다. 등짐을 지려면 먹어야 한다. 비가 오지 않아도 살아야 한다.
녀석은 뱃가죽이며 발굽에 피멍이 아물기도 전에 죽지 않을 만큼의 등짐을 지고 또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짐을 질 수 없는 낙오자에게는 죽음뿐이라는 사실 또한 직감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가는 이슬비를 맞아가며 뒤늦게 풀을 뜯고 있는 외톨이 조랑말을 보면서 란드룩 '헝그리 아이 게스트하우스'에 얼마나 더 머물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답이 없다. 외톨이 조랑말의 방울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른 동료들은 멍청히 서서 꿈벅꿈벅 무거운 눈꺼풀로 우물우물 되새김질 하고 있는데 상처 많은 외톨이 조랑말은 혼자서 달랑달랑 방울소리를 내며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조랑말들이 자유롭게 풀밭에 풀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산비탈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기회다. 그럼에도 그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원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니는 말의 본성이 퇴화된 것일까. 무엇이 저 조랑말들의 본성을 길들여 고통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한 것일까.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와 저 조랑말들과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나는 조금씩 굵어져 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종종 빗줄기를 타고 올라 머나 먼 전생의 동굴로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은 가장 안락한 공간이다. 나는 그 동굴 속에 앉아 있다.
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설산에서 녹아내린 물 한 방울이 바다와 이어져 있고,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앞바다와 이어져 있듯이 빗방울은 까마득한 원시 동굴과 맞닿아 있다는 상상을 한다.
원시 시대에는 동물이든 인류든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동굴은 비가 오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 되었을 것이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동굴은 인류의 가장 소박한 생활공간이다. 인류가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만 소유했을 동굴의 소박한 삶의 형태와 일찍이 깨달음을 성취한 성인들의 정신을 결합한 삶을 살아왔다면 현재의 인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생명을 함부로 해가며 서로 증오하고 싸우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갈 무시무시한 살상무기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인류는 진화를 거듭할수록 그에 따른 욕망 또한 잔혹하게 진화되어 왔다. 정신 또한 사랑과 자비의 화신인 수많은 성인들의 깨달음을 통해 진화되어 왔다. 진화된 정신으로 잔혹한 욕망을 거둬낼 수 있다면 지금처럼 생명이 생명을 길들여 다스리고 부리고 억압하고 죽이는 끔찍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조랑말들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사슬
본능적으로 풀을 뜯고 있는 녀석을 보다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는 시 구절을 떠올린다. 조랑말은 '비가 온다. 살아야 한다.'라는 의지로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다. 등짐을 지려면 먹어야 한다. 비가 오지 않아도 살아야 한다.
녀석은 뱃가죽이며 발굽에 피멍이 아물기도 전에 죽지 않을 만큼의 등짐을 지고 또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짐을 질 수 없는 낙오자에게는 죽음뿐이라는 사실 또한 직감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가는 이슬비를 맞아가며 뒤늦게 풀을 뜯고 있는 외톨이 조랑말을 보면서 란드룩 '헝그리 아이 게스트하우스'에 얼마나 더 머물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답이 없다. 외톨이 조랑말의 방울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른 동료들은 멍청히 서서 꿈벅꿈벅 무거운 눈꺼풀로 우물우물 되새김질 하고 있는데 상처 많은 외톨이 조랑말은 혼자서 달랑달랑 방울소리를 내며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조랑말들이 자유롭게 풀밭에 풀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산비탈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기회다. 그럼에도 그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원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니는 말의 본성이 퇴화된 것일까. 무엇이 저 조랑말들의 본성을 길들여 고통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한 것일까.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와 저 조랑말들과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나는 조금씩 굵어져 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종종 빗줄기를 타고 올라 머나 먼 전생의 동굴로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은 가장 안락한 공간이다. 나는 그 동굴 속에 앉아 있다.
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설산에서 녹아내린 물 한 방울이 바다와 이어져 있고,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앞바다와 이어져 있듯이 빗방울은 까마득한 원시 동굴과 맞닿아 있다는 상상을 한다.
원시 시대에는 동물이든 인류든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동굴은 비가 오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 되었을 것이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동굴은 인류의 가장 소박한 생활공간이다. 인류가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만 소유했을 동굴의 소박한 삶의 형태와 일찍이 깨달음을 성취한 성인들의 정신을 결합한 삶을 살아왔다면 현재의 인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생명을 함부로 해가며 서로 증오하고 싸우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갈 무시무시한 살상무기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인류는 진화를 거듭할수록 그에 따른 욕망 또한 잔혹하게 진화되어 왔다. 정신 또한 사랑과 자비의 화신인 수많은 성인들의 깨달음을 통해 진화되어 왔다. 진화된 정신으로 잔혹한 욕망을 거둬낼 수 있다면 지금처럼 생명이 생명을 길들여 다스리고 부리고 억압하고 죽이는 끔찍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조랑말들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사슬
왔던 길로 되돌아 떠나는 조랑말들. ⓒ 송성영
빗줄기를 타고 부질없는 상상의 세계를 유영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올 무렵 오락가락하던 비가 그쳤다. 조랑말들은 다시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주어진 시간, 주어진 공간에서 풀을 뜯고 주어진 잠자리에 만족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조랑말들, 이제 또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처음 이곳에 올 때처럼 등에는 자루가 실려 있다. 하지만 빈 자루다. 비탈길을 내려서는 걸음들이 딸랑딸랑 목에 건 방울 소리만큼이나 가벼워 보인다. 하지만 저 빈 자루에 또다시 곡식을 가득 채우고 험난한 비탈길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짐을 지고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말몰이꾼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찌감치 앞장서 걸어가고 있다. 말몰이꾼이 보이지 않은 틈을 타 대열을 이탈할 수도 있는데 조랑말들은 늘 해왔던 일상처럼 앞에서 걷는 말꼬리를 따라 딸랑거리며 묵묵히 걷고 있다.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조랑말들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사슬처럼 다가온다. 조랑말들에게 저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방울을 달고 살아가는 것이 어디 조랑말뿐이겠는가. 사람인들 자본의 먹이사슬에 얽매여 온갖 속박과 억압의 고통스런 짐을 벗어던지지 못한다면 저 조랑말의 운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상처투성이의 조랑말은 맨 뒤를 따르고 있다. 똑같이 빈 자루를 등에 싣고 있지만 불편한 걸음걸이로 점점 뒤처지고 있다. 어쩌면 저 길이 녀석에게는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른다. 나 또한 안나푸르나가 올려다 보이는 이곳 란드룩을 떠나면 영영 돌아올 날이 없을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이 온통 상처투성이인 나를 닮은 조랑말이 저만치 비탈길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인간은 조랑말이 아니다.'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다. 인간은 저 운명의 사슬처럼 목에 걸고 다니는 '조랑말의 방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그 어떤 절대 신이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그 어떤 억압의 사슬을 스스로 풀 수 있다. 그 어떤 속박과 억압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속박과 억압의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인 나는 끊임없이 그 고통을 직시하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처럼 등에는 자루가 실려 있다. 하지만 빈 자루다. 비탈길을 내려서는 걸음들이 딸랑딸랑 목에 건 방울 소리만큼이나 가벼워 보인다. 하지만 저 빈 자루에 또다시 곡식을 가득 채우고 험난한 비탈길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짐을 지고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말몰이꾼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찌감치 앞장서 걸어가고 있다. 말몰이꾼이 보이지 않은 틈을 타 대열을 이탈할 수도 있는데 조랑말들은 늘 해왔던 일상처럼 앞에서 걷는 말꼬리를 따라 딸랑거리며 묵묵히 걷고 있다.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조랑말들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사슬처럼 다가온다. 조랑말들에게 저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방울을 달고 살아가는 것이 어디 조랑말뿐이겠는가. 사람인들 자본의 먹이사슬에 얽매여 온갖 속박과 억압의 고통스런 짐을 벗어던지지 못한다면 저 조랑말의 운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상처투성이의 조랑말은 맨 뒤를 따르고 있다. 똑같이 빈 자루를 등에 싣고 있지만 불편한 걸음걸이로 점점 뒤처지고 있다. 어쩌면 저 길이 녀석에게는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른다. 나 또한 안나푸르나가 올려다 보이는 이곳 란드룩을 떠나면 영영 돌아올 날이 없을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이 온통 상처투성이인 나를 닮은 조랑말이 저만치 비탈길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인간은 조랑말이 아니다.'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다. 인간은 저 운명의 사슬처럼 목에 걸고 다니는 '조랑말의 방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그 어떤 절대 신이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그 어떤 억압의 사슬을 스스로 풀 수 있다. 그 어떤 속박과 억압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속박과 억압의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인 나는 끊임없이 그 고통을 직시하고 있었다.
안나푸르나 란드룩 마을, 한 민가의 벽에 내걸려 있는 말방울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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