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3. 09:58ㆍ책 · 펌글 · 자료/역사
마오저뚱(毛澤東) 이야기 2 [중국현대사인물들]
1. 홍군 枯死 직전, 에드거 스노 기자를 불러들이다[마오쩌둥의 공공외교]
1960년 6월 중국을 방문한 에드거 스노(Edgar Snow). 당시 중국은 미국인들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에드거 스노는 예외였다. 국가주석 류샤오치와 대화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는 마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은 중국식 공공외교(公共外交)의 창시자였다. 1935년 10월 마오가 인솔하는 중앙홍군이 산시(陝西)성 북쪽 바오안(保安)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국민당은 물샐틈없이 봉쇄했다. “비적들은 소멸됐다. 극히 일부가 서북의 불모지에 들쥐처럼 숨어들었지만 소탕은 시간문제다”라는 기사가 연일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North China Daily News:字林西報)가 유일하게 “조잡하고 문화가 없는 비적집단”이라는 조롱과 함께 ‘경이’와 ‘기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모두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홍군은 고사 직전이었다. 2만5000리의 장정으로 기력을 상실한 데다 산베이(陝北)의 빈곤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주 집안엘 가봐도 변변한 살림살이나 양식이 없었다. 남쪽이 고향인 홑옷 차림의 홍군 전사들은 첫해 겨울을 나기조차 힘들었다.
무기와 실탄은 거의 고갈 상태였다. 소련에 원조를 구하기 위해 리셴녠(李先念)과 쉬샹첸(徐向前)을 파견했지만 중도에 국민당 기병대의 공격을 받아 빈손으로 돌아왔다. 장제스의 중앙군은 포위망을 점점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마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자신과 전우들이 걸어온 길을 후세에 전설로 남기고 당의 기본방침이 “항일 근거지와 통일전선의 구축”이라는 것을 외부에 알리고 싶었다. 중국의 작가나 기자들은 마오의 요구를 들어줄 형편이 못됐다. 비적들을 옹호했다간 귀신도 모르게 행방불명이 되고도 남았다.
유명기자 판창장(范長江)이 찾아 왔을 때도 제대로 된 보도가 나갈 리 없다며 깊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신문이나 방송도 없었지만 마오는 제3자, 그것도 제 발로 바오안까지 걸어 들어온 외국인 기자를 통해 홍군의 진면목을 대내외에 알릴 방법을 모색했다.
쑹칭링과 에드거 스노(1939년 홍콩).
마오는 양상쿤(楊尙昆)에게 정치부 산하에 편집위원회를 만들게 하고 사단급 이상의 간부들에게는 ‘홍군 장정기’를 쓰라고 지시했다. 동시에 상하이의 지하조직을 통해 쑹칭링(宋慶齡)에게 “믿을 만한 외국기자와 외국인 의사 한 명이 바오안을 방문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쑹은 항일을 주장하는 공산당에 우호적이었고 아는 외국인이 많았다. 국민당 정보기관도 외국인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쑹칭링은 상하이의 외국인 기자들을 부지런히 만났다. 다들 사교활동에 바빴다. 홍군 얘기를 꺼내면 만나 보기라도 한 것처럼 침들을 튀겼지만 정작 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쑹은 항일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적극 지지했던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와 외과의사 조지 하템을 접촉했다. 스노는 험상궂은 얼굴에 공산공처(共産共妻)하는 것으로 외부에 알려진 붉은 토비들을 만나 보겠다며 몇 년 전 장시(江西)소비에트 문턱까지 갔다가 쫓겨난 적이 있었다.
1929년 4월 국민정부 교통부장 쑨커(孫科)는 중국의 수려한 풍경을 해외에 알리고 미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공공외교를 편 적이 있었다. 에드거 스노에게 철도여행을 주선했다. 스노는 가는 곳마다 굶어 죽은 시체들을 목도했다. 풍광 따위는 볼 겨를도 없었다. 4년간 비가 내리지 않아 500여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 겪어본 중국인들은 미국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매하고 낙후한 민족이 아니었다. 중국인의 재앙을 외면하며 모험이나 즐기고 돈벌이에만 급급한 중국에 와있는 미국인들의 행태가 형편 없었다. 이들을 비판하는 글을 연일 발표했다.
문장이 신랄했다. “백인들의 반도”라며 공격을 한 몸에 받았다. 귀국할 생각까지 했지만 맘에 드는 여성을 만나는 바람에 그냥 눌러 앉아있었다. 쑹칭링의 제안을 받은 스노는 직접 예방주사를 놓고 암시장에 나가 브라우닝 권총을 구입했다. (계속)
[출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0> / 중앙선데이
3. 에드거 스노 만난 마오 “공산당원 될 줄 상상 못했다” [마오쩌둥의 공공외교]
장정 도중인 1935년 5월 다두허(大渡河)전투에서 17명의 홍군 전사들이 군복 한 벌, 일기장 한 권, 연필 한 자루, 젓가락 한 개를 상으로 받았다. 최고의 상이었다. 1949년 10월 신중국 수립을 선포했을 때 17명 중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에드거 스노는 1936년 여름 닝샤에서 이들을 만났다. 김명호 제공
1936년 6월 말, 에드거 스노는 시안(西安)에서 조지 하템과 합류했다. 중공 보위국장이 두 사람의 호송을 지휘했다. 관광객을 가장해 옌안(延安)에 도착한 후 장쉐량(張學良)의 부관이 동승한 차를 타고 마지막 검문소를 빠져 나왔다. 옌안은 아직 국민당이 지배하고 있었다.
국민당의 2인자 장쉐량과 공산당의 관계를 눈치챈 스노는 머리가 복잡했다. 『수호전』에 나오는 흑선풍 이규(黑旋風 李逵)처럼 험하게 생긴 사람이 마차를 몰고 와 무조건 타라며 짐을 빼앗았다. 어찌나 무섭던지 시키는 대로 했다.
7월 9일 소련 구역의 첫 번째 초소에 도착하자 말 위에 앉아있던 사람이 악수를 청했다. 얼굴이 수염투성이였다. “현상금 8만원에 지명수배된 저우언라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11일 밤 9시 스노와 하템은 저우의 안내로 마오쩌둥을 만났다. 마오는 부엉이처럼 모든 업무를 야간에만 봤다. 매일 밤 저녁을 먹고 나서 스노와 마주 앉아 노닥거리기를 즐겼다. 당시 마오의 부인은 허쯔전이었다.
허기가 질 때쯤이면 흑설탕에 버무린 살구와 기름에 볶은 고추를 내왔다. 어찌나 맛이 없고 매운지 혀와 코가 뭉그러지는 줄 알았다. 마오가 “후난 사람들은 매운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혁명가 기질이 다분하다. 이탈리아 사람들도 매운 것을 좋아한다. 고추를 먹는다”고 하자 스노가 말을 받았다. “무솔리니도 매운 것을 먹지만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 마오는 스노에게 호감을 느꼈다. 아무 때고 찾아와도 좋다는 특권을 줬다.
마오는 별난 사람이었다. 자신에 관한 얘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전우들 얘기만 해댔다. “린뱌오는 어떻고, 보꾸는 어떻고, 주더와 펑더화이는 어쩌고 저쩌고….” 계속 이런 식이었다. 스노가 대놓고 물었다. “당신은 폐병 3기의 노인과 다를 게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전 세계에 당신의 상황과 진면목을 알리고 싶다.”
마오는 “아직은 말할 기력이 있다. 우선 전선에 가봐라. 서부전선에 가면 홍군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와서 얘기하자. 홍군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후회한다”며 딴청을 피웠다. “조사를 하지 않은 사람은 발언할 권리가 없다”는 천하의 명언을 남긴 사람다웠다.
홍군의 주력부대는 바오안에서 2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스노와 하템은 간쑤(甘肅)·닝샤(寧夏) 일대를 다니며 홍군을 접촉했다. 장정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들은 떼지어 다니는 토비들이 아니었다. “예정보다 더 머물지 않았다면, 마오만 만나고 돌아왔다면, 홍군의 승리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홍군은 패할 리 없다. 정치적으로 잘 다듬어진 군대였다.”
스노가 바오안으로 돌아오자 마오는 토굴의 등잔 밑에서 본격적인 공공외교에 들어갔다. 10여 차례에 걸쳐 소련 정부의 정책과 항일전쟁의 형세,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관한 것 외에 그동안 누구에게도 해 본적이 없었던 성장 과정과 결혼에 얽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꿈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공산당원이 되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인간의 의지보다 강하다. 현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결국 내 발로 공산당 조직에 참가했다.”
스노는 통역하는 사람이 하는 말을 영어로 받아 적어 통역에게 건넸다. 통역은 중국어로 옮겨 마오에게 수정을 요청했다. 마오의 검열이 끝나면 통역은 다시 영어로 옮겨 스노에게 전달했다.
여름이기도 했지만 방 안에는 온갖 벌레들이 들끓었다. 마오는 간간이 옷을 벗어 들고 나가 한바탕 훌훌 털곤 했다. 평생 목욕을 해본 사람 같지 않았지만 정교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중국의 미래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칠지 잘 알고 있었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1> / 중앙선데이
4. 에드거 스노 ‘중국의 붉은 별’ 홍군에 날개 달다 . [ 마오쩌둥의 공공외교 ]
에드거 스노는 중국의 문화인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1938년 봄, 홍콩에서 열린 만화가 딩충(오른쪽 둘째)의 항일전쟁 기금 마련 전시회에 참석한 스노(왼쪽 둘째). 김명호 제공
1936년 10월 중순, 베이핑(北平)으로 돌아온 에드거 스노는 미국 영사관 강당에서 서북기행(西北紀行)을 발표했다. 베이징대·옌징대·칭화대 학생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스노는 일본과의 전쟁을 주장하던 12·9 학생시위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다.
참석자들은 스노가 16㎜ 필름에 담아 온 마오쩌둥과 주더, 펑더화이, 청년장군 린뱌오, 테러리스트 저우언라이 등 현상수배자들과 홍군의 진면목을 보고 열광했다. 홍군을 비적으로 몰아붙이던 국민당의 선전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2개월 후 시안사변이 발생했다.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이 최고지도자 장제스를 감금해 국공합작과 항일전쟁을 요구한 기상천외한 사건이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의 요청을 수락했고 마오쩌둥과 홍군은 기사회생했다. 마오는 바오안(保安)을 떠나 옌안(延安)에 정착했다. 홍군은 정규군 대접을 받았다. 이제 옌안은 현대판 양산박이 아니었다. 당당한 항일 근거지였다.
이듬해 여름(7월 7일) 중·일 양국이 전면전에 돌입한 직후 스노는 런던에서 『Red Star Over China(중국의 붉은 별)』를 출간했다. 상하이의 공산당 비밀당원들은 발 빠르게 중국어판을 만들어 시중에 내놓았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고사 직전의 공산당이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며 만든 홍보물이었다면 불쏘시개감으로나 딱 알맞을 종이 뭉치였지만 이건 경우가 틀렸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보도로 명성이 자자한 미국 기자가 그것도 제 발로 홍군의 근거지를 찾아가 4개월간 현장을 누볐다니 내용에 거짓이 있을 리 없었다.
반응은 해외에서 먼저 왔다.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캐나다 의사 노먼 베순을 포함한 외국의 의사와 기자, 작가들이 옌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인도에서는 중국 의료지원단을 구성했고 미국 내 화교들은 성금을 모아 옌안에 ‘로스앤젤레스 유아원’을 설립했다. 한결같이 스노의 책을 읽고 실상을 알았다는 말을 한마디씩 했지만 총연출자가 마오쩌둥이라는 사실은 알 턱들이 없었다.
1936년 7월 마오쩌둥의 권유로 바오안 외곽의 홍군 근거지 취재에 나선 에드거 스노(오른쪽). 당시 서북 지역의 이동 수단은 말이었다.
국내는 더 요란했다. 이상을 추구하는 청소년들과 정치와 도덕이 일원화된 사회가 가능하다고 믿는 문화인들은 옌안에 가기 위해 시안행 열차를 탔다. 전국의 대학생 4만2922명 중 1만여 명도 캠퍼스에서 자취를 감췄다. 항일 전쟁 기간 약 4만 명의 지식인이 붉은 도시에 바글바글했다.
아편·술·도박·여자 외에는 관심이 없는 시궁창 같은 남편들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던 여인들과 대도시로 나왔다가 온갖 꼴불견은 다 구경한 여류 연예인 중에도 장칭(江靑)처럼 결단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사람들이 많았다. 계급·매춘·불량배, 툭하면 눈 부릅뜨고 잘난 척이나 해대는 정객과 공직자들이 없다는 항일성지(抗日聖地) 옌안은 낙원이었다. 스노의 책에 그렇게 써 있었다.
팔로군(八路軍)으로 개편된 홍군의 시안 연락사무소는 하루 평균 180명씩을 옌안으로 인솔했다. 남녀 할 것 없이 녹색 군복에 집에서 들고 나온 물건들을 꿰차고 행군하는 이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정치범이나 사상범으로 체포되거나 수배된 경험이 있는 반역형 지식인과 입 한 번 벙긋한 죄로 죽도록 얻어맞고 나온 불평객들은 끝까지 잘 버텼지만 남의 돈 떼어먹거나 형사범으로 도망 다니다 옌안을 피난처로 택한 사람들은 오래 붙어 있지 못했다.
최근 공직에서 은퇴한 전직 관료 몇 명이 올해를 중국 공공외교의 원년으로 선포하자 스노와 함께 바오안에 갔던 조지 하템의 아들이 “74년 전 마오가 바오안의 토굴에서 스노와 하템을 처음 만난 1936년 7월 11일 오후 9시가 중국 공공 외교의 기점”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틀린 주장이 아니다. 『중국의 붉은 별』은 대전략가 마오쩌둥이 자신과 홍군을 중국과 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한 공공외교의 산물이었다.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2>/ 중앙선데이
5. 마오쩌둥, 외교관 망명 막으려 인민군서 대사 차출 [외교관차출]
1955년 5월, 반둥회의를 마치고 자카르타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관원들과 함께한 총리 저우언라이(밑에서 둘째 줄 한가운데 넥타이 맨 사람)와 부총리 천이(저우언라이 왼쪽). 김명호 제공
1949년 1월 19일, 내전 승리를 앞둔 마오쩌둥(毛澤東)은 외교문제에 관한 세부사항들을 중공 중앙위원회에 서면으로 지시했다. 말미에 “중국은 독립국가다. 그 어떤 국가나 연합국(유엔)의 내정간섭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 중국 경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중국 인민과 인민의 정부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구(舊) 중국의 굴욕외교와 확실한 선을 그었다.
10월 1일 사회주의 중국을 선포하는 자리에서도 “본 정부는 전국 인민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한다. 상호 평등과 쌍방의 이익을 준수하고, 영토주권의 원칙을 존중하는 국가들과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마오의 외교정책은 부뚜막을 새로 만들고,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 후에 다시 손님을 초대하고, 사회주의 일변도(一邊倒)를 견지한다는 세 가지였다.
1949년 3월 허베이(河北)성 시바이포(西柏坡)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7차 2중전회에서 신중국 외교방침을 선언하는 마오쩌둥
신(新)중국 선포 1개월 후인 11월 18일, 북양정부 외교부 소재지였던 ‘둥단구(東單區, 현재의 東城區) 외교부가(街) 31번지’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현판식이 열렸다. 판공청(辦公廳) 주임 왕빙난(王炳南)이 성립대회를 주재했다. 부(副)부장 리커농(李克農)이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소개했다.
저우의 인사말은 훈시라기보다 덕담 수준이었다. “모든 기관이 성립대회를 연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이게 바로 형식주의다.” 회의장에 폭소가 터졌다. “리커농 부부장의 착오를 수정하겠다. 나는 외교부장이다. 앞으로 외교부 사람들은 나를 총리라 부르지 마라. 부장이라고 불러라.” 저우는 국무원 총리와 외교부장을 겸하고 있었다.
신중국 외교부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저우언라이가 사무용품을 새로 구입하지 말라는 바람에 북양정부가 쓰던 비품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자동차도 없었지만 자전거 하나만은 당시 최고급이었던 봉황(鳳凰)표 20대를 홍콩에서 구입해 타고 다녔다. 대우는 형편없었다. 한 달 봉급 3위안(元), 싸구려 신발 한 켤레 값이었다. 매달 아이스케키나 과자 사먹기에도 빠듯한 돈을 받다 보니 끼니는 모두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해방 초기 가장 흔한 식료품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버터였다. 1년 열두 달 하루도 빠짐없이 좁쌀 밥에 버터를 넣고 비벼 먹던 신중국 초기 외교부 근무자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버터만 보면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4년이 지나자 야채 볶음과 닭고기들이 가끔 나오고 제대로 된 봉급을 받기 시작했다.
외교부는 1년 만에 17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중 6개는 의식 형태가 완전히 다른 자본주의 국가였다. 영국·파키스탄·노르웨이 등 7개국과도 수교를 위한 회담이 진행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1차로 해외에 파견할 특명전권대사 15명을 인민해방군 지휘관들 중에서 차출했다. 국민당 시절 외교 업무에 종사했던 외교관들이 많았지만 이들을 해외에 내보낸다면 망명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농담이라며 “왜 장군들을 파견하려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이 사람들은 도망갈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번도 빨아 본 적이 없는 두툼한 군복에 짐 보따리를 둘러멘 사람들이 꾸역꾸역 외교부로 몰려들었다. 장정과 항일전쟁, 국공전쟁을 거치며 많게는 10여 만에서 적어도 2만 명 이상의 전투병력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장군들이었다. 개중에는 베이징(北京)을 처음 와 본 사람도 있었지만 평생 주눅이라는 것을 들어 본 적 없는 듯 행동거지에 거침이 없었다. 따라온 부인들의 행색도 남편들과 비슷했다.
저우언라이는 온 몸에서 화약냄새가 가시지 않은 미래의 전권대사와 부인들을 위해 호텔 한 개를 비워놓고 외교부 강당에 ‘대사 훈련반’을 개설했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2> 중앙선데이
6. “총칼 대신 입으로 싸워라” … 마오, 군 출신 대사 설득 작전 [외교관차출]
대표적인 장군 출신 외교관 황전(黃鎭)은 화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대사와 프랑스대사, 초대주미연락사무소 소장 등 5개국 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역임했다. 둘째 사위인 외교 담당 국무위원 다이빙궈(戴秉國)도 프랑스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다. 1964년 6월, 엘리제궁에서 드골 프랑스 대통령(가운데)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뒤 기념촬영을 한 중국의 초대 주프랑스대사 황전. 김명호 제공
1950년 봄, 제3야전군 7병단 정치부 주임 지펑페이(姬鵬飛)는 외교부에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왕년의 직속상관 쑤위(粟裕)를 찾아가 군대에 남아 있게 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우리는 장군이다. 국가가 요구할 때 선택할 권한이 없다”는 답을 듣자 군말 없이 베이징을 향했다.
저우언라이의 부름을 받은 제2병단 참모장 겅뱌오(耿飇)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겠다. 외교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어 걱정이다”며 한숨만 내쉬었다.
장정 시절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던 중앙군사위원회 정치부 주임 황전(黃鎭)은 부인 주린(朱霖:현 국무위원 다이빙궈의 장모)이 축하는커녕 “혼자 나가서 외교관 노릇 열심히 해라. 나는 국내에서 할 일이 많다”는 말을 하자 난감했다. 겨우 달래 이불 보따리 2개와 자녀들을 데리고 외교부에 도착했다.
유격전과 정규전을 두루 거친 한녠룽(韓念龍)과 황포군관학교 1기 출신인 난징(南京)군구 경비사령관 위안중셴(袁仲賢)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작전 지역을 옮겨 다니던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전쟁과 외교를 교묘히 결합시켰다. “여러분은 새로운 전쟁터로 나간다. 외교는 전쟁과 똑같다. 그동안 총칼을 들고 싸웠지만 이제부턴 글과 입으로 싸워야 한다. 작전 지역 이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외교무대가 전쟁터와 같다는 말을 들은 장군들은 그제야 귀가 솔깃했다. 전쟁이라면 자신 있었다. 외국어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에겐 “우리가 언제 외국어 잘해서 전쟁에 이겼느냐. 상대방이 말할 때 웃으며 고개만 까딱거리면 된다”며 안심시켰다.
가장 중요한 사항 중 하나인 ‘신임장 제정’에 관한 설명은 주린이 “대단한 건 줄 알았더니 소개장이네”라며 한마디 하자 다들 “맞다”고 박장대소하는 바람에 쉽게 끝났다. 따지고 보면 신임장이나 소개장이나 그게 그거였다.
각 방면의 전문가와 학자들이 국제법·연합국헌장·면책특권 등 외교관이 꼭 알아야 될 것들을 주입시키고 신임장·비망록·전보·회담기록 등의 전시회도 열었다. 모두 난생 처음 보고 듣는 것들이었다. 장군들의 시야가 서서히 넓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생활습관이었다. 호텔에 머물며 훈련을 받던 장군들은 아침마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스프링이 달린 침대는 옷 입은 채로 땅바닥에서 자는 것만도 못했다. 소파는 앉으면 몸이 푹 꺼지고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방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도 이상했다.
양식 먹는 법과 사교춤은 정말 배우기가 힘들었다. 양복에 넥타이 매고 포크와 나이프질 하자니 숨이 막혀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질 않았다. 두부 한 판과 찐빵 10개를 단숨에 먹어 치워도 탈 난 적이 없었던 장군들은 화장실 드나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쟁 시절 틈만 나면 모여 춤을 췄지만 마룻바닥 위에서 추는 춤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부인들은 더 힘들어했다. 포성 속에서 성장한 전사들에게 파마와 얼굴 화장, 치파오와 굽 높은 신발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예절교육 담당자가 “남편은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외교관 부인은 복장·행동·말투가 남달라야 한다. 남편이나 과거의 동지들이 좀 모자란 행동을 했다고 소리부터 버럭 지르는 교양 없는 행동은 정말 고쳐야 한다”는 말을 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주린이 “우리는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혁명에 참가했다. 부속품 노릇 하라니 어이가 없다. 이건 모욕이다”며 격앙하자 “대사 부인 하느니 이참에 이혼하고 군부대로 돌아가겠다”는 발언들이 속출했다. 여전사들은 총리 면담을 요구했다.
저우언라이는 부인 덩잉차오에게 도움을 청했다. 덩은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자 생활할 때 치파
오를 입고 나갈 때마다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뾰족한 신발 신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굴러떨어진 적도 있었다”며 부인들을 진정시켰다.
신중국 초기에 군대에서 차출한 장군 출신 대사들의 평균 연령은 41세였다. 초대 북한대사 니즈량(倪志亮)이 49세로 제일 많았고 불가리아대사 차오샹런(曺祥仁)은 35세로 제일 어렸다. 초대 주소대사 왕자샹(王稼祥)은 여권 없이 모스크바로 부임했다. 만드는 것을 미처 생각 못했는지 아니면 놓고 갔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출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3> / 중앙선데이
7. 마오쩌둥, 소련 방문 원했지만 스탈린에 3번 거절 당해 [대소련 외교]
1949년 12월 16일 모스크바의 키로프 역에 도착한 마오쩌둥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몰로토프(오른쪽 둘째), 국방상 불가린(오른쪽 첫째), 외무성 차관 그로미코 등의 영접을 받았다. 마오의 왼쪽은 초대 소련 주재 중국대사 왕자샹(王稼祥왕가상). 김명호 제공
1947년 국·공 전쟁이 치열했을 무렵부터 마오쩌둥은 소련 방문을 희망했다. 스탈린은 3차례나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체를 알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자 같기도 하고 민족주의자 같기도 하다. 뭐라고 정의 내리기 힘든 사람”이라며 미래의 중국 지도자를 믿지 않았다. 1949년 2월 인민해방군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마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정치국원 미코얀을 중국에 파견할 정도였다.
1949년 12월 21일이 스탈린의 70번째 생일이었다. 마오쩌둥이 경축연에 참석하겠다고 하자 스탈린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전권대표를 보내 극비리에 추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선물 준비는 중앙 판공청 주임 양상쿤(楊尙昆·양상곤)의 몫이었다. 소련에서 막 돌아온 장칭(江靑·강청)이 “남편이 갖고 갈 선물”이라며 직접 나섰다. 산둥(山東)배추·대파·무·항저우(杭州) 용정차·산시(山西)의 죽순·징더전(景德鎭) 도자기 등을 스탈린의 생일선물로 선정했다.
양상쿤의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외국인에게 보내는 선물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며 버럭 화를 냈다. 직접 ‘장시(江西·강서) 감귤’과 ‘산둥 대파’를 한 부대씩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장시성 감귤은 워낙 맛있는 과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고라도 산둥성 대파의 의미를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오쩌둥은 섭섭했던 일들을 자기식대로 푸는 사람이었다. 상대방이 알건 모르건 개의치 않았다. 산둥 사람들은 피 튀기는 싸움을 하다가도 상대가 대파를 권하면 즉시 멈춰야 하는 불문율이 있었다. 스탈린은 중국혁명에 걸림돌이 된 적이 많았다.
훗날 자신의 착오를 인정했지만 미국의 개입을 우려한 나머지 인민 해방군의 양쯔강 도하를 반대했고, 신중국 선포 두 달이 지났건만 국민정부와 체결한 우호조약의 폐기를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저우언라이가 “외교무대에 나서려면 복장도 중요하다. 예복은 흑색이어야 한다. 구두와 양말도 마찬가지”라고 하자 “뭐 이렇게 복잡하냐”고 투덜대면서도 그대로 하게 내버려뒀다. 마오는 검은색 옷을 싫어했다. 헐렁헐렁한 회색 옷을 제일 좋아했다.
마오쩌둥의 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이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사기(史記)·노신전집(魯迅全集) 외에 톨스토이, 고골리 등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챙겼다.
12월 6일 오전 8시 9002호 열차가 베이징을 출발했다. 루스벨트가 장제스에게 선물했던 호화열차였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 한번 이용했을 뿐, 장제스는 올라탄 적이 없었다.
수행원도 단출했다. 경호원과 비서들 외에 눈에 띄는 사람이라고는 당내 이론가 천보다(陳伯達·진백달)가 다였다. 후일 수행원 중 한 사람이 당시 마오쩌둥의 심경을 헤아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주석은 스탈린에게 냉대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굴욕을 감수할 태세였지만, 당이나 국무원의 고위직들에게는 망신당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중앙 군사위원회는 출발 전부터 전군에 전시상태를 선포하고 해방군 3개 사단을 동원해 철로연변을 봉쇄했다. 마오쩌둥을 태운 열차가 통과해야 할 동북 일대에는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국민당 특무요원들이 잠복해 있었다.
12월 9일 마오쩌둥의 전용절차가 국경도시 만저우리(滿洲里)에 들어섰다. 스탈린은 외교부 차장 편에 자신의 전용열차를 파견했다. 이날 밤 마오는 난생 처음 국경을 넘었다.
16일 정오 모스크바에 도착한 마오쩌둥은 안색이 굳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스탈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4> / 중앙선데이
8. 스탈린 생일잔치서 기분 상한 마오 “문 닫아걸어라” [대소련 외교]
1949년 12월 29일 밤, 스탈린 생일 기념공연을 관람하는 마오쩌둥과 스탈린. 이날 마오는 표정을 통해 불만을 드러냈다.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의 1차 소련 방문은 국제사회에 수많은 억측거리를 제공했다. 스탈린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는 사람이 2개월 이상 머물며 행적이 묘연했기 때문이다. 대단해 보이는 일일수록 진상을 알면 우스꽝스러운 경우가 허다하다. 베일투성이였던 마오의 소련 방문도 희극적인 요소가 강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소련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오가 ‘소련 일변도’를 천명했을 때 지식인과 민주인사,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들 거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색 제국주의와 홍색 제국주의, 색깔만 틀릴 뿐 미국과 소련은 다를 게 없었다.
중국을 놓고 뭔가 도모하느라 눈을 반짝거리는 것은 똑같았다. 일본이 지배했던 동북쪽에서는 “코 작은 놈들 떠난 자리에 코 큰 것들이 들어왔다”며 공개적인 비난이 비일비재했다.
스탈린도 인정했듯이 1945년 8월 14일 중국국민정부와 소련이 맺은 ‘중·소 우호동맹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를 폐기시키고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 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민족을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느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공청(공산주의청년단)의 설립자이며 중공 5대 서기 중 한 사람이었던 런비스(任弼時·임필시)를 방문한 마오쩌둥. 당시 런비스는 소련에서 병을 치료 중이었다. 5개월 후 사망했다
12월 18일 인민일보에 마오의 이틀 전 모스크바 도착 모습이 크게 실렸다. 중국인들은 울화통이 터졌다. 모였다 하면 스탈린 비난에 열을 올렸다. 공·상계와 지식인 사회가 특히 심했다. “스탈린은 예절을 모르는 사람이다. 직접 영접하지 못하면 말렌코픈지 뭔지 하는 후계자라도 내보내는 게 정상이다.”
수행원 중에 당이나 국무원의 고위직이 없다 보니 “주석이 소환당한 게 틀림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신문국(신문출판총서의 전신)의 성명도 묘했다. “소련 측은 관례대로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스탈린이 일본 외무상을 직접 영접한 적이 있다.”
마오쩌둥은 도착 당일 오후 6시 크렘믈린 궁에서 스탈린과 마주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얻어맞고 따돌림당했던 사람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할 곳이 없었다”고 운을 떼자 스탈린이 화답했다. “중국 혁명은 승리했다. 승리자는 견책 대상이 아니다. 먼 길을 왔으니 빈손으로 갈 수 없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라.”
마오의 입에서 “보기에 좋고, 맛도 좋은 것”이란 말이 나왔다. 전형적인 중국식 표현이었다. 스탈린은 무슨 말인지 몰랐다. 통역이 진땀을 흘리며 “새로운 조약의 체결과 조약문의 내용”을 의미한다고 부연했다.
스탈린은 ‘얄타 협정’을 거론하며 난색을 표했다. 국민정부와 체결한 조약을 당분간 유지할 태세였다. 어조가 강경했다. 마오가 조약 얘기를 꺼내면 중간에 말을 끊고 엉뚱한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몇 달 전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가 소련을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오면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분명히 말한 적이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마오는 기분이 확 상했다. 정작 만나면 딴소리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심부름하는 사람들만 데려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월 21일, 모스크바 대극장에서 스탈린의 70세 생일잔치가 열렸다. 저녁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계속됐다. 스탈린과 나란히 앉은 마오는 시종 굳은 얼굴로 박수만 쳤다. 참석자들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연호해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온 마오는 “음식은 맛있어야 하고, 공연은 재미있어야 한다. 박수 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이라며 짜증을 부렸다. 이날 6시간을 붙어 있었지만, 스탈린은 조약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제는 마오가 솜씨를 보일 차례였다. “문을 닫아걸라”고 지시했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5> / 중앙선데이
9. 목표는 중·소 신조약 … 마오, 스탈린 압박 위해 ‘농성’ [대소련 외교]
1950년 1월 20일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가 대규모 방문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도착, 본격적인 중·소 회담이 시작됐다. 같은 날 베이징에서는 신문총서(新聞總署) 서장 후차오무(胡喬木) 명의로 “중·소 관계를 이간질시키기 위해 온갖 요사스러운 말들을 날조했다”며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도착 당일 레닌묘 참배에 나선 저우언라이. 김명호 제공
스탈린의 칠순 잔치가 끝나자 모스크바에 왔던 각국 지도자들은 귀국을 서둘렀다. 마오는 소련의 발전상을 둘러보고 요양까지 한 후에 돌아가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급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12월 24일 밤 스탈린 별장에서 두 번째 회담이 열렸다. 마오는 밤만 되면 정신이 맑아지고 온갖 기억이 되살아나는 사람이었다. 5시간 반 동안 일본·베트남·인도와 서구 여러 나라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소리에 맞장구 치며 듣고 싶은 얘기가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26일 마오는 모스크바에서 신중국 선포 후 첫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그로미코와 베리야가 찾아왔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오후 늦게 국민당 공군이 상하이를 폭격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옛 친구 장제스가 보낸 생일 선물이겠거니 했다.
마오는 베이징의 류샤오치에게 전보를 보냈다. 류는 소련 사정에 밝았다. 평소 소련 얘기만 나오면 갖은 잘난 척을 다했다. “스탈린 동지는 조약이라는 용어를 꺼내기조차 싫어한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치국원들과 의논해 알려주기 바란다.” 이틀 후 답전이 왔다. “스탈린이 그렇게 강경하다면, 더 이상 조약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생일 경축연도 끝났으니 귀국하는 게 좋겠다.”
무슨 전문들을 또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오는 류샤오치의 의견을 무시했다. 지구전에 돌입할 준비를 갖췄다. 잠자리가 제일 중요했다. “몸이 꺼져 잘 수가 없다”며 최고급 침상을 마당으로 들어냈다.
중국대사관에 가서 나무 판때기 구해 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화장실도 맘에 들지 않았다. 갈 때마다 혼자서 짜증을 부렸다. 사방이 콱 막혀 답답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양변기라는 물건은 보면 볼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오는 “냄새가 사색을 방해한다”며 화장실에서 대·소변 보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잡초가 우거지거나 시원하게 탁 트인 곳을 좋아했다.
마오는 방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수행원들도 외부 출입을 못하게 했다. 중국을 떠날 때 들고 온 화선지가 많았다. 밤새도록 붓글씨만 써대다가 새벽이 되면 잠자리에 들었다. 글씨는 쓰는 족족 찢어 버렸다.
통역 중 한 사람이 소련 영화를 구해왔다. 마오는 ‘푸카초프’ ‘나폴레옹’ ‘표트르 대제’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레닌그라드 방문과 모스크바 지하철, 집단농장 참관 등 소련 측에서 짜놓은 일정이 있었지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며 공개적인 활동을 거부했다.
스탈린은 난처했다. “생일 축하하러 왔다는 사람이 볼일 끝났으면 가야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외부 활동이라도 해야 할 게 아니냐”면서 낯을 찡그렸다. 베이징에서부터 수행했던 코왈로프가 찾아와 간곡하게 외출을 권했다. 마오는 주먹으로 탁자를 쳐댔다. “지금 내게 주어진 임무는 세 가지밖에 없다. 밥 먹고, 잠자고, 똥·오줌 만드는 일이다.” 이어서 “왕바단(王八蛋)”이라고 내뱉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중국 최고의 욕이었다.
마오의 행적이 묘연해지자 서방세계의 정보기관들은 긴장했다.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언론 매체들은 신이 났다. “스탈린이 동북 3성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마오는 귀국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한다. 류샤오치와 주더(朱德)가 정변을 일으켰다”며 연일 방정들을 떨어댔다. 그럴듯한 내용들이었다.
소련 측은 당황했다. 영국의 한 통신사가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연금 당했다”고 전 세계에 타전하자 주소 대사 왕자샹에게 마오의 기자간담회를 조심스럽게 권했다. 마오는 모처럼 씩하고 웃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계속)
[출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6> / 중앙선데이
10. 마오 “신조약 위해 왔다” … 언론 앞에서 스탈린에 결정타. [대소련 외교]
1950년 2월 14일 오후 6시, 크렘린 궁에서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中蘇友好同盟互助條約) 조인식이 열렸다. 소련 측에서는 말렌코프(왼쪽에서 5번째), 배리아(왼쪽에서 3번째), 흐루쇼프(오른쪽에서 7번째) 등 정치국원 전원이 참석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약문서에 서명하는 중국 측 수석대표 저우언라이.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은 인구 7억과 무궁무진한 자원을 보유한 신중국의 국가원수였다. 제아무리 스탈린이라 할지라도 “생일 경축연에 온 마오쩌둥을 모스크바 교외에 연금했다”는 소문이 서방 세계에 난무하는 것을 등한시할 수 없었다.
스탈린의 중국에 대한 이해는 한계가 있었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세계를 향해 속내를 드러내겠다”는 마오의 전략을 꿰뚫어 볼 정도가 아니었다. 마오가 직접 나서서 한마디 던지는 것 외에는 온갖 억측에 찬물을 뿌릴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마오는 소련 측이 제의한 기자간담회를 마지못한 듯이 받아들였다.
마오는 방문 목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조약 체결이 최우선임을 분명히 밝혔다. “중·소동맹조약과 무역협정 등 해결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 많다. 소비에트 국가의 경제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도시와 지방도 샅샅이 둘러보려 한다. 체류기간이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스탈린 생일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1950년 1월 2일,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마오쩌둥과 타스통신 기자의 대담 내용이 실렸다. 스탈린도 마오의 방문 목적이 보도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신조약 체결 문제를 토의할 의향이 있음을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오는 모르고 있었지만, 대만을 포기하고 중국내전에서 손을 떼겠다는 미국의 정책도 스탈린의 태도에 변화를 줬다. 소련이 신중국과 새로운 조약을 체결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라고 파악하자 더 이상 얄타협정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그날 밤 8시, 스탈린의 지시로 몰로토프와 미코얀이 마오의 숙소를 찾아왔다. 중·소조약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마오는 3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첫째는 신조약의 체결, 둘째는 예전에 소련과 국민당 정부가 맺은 중·소우호조약에 관해 두 나라 당국자들이 의견을 나눴다는 공동성명 발표, 셋째는 양국 관계에 관한 요점을 몇 자 적어서 서명이나 하고 끝내버리자”였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뜻이라며 저우언라이가 회담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오는 것을 수락했다. 마오는 “구조약을 대체하는 신조약이냐”고 재차 확인했다. 몰로토프는 고개를 끄떡였다.
마오는 꼼꼼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내일 아침 베이징으로 전보를 치겠다. 5일간 준비해서 9일 날 출발하면 19일 날 도착할 수 있다. 20일 밤부터 회담에 들어가자.” 이어서 레닌 묘 참배와 레닌그라드, 고리키 시 방문 의사를 밝혔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공병창, 지하철, 집단농장 참관 외에 정치국원들과의 만남을 제의했다.
마오는 신생 정치대국의 최고 지도자로 손색이 없었다. 스탈린의 양보를 받아내기 전까지 혁명동지 런비스(任弼時·임필시)의 병문안 외에는 단 한번도 외출하거나 단독으로 소련 지도자들을 만나지 않았다. 지병 치료차 소련에 장기체류 중이던 막내아들도 아버지의 그림자조차 볼 기회가 없었다.
중·소회담이 한참 진행 중이던 1월 30일, 스탈린은 그간 미적거리던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의했다. 마오에겐 일언반구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당시 김일성도 모스크바에 와 있었는지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7>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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