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3. 09:54ㆍ책 · 펌글 · 자료/역사
[술라이만] 오스만 터키여, 술라이만이여!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한국군이 파병될지 모르는 이라크 술라이마니야의 옛 주인공
… 탁월한 입법가였던 화려한 황제
"한국군이 파병지로 검토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지역 술라이마니야와 에르빌은 모두 파병의 제1원칙인 파병 장병의 안전 측면에서 과거 파병 후보지인 키르쿠크보다 양호하다… 술라이마니야는 에르빌보다 면적이 넓지만, 터키계인 투르크멘인이 적어 쿠르드-투르크멘의 민족 갈등에 휘말릴 가능성이 적다.” (2004년 4월19일 군 관계자)
빈 공방전, 전 유럽을 전율시키다
술라이마니야라는 이름이 다가오고 있다. 이라크 파병 예정지로 급부상하면서 온 국민의 지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술라이마니야는 어떤 곳일까? 과연 거기선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역사를 보면 다른 어떤 곳보다 술라이마니야로 가는 것이 대단히 상징적인 성격을 띤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어느 의미에선 한국군이 중동의 뜨겁고 어두운 역사에 본격적으로 빨려들어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술라이마니야는 바로 오스만 터키의 최전성기를 연 술탄 술라이만을 기려 지명을 붙인 곳이다. 이슬람 역사는 술탄 술라이만에 대한 기본정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이름: 야우즈 술탄 셀림(야우즈는 ‘냉혹한 자, 탁월한 자’라는 뜻)
술라이만은 1495년 흑해의 해안도시 트라브존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가 바로 2002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 이을용 선수가 진출했던 트라브존스포르의 홈코트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상륙한 지 채 3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술라이만은 대단한 행운 속에서 오스만 터키의 최고 권좌에 오를 수 있었다. 혼자 남은 아들이었기에 아무런 승계 분쟁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오스만 터키는 할아버지대의 230만㎢에서 아버지대의 650만㎢로 확장돼 있었고, 홍해와 동지중해의 해상권도 대부분 확보하고 있었다. 제국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와 무력을 쌓아놓은 채 유능한 통치자의 등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위 초기 이집트계의 맘루크조를 재건하려는 다마스커스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한 뒤 술라이만은 1521년 발칸반도에 대한 전격적인 원정에 나서 그때까지 난공불락이라던 베오그라드와 주변의 요새들을 점령했다. 기독교 문명권의 중동 공격이라 할 수 있는 ‘십자군 원정’에 대응하는 이슬람의 유럽 공격인 ‘지하드’(성전)가 본격화한 것이다.
그해 가을에는 다시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성 요한 기사단이 220여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로도스섬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동지중해와 발칸반도에 성공적으로 거점을 마련한 술라이만은 드디어 유럽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헝가리와 일대 격전을 벌인다.
오스만 군단은 모하치 평원에서 헝가리군을 자기 진영 깊숙이 유인한 뒤 대포부대의 집중 포화와 정예병의 기습공격으로 몰살시켰다. 헝가리왕 루트비히 2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유럽대륙의 중심부인 헝가리는 그 뒤 145년 동안 오스만 터키의 속국이 된다.
당시 오스만 군단은 화약을 이용한 대포와 소총을 대대적으로 활용해 무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술탄은 여세를 몰아 1529년 12만명의 대군에 300문의 대포를 동원해 오스트리아까지 진출해 빈을 포위했다.
유럽 최강국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일대 위기에 놓인 것이다. 결국 오스만 군단은 보급 문제와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철수했지만, 이 빈 공방전은 전 유럽을 전율시켰다. “오스만 터키는 오늘날 지구상의 공포이다.”
그에게 치명적 약점이 있었으니…
술라이만의 군대는 진격을 계속해 독일 바바리아 지방과 폴란드 국경까지 육박하고, 드네프르강 하구까지 진출했다. 이와 함께 동쪽의 이란계 사파비 왕조를 공격해 그 수도 타브리즈를 점령하기도 했으며, 아제르바이잔, 카프카스 지방, 이라크를 정복한 것도 술라이만 때의 일이다.
육지에서 오스만 군단이 위세를 떨치는 동안 오스만 함대도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누볐다. 1538년 122척의 오스만 함대가 알바니아 해안 프레베자에서 200여척으로 이뤄진 기독교 국가의 연합함대를 격파했다. 그 뒤 지중해 해상권을 바탕으로 알제리 등 아프리카 북부를 점령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는 물론 프랑스의 니스, 멀리는 대서양의 아프리카쪽 관문인 세우타까지도 오스만 함대의 작전지역이었다. 술라이만은 이런 제해권을 바탕으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교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확보하는가 하면, 교역과 관련된 이권을 지렛대로 유럽국가들의 반오스만 통일전선을 교묘하게 분열시키는 외교전을 성공시켰다.
그는 재위 기간에 모두 12차례의 대원정을 벌였으며, 스스로 전쟁터에서 보낸 기간도 10년에 이른다. 이런 업적에 대해 후세 역사가들은 ‘술라이만 화려한 황제’(Suleyman, the Magnificent)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 1521년 8월 오스만 군단의 모하치 전투. 대표부대의 집중 포화와 정예병의 기습 공격으로 헝가리군을 무릎 꿇게 했다
그는 종교와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들 사이에 정의가 존재해야 하고, 권력자 역시 국민에 대한 정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을 관철시켰다. 오스만 터키가 ‘유럽의 병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면서도 650년 동안 유지된 배경에는 이런 법에 의한 통치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공을 기려 이슬람 역사가들은 그에게 ‘카누니’(입법자·The Lawgiver)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는 동시에 세계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걸출한 건축물을 후세에 남기는 데 성공했다. 이스탄불에 있는 술라이마니야 모스크와 루스템 파샤 모스크를 비롯해 예루살렘의 아크사 모스크 등이 다 그의 시대 작품이다. 오늘날에도 세계의 관광객이 끊임없이 이 걸작들로 몰려들고 있다.
각 민족의 연고권이 복잡하다
그러나 이런 술라이만도 어쩌지 못하는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하나는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였다. 그는 총애하는 황후 록셀란이 후계 분쟁에 관여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결국 궁정은 술탄의 후계를 둘러싼 모략과 암투 그리고 피로 물들어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점차 제국은 통치권이 이완되면서 내부 분열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나아가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권을 장악한 오스만 터키는 이슬람 시아파의 지도국가인 이란-사파비 왕조와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사파비 왕조는 군사력이 현저하게 열세일 때는 후퇴하면서 식량 등을 불태우는 초토 전술로 버텨나갔다. 서부의 유럽전선에도 대응해야 했던 오스만 터키는 동부의 사파비 왕조를 끝내 복속시키지 못한 채 평화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555년 아마시야 협정을 맺어 술라이만은 터키 동부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차지하는 대신, 아제르바이잔과 카프카스에 대한 권리를 사파비 왕조에 양도했다. 술라이마니야는 바로 이런 과정에서 태어난 이름이다. 오스만 터키가 사파비 왕조와 맞바꾼 지역에 술탄 술라이만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이란과 터키 그리고 이라크를 번갈아 주인으로 섬겨야 했던 땅… 그러면서도 민족·종교적으로는 쿠르드(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도)를 비롯해 투르크멘(수니파)과 수니파 아랍인, 시아파 아랍인 그리고 시아파 이란인이 뒤섞여 사는 매우 불안정한 땅… 나아가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석유자원의 이권을 둘러싸고 나라와 민족 사이의 갈등과 권모술수가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땅….
이런 역사적 맥락과 경제적 배경 때문에 각 민족이 내세우는 연고권과 자기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먼저 이 지역에 관한 한 다수민족인 쿠르드인은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을 적극 활용해 수천년래의 비원인 ‘쿠르디스탄’ 독립국가나 자치주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 쿠르드인들은 현재 이라크 원유수출량의 절반을 생산하는 키르쿠크를 자신들의 관할권으로 두려 한다. 터키계 투르크멘인들은 쿠르드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연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몫을 극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925년 제정된 이라크 독립헌법 제16장은 아랍계 쿠르드인과 함께 투르크멘인을 이라크의 3대 민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더욱 엄밀히 측정하면 투르크멘인들이 쿠르드인보다 더 많다.”
그런데도 미국 중심의 서구세력이 이라크의 아랍인을 견제하기 위해 쿠르드인을 우대하는 정책에 펴는 바람에 자신들만 불이익을 겪고 있다는 논리를 편다.
이라크의 다수파인 아랍인들은 현재 쿠르드인과 투르크멘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라크 북부 지역에서 일정 한도 이상의 독립 움직임이 현실화하거나 쿠르드인 등에게 막대한 원유 관련 이권을 넘긴다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후세인은 바로 그런 잠재적 여론을 등에 업고 1988년 쿠르드인 마을을 화학무기로 공격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라크 북부지역은 상황에 따라선 국제적 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안고 있다. 후세인 시기까지 터키는 자기 나라 안에 있는 쿠르드인 문제를 밀봉하기 위해 반대급부로 이라크 내 투르크멘인에 대한 지원을 억제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의 정책에 따라 쿠르드가 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이라크 내 투르크멘 문제를 서서히 노골화하는 움직임을 보여 주목된다.
터키가 한국 군당국에 이라크 북부에 파병되더라도 투르크멘인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를 부탁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암시적이다. 술라이마니야의 옛 주인이 발언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피와 모래와 기도의 땅, 그 심장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투르크멘은 술라이마니야에는 3만명, 에르빌에는 30여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나아가 쿠르드인들이 이라크는 물론 이란·터키·시리아에 넓게 퍼져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국제 분규로 발전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한 국가의 쿠르드인 문제가 다른 나라로 불똥을 튀게 해 자연발화식으로 국제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일본인 저술가 무라마쓰 쓰요시는 중동의 현대사를 다룬 저서에 <피와 모래와 기도>라는 제목을 붙였다. 피와 모래와 기도의 땅, 그 심장부로 우리 젊은이들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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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형제와 그 자녀를 죽여라”
술라이만과의 사이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었던 록셀란.
오스만 터키는 기이하고도 끔찍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무력이나 책략으로 집권한 왕자는 남은 형제와 그 자녀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준 것이다.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에서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드 2세가 이 제도를 정착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왕자간의 갈등과 투쟁이 치열했다. 후계권을 갖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물론 술탄으로 즉위한 뒤에도 경쟁자와 그 무리를 제거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이 분열되거나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늘 존재했다. 실제로 술레이만의 할아버지인 메흐메드 2세도 동생과 권력 다툼을 벌여야 했고, 아버지 셀림 1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두 차례나 반란을 일으킨 뒤 나중에 술탄의 근위부대인 예니체리 부대의 지원을 받아 양위를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즉위 뒤에는 두 형을 죽인다.
걸출한 술탄 술레이만도 이 끔찍한 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히려 어느 의미에서는 더하면 더했다고도 할 수 있다. 술레이만은 진실로 사랑하는 여성 록셀란이 후계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결국 왕가는 승계를 둘러싼 모략과 암투 그리고 피로 물들어갔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노예로 황후에까지 오른 록셀란은 술레이만과의 사이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 황태자 메흐메드가 죽자 피의 암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유고 몬테네그로 출신의 귤헴이라는 여인에게서 낳은 왕자 무스타파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이 음모에는 딸과 사위 등 온 가문이 가담했다. 그러나 그 여파로 다시 록셀란의 아들 지한기르가 자살한다. 이복형을 몹시 사랑했던 것이다. 록셀란이 죽은 뒤 남은 두 아들 셀림과 바예지드는 서로 군대를 일으켜 사생결단을 벌인다. 여기서 아버지인 술레이만은 셀림을 지원해 바예지드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이 끔찍한 제도는 17세기 들어서야 나머지 왕자들을 살해하지 않은 채 별궁에 유폐하는 식으로 완화될 수 있었다
[출처]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2004.05.06 제507호] 고난은 인간을 키운다[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연재를 마치며]
어머니 이름: 하프사 하툰
생존기간: 1495~1566년
재위기간: 1520~1566년
통치면적: 1498만㎢
통치지역 인구: 약 2천만명
별명: ‘화려한 황제’ ‘입법자’
요셉에서 간디까지 5천년 인류 역사에 아로새겨진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고난 없이 인간은 성공하지 못한다. 골짜기가 깊어야 산은 높아지던가? 지난 15개월 동안 5천년 인류 역사에 아로새겨진 인물들을 되짚어오며 무엇보다 고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고난을 겪고서야 비로소 더 큰 일을 이루게 되는 역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4천년 전 이집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7년 연속 기근의 대재앙에서 구한 것으로 <구약성서>에 기록된 요셉을 보자. 자신을 시기하는 형제의 손으로 웅덩이에 던져지고… 그 형제의 손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고… 다시 여주인의 유혹을 피하는 올바른 행동을 했는데도 모함을 받아 감옥에까지 갇히고….
끝내 그를 훨씬 더 성숙시키고 남을 위해 훨씬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무엇이었던가? 아비의 편애였던가? 자신의 잘남이었던가? 아니다. 오직 모든 고난과 억울함을 묵묵히 이겨낸 뒤에야 그는 온 세상을 구원하는 큰 지혜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손빈은 어떤가? 전국시대 병법의 대가 손빈은 스승 귀곡선사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손빈은 질투와 시기의 힘, 세상 사악함의 파괴력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문하 출신으로 먼저 위나라에 출사해 대장군에까지 오른 방연의 초빙에 응했다가 그의 간계에 말려버린다.
무릎을 잘리고 돼지우리에 돼지처럼 갇힌다. 이 처참한 지옥도에서 손빈은 자신의 최대 능력인 지혜를 발휘해 제나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13년 뒤 손빈은 제나라 군대의 군사(전략참모)로서 위나라 군대를 공격해 결국 방연을 고슴도치처럼 화살 세례를 받아 죽게 만든다(일부에서는 생포설도 있다). 손빈은 처절한 고난을 겪은 뒤에야 진정한 제1인자가 됐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까지 던진 여불위
이쯤 되면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고난은 곧 행복이다.’ 역사는 항상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주인공의 목숨마저 요구했다.
전국시대 말기, 조나라에 인질로 온 진나라 왕자에게 전재산을 투자한 여불위는 대성공을 거둔다. 진나라 왕자는 자신의 공작대로 진나라 왕이 됐다. 그뿐인가? 이미 자신의 아들을 잉태한 무희마저 진나라 왕의 비로 들여보내 아들까지 낳는다.
일개 상인에서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둔 최강대국 진나라의 승상의 자리에 오른 그는 마침내 사실상 자신의 아들(진시황)이 진왕에 즉위하는 감격까지 맛본다.
그러나 그도 결국 출생을 둘러싼 소문을 잠재우려는 진왕의 의지에 따라 몰락으로 내몰린다. 아들인 진왕을 위한 마지막 사랑이었을까? 그는 하나뿐인 목숨마저 던져야 했다.
인질로 온 진나라 왕자에게 투자하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무희를 그 인질왕자에게 들여보내지 않았다면, 진나라의 승상 자리까지 욕심내지 않았더라면, 승상 자리에서 더 일찍 물러나와 낙향생활을 했더라면…. 역사는 필연의 과정을 거쳐 그를 자살로 내몰아가고 있었다.
링컨은 어떤가?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고, 흑인노예도 해방시키고, 저 유명한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민주주의’라는 명연설이 지금껏 회자되는 그는 19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초등학교 1학년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온갖 실패의 경험을 딛고 미국은 물론 세계사의 스타에 올랐다. 그러나 그 완전한 승리와 성공의 순간 암살당한다. 후세에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되지만, 그는 남북전쟁 승리 1주일도 채 안 되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성공을 위한 대가로 바쳐야 했다.
패배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인간을 기쁨으로 채워주는가?
권세에 있지도 않았다. 정복에 있지도 않았다. 세상을 떡 주무르듯 흔들어대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돈에 있지도 않았다. 나라 안팎에서 골라 화려하게 치장한 솔로몬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도 있지 않았다.
고대 세계 최대의 정복자 알렉산더는 넓은 땅덩어리를 정복하고도 자신과 자식의 목숨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채 30대 젊디젊은 나이에 죽어갔고, 탐하는 대로 여인을 취해본 솔로몬도 끝내 탄식해야만 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행복은 가까운 곳, 낮은 데 있었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작은 나라 조선의 경상도 지방에 사랑과 사람다운 삶을 심어 300년을 전해온 경주 최부잣집의 마음 같은 것이 곧 행복이었다.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를 섬긴 마더 테레사만이 종교의 차이를 넘어 힌두교도의 진정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참행복의 의미를 세상에 전했다. 바로 이렇게 남을 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몽고 재상 야율초재는 그 학살과 살육의 시대에 죽음을 무릅쓰고 개봉 백성 140만명을 살리는 구명운동을 벌인 것이 아닌가? 행복은 이기심의 굴레를 벗을 때 시작되고, 남과 함께 살아갈 때 그 열매를 맺고 있었다.
슬픔도 힘이다. 놀랍게도 슬픔도 패배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가고 있었다. 고대 로마 검투사의 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는 패배했지만 죽지 않았다. 그에게 군사적 승리를 거둔 크라수스는 성공하려는 자들의 참고인물 정도로 박제화됐지만, 그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2천년 이상 자신의 뜻을 이어나가도록 이끌고 있다.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는 모든 세대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된 것이다. 어찌 슬픔이, 패배가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류관순도 이런 슬픔의 힘으로 한민족의 별이 되고, 제갈량도 이룰 수 없었던 천하통일의 슬픔 때문에 민중들의 사랑이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교육에서 승리하기 위한 치열한 각축
그리하여 간디는 이렇게 말한다. “절망할 때가 찾아오면 역사를 통해서 진리와 사랑이 승리한 순간을 기억해내지. 독재자와 살인자는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지만, 결국 늘 몰락하고 말았어. 항상 그걸 생각해보며 힘을 얻지.”
무엇이 가장 의미 있고 오래 지속되는 것일까? 역사는 자신만의 해답을 내놓고 있었다. 신과 문자와 인간 그리고 그것을 종합해서 후대에 이어주는 교육이었다. 놀랍게도 모두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느 인간집단도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가지고 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황에 따라선 세상의 패권까지 움켜쥘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 이 요소들의 변증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가장 일찍 신의 존재와 가치를 제대로 안 족속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보다 신과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기록해서 전승시킬 수 있는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모세 오경’ 등 유대교의 경전과 탈무드 등 가르침이 자신들의 히브리어 문자로 기록됐다. 문자는 곧 교육체계로 이어진다.
랍비 요한나 벤 자카이는 로마군에게 유대 지역이 점령돼 깡그리 파괴될 때 오직 대학이 있는 유대교 교육도시 야브네만을 살려냈다.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은 인구라는 성장 엔진을 가장 먼저 가동한 족속이기도 하다. 요셉의 시대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 12지파 선조 70여명이 불과 수백년 만에 200만명 규모로 확대되고 있다.
부부가 사랑하고 생육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찬양하고 권장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독선적인 교리와 선민의식은 이웃의 반발과 혐오를 불러오고, 이슬람교의 탄압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같은 비극까지 겹쳐 이 인구라는 요소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웃과 함께 사는 마음이 없인 인구라는 성장 엔진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법일까?
중국인은 이 가운데 신을 빼고 문자 교육 인구로 승부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사례다. 대영제국은 쇠락했어도 그들의 언어 문자 영어는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는 패권문자가 돼 있다. 미국은 외형상 여러 민족을 다 받아들여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민족의 용광로, 문화의 용광로 같은 성격으로 발전의 모티브를 잡은 측면도 강하다. 이제 이 모든 주역들은 교육에서 진정한 승리를 이루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달리는 말에 올라 산을 본 느낌이 이런 것일까? 그것도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식의…. 전문가도 전혀 아니면서, 심지어 한번도 그 인물에 대해 읽어보거나 생각해본 적이 없으면서도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다는 하염없는 부끄러움만 남는다.
한번 뭔가 흉내라도 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항해가 별다른 성과도 없이 이제 닻을 내린다. 이 부끄러움 속에서도 마지막 글을 쓰는 힘은 단 하나,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들에게 모자란 사람의 한마디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해 크게 외쳐보시라
“앞으로 자네들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나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될 거야. 선배나 친구의 조언도 좋지만, 깊은 밤 홀로 역사인물을 한번 읽어보시게나. 혼자 있어야 그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나와 대화할 수 있거든. 그리고 사람이 혼자 울어야 진정 슬픔의 힘을 깨닫게 될 때도 있거든. 그리고 가능하다면 언제 산에 올라 바다를 한번 바라보시게. 깊게 심호흡을 하고 한번 크게 외쳐보시게나. ‘바다야, 내가 간다! 세상아, 우리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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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사람들, 아쉬운 사람들
» 이건희, 세종대왕, 프리다 칼로, 에디슨
한번 꼭 써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아쉬움을 모아 이름이라도 한번 적어보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이건희 회장이 가장 아쉽다. 어느 의미에서 그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일을 이뤄낸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적어도 그의 영향력이 동시대 가장 많은 인류 구성원에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동시대인이기에 그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종대왕은 한글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가장 소중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과연 한민족이 한글을 제대로 살려나갈 수 있을지, 그렇게 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시기마다 그는 우리 곁에 다시 살아올 것이다.
문익점을 쓰고 싶었다. 처음 우리 민족에게 목화를 전해준 인물. 그를 통해 우리 민족의 가난한 이들은 덜 춥게 됐다. 제법 사람답게 살게 됐다. 어느 군주가, 정복자가, 영의정이 그보다 훌륭했단 말인가? 그가 비록 중국의 처지에서 보면 산업스파이 격이라 할지라도 나는 당연히 그의 편에 서련다.
기황후. 어느 면에서 보면 참 매력적인 여성이다. 지금껏 우리 민족 가운데 이 여인처럼 세속권력의 최상층부에 가본 이가 있을까? 없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만나볼 만하지 않은가?
외국인 가운데 개인적으로 깊은 흥미를 느낀 사람은 조지프라는 이름의 인디언 추장이다. 로키산맥 북쪽 태평양 연안에 살던 네스 페르세족의 추장인 그는 1870년대 미국 정부가 그자기 부족을 강제로 보호구역에 몰아넣으려 하자 부족원 300여명을 이끌고 탈출한다. 그는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포함된 부족원들을 무섭고 강력한 미국 기병대의 추적 속에서 살려낸 ‘인디언 모세’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놀랍고 눈물겹다.
멕시코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도 교통사고로 온몸이 망가지는 운명을 극복하고 놀라운 예술혼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 분야에 헬렌 켈러, 마더 테레사 같은 여성이 많아 아쉽지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에디슨도 한번 꼭 다루고 싶은 이였다. 너무나 잘 알려졌지만, 발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한번 제시해보고 싶었다. 우리 민족은 물론 인류의 미래 장기 생존에 발명이라는 요소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위해 소중한 지면을 내주신 <한겨레21>과 그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고 글 가운데 잘못된 부분에 대해 지적하시며 가르쳐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출처]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2005.03.22 제5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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