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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 국내여행

현충사, 참 오랫만에 와 보오.

 

 

 

난, 고딩때 봄소풍 와본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는데,

집사람 얘기가, 우리 애들 어릴 때 데리고 왔었답니다. 너댓 살 때라니까 그렇더라도 20년이 넘소.

참 희한하오, 전혀 기억이 안나니…….

 

 

 

 

 

 

 

 

 

 

 

 

 

 

 

마침 관리직원을 만나서,

여기 많이 바뀐 것이지요? 제가 20년 넘어서 다시 와 본 것인데

NO!  NOTHING!” 

 

1967년인가 성역화공원 造成한 이래로, 그대로라고 합디다.

다만, 지금 보이는 ↑ 이 무덤 봉분같은「기념관」과 「전시관」만 새로 만든 것이랍디다.

따로 2동(棟)으로 지었더군요.

 

집사람이 워낙에 관심 없는 터라서 휙 둘러만 보고 말았는데,

이순신과 관련된 문서들은 하찮은 것들까지도 전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됐습디다???? 

 

한 개인을 이처럼 성역화한 사례는 매우 드물 것이오.

불만 없소이다. 대접 받을 만합니다.

외려, 중국「악비묘 」맹키로,

 

무릎 꿇린 宣祖놈 동상을 입구에다 하나 콱 처박아놨으면 하오이다.

 

 

 

 

 

 

이 소나무는 진짜 명품으로 가꿨습디다.

경내에 이런 식으로 멋지게 가꾼 소나무들이 많습디다.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가지치기할 걸 생각해 보오. 이만저만 공들인 게 아닙디다.

 

 

 

 

 

 

 

 

 

 

 

 

‘충의문’ 뒤로 ‘현충사’ 현판 글씨가 저만치 보이도록 높이를 계산을 했겠지요?

 

 

 

 

 

 

 

 

 

좌우에 쌍으로 심은 나무도 좀 보오.

 

 

 

 

 

박정희가 쓴 글씨라는데, 건물과 분위기와 잘 어울립디다.

‘충무문’ ‘충의문’도 글씨체가 같은 것으로 봐서‥‥,

 

 

 

 

 

 

 

 

 

 

 

양 옆으로 모과나무가 있는데, 모과나무가 배롱나무처럼 매끈합디다?

 

 

 

 

 

 

 

 

 

 

 

 

 

 

 

 

 

 

 

 

 

왼쪽에 있는 봉분 몇 개는 후손들 묘(墓)라 하고, 오른쪽은 이면의 무덤으로 가는 길입니다.

장군의 무덤은 8km인가 떨어져 있다고 써 있던데, 왜 이곳으로 모시지 않았을까요? 

 

 

 

 

  

 

장군이 연습하던 활터랍니다.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生價)가 아니요,. 그래서 이름이「옛집」이라오.

20대부터 30대初 무과 급제할 즈음까지 살던 집이랍디다.

(물론 식구들은 계속 살았겠지요.)

 

집터가 아주 좋습디다. 좌우전후를 잘 둘러보기오, 기막힌 명당자리요.

장군네가 물려받은 재산이 좀 있었는지, 아니면 훗날에 하사받아서 집을 늘려서 지은 것인지,

집이 크고도, 격식 갖춰서 잘 지었습디다.

학식 높은 유학자나, 방귀 좀 뀌고 살던 정승 판서 집 같더이다.

 

 

 

 

 

 

 

 

 

 

 

 

 

 

 

이십여년 전에 왔을 때는 나무를 갓 식수한 터라서 허허벌판 황량했었는데,

이젠 숲이 제대로 어울렸습디다.

수종 선택도 잘됐고, 식재 간격도 적당하고, 조경을 아주 잘했습디다.

 

 

 

 

 

 

 

 

 

 

 

 

 

서원과는 관련이 없었을 것 같은데, 대원군이 왜 없애라 했을까?

 

 

 

 

 

 

 

 

 

 

 

 

이 돌다리랑 잉어는 기억이 나오. 당시에도 큼지막한 잉어가 많았으니까.

사람들이 하도 밥을 주다보니, 고기가 줄지어서 사람 따라다닙디다.

 

 

 

 

 

 

 

 

 

 

 

 

 

 

 

 

 

 

ㅁ ㅓㄴ 행사가 있는 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