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大) 피터르 브뤼헐

2015. 8. 1. 19:59미술/서양화

 

 

 

대(大) 피터르 브뤼헐

  http://youtu.be/NHVEj4HBXXI   

 

 

 

 

 

대(大) 피터르 브뤼헐(네덜란드어: Pieter Brueghel de Oude, 1525년-1569년) 브라반트 공국의 화가.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인 그는 태어난 마을 이름을 따 성을 삼았다.

 1551년 앤트워프의 화가 조합에 들어간 후, 이탈리아·프랑스에서 유학하였다.

처음 에는 '민간 전설'이라는 속담 등을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렸고,

후에 네덜란드에 대한 에스파냐의 억압을 종교적 제재로써 극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이어서 농민 생활을 애정 과 유머를 담아서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므로 '농민의 브뤼겔'이라고 불리었다.

여기서의 풍경 묘사는 풍경화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은 동판화 1점을 포함하여 45점이 알려졌지만〈장님>〈라벨의 탑>〈농부의 혼인>〈눈 속의 사 냥꾼〉 등이 특히 유명하다.

루벤스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작품의 배경을 그린 적도 있다.

그는 인물을 작게 배치한 풍경화를 즐겨 그렸다.

1602년 앤트워프의 화가 조합장을 지냈다.

그는 작품에 서명과 날짜를 기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1559년부터는 작품 서명 에 ‘h’를 빼고 ‘Bruegel’로 적었다.

큰 아들 소 피터르 브뤼헐과 작은 아들도 유명한 화가이지만, 아버지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장남 소 피터르는 아버지와 같은 제재의 작품 외에, 환상적·악마적 화면을 즐겨 그려 '지옥의 브뤼헐'이라고 불리었으며,

차남 얀은 화초나 풍경을 잘 그려 '꽃의 브뤼헐', '천국의 브뤼헐'이라 불리었다.

 

 

 

 

ㅡ 피터르 브뤼헐, 바벨탑 통해 파멸로 치닫는 사회 혼란 그려내 ㅡ MYSTIC ART STORY

‘바벨탑’, 1563년, 목판 위에 유채, 114×155cm, 빈 미술사박물관

 

 

 

 

 

기원전 597년 유대교의 성지 예루살렘은 신(新)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대병력 앞에 초토화되고 만다. 

성지는 폐허가 됐고 수많은 성물이 정복자에 의해 약탈됐다.

이때 유대인 수천 명이 바빌론으로 끌려 갔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여태껏 본 적 없는 거대한 탑을 목격한다.

구름 위로 치솟은 그 탑은 마치 하늘로 연결된 통로 같았다.

압류된 유대인들의 목격담은 그 후 예루살렘에 전해져 훗날 성서 편찬에 영향을 주게 된다.

성지를 파괴한 바빌론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야만인으로 묘사되고,

바벨탑은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 과 탐욕의 상징으로 기술된다. 

이로부터 바벨탑은 무지한 민중을 계몽하기 위한 기독교 회화의 단골 주제가 된다.

바벨탑의 형상은 여행자들로부터 전해들은 목격담을 토대로 그려졌는데

의견이 분분할 뿐 정확한 형태는 알수 없었고 화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대체로 하늘로 높이 치솟은 원추형의 구조물이 일반적인 모델이다.

최근에 고고학 발견에 따르면 바벨탑은 원추형이 아니라 피라미드형이었다고 한다.

피터르 브뤼헐 이 그린 ‘바벨탑(1563)’ 은 그런 류의 그림들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림을 보면 한가운데에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바벨탑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고

그 뒤로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바빌론의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왼쪽 하단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로 추정되는 왕이 수행원들을 이끌고 공사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당연히 감상자의 시선을 끄는 것은 중앙의 바벨탑 건설 현장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원추형의 바벨탑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닮았다.

이것은 중세 이후의 서구인들에게 천년의 영화를 누렸던 이교도 제국 로마의 모습이 바빌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브뤼헐은 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을 바벨탑의 구조적 특징으로 차용함으로써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교 문명을 상징하려 했다.

공사는 완전히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애초에 탑은 수직에서 벗어나 왼쪽으로 기울어진 채 쌓아올려지고 있고

아래층을 완성하기도 전에 위층을 쌓아올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결국 공사는 실패 할 것이고 바벨탑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화가는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브뤼헐은 왜 바벨탑을 그렸을까?

그 답은 당대 플랑드르(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대) 의 정치·사회적 혼란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플랑드르는 대외적으로는 자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던 스페인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맹인들의 우화’, 캔버스에 템페라, 86×154cm, 나폴리 카포디몬테 박물관

 

 

 

 

그런 가운데 민중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 갔고 이는 화가 브뤼헐에게 극도의 좌절감을 안겨줬다.

그에게 당시 사회는 멸망 직전의 바빌론이나 로마와 다름없었다.

탑이 기우뚱한 것은 사회가 균형감각을 상실 했음을 의미하며

공사의 선후관계가 뒤바뀐 것은 상호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합리성을 잃은 사회의 혼란 을 상징한다.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것이다.

브뤼헐의 현실 비판은 ‘맹인들의 우화(1568)’와 ‘불구자들(1568)’에도 잘 드러나 있다.

‘맹인들의 우화’는 여섯 명의 맹인이 서로의 손에 의지한 채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맹인이 맹인을 인도 하면 구덩이에 빠진다”는 성서(마태복음 15장 14절)의 내용에서 따온 것이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는 그 기막힌 현실은 -

- 부패하고 무능한 지도자와 선동가에 맹목적으로 이끌려 가는 플랑드르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오른쪽의 엎어진 맹인은 장차 플랑드르가 맞이하 게 될 암울한 미래를 의미한다.

 

 

 

 

 

  ‘불구자들’, 18×21.5cm, 캔버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코케인’, 1567년, 목판 위에 유채, 52×78cm, 뮌헨 알테르 피나코테크

 

 

 

 ‘불구자들’은 목발을 짚은 다섯 명의 신체장애자를 묘사한 작품인데,

이것은 절름발이가 된 당대 네덜란드의 다섯 개 사회계층을 상징한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기만은 목발 짚은 장애인처럼 걷는다”라는 경구를 시각화한 것이다.

그야말로 블랙 유머의 극치다.

그의 신랄한 비판 정신은 대중의 허황된 낙원에의 꿈을 꼬집은 ‘코케인(1567)’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늘에서 비 대신 치즈가 쏟아지는 등 온갖 먹을거리로 가득한 상상의 낙원 ‘코케인’을 묘사한 이 그림에서

사람들은 땅바닥에 드러누워 먹고 자고 하는 모습으로 묘사돼있다.

그림은 한편으론 당시 경제적 번영을 일궈낸 주역인 플랑드르의 시민계급을 예찬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무능한 당대 지배계층에 일침을 가하고있다. 

가운데 나무를 중심으로 바퀴살처럼 누운 세 사람은 각각 기사, 농민, 서기 계급을 대변한다. 

그러나 귀족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사람대신 구운 오리를 배치했는데

이것은 네덜란드의 혼란 을 제대로 봉합하지 못한 지도자들에 대한 야유로 해석된다. 

지난해 프랑스의 릴 박물관은 ‘바벨탑’ 특별전을 열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 유수의 현대 작가들이 참석한 이 전시는

현재 세계 도처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무모한 욕망을 바벨탑을 빌어 재해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끝없이 높은 빌딩을 쌓아올리며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현대인의 끝없는 욕망과 탐욕이

바빌론인 이나 로마인들의 욕망이 다름없다고 파악한 것이다.

브뤼헐이 수백 년 전 바벨탑을 통해 던진 경 고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

 

* * * * *

 

 

 

 

 

 브뤼헐의 그림들

>파일:Bruegel, Pieter de Oude - De val van icarus - hi res.jpg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1558년)

 

 

 

루벤스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작품의 배경을 그린 적도 있다.

그는 인물을 작게 배치한 풍경화를 즐겨 그렸다.

1602년 앤트워프의 화가 조합장을 지냈다. 그

는 작품에 서명과 날짜를 기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1559년부터는 작품 서명에 ‘h’를 빼고 ‘Bruegel’로 적었다.

파일:Pieter Bruegel the Elder - The Dutch Proverbs - Google Art Project.jpg

 

 

 

 

네덜란드 속담(1559년) 파일:Children.jpg

 

 

 

 

아이들의 놀이(1560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파일:Thetriumphofdeath.jpg

 

 

 

 

죽음의 승리(1562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파일:Pieter Bruegel the Elder - The Fall of the Rebel Angels - Google Art Project.jpg

 

 

 

 

 

반란 천사의 추락(1562년) 파일:Pieter Bruegel d. A. 107.jpg

 

 

 

 

 

  겨울 풍경(1565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파일:Harvesting-brueghel.jpg

 

 

 

 

 

 

건초 만들기(1565년), 프라하 국립 박물관 소장 파일:Pieter Bruegel the Elder- The Corn Harvest (August).JPG

 

 

 

 

 

곡물 수확(1565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파일:Pieter Bruegel d. A. 106b.jpg

 

 

 

 

 

  눈 속의 사냥꾼(1565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파일:The Wedding Dance.JPG

 

 

 

 

  결혼식 춤(1566년),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파일:Brueghel7.jpg

 

 

 

 

  베들레헴의 인구조사(15660 파일:BRUEGEL the Elder, Pieter - Massacre of the Innocents (1565-7).JPG

 

 

 

 

  베들레헴의 영아학살(1565년-1567년), 브루켄탈 국립박물관 파일:Pieter Bruegel the Elder - Peasant Wedding - Google Art Project.jpg

 

 

 

 

  농가의 혼례(1568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파일:Pieter Bruegel The Peasant Dance.jpg

 

 

 

 

  농민들의 춤(1568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감상)

 

16세기 네델란드회화는 이탈리아미술을 모방하려는 경향과 종교적인 주제를 탈피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브뢰헐에 영향을 주어 그는 농촌풍경과 농촌 전래의 관습을 환상적으로 표현하며 농민화가로 불리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성서이야기중 바벨탑을 모호한 방법으로 그려낸 특이한 화가로도 역사에 유일하다.

 '죽음의 승리' '반란천사의 추락'등 화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캐리커처를 초자연적이고 모순된 형상으로 그려내어

보는사람으로 하여금 조소와 혐오감,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화풍 즉, 그로테스크 예술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집안은 16세기에서 17세기 걸쳐 수많은 화가를 배출했던 화가 집안이다.

농민의 생활 모습이 담긴 그림을 남겨서 ' 농민의 브뤼헐 ' 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아버지 대(大) 피터르 브뤼헐,

지옥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그려서 ' 지옥의 브뤼헐 ' 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小) 피터르 브뤼헐 까지 오늘날에도 많이 알려져있다.

  특히 브뤼헐 일가의 그림들 중에는 같은 장면을 그린 묘사한 그림이 많아서 오늘날까지도 누가 그린 것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플랑드르 화가란? 생동하는 감각적 표현과 뛰어난 회화 기법으로 유명하다.

얀 반 에이크(1395~1441)로 부터 브뢰헬(1525~69)을 거쳐 루벤스에 이르기까지 플랑드르의 화가들은 유화의 대가였으며

주로 유화로 주변 세계를 힘차고 상세하고 때로는 날카롭게 묘사했다.

플랑드르는 프랑스,독일, 저지대 국가에 둘러싸인 좁은 지역으로 15세기에 부르고뉴의 공작들이 통치하던 평화로운 번영기 이후

종교적인 위기와 내전으로 이어진 오랜 혼란기를 거쳐 끝내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들에게 전제적인 지배를 받았는데

플랑드르 회화에는 그러한 운명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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