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29. 12:08ㆍ음악/영화. 영화음악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최저생계비는 정해질 수 있지만 최대생계비는 정할 수 없다는 것,”
돈에 대한 갈망은 집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체제 아닌가.
이제 돈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한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절대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수단은 동시에 절대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미 돈은 하나의 숭고한 목적으로 승격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돈을 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돌아보면 우리가 대학교와 전공을 정하는 것도, 취업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모두 궁극적으로는 돈을 벌기 위한 것 아닌가.
돈만 있으면 여행도, 물건도, 행복도, 사랑도, 심지어는 애인마저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기에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친구가, 애인이 내게 친절한 건 내게 돈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들도 나처럼 돈을 신처럼 숭배한다면 말이다.
결국 돈이 없다면 친구들 애인이든 모두 나의 곁을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돈을 모으고 또 모은다.
아이러니하게도 관심과 애정을 받기 위해 돈을 별려고 했지만,
돈에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우리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직접적인 관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마치 신에게 헌신하느라 가족과 이웃은 돌아보지도 않는 어느 우매한 아주머니처럼 말이다.
이런 딜레마, 돈에 대한 갈망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을까?
그것은 나름대로 최적생계비를 생각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 원래 자리, 그러니까 수단의 자리로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돈은 여행을 가려고, 맛난 음식을 먹으려고, 혹은 멋진 옷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돈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윤활유다.
바로 이것이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있다.
최적생계비를 계산하고, 그것을 삶에 관철하는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삶과 사랑을 향유해야지."
돈에 대한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은 이렇게 내딛는 것이다.
- 강신주,『감정수업』-「탐욕」에 대해서
피츠제럴드의 소설에는 화려한 사교계에 대한 동경과 '젤더;를 곁에 두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살았던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낙원의 이쪽』과 『위대한 개츠비』(1925)의 성공으로 부와 인기를 얻은 피츠제럴드는, 주제가 너무 한정된 게 아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맙소사, 그럼 돈 말고 또 다른 주제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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