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하라 / 선언

2011. 5. 16. 20:29음악/쟈덜- m

 

 

 

     Victor Jara - Manifesto

 


빅토르 하라- 선언

내가 노래하는 건 노래를 좋아하거나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지
기타도 감정과 이성을 갖고 있기에
난 노래 부르네
내 기타는 대지의 심장과
비둘기의 날개를 갖고 있어
마치 성수와 같아
기쁨과 슬픔을 축복하지
여기서 내 노래는 고귀해지네
비올레따의 말처럼
봄의 향기를 품고
열심히 노동하는 기타,

내 기타는 돈 많은 자들의 기타도 아니고
그것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지
내 노래는 저 별에 닿는
발판이 되고 싶어
의미를 지닌 노래는
고동치는 핏줄 속에 흐르지
노래 부르며 죽기로 한 사람의
참된 진실들
내 노래에는 덧없는 칭찬이나
국제적인 명성이 필요없어
내 노래는 한 마리 종달새의 노래
이 땅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지

여기 모든 것이 스러지고
모든 것들이 시작되네
용감했던 노래는
언제나 새로운 노래일 것이네

 

 

 

 

 

 

빅토르 하라 ―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조안 하라 지음/삼천리/1만8000원


"민요와 시와 음악과 무용이 폭탄이 될 수 있을까?"

칠레의 전설적인 저항가수 빅토르 하라(Victor Jara·1932∼1973)의 치열했던 삶을 기록한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의 번역자 차미례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묻고, '그렇다'고 대답한다.

어떻게 '광대'의 하찮은 노래 따위가 폭탄이 될 수 있을까.

칠레에서는 합법적인 선거로 당선된 아옌데 정권을 1973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쿠데타로 전복시키는 과정에서

노래를, 그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폭탄보다 더 위험하게 취급했다.

그리하여 기타를 치던 두 손목을 부러뜨리고, 가슴을 군화발로 짓이겼으며,

끝내 자동기관총으로 난사해 시체를 철로 가에 버렸다.

그렇게 죽은 가수 빅토르 하라의 몸은 산티아고 공동묘지에 있지만,

그의 노래는 오랫동안 살아남아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상황으로만 짐작하면 선동적인 목청일 것 같지만

정작 그의 노래는 여린 목소리에 실려 서정적인 톤으로 흐른다.

바로 이 서정적인 '소통'이야말로 대중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알코올에 절어 사는 무능력한 아버지 대신 새벽부터 시장 바닥에 나가 중노동을 하며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 그들 밑에서 빅토르는 성장했고,

산티아고 빈민가로 이주한 뒤에는 어머니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청년기를 보내야 했다.

배우이자 연출가로 활동하다가, 힘든 생활 속에서도 민요를 읊조리던 어머니의 유전자를 타고난 빅토르는

칠레 전역을 돌아다니며 민요를 채집해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운동)'의 씨앗을 뿌린 비올레타 파라를 만나

새로운 노래 인생을 시작했다.

이 책의 화자는 그의 영국 출신 아내 조안 하라다.

조안은 무용수로 칠레에 와서 첫 남편과 헤어진 뒤 연하의 제자 빅토르와 만났다.

수줍은 듯 환한 미소가 매력적이던 청년 빅토르는 실의에 잠긴 채 아픈 몸을 가누고 있던 그녀에게 꽃을 들고 찾아갔다.

조안은 이 책에서 빅토르의 행적을 당시의 칠레 상황과 함께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한 가수의 전기를 뛰어넘어 1960년대부터 시작된 칠레 문화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중계하는 효과를 거둔다.

칠레 문화운동의 궤적은 한국의 1980년대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전통 형식에 당대의 주장과 민초의 삶을 담아내는 노래운동이랄지, 연극과 그림의 새로운 형식을 찾아가는 과정들은

한국의 문화운동패들이 그대로 칠레를 베끼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똘똘 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현실과 동떨어진 극좌의 무책임한 분열 행위나,

세밀하게 들어가면 같은 문화패들 중에서도 출신 계층에 따라 달라지는 예술 형식의 양상마저 비슷하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칠레는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무려 3만여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고 오랜 압제의 세월로 접어들었지만,

다행히 한국은 민주화의 궤적을 그려올 수 있었다.

1988년 국내에 처음 번역됐다가 절판된 이 책은 조안의 후일담을 덧붙여 이번에 새롭게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빅토르가 죽음을 예감하면서 만들었던 노래, '선언'의 가사는 이렇게 흐른다.

"…내 기타는 대지의 마음과/ 비둘기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네/

기쁨과 슬픔을 다 축복하는/ 성수(聖水)와 같은 존재/

…나의 기타는 사다리/ 우리가 별에 오르기 위해 만드는 사다리/

노래하며 죽기로 한 남자…"



조용호 기자 jhoy@segye.com ⓒ 세계일보&세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