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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미술 이야기 (책)

아카세가와 겐페이 評說, 모네의 「양산 쓴 여인 」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눈이 핑핑 돌았다.

그리을 올려다보는 것이 눈 부셔셔, 약간의 온기를 머금은 여름공기가 목 주변을 휘감는 듯했다.

실제로는 그림을 올려다보고 있었는지 아닌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처음 본 것은 화집(畵集)이었을 것이다.

화집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내려다봤겠지만, 그림이 펼쳐지는 순간 올려다보게 되었다.

그림 속 인물을 올려다본 셈인데, 이 각도에는 묘한 사실감이 있다.

무더운 여름날의 공기가 조금 떠다니고 가벼운 푄(Foehn) 현상이 일어나는 둑 밑에 내가 있다.

그림 속 여인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보는 순간 나는 이미 둑 아래에 홀연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하다.

 

이 그림뿐만 아니라 또 모네뿐만 아니라, 인상파의 그림에는 그런 감각들이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논리가 아닌 것이다. 사상이나 관념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림이 표현하는 공기에 푹 젖어 들었던 듯하다.

이런 그림이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인상파 화가들은 꿈꾸듯이 빛을 그렸는데, 빛과 함께 온도도 그렸다.

그림 속에는 습기와 산들바람도 있다.

그림에는 세세한 감각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말로는 명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인상파 그림이 갖는 특징이다.

 

이 여인이 누구인 것보다, 모네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흩날리는 스카프이다.

옅은 파란색의 가벼운 스카프가 뒤에서 불어오는 꽤나 거친 바람에 나부껴 펄럭인다.

얼굴에 부딪치는 스카프의 반투명한 감각이 기분 좋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즐기는 것이다. 미묘한 느낌을 맛보는 것이다.

인상파의 그림은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단순히 화면의 구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몇 번씩 반복하면서 차츰 작가가 서 있는 위치까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비로소 느낌을 맛볼 수 있다.

사람들이 인상파를 좋아하는 이유는, 언어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을 좋아하는 것이다. 

 

나는 바람에 펄럭이는 스카프도 좋아하지만, 왼쪽 허리의 약간 윗부분에 맨 빨간 장식도 좋다.

전체적으로 그림의 색조가 막연한데, 빨간 꽃장식이 화룡점정으로 그림을 매듭짓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풀의 색깔은 솔직히 말해서좋지 않다.

색상의  배치가 어딘지 모르게 정립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색조도 가까이서 보면 지저분해 보인다.

또 자세히보면 양산에 받침대가 없다. 아마도 그리는 것을 잊어벼렸을 것이다.

파란 하늘의 붓자국도 상당히 엉성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관념을 가진 인간의 머릿속 논리일 뿐이다.

떨어져서 보면 그런 느낌은 없다. 명화라고 불리우는 것은 의외로 그런 것이다.

꽤나 많은 결점을 안고 잇지만 아슬아슬하게 그 결점을 넘어서는 찬란함이 있다.

모네는 무언가에 빠져 그리는 사이에 그 논리를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그런 열정으로 그려진 그림이 보는 사람을 기쁘게 만든다.

 

 

- 아카세가와 겐페이,『명화독본』에서 옮김 -

 

 

 

 

 


 

 

 

 

자신의 눈으로 명화(名畵)를 보는 또 다른 방법은, 돈을 주고 그림을 산다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주머니를 털어 그림값을 지불하고 방에 건다는 마음으로 본다.

그렇게 하면 그리을 보는 방법이 달라지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예전에 나는, 그런 방법으로 그림을 감상하지 않았다.

그림이 갖는 의의나 사상을 먼저 보려고 했다.

하지만 사상이나 관념을 앞세우는 감상법은 무책임하다. 진실하지 않다.

머리와 논리로만 그림을 볼 뿐,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

뭔가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애쓰는 듯한 공명심만 작용한다.

옛날에 논리와 이성으로 감상했던 그림들을 떠올려 보면 도무지 사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확실히 새롭다는 것은 것은 알겠지만, 그거을 사서 집에 걸 생각은 아예 없다.

결국 애물단지로 전락해서 쓰레기통에 처박게 될 것이다.

그림은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서 살 것처럼 보는 것이 가장 좋다.

세상의 평가나 관념이나 사상 등에 속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눈은 언제나 무언가에 속고 있다.

그것을 단 한번에 벗겨 낼 수는 없지만, 조금씩 벗겨서 보는 쾌감이 명화 감상에는 숨어 있기 때문이다.

 

1992년 11월

아카세가와 겐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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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Vivaldi
The Four Seasons, Op.8 No.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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