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금년은 畵聖 겸재 정선(1676~1759년)이 조선의 500년 회화사에 큰 업적을 남긴 근세조선중기의 화가로
84세로 서거한지 250주년이 되는 해다.
겸재는 우리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생하는데 가장 알맞은 고유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산천을 소재로 그 회화미를 발현해내는데 성공한 진경산수화의 大成者이다.
겸재는 동양화의 양대 기법인 筆法과 墨法에 정통하여 필묵을 한 화면에서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하였다.
암산절벽(巖山絶壁)은 필법으로 처리하고 土山樹林은 묵법으로 처리하되 토산수림이 암산절벽을 감싸서 음양조화를
이루게 하거나 토산과 암산이 마주보게 하여 음양대비를 이루게 하는 화면구성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는 겸재가 율곡학맥을 계승한 조선 성리학자로 周易에 밝아 음양조화와 음양대비의 원리를 확실히 깨달아 알고 있던
결과였다.
겸재는 숙종2년(1676년)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유란동(幽蘭洞)에서 탄생한다.
유란동은 지금 경복 고등학교와 청운중학교가 있는 청운동일대의 白岳山(北岳山) 서쪽 아랫동네이다.
율곡학맥을 이어 진경문화의 꽃을 피어냈던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자제 6형제가
궁정동부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유택(遺宅)에서 그 증손자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문곡 자제 6형제가 바로 겸재의 스승들이었다.
이 6형제들이 모두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 우암 송시열의 학풍을 이어받아 율곡학맥을 계승하며
시문서화로 일세를 울리던 율곡학파 서인의 맹장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성리학은 물론 불교, 도교를 비롯하여 제자백가와 시문서화 등에 박통한
일세통유(一世通儒)로 겸재 댁과는 가까운 이웃이었다.
겸재집안은 전적으로 외가의 후원을 받아 생활할 정도로 가난하여 겸재는 과거로 벼슬길에 나갈 수 있다는 희망조차
버려야만 했다. 이런 절망과 좌절이 바로 겸재로 하여금 화도에 입문 하게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19세 되던 해인 숙종20년 정국이 일변하여 南人정권이 축출되고 西人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겸재는 진경문화의 스승인 삼연과 노가재의 지도아래 畵論의 正經인 곽희의 林泉高致를 탐독하며 “고씨 화보” “당씨 화보”같은
중국화보를 임모 방작하는 한편 빼어난 경관을 가진 백악산과 인왕산일대의 전경을 사생하는 화도수련에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1.) 겸재의 5세 연상 사연문하동문수학자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이 金化현감으로 임명되어 숙종37년 (1711년) 삼연이
詩 弟子와 함께 제6차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데 이때 겸재를 수행시키는 듯하며 그때 그렸다고 생각되는 그림 13폭이 현재
“신묘년 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과 소장)이다.
다음해 1712년 금강산 여행을 떠나 사천의 후의에 보답하기위해 “내외금강산” 진경 21폭을 그려 사천에 선물하니
사천은 이를 “해악전신첩”이라 이름 붙이고 스승 삼연에게 폭마다 “제화시”를 붙여주도록 부탁하고 자신도 그렇게 하니
“진경시화합벽”의 최고 걸작 품을 만들어낸다.
이 “해악전신첩”이 사대부사회에 알려지자 겸재는 일약 최고의 명화가로 유명해지게 된다.
2.) 1720년 겸재는 河陽현감에 제수된다.
(영의정 김창집의 배려로 겸재는 하양 현감시 “망천도”를 상고당 김광수에게 그려준다.
겸재는 동네 후배인 지수재 유척기 경상감사의 비호와 이해 아래 진경사생에만 몰두하여 영남 66군현을 고을고을마다 다니며
명구승지(名區勝地)를 사생하는 사생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관아재(조영석)가 말한 “영남첩(嶺南帖)”이다.
3.) 영조7년 1731년 사천의 환갑을 축하하기위해 “南極老人圖”, “千年松芝圖”등을 그려 선물한다.
영조9년 (1733) 겸재는 경상도 동해변 淸河현의 현감으로 발령된다.
겸재는 동해안을 따라 관동의 명승 평해 월송정, 울진 망향정, 삼척 죽서루, 양양 낙산사, 간성 청간정, 고성 삼일포,
통천 총석정, 흡곡 시중대 관동팔경을 차례로 찾아다니며 사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영양 “쌍계 입암”, 예안 “도산서원”, 울진 “성류굴”, 청하 “내연산삼룡추”, 합천 “해인사”등의
그림이 남아있다.
4.) 겸재는 영조13년 (1737) 62세로 모부인의 3년 상을 치른 다음 울적한 심회를 달랠 겸 그동안 손 놓았던 화필을 다시
가다듬을겸 겸사겸사해서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 청풍, 단양, 영춘, 영월 등 경치 좋은 4군의 명승지로 사생여행을 떠나
“사군첩을 그려온다.
영조14년 (1738) ”관동명승첩” 11폭의 대표적인 작품을 남긴다. (간송미술관 소장)
5.) 겸재는 청하현감시절 영남 66군현 명구승지를 사생 여행하여 그린 “영남첩”을 남긴다.
겸재가 그린 “4군 영남2첩에 제함”의 내용은 수옥정(漱玉亭), 월탄홍정(月灘洪亭), 한벽루(寒碧樓), 구담옥순봉(龜潭玉筍峯),
봉서루(鳳樓亭), 하선암(下船巖)인데 五言 혹은 七言의 “제화시”를 달고 있다.
이 시기에 그려졌다고 생각되는 그림 단사범주(丹砂泛舟)(간송미술관 소장)가 있다.
그다음에 “또 겸재가 그린 영남첩에 제함”에서 홍류동(紅流洞), 취적봉(吹笛峰), 해인사(海印寺),
청량산연선생가곡(淸凉山演先生歌曲), 도산서원(陶山書院), 고산정(孤山亭)등 6폭의 진경산수화에 제화시를 붙이고 있다.
(청하현감시절에 그림)
6.) 1738년 11월 겸재는 “절강추도도(浙江秋濤圖)”를 후배화가 조영석의 사랑 "관아재“ 문비(門扉)위에 그림
7.) “청풍계”는
인왕산동쪽기슭의 북쪽에 해당하는 청운동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원래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청풍계(靑楓溪)라 불렀었다.
병자호란 때 순국한 김상용(金尙容)(1561~1637)이 별장으로 꾸미면서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靑風溪로
바뀌었다한다.
겸재64세 영조15년 1739년에 그림.
바위벼랑이 부벽찰법, 도끼로 쪼갠 단면처럼 수직으로 보이도록 붓으로 쓸어내려 절벽을 나타내는 먹칠법으로 대담하게
쓸어내려져 있다.
인왕산특유의 백색암벽들이 마치 음화인양 겸재의 대담 장쾌한 묵찰법에 의해 검은 바위로 표현되었다.
이곳의 버드나무,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의 거친 표현은 특유의 진경산수화법의 특징이 모두 갖춰진
완벽한 걸작품이다.
8.) 영조15년(1739) 옥동척강(玉洞陟岡)
도승지 이춘제 (저택이 겸재의 인곡정사 부근에 있음)집으로 그와 친교가 깊은 소론 탕평인사들
(이조판서 조현명, 사천, 겸재외)을 초청하여 소동파에 서원아집(西園雅集)을 재연하는 모임을 갖는다.
이 모임에서 조현명은 사천과 겸재에게 진경서화로 이 아회(雅會)를 사생해주도록 요청한다.
그래서 겸재는 1739년 이춘제집 후원인 서원에서 모인다음 옥류동 산등성이를 넘어 청풍계까지 가서 놀다왔으므로
그 장면을 그린 “옥동청강”을 남긴다.
“三勝亭” : 이춘제 후원 모정(茅亭)을 겸재가 이춘제를 위해 그림.
“三勝眺望” : 이춘제가 정자에 앉아 한양도성일대를 조망하는 장면. (경복궁, 사직단, 인경궁, 남산, 관악산, 남한산성포함)
영조16년(1740) 이춘제집 후원인 서원에 모정을 고쳐짓고 조현명에게 정자의 이름을 지을 것을 의논하게 된다.
이에 조현명은 사천의 아름다운 시가 빼어나고, 겸재그림이 빼어나고, 경치가 빼어나다는 의미의 三勝亭으로 지으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西園小亭記를 지으면서 그 내력을 모두 기술해놓는다. 그래서 이루어진 그림이 삼승정과 삼승조망이다.
9.) 겸재 양천현령 부임 (종5품 승진발령) 영조16년(1740)
(양화나루 건너)
영조는 겸재로 하여금 마음 놓고 한강을 오르내리며 강 주변의 승경(勝景)을 그리도록 진경문화의 애호차원에서 배려함.
그리고 배를 띄워 임진강 예성강도 오르내리며 진경시화로 그 경계를 사생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런 아름다운 정사를 단행했던 것이다.
영조17년(1741) 사천과 겸재는 시를 보내면 그림이 오기로 하는 “시화환상간”의 약조를 한다.
1740년 겨울 세밑부터 1741년 동짓달까지 만1년 동안 시와 그림을 합장하여 화첩을 꾸밈.
그 화첩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상,하2첩 (간송미술관 소장)이다.
화첩 “경교명승첩”은 한강주변의 명승지와 서울 백악동부일대의 명승지를 그린 완성픔이며
겸재의 화명이 더욱 높아져 겸재는 畵聖이라 불린다.
경교명승첩 상권 :
“인곡유거”
“양천현아”
“서화환상간”
“홍관미주”
“행주일도”
“창명낭백”
서화환상간의 내용 : “은암동록” (대은암 동쪽그림)
“장안연우” (안개비 휩싸인 서울 장안그림)
“개화사” (양천 개화산소재그림)
“사문탈사” (율곡선생이 눈 쌓인 절을 찾는 모습)
“척재제시” (웅어 꿰미를 선물 받으며 서로 대가를 치르는 장면)
“어초문답” (강철선생 소옹의 어초문답을 소재로한그림)
“고산방학” (북송고사고산임모의 고사를 소재로한그림)
경교명승첩 하권 :
(한강을 따라 내리며 그린 것으로 흐름의 순서를 맞춰 정첩
화법은 산세 온유하고 청록화려하며 풍범 래왕하는 청징명미한 것이다.
“독서여가” (겸재 일상생활모습)
“녹운탄” (높은여울)
“독백탄” (쪽잣여울)
“우천” (소내)
“미호” (미음나루부근)
“미호” (삼주삼산각)
“광진” (광나루)
“송파진” (남한산성으로 가는 나루)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들어선 압구정동)
“목멱조돈” (남산에서 해가 떠오르는 그림)
“안현석봉” (이화여대 뒷산인 안산에서 봉화가 오르는 장면)
“공암층탑” (나와있는 광주바위와 양천허씨의 발상지인 허가바위를 그림)
“양화환도” (성상대교가 놓여있는 장면)
“행호관어” (행주산성 앞강에서 고기잡이를 구경하는 모습)
“종해청조” (양천현관하인 종해헌에서 조수 밀려드는 소리를 듣는다는 장면)
“소악후월” (현아부근 소악루에서 달뜨기를 기다린다는 장면)
“설평기리” (가양동에서 우장산을 향해 눈 쌓인 들녘을 가로질러가는 장면
“빙천부신” (얼어붙은 한강 가에서 서울장안으로 땔나무를 실어가는 장면
10.)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 (의적벽부(擬赤壁賦))
영조18년(1742년 임술년 소동파가 호북성 환강현(황주)“적벽강에서 주유하고 적벽부를 짓던 적벽선유장면을 재연하고자
경기감사 홍경보 주관으로 관찰사가 관내를 순시한다는 명분아래 임진강 ”적벽“에서 선유놀이를 한 장면을
겸재(67세)를 초청하여 진경화법으로 사생한 그림으로
우화등선(羽化登仙)(발선장면)과 웅연계람(熊淵繫纜)(도착장면)을 담고 있으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11.) 필운상화(弼雲賞花)
1742년 심사정의 6촌 형 심사주의 청으로 필운상화를 그려 “금오개첩”속에 담게 했었다.
개성대흥산성 박생연(박연폭포)도 그려냈다.
12.)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李先生進蹟帖)”
겸재외조부 박자진이 이황친필"주자서절요서“를 우암 송시열이 발문합장된 것이며
이 책이 겸재집에 까지 전래되는 과정을 겸재의 4폭 그림과 ”사천“이 제화시를 쓰고
”정만수“가 발문한 서화합벽첩으로 꾸미고 본래대로 ”퇴우이선생진적첩“이라했다.
“계상정거” : 퇴계은퇴후 주자서 절요서를 짓는 장면 그림
“무봉산중” : 우암선생을 찾아가 발문을 받아오는 장면
“풍계유택” : 이를 보관하고있던 “청풍계” 외가댁모습 그림
“임곡정사” : 1751년(겸재76세 겸재 자신의 집 그림
13.) “금강산도”8폭
겸재는 금강산도8폭을 그려 제자에게 준 것임.
1. 비로봉
2. 진불암
3. 사자암
4. 혈망봉
5. 보덕굴
6. 명경대
7. 장안사 비홍교
8. 장안사
“화첩발” (금수14폭)
권신웅이 겸재로부터 받은 초충, 산수, 영모, 어해, 화과그림제본
14.) “해악전신첩”
영조23년(1747) 겸재72세때 아우“유”66세의 타계로 울적한 심회를 달레기 위해 금강산여행 꼭36년 전 처음 그려보던 그 장면들을
다시 그려낸다.
21폭을 다시 그려내고 “사천”제화시, “스승삼연“의 제화시를 동국진체풍명필 강원감사 홍봉조로 하여금 대필케 하여
”해악전신첩을 다시 꾸며낸다.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신묘년 풍악도첩”이 정송애 구장의 최초해악전신첩이 아닌지 모르겠다.
21폭의 내용
1. 화적연 2. 삼부연 3. 화강백전 4. 정자연 5. 피금정 6. 단발령만금강 7.. 장안사비홍교 8. 정양사 9. 만폭동 10. 금강내산
11. 불정대 12. 해산정 13. 사선정 14. 문암관일출 15. 문암 16. 총석정 17. 시중대 18. 용공동구 19. 당포관어 20. 사인암
21. 칠성암
현재 원(해악전신첩)의 면모를 가장 잘 전해주는 그림이라할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신묘년풍악도첩”의 내용
1. 피금정 2. 단발령만금강산 3. 금강내산 4. 장안사 5. 보덕굴 6. 불정대 7. 백천교 8. 해산정 9. 삼일포 10. 고성문암관일출
11. 옹천 12. 총석정 13. 시중대
두 화첩을 비교해보면 “신묘년풍악도첩”은 패기 넘치는 36세의 무명화가가 그린 그림답게 패기와 열정과 희망이 넘쳐나서
방금 벼려낸 새 칼처럼 삼엄하도록 새 물냄새가 진동하니 필법은 날카롭고 묵법은 숙연하도록 엄정하며 화면구성은
대경(對境)에 충실하여 도설적(圖說的)이리만큼 정밀하다.
그에 반해 “해악전신첩”은 조선제일의 화가임은 물론 화성(畵聖)으로까지 존숭되는 72세 노대가의 그림답게
달관(達觀)과 파법(破法)과 확신으로 가득차서 필법은 부드럽게 세련되고 묵법은 거침없이 분망하며
화면구성은 대경의 요체파악에 중점을 두어 함축과 생략이 자유롭게 구사되고 있다.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해내려는 초기에 실험적으로 그려진 그림과 36년의 각고 수련 끝에 진경산수화법을 완성해낸
노년기의 완성작으로 그려낸 그림의 비교라서, 입지지년(立志之年)의 30대 젊은이와 불유지년(不踰之年)의 70대 노숙(老宿)의
면모를 보는 것 같아 어느 것 하나 생숙(生熟)의 대조적 차이가 없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 필묵사용의 기본법칙과 음양조화의 화면구성 원칙은 시종일관 철저하게 고수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니
화성의 길이라는 것이 이렇게 정일집중(精一集中)하는 화고한 신념과 불굴의 투지 속에서 열리는 것인가 보다.
확고한 이념과 이론적 바탕위에서 전통화법을 충실히 익힌 기량으로 그 혁신적인 화풍을 창안해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겸재는 36년 동안 한 번도 흔들림 없이 그 진경산수화법을 보완 보충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였으니
“관동명승첩”, “사군산수첩”, “영남첩”, “경교명승첩”등은 모두 그 일을 위해 이루어낸 주옥같은 중간결실이었던 것이다.
그사이 이런 우리국토 중 가장 빼어난 경치를 지닌 명승지들의 각기 다른 모습들을 그에 맞게 사생해내면서
터득한 화리(畵理)를 이제 “해악전신첩”의 그림을 그려내는데 모두 적용시킨 것이다.
그래서 음양대비가 더욱 극명하고 음중양(陰中陽)의 자연섭리가 더욱 자연스럽게 표출되며 陰을 상징하는 土山은
더욱 임리(淋漓)하고 陽을 상지하는 岩峯은 더욱 삼엄(森嚴)하다.
遠山은 아련하고 海山은 광활(廣闊)하며 파도는 흉용(洶湧)하고 立石은 기괴(奇怪)하니 과연 天工의 造化를 人工의 묘리(妙理)로
빼앗은 느낌이 든다.
진정 화성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겸재그림은 그 스승인 삼연 김창흡이 평한 대로 畵興이 일면 붓을 멋대로 휘둘러 먹물을 뿌려대도 화면에 생동감이 흘러넘치는
자연스러움이 가득했다 이것이 바로 천취자성(天趣自成)의 천재성이다.
이는 그림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념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림을 왜 그렇게 그려야하는가 하는 이유가 분명하니 필묵의 운용이 신속정확하고 항상 창조적이고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두고 신운자현(神韻自顯)이니 이견천취(而見天趣)니 하는 평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국토가 거의 대부분 바위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있어 우리성정이 그런 화강암같이 굳센
암석기(岩石氣)를 가지고 있기에 겸재는 우리에게 내재되 있는 그 본성을 최대한 노출시켰을 뿐이었고,
장마철 습기 찬 구름 산에서 남방화법의 임리한 미가운산법(米家雲山法)을 자기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끊임없는 자연관조와 사생 및 임모수련에서 대상의 형사(形似)를 가장 적절하게(最適) 표현해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가게 되었을 것이다.
15.) “二十四詩品” 소재 24폭 그림
당대 大詩人 사공도(司空圖)의 “二十四詩品”을 소재로 24폭의 그림을 그려 詩品과 함께 서화첩을 꾸며낸다.
글씨는 당시의 최고명필로 소문나 있던 동국진체의 대가 원교 이광사가 쓰고 있다.
진경문화시대의 서화양절(兩絶)이 사공표성의 시품을 매개로 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실로 시서화(詩書畵) 삼절첩(三絶帖)이라할만한 보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그림은 겸재72세시에 그려진 후 “해악전신첩”에서 보인 완성된 진경산수화법을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어
중국소재를 조선적 화법으로 표현한 기준 작이 되고 있다.
배경산수는 미가운산(米家雲山)으로 변형시킨 겸재 식 土山法이라든가 해삭준(解索皴)을 변형시킨 大山法,
금강산에서 터득해낸 장부벽(長斧劈) 岩山法등이 그대로 겸재 진경산수화법이고
흉용(洶湧)한 파도가 일렁이는 해도법(海濤法)역시 겸재가 동해바다를 보고 터득해낸 동해도법(東海濤法)이며
우람한 등치의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대담하게 죽죽 쳐올리되 천년 노송이 가지는 고고(孤古)한 기품을 잃지 않게 한 것도
겸재 특유의 소나무그림법이고 우람한 등치에 갑자기 잔가지를 드리우는 버드나무법도 겸재의 우리식 표현이다.
겸재는 진경산수화법을 완성시킨 다음 중국 고사도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그린 다음과 같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1. 여산초당(廬山草堂) 2. 무송관산(撫松觀山) 3. 노자출관(老子出關) 4. 고산방학(孤山放鶴) 5. 동정악루(洞庭岳樓)
6. 강천모설(江天暮雪) 7. 오류풍월(梧柳風月) 8. 고사관란(高士觀瀾) 9. 모우도교(冒雨渡橋) 10. 건려방매(蹇驢訪梅)
11. 소년행락(少年行樂)
같은 화법으로 “취성도(聚星圖)”를 그려낸다.
후한(後漢)의 명사 진식(陳寔)이 순숙(筍淑)의 집을 방문할 때 양가 아들들이 효행을 하여 덕성(德星)이 취회(聚會)했다하여
이를 기념하기위해 진식의 후손들이 취성정(聚星亭)을 지었다고 한다.
주자(朱子)시대에 와서 그 후손들이 이를 중수하고 그 아름다운 고사를 그림으로 그려 병풍으로 만들고 주자에게 그 찬문을
부탁했다.
그때 주자가 지은 “취성정화병찬병서(聚星亭畵屛贊幷序)”가 주자대전에 실려 있는데 조선 성리학파의 중진 곡운 김수증이
이 글 내용에 감동하여 그의 예서솜씨로 써서 걸어놓게 되었다. 이를 본 조선성리학파의 명수인 우암 송시열은 주자의 찬사에
그 내력을 밝히는 발문을 지어 붙인다. 70대의 겸재는 완성된 진경산수화법으로 이 “취성도”를 재연해내고 있다.
16.)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호암미술관소장)
영조27년(1751) 겸재의 평생지기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이 81세의 고령으로 타계하였다.
평생 동안 겸재의 그림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해준 사람 자신의 재능을 미리 간파하고 금강산으로 초청하여 여행하며
사생해 내게 해서 그 그림들로 “해악전신첩”을 꾸며내어 “스승사연”의 제화시를 받아내고 사천자신도 제화시를 붙여서
천하제일의 명화가로 자신을 발전시켜준 그 친구, 누구나 사연문하의 시화쌍벽으로 부러워하던 그 짝을 잃었으니
겸재의 슬픔은 이제까지 당했던 그 어떤 이별의 슬픔보다도 더 컸던 것이다
겸재는 이 고통을 이기기 위해 오히려 사천이 그렇게도 아끼던 자신의 그림솜씨를 마음껏 발휘하여 사천의 영전에 바치려한다.
그래서 늘 백악산남쪽 산기슭의 사천댁에 놀러 가면 함께 뒷동산인 백악산기슭에 올라 바라보던 인왕산을 그려내게 된다.
때마침 장마철이라 인왕산은 늘 비구름에 잠겨있었는데 잠시 해가 떠올라 장마철 비 개인 인왕산모습을 실감나게 표현
이 그림을 “인왕제색”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여기서 겸재는 백색화강암봉인 인왕산봉우리를 늘 상 해오던 데로 장쾌한 농묵쇄찰법(濃墨刷擦法)으로 장쾌하게 쓱쓱
쓸어내리고 장지바탕을 그대고 두어 산 아래를 감싸고 있는 운무(雲霧)를 상징하게 하는 등 대담한 필묵법을 구사하여
장마철 비 개인 인왕산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해내고 있다.
과감한 생략과 익숙한 함축을 바탕으로 이제 진경산수화를 추상화시켜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추상성이 노정되기 시작하는 진경산수화를 꼽자면
1. 통천문암(通川門岩) 2.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3. 자하동(紫霞洞) 4. 청송당(聽松堂) 5. 대은암(大隱巖) 6. 독락정(獨樂亭)
7. 취미대(翠微臺) 8. 청풍계(淸風溪) 9. 수성동(水聲洞) 10. 필운대(弼雲臺) (간송미술관 소장)
추상성이 더욱 노골화된 그림
1. 경교명승첩(하권) 중에서
1) 양천현아(陽川懸衙)
2) 시화상간(詩畵相看)
3) 홍관미주(虹貫米舟)
4) 행주일도(涬洲一棹)
5) 창명낭박(滄溟浪泊)
추상성이 노정되기 시작하는 진경산수화
1. 관동팔경팔곡병풍 (간송미술관 소장) : 장안사, 정양사, 만폭동, 백천동, 삼일포, 문암, 총석정, 낙산사,
2. 통천문암(通川門岩)
영조30년(1754) 추상화작품 (고대박물관)
1) 경복궁(景福宮)
2) 목멱산(木覓山)
3) 동소문(東小門)
17. 영조31년(1755) 영조의 과갑(過甲, 62세) 仁元대비 망칠(望七, 69세)이 되는 왕실의 수경(壽慶)으로 80세 이상 노인들에게
품계1등을 올려주는 제도에 따라 겸재는 종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예수(例授)된다.
18. 영조31년(1755) 8월 “사문탈사(寺門脫蓑) (간송미술관 소장)”를 그려내는데 이는 우연히 그리고 싶은 욕구가 충동적으로
일어나서 그린 그림인 듯 표현이 자유롭고 운필이 거침없다. (老益壯)
무송관산(撫松觀山) “해는 어둑어둑 저물어 가는데,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서성거린다.”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을
재화시로 쓴 겸재관서를 보면 80세전후한 시기의 그림이다.
“선객도해(仙客渡海)” “밤이 고요하고 바다물결은 삼만리, 달도 밝아서 석장(錫杖)을 날려 하늘 바람 타고 내린다.”는
제사글씨로 보아 겸재의 노필이라 할 것이다.
노송영지(老松靈芝)(개인소장)
19. 영조32년(1756) 대왕대비 인원왕후 칠순(七旬, 70)의 수경(壽慶)행사로 겸재는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를 예수 받는다. 2품 이상이 되면 3대를 추증하는 법전의 조문에 따라 겸재의 부친은 호조참판(종2품)으로
조부는 좌승지(종3품)로 증조부는 사도시정(정3품)으로 각각 관직이 추증되었다.
사천의 제자이자 겸재의 제자이기도한 창암(蒼巖) 박사해(朴師海)는 글을 지어 겸재의 품계상승을 축하한다.
창암은 겸재와 합작으로 꾸며낸 시화첩 뒤에 “두 노인의 시와 그림에 제함.” (제이노시화(題二老詩畵)과
“또 발(跋)을 붙임.”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제사를 붙이고 있다.
“죽서루(竹西樓)”에 사천을 주인으로 삼고 겸제를 가객(佳客)을 삼아 사천이 시를 짓고 겸재가 그림을 그렸는데
대체 죽서루의 빼어남이 연광정(練光亭, 평양)이나 강선루(降仙樓, 成川)에 비교해보아 그 그림이 산수에 뛰어나다고 했다.
사천이 삼척부사로 있을 때 겸재가 삼척으로 사천을 찾아가 죽서루에서 사천은 긴경시를 짓고 겸재는 진경산수화를 그린
시화첩을 창암이 보고 겸재가 81세로 동지중추부사가 된 영조32년(1756)에 이런 제사를 써서 사천을 추모하며 겸재를
현창(顯彰)하고 있다.
20. 청송당(聽松堂)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는 82세 옹 겸재라는 자필관서가 남아있다.
도원도(桃園圖) 겸재가 백악사단이던 일원이던 악은 신민복에게 그려줌.
학산한언(鶴山閑言) 경헌 신돈복이 지음.
한 중인이 겸재의 집에 와 있다가 비단치마를 고기국물로 더럽힌바 겸재가 그 말기를 뜯어버리고 그 더럽힌 곳을 빨게 하여
그것을 바깥사랑에 두었다. 하루는 화흥(畵興)이 크게 일어 비단 폭에 풍악도(楓樂圖)를 그리고 남은 치마폭에 다시 해금강을
그려내니 지극히 기묘하여 진실로 최고의 보배였다.
또한 일찍이 부채하나에 도원도를 심히 정세(精細)하고 제사에 82세 옹이 그림이라했다.
글자가 실낱같으니 그 정신이 왕성함이 또 이와 같았구나. (신돈복 학산한언)
21. 진경산수화법의 마무리
극도의 추상적 기법으로 처리한 화법의 최종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간송미술관 소장의 “금강대”와 “정양사” 쌍폭이다.
그리고 진경산수화법을 통해 터득해낸 우리산천의 특징을 정형화하려는 노력도 했으니
간송미술관 소장의 다음 작품이 그 대표작이다.
1.) 강진고사(江津孤舍) : 실제 있는 경치인 실경을 마치 바다속이나 하늘에 잠긴듯한 이상적인 경치로 표현하고 있다.
2.) 강정만조(江亭晩眺) : 실경은 아니로되 우리산천 어디에 있음직한 경치로 정형화시켜 그려내고 있다.
한 화법의 창안과 완성 그리고 추상적 이념화의 단계를 차례로 보여주면서 겸재는 그 일생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22. 영조32년(1759) 3월24일 인곡정사(仁谷精舍)에서 겸재 정선畵聖은 84세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양주 해동촌면 개성리에(현재 도봉구 쌍문동)에 안장되었다.
만 30년간 백악산 밑 순화방의 이웃집에 거주하며 조석으로 상봉하여 詩畵를 의론하였으며
겸재가 “절강추도도”를 그려준 풍속화시조 관아재 조영석(74세)이 겸재를 애도하는 哀辭를 남김.
영조48년(1772) 영조79세 1월25일 영조는 특증 전교를 내려 겸재를 “아경(亞卿)” 종2품 6조참판과 한성 좌우윤에 특증 하였음.
1월27일 영조는 임진년, 효행의 표본을 이유로 겸재에게 “정경(正卿)” 정2품 한성판윤이라는 구경(九卿, 6조판서, 좌우참찬,
한성판윤)의 자리에 오르는 특명을 내려 사후 13년 만에 그 영광을 극대화시키고자 했다.
(출처. 경기고 54회 동창회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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