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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미술 이야기 (책)

손철주,《보는만큼 보인다》(머리말 옮김)

 

   

 

 

 

      李快大 / <상황> 캔버스에 유채 크기 : 130 x160 : 개인 소장

 

 

 

   마음껏 떠듭시다

 

   김 선배니까 탁 까놓고 말씀드리죠. 저 아직 그림에 어둡습니다.

괜히 대중 미술서 하나 낸 죄로 얼결에 전문가연 하고 있습니다.

눈 밝고 귀 밝은 이들이 어쩌다 까탈스런 질문이라도 던질 양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답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지지 않으려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도 이제 밑천 떨어질 때 됐습니다.

아직 눈 침침하다면서 왜 말은 많으냐구요? 허긴 ‘정유위 조무위’라 한다지요.

조용하게 있는 가운데 귄위가 깃들고 까불면 그것마저 날아간다는 것.

그림 보면서 말 많이 하다보면 일쑤 들통난다는 거. 저도 압니다.

짐짓 묵상에 들어간 표정이라도 지어야 전시장에서 대접받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말이죠, 술자리에서조차 목가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는 김 선배와 달리,

저는 떠들 게 있으면 더 떠들어라 하는 주의입니다.

창피당하면 어떻습니까.

연습이 천재를 만드는 거나 무쇠가 두들겨 맞고 단련되는 거나 같은 발버둥 아닙니까.

수업료 안 내고 익히려 드는게 도둑놈 심보지, 클 놈치고 좌충우돌 안 하는 거 봤습니까.

그림도 마찬가집니다.

보이는 대로 한 마디씩 지껄이고 쥐꼬리만 한 지식이라도 갖다 붙여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그러면서 눈이 트이는 겁니다.

맞습니다. 김 선배. 전문가들 말 어렵게 하는 건 큰 병폡니다. 그거다 믿지 마세요.

누가 뭐라 하든 제 눈에 꽃이면 다죠, 뭐.

그나마 예전에 미술기자 생활 몇 해 해본 깜냥으로 남 못 보는 게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첨엔 그게 으쓱해 대단한 걸 귀띔하듯이 목소리 착 깔았습니다.

저 그림 말이야, 초등학생 아들 그림 보고 베낀 거라구. 그래 놓고선 천진한 동심을 표현했다드니

주접을 떠니 웃기는 거지……  저 붉은색은 작가가 고향에서 봤던 노을을 그린 거고,

노란색은 첫사랑 여자아이가 입었던 스커트 색이래…… 저 작가는 또 인물 소묘에 자신이 없어

노상 추상화만 들고 나온대…… 어쩌고저쩌고.

뭘 모르는 사람들은 제 말이 신기하기도 했겠죠.

개중에는 마침내 비밀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재미있는 건 말이죠, 특히 난해한 그림을 두고 제가 씹어대면 듣는 이들이 그렇게 좋아들 하데요.

그러잖아도 기죽어 있는데 잘됐다 싶었던 게죠. 내색은 안 해도 그런 사람 무지 많습니다.

아, 그런데, 평소 저처럼 떠들면 될 걸 왜 사람들이 울화증을 삼키고 있었던 거죠.

맘에 안들면 안 든다, 좋으면 좋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촉바른 말이 아니라, 우리나라 평론가들이 좋다는 그림 그대로 다 믿으면

한국 미술품은 벌써 루브르건 테이트건 유명 미술관에 차고 넘쳤을 겁니다.

분명합니다. 좋은 그림 있고 볼 일 없는 그림 있는 겁니다.

아는 대로 떠들어라. 제가 경험한 쓸모 있는 수칙 제1조입니다.

자, 그럼 김 선배, 왜 자기 아는 대로 말하는 것이 중요한지 말씀드려볼까요.

나는 왜 남 눈치 보지 않고 그림을 내 멋대로 읽고 있는가.

그것은 그림 보기에서 ‘차이’와 ‘사이’를 수용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 제 자신이 깊어지는 걸 느끼고 있답니다.

‘차이’니 ‘사이’니 하는 말은 제 기억에 하이데거가 쓴 용어인데요,

저는 제 식대로 이걸 풀이하고자 합니다.

뒤에 천천히 얘기하겠습니다.

미술이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진 건, 오스카 와일드가 비꼬았듯이

밥 먹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한 짓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 바깥에 보이는 사물에서 머릿속에 있는 생각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이건 좀 화가 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긴 세월 미술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외양을 능숙한 솜씨로 실제보다 아름답게 그려내는 데 봉사하고 있었죠.

물론 그 대상을 얼마나 다르게 비치게 하느냐 하는 것이 작가의 창의가 된 시절이 그 뒤로 왔습니다.

개성과 감각 우위의 시대였죠, 그때는. 요즘도 그건 미덕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대상이 명확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 어떻게 변했습니까.

신경질 날 만도 하죠. 난해와 혼란과 실험의 극치를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별의별 아이디어들이 다 나와 마치 ‘이보다 더 새로운 것 있으면 어디 한번 덤벼봐’ 하는 형국입니다.

이러다 보니 예사 눈으로는 어렵게 됐습니다. 암만 봐도 소화되는 게 없다는 겁니다.

이쯤이면 김 선배도 눈치 챘을 겁니다.

문학도 그런 것 아니냐.

음풍농월의 세월을 건너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시를 읊어대는 시대로 왔지 않느냐.

그렇지요. 제가 예술 일반론을 들먹일 푼수는 되지 못하니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미술은 문학보다 스펙터클하죠.

그게 이해가 되든 안 되든, 한눈에 강박적으로 달려드는 속성이 미술에는 있다는 말입니다.

관념이 아니라 시각적이고 구체화된 방식으로 펼쳐지는 세계죠.

문학처럼 행간을 읽을 짬도 없이 이놈은 즉물적으로 덤벼듭니다.

작가와 독자(그림도 읽은 때는 독자죠) 그 둘 사이에 상상력을 나눌 여지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현대의 미술은 ‘명백히 실존하는 공포’라고 할까요.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푸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현대 미술 감상의 길잡이』란 책이 번역돼 있습니다.

필립 예나윈이 필자인데요, 미국의 유수한 미술관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자는 사람이랍니다.

이 사람도 표현 대상이 외부 세계에서 내부 세계로 전이된 현대 미술은 골치 아플 수밖에 없다고

도설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이디어는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였습니다.

현대 작가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면 당연히 작품을 곱씹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공을 좀 들이라는 얘기겠죠.

아, 그럼 미켈란젤로나 겸재 정선은 속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긴가.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그 사람들 시대는 작품 바깥에서도 작품과 닮은 그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는

겁니다. 어쨌거나 속 들여다보기, 요게 관건입니다.

 ‘차이’는 변별성을 만들어내는 것 아닙니까. 작가의 고유성은 이 차이에서 오는 거겠죠.

설혹 내용이 똑같은 아이디어로 창작을 해도 결코 판박이가 나오지 않는 것은 뻔한 얘기로,

문화의 차이, 교육의 차이, 경험의 차이가 있어 그런 거지요.

그의 속과 나의 속의 차이를 짚어보는 것, 그림 보기의 요체는 이겁니다.

그의 아이디어가 이러저러할진대, 왜 저런 모습의 작품으로 나타났을까.

작품의 원형질인 아이디어가 작가의 손을 거쳐 나오기까지 어떤 곡절을 거쳤으며,

그 사연은 작품을 복 있는 나와 과연 공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서로 빗나간다 해도 저는 괘념치 않습니다. 아니, 빗나가는 것이 자명합니다.

오히려 귀한 것은 차이를 인식하고 있는 저를 자의식 안에서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가 갖춰질 때 작가와 나, 작품과 관객의 ‘사이’가 감상에 주효한 것이 되지요.

김 선배,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왜 떠드는 걸 주저하는 걸까요.

저는 작가의 그림 그리기와 감상자의 그림 읽기가 서로 달라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상자는 맹목적인 동일시에의 집착이 있습니다.

너와 내가 그림을 본 느낌이 일치했으면 하는 희망, 그리하여 공감이 주는 안도감을 누리고 싶은 욕구,

이런 게 다 동일시에 대한 집착입니다.

작품 보면서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경우가 더러 있지 않았나요?

그런데 그게 다 허욕인 겁니다.

세상 보는 눈은 장삼이사 우수마발이 다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작품 볼 때는 그 세계에 자신을 틈 없이

밀착하고픈 집착에 사로잡히는 겁니까.

동일시는 절대로 불가능한 욕망입니다. 차라리 차이를 인식하는 게 현명합니다.

김 선배, 잠깐 옆길로 샙니다.

제가 아는 IT업계 종사자 한 분은 참 명민합니다.

그분이 월북 화가 이쾌대가 1934년에 그린 <상황>이란 작품을 도판으로 보고선 느닷없이 저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당황했지요. 그 그림이 묘하거든요.

화면 맨 앞에 족두리를 쓴 신부가 열 십자로 손시늉을 하면서 뛰쳐나오고 있고,

발치에는 깨진 접시가 나뒹굴고, 왼쪽에 표정 얄궂은 할멈이 품에 이것저것 잔뜩 안고 있고,

뒤쪽에는 고갱의 타히티 여자 같은 반라의 인물이 눈을 치뜬 채 앉아 있고……

도시 감 잡기 어려운 그립입니다.

저의 속은 짐짓 접어두고 평론가의 말을 빌려 몇 마디 들려주었죠.

전통과 현대의 갈등, 개인과 시대와의 불화, 대충 이런 걸 상징한답니다 운운……

암 말도 않다가 술자리로 옮기고 나서 그분 하는 말이 기상천외했습니다.

“거 혹시 디지털 세상을 예측한 거 아닐까요?”

세상에, 들어도 그런 엉뚱한 소감은 처음이었습니다.

디지털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분이었습니다.

겨냥이 한참 어긋났다구요? 아뇨, 저는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아, 이게 바로 그림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차이와 사이의 기쁨이구나, 저는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아니, 김 선배, 그 웃음은 뭡니까. 별것 아닌 걸 별스럽게 지껄이는 제가 여전하다구요.

아이고, 밸도 없이 또 풍각 잡고 말았네요. 그만 넘어가시죠.

 

 

- 손철주,『그림 보는만큼 보인다』 머리말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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