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우습게 보지 말라
"나도 저 정도는 그리겠다." 사람들은 거장들의 작품 앞에서 쉽게 말한다.
하지만 아무도 내 그림을 거장의 것처럼 대접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인정한 것은 안료로 덮인 캔버스, 즉 결과물뿐 아니라
작가가 그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과 개념이다.
미술감상은 우리를 훌륭한 미술가로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의 개성있는 감성을 배울 수는 있다
우리가 미술 감상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예술적인 테크닉이 아니다.
거기에 실린 예술적인 마음이다. 그 마음은 효율이 아니라 의미를 짚어 갈 수 있는 마음이다.
미술가의 창조적 행위의 마침표는 관람객의 해석이다
미술가의 창조적 행위는 언제 끝날까?
화가가 붓질을 멈추었을 때? 조각가가 작업실을 떠날 때?
아니다. 관람객의 해석을 통해 미술품이 외부 세계와 만날 때 창조적 행위는 끝난다.
현대 미술에서는 감상자가 작품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의미가 발생하는 미술품이 많다.
<무제>는 감상자들이 온전히 미술품에 집중하도록 붙인 제목이다
미술품의 의미를 선명하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왜곡할 여지도 있는 것이 제목이다.
몇몇 미술가들은 제목이 미술품과 감상자가 소통하는 데 방해가 되는 군더더기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제목이 없다면 미술품을 자료화 하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제목 없는 제목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이러한 실용적인 이유에서이다.
손바닥만한 책인데, 값이 싸서 주문해봤습니다.
30분이면 다 읽습니다. 인용할만한 내용이 없네요.
아래는 이번에 도서관에서 빌렸다는 책의 머릿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전에 이 문제를 가지고 고동우님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미술 감상의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로 그림 속에 담겨 있는 내용,
곧 스토리가 무엇인지에 모든 관심을 쏟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성취되면 그 작품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작품에는 주제와 스토리에서부터 그런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나 시대적 조건,
당대의 역사, 작가의 성격, 취향,철학, 작품의 미학적인 구조, 조형어법, 사조, 스타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요소가 담겨 있다.
이것들은 제각각 혹은 서로 어울어져서 감상자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열망의 달성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감상자의 안목이다.
진정한 감식안은 눈앞의 이미지로부터 무엇이 이 작품의 핵심적인 가치를 이루는지,
왜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를 금세 안다.
그것은 그가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서 가능한 것일 터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창조성이다.
학문적 성취든 예술 감상이든 창조적인 시각만이 의미를 발견해내고 만들어낸다.
이 창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바로 직관이다.
직관이 뛰어난 감식안은 보는 순간 작품의 가치를 알아낸다. 이런 감상자가 바로 뛰어난 감상자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작품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다시 지식의 습득과 경험의 확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식과 경험은 직관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직관은 지식과 경험이라는 구슬을 꿰는 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근거가 있는 말임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서문에서 발췌-
'이렇게 에로티시즘의 미학으로 여성을 복권시킨 그의 그림은 나아가 남성과 여성,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정한 화해를 시도한다.
그 대표적인 걸작이 「키스」다.
그림의 구성은 단순하다. 꽃이 핀 벼랑 위에서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고 남자는 여자의 뺨에 키스한다.
둘 다 듬빛 옷을 입었는데, 금장식은 남녀의 옷에 그치지 않고
여자의 뒤꿈치에서 남자의 어깨 부분까지 일종의 광배 같은 것을 형성한다.
옷과 광배를 한데 이어 보면 남성의 성기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지금 남성 성기 모양의 광채 안에서 두 사람이 진한 화해의 키스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남성 안의 여성성과 남성성의 화해를 의미한다.
가부장 전통사회에서는 성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기 때문에,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주어진 성 역할에 철저히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기존질서에 대한 도전이 된다.
따라서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은 시종일관 억압된다.
여성 억압이 남성 억압이기도 한 것은 그것이 남성 안의 여성성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남녀 화해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넘어 이렇듯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이
그 반대의 정체성과도 화해를 하는 것이다.
남자도 사람들 앞에서 울 수 있고 여자도 용감무쌍한 리더가 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할 때 남성과 여성은 서로 동등한 인간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동료가 될 수 있다.
클림트의 「키스」는 바로 그 사실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同書 p12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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