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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서양화

윌리암 부케로

 

 

Adolphe William Bouguereau

 

 

 

 

1

 

세잔에게 꼴통 중의 꼴통이라고 비난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돌프 윌리엄 부게로 (Adolphe William Bouguereau) 입니다.

부게로를 존경했던 이국적인 그림의 대가앙리 루소가 그냥 지나칠 수 없었겠지요.

'‘미완성 그림만 그리는 주제에 ----‘' 앙리 루소가 세잔에게 던진 말이었습니다.

살아서는 화가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렸지만 세상을 떠난 후 미술사에서는 흔적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묻혀버렸다가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부게로의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어쩌면 이야기가 길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벌써부터 저의 마음이 부글거리기 때문입니다.

  

  

부게로는 자신의 이름 중에 아돌프를 쓰지 않아서 보통 윌리엄 부게로라고 불립니다.

프랑스 화가들의 이름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국내 자료를 보면 그의 이름을 부게로, 부궤로, 브케르, 브그르, 브그로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부게로에 관한 자료를 보면 어려서부터 미술에 대한 재능이 뛰어 나서 모차르트와 같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와인과 올리브 기름 상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음 학교에 입학해서 받은 노트와 교과서의 여백에 수 많은 그림을 그렸고

아이들은 그의 그림에 대해 늘 시끌시끌 했던 모양입니다  

  

부게로의 아버지는 대를 이어 그를 상인으로 키우고자 했지만 집안 사정이 급격히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친척들 집에 맡길 수 밖에 없었는데,

결과를 놓고 보면 부게로의 인생 행로가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를 맡아 준 사람은 삼촌이었는데, 그에게 그리스 신화와 고전,라틴어, 역사 그리고 성경과 관련 된 주제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삼촌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서 처음으로 그리기에 대한 수업을 받습니다.

훗날 부게로가 어렸을 때 행복했던 기억은 없었지만 삼촌 집에 있었을 때는 행복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르도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을 하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빠듯했던 그는,

상표 디자인 같은 일을 합니다. 학교 수업도 아침 8 이전에만 참석할 수 있었고 밤 늦게까지 일을 했는데,

어린 스무 살 도 안된 아이를 생각해보면 그의 끈기와 근면성이 놀랍습니다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한 부게로였지만 2등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졸업 후 파리에 있는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고 싶었지만 이 때도 금전적인 문제가 그의 앞에 막아 섰습니다  

삼촌은 그 지역의 유력 인사들의 초상화 그리는 일을 주선합니다.

3개월 동안 33장의 초상화를 그리고 난 후 부게로는 900프랑을 손에 쥘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바느질 일을 해서 아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드디어 부게로는 파리로 떠납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시험을 봤는데 하마터면 입학시험에 떨어질 뻔 했습니다. 100명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99등이었습니다.

고고학, 고대 의상학, 해부학을 배우면서 그의 성적은 점점 상승했습니다.

에콜 드 보자르에서는 매년 우수한 학생 10명을 선발해서 로마에 유학을 보내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4년간 로마 유학 기간 중 부게로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대작들의 구성과 형태에 대해 집중했습니다.

유학 기간 중에도 그림에 대한 그의 쉬지 않는 근면성과 인내심은 계속되었고, 가장 집중 했던 화가는 지오토였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미술사에서 진정한 천재는 지오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이유는 지오토 이야기를 할 때 써 보겠습니다.

 

 

 

2

로마에서 귀국한 부게로의 그림은 곧 사람들의 인기를 얻습니다.

세밀한 묘사, 특히 손과 발, 피부의 묘사는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고 살롱에서 그의 작품은 인기 있는 품목이었습니다.

아카데미 화풍으로 충실하게 그려진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사진처럼 정확하면서도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림을 그리기 전 주제에 대해 완벽하게 공부를 하고 난 뒤,

무수히 많은 스케치를 통해 얻은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일군의 작가들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공격자는 인상파 화가들이었는데 선봉은 드가와 세잔이었습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잠깐 이유를 뒤져 볼까요?

19세기초부터 르네상스 대가들의 미학적인 규범에 맞춰서 새로운 형태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공식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주제는 역사나 문화 쪽에 기울어져 있었고 작업을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다시 도제가 도입되었고 미술에 대한 교육 역시 예전 도제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규범화 되어 있다 보니까 당연히 개인의 창의성 보다는 표준화된 기술만 강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이런 제도에 대한 불만이 젊은 화가들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인상파가 등장한 것입니다.

인상파의 탄생을 기존 체제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인상파들이 소위 꼴통이라고 부르는 체제가 바로 부게로가 대장인 아카데미파 입니다.

그런데 광의로 보면 아카데미파는 어느 시대이든 주류를 일컫는 통칭이기도 합니다.

 

이 두 흐름과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세잔이 부게로에 대해서 막말을 한 것은 이미 소개를 했고 이 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부게로와 앙리 마티스입니다.

부게로가 지도하던 학생 중에 앙리 마티스가 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그림 그리기는 끈기와 인내를 요구합니다.

당시 아카데미즘을 추종하는 화가 중에서 부게로만큼 학생들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도록 독려한 스승도 없었다고 하는데

마티스는 얼마 못 견디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부게로는 처음부터 마티스를 격려했지만 마티스의 연약함이 문제였습니다.

화가 난 부게로는 마티스에게 너는 원근법을 다시 배워야겠다. 그러나 먼저 연필 쥐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

그렇지 않다면 결코 그림을 그릴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인상파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드가와 그의 친구들은 고요하고 부자연스러운 외모가 그려진 그림을 보면 부게로 같다라는 말로 비웃었습니다. 

 

당시 파리의 살롱은 연간 30만 명이 찾는 곳이었습니다.

살롱에 그림이 걸리고 그 그림이 팔린다면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부게로의 그림은 살롱에서 인기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의 명성은 영국까지 알려졌고 금전적으로도 부유해졌습니다.

드디어 그는 몽파르나스에 큰 집과 화실을 장만합니다.

   

31살이 되던 해 마리와 결혼합니다. 마리와의 결혼 생활은 21년간 이어졌는데 둘 사이에 다섯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부와 명예를 얻기 시작하면서도 부게로는 자신이 가난했던 시절을 잊지 않았습니다.

가난하지만 가능성 있는 화가들을 지원했고 나중에는 빈민을 위한 재단도 설립합니다.

그의 그림에 가난하고 소외 받은 계층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들에 대한 따듯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게로는 적어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52살 때 아내 마리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 전 해에 막내 아이를 낳았는데 폐결핵과 임신중의 합병증이 원인이었습니다.

갓난 막내 아이 역시 두 달 뒤 엄마를 따라 세상을 떠납니다.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을 것 같은데,

아내가 죽던 해 12, 그 다음해는 17, 3년째 되던 해 23점의 작품을 그린 것을 보면 부게로는 더욱 그림에 매달린 것 같습니다.

 

   

계속되는 무자비한 인상파의 공격에도 그는 평온했고 그가 추구하는 절대미에 대한 탐구는 계속 되었습니다.

부게로에 대한 공격이 심했던 것은 그의 품성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공과 사에 있어서 항상 정직했고 권력남용이나 거짓을 혐오했던 그는 소위 타협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 호색가라는 소문도 있었고 여성 누드를 그릴 때만 행복해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부게로가 여성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 중 누드화는 10%도 안됩니다.

이런 저런 소문에 대해 부게로는 어떤 변명도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예술 학교에서 여학생을 받게 된 것은 부게로가 처음 주장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것은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826점의 작품을 남기고 80세로 부게로는 세상을 떠납니다.

  

 

 부게로가 세상을 떠난 후 일어나는 일을 따라가다 보면 이럴 수도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우선 미술관에 있던 그의 그림들이 차근차근 벽에서 내려집니다.

인상파가 득세하던 때였으니까 아카데미즘의 대장인 그의 작품이 눈에 가시 같았을 것이고

당시 관람객들도 그의 작품에서 흥미를 잃었을 것입니다.

그의 명성과 업적은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비방 속에 묻혔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년 뒤에는 백과사전과 역사교과서에서 조차 그의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다만 그의 작품을 맹목적으로 비난하고 평가절하 하는 자료에만 그의 이름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렘브란트는 시대의 영혼을 잡았고 부게로는 젊음의 영혼을 잡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거장에 대한 찬사이지만 사후의 운명도 비슷합니다.

렘브란트가 1669년 세상을 떠난 후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이 사라집니다.

100년이 지난 1790년대가 되어서야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지만

1910경매 시장에서는 영국 죠수아 레이놀드의 작품이 렘브란트의 작품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될 정도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부게로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처음 관심을 보인 곳은 역시 경매시장이었는데 3년 반마다 그의 작품 가격은 두 배씩 뛰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경매에서 그의 작품 가격이 4배 이상 폭등하면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재발견 작업이 시작됩니다.

1차 대전부터 1980년대까지 유럽에서 부게로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흑백 사진 속에 남아 있는 그림을 보는 정도였으니까요.

   

드가와 모네는 ‘2000년까지 19세기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기억 될것이라고 부게로를 평했습니다.

부게로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냈던 드가였지만 부게로의 실력만큼은 인정한 것이죠.

신랄한 유머와 심미안을 가진 드가의 말이기 때문에 느낌이 좀 다릅니다.

 

 

극과 극의 평가 속을 오갔던 부게로 선생님,

돌아 가시고 난 뒤의 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살아 생전 즐거우셨고 따듯했고 정직했다면 그 것으로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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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Adolphe Bouguer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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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키스 the First Kiss (1890) L'Amour et Psyche, enfants

 

 

 

The Secret, 1876  oil on canvas, New York Historical Society

 

부게로는 수십 년 동안 '살롱전(미술 전람회)'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하기도 하면서 화가로서 대성을 한다. 후기에는 파리의 여러 교회장식을 맡아 하였으며, 보르도의 큰 극장에서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프랑tm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도 폭넓은 영향을 미쳤으며,  1876년에는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The Harvester 1868

 

 

Return from the Harvest,  1878, oil on canvas, Museum of Art & Gardens, Jacksonville.

 

부게로는 낭만주의의 끝자락에 서서 아카데미즘을 널리 알리려 한 인물이었으나 인상파의 시류를 이기지 못한 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화가다. 실제로 부게로에 대해서는 "저주받은 화가"라는 둥 다소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나돌고 있지만, 부게로가 "저주 받은 화가"라고 불리는 것은, 그 의 작품들이 후대의 미술사학계에서 철저하다 싶을 만큼 소외당했기 때문이다.

 

 

 

L'aurore 1881

 

부게로 활동하던 당시 화단에 '이단아'처럼 등장해 그야말로 핵폭탄급의 충격을 던졌던 인상파의 출현이 작금에 와서 아무래도 미술사학적으로는 더 영향이 컸기 때문이지만 부게로는 당시의 프랑스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던 예술가였다. 해부학적 완벽을 추구하는 정교하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린 낭만주의의 마지막 선봉,  부게로를 기존의 화풍과는 다른 그림을 들고 나왔던 인상파 화가들이 소위 "기법적 기득권층"의 대표격으로 간주한 것은 당연했다.

 

 

 

 

 

Apres le bain 1894

 

부게로는 당시 파리 화단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작가였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으며 전시회의 그림들을 본 사람들로부터 원작의 축소판을 그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프랑스 국립 미술원의 종신회원으로 벨기에와 스페인에서 명예 작위까지 받을 만큼 동시대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끝내 후배들과 "코드"를 맞출 수 없었던 부게로는 그대로 잊혀진 화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The Flagellation of Our Lord Jesus Christ


 

드가와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이런 부게로를 끔찍하게 싫어해서 통속적이고 보수적이고 과거중심적인 데도 진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결과적으로 프랑스 미술의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며 끊임없이 부게로를 헐뜯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부게로 역시 인상파를 보는 시각은 그들과 다름이 없었다. 당시의 모네를 중심으로 일어난 인상주의에 대해 그는,

"무슨 까닭으로 자연의 추함을 재현한단 말인가?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고? 안 된다!"

인상파들은 부게로를 끊임없이 헐뜯고 깎아내렸지만, 그 것으로 부게로의 재능이나 그의 작품의 위대성까지 깎아내릴 수는 없었다. 그들로 하여금 부게로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부게로의 그림에서의 재능이 미숙한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들 자신의 천재성이었다. 부게로 정도의 거장이었다면, 거기에 동조나 공감은 하지 않았더라도 인상주의의 위대함을 꿰뚫어볼 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The first mourning (아벨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담과 이브)

이 그림은 창세기 4장에 나와 있는 인류 최초의 살인이라 일컬어지는 아벨과 카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The Dance 1856, oil on canvas Musee d'Orsay, Paris

 

Fred Ross 라는 인물이1977년에 Clark Museum에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러갔다, 그 구석에서 처음으로 부게로의 작품 보았다. 콜럼비아대학에서 미술교육으로 박사학위를 가진 자신조차 한번도 들어본 적도, 본적도 없는 그림..

 

 

 

 The Remorse of Orestes

생전에 엄청난 경력을 가진 화가가 어떻게 철저하게 묻혀 질 수 있는지,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해 말이죠. 아는 사람도, 자료도 찾기 힘든 상황에서 연구가 시작된다. 그리고 동시대를 연구하고, 내버려진 작품들을 찾아다니며, 이 일이 '부궤로'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Jules Joseph Tissot, Alexander Cabanel, Jules Lefebvre,Ernst Louis Meissonnier,

Jean George Vibert , Leon Bonnat and Leon L'hermitte from France,

John William Waterhouse, Dante Gabriel Rossetti, Sir John Everett Millais,

Edward Coley Burne Jones Sir Lawrence Alma-Tadema,

Frederic Lord Leighton, and Frank Dicksee 등등....

인상파와 그 뒤를 이은 현대미술, 그리고 대량생산을 선호하는 딜러들의 이해관계에 맞물려 희생된 사람들...

 

 

 

Fraternal Love, 1851, oil on canvas, Museum of Fine Arts, Boston.

기본과 안정적인 구도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회화의 방식을 고수하며, 원근법과 해부학적인 관점을 중시여긴 사실적인 묘사, 덕분에 회화에 있어서 누적된 지식과 기술, 훈련으로 인해 표현력에 있어서는 최고의 수준에 오를수 있었던.. 금방이라도 튀어나올듯한 근육, 핏줄, 뼈대.. 생생한 색깔.. 그중의 최고라고 평가받는 부게로.


"회화에서 나는 이상주의자다. 나는 예술에서 아름다운 것만을 보며, 나에게 예술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Psyche

 

 

All Saints' Day (Le jour des morts), 1859, oil on canvas, Musee des Beaux-Arts, Bordeaux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인간의 몸을 평면화시키고, 입체화 시키고,  갖은 기구를 동원하여 알 수 없게 표현한 현대의 그림에 못지않게, 인간 신체의 본래의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그 표현의 독창성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면 그 그림은 명화로서 대우받아야 할 것이다. 감상은 그런 것이 아닐까??.. 비평을 위한 감상보다는 감상을 위한 감상이 "그림을 보는 시각"에는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3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
William Adolphe Bouguereau(1833~1898)의 작품감상과 해설 

 



한가한 어린 시절  A Childhood Idyll / 1900

무릎에 팔을 괴고 풀피리를 부는 언니를 쳐다보는 어린 소녀의 표정이 압권입니다.
요즘 아역 배우들 못지 않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손보다도 작은 발, 큰 눈, 신기한 듯 자신도 모르게 번지는 입가의 미소,
화면의 가운데를 지나는 풀밭과 하늘이 맞닿는 선이 주는 안정감,
---- 그냥 편합니다.



 

응석    A Little Coaxing / 1890

꼬마가 뭔가 필요한 것이 있는지 언니에게 응석을 부리는 중입니다.
언니의 얼굴이 환한 걸로 봐서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하나 남은 노란색 오렌지를 넘보는 것 아닐까요?
언니의 손등에 묘사된 힘줄을 보면서 부게로의 테크닉에 감탄하고 감탄했습니다.


 



 

말등 놀이    The Horse Back Ride / 1881

언니가 동생을 등에 태우고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동생들하고 많이 했던 놀이입니다.
언니는 뭔가에 토라진 동생을 달래려는지 기꺼이 등을 내 준 표정입니다.
동생은 언니의 옷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데 표정을 보면 아직 덜 풀린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벌떡 일어나서 동생을 떨어드렸는데
아마 화면 속의 언니는 그런 야만적인 행동은 하지 않겠지요.





공부는 어려워    The Difficult Lesson / 1884

또랑또랑한 아이가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보다가 모르는 부분이 나온 모양입니다.
‘이게 뭐죠’ 하는듯한 눈이 너무 귀엽습니다.
예술학교에 처음으로 여성을 입학시킨 그의 경력을 생각하면
어린 소녀의 책을 읽는 장면도 여성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잘못했어요  In Penitence / 1895

 

손에 먹다 만 과자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혼나고 있는 이유가 짐작이 됩니다.
부끄럽고 무안한 아이의 표정과 얼굴을 가린 손짓에 웃음이 나오지만 뒷맛은 씁쓸합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문제는 가난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만든다는데 있습니다.
 

 



맛 만 봤어   Just a Taste / 1895

잠시 후 같이 먹자고 했는데 먼저 한 숟가락을 먹다가 걸린 걸까요?
표정은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눈은 미안한 듯, 약간 겁 먹은 듯 하지만
꼭 다문 입을 보면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그러느냐는 듯 합니다. 아이답습니다.




깨진 물항아리  The Broken Pitcher / 1891

참 난처한 일입니다.
우물가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소녀의 발 옆에는 깨진 물항아리가 있습니다.
잘 들고 왔는데 물을 긷기 위해 내려놓다가 깨진 모양입니다.
‘깨진 독에 물을 붓기’도 어렵고, 걱정이 가득한 눈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 ‘살다 보면 넋을 잃어야 할 순간이 얼마나 많은데,
그때마다 마음을 내려 놓으면 나중에는 마음을 들 수 도 없단다’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소녀에게는 아무 도움이 안될 것 같습니다. 





바스크 드럼을 든 집시 소녀  Gypsy Girl With a Basque Drum / 1867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한 걸까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입니다.
올려다 보며 애써 참아 보고자 했지만 결국 뺨으로 흘러 내리고 말았습니다.
눈물을 닦아 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군요.
하느님은 여인의 눈물을 세고 계신다고 했으니까 소녀의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은 큰 일 났습니다.
어디선가 저 때문에 울었던 여인이 있다면 용서를 빌어야겠습니다.
눈물이 가득한 소녀의 눈,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어린 거지   The Little Beggar / 1880

어린 거지 소녀의 퀭한 눈은 이제 그녀의 여린 몸을 지탱하는 것도 힘들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벌린 손은 돈을 요구하고 있지만 구부러진 손가락은
뭐든 손에 쥐어지는 것은 놓치지 않겠다는 표시처럼 보입니다.
소녀의 뒤로 칼날 같이 서 있는 산들의 모습은 그녀가 처한 상황 같아서 섬뜩합니다.
이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린 도둑   Little Thief / 1900

몰래 딴 과일을 손으로 감추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보면 당황하거나 하는 표정이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훔친 것이 아니고 서리를 한 정도라고 보면 될까요?
뭐 이 정도를 가지고 ---- 소녀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거친 맨발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부게로의 작품에는 귀여운 도둑이 참 많습니다.
커서는 과일이 아니고 좋은 남자의 사랑을 훔쳤으면 좋겠습니다.



 

어린 거지들   Little Beggars / 1890

뒤에 선 언니의 모습에는 삶의 피곤함이 묻어 있지만 동생은 야무진 얼굴입니다.
(한 성질 할 것 같습니다).
구걸을 원하는 손가락도 애처롭지만 유난히도 큰 엄지발가락이 마음을 쓰리게 합니다.
그나저나 앞의 소녀는 부게로의 전속 모델이었을까요?
참 많은 작품에 등장합니다.





어린 도둑들    Little Thieves / 1872

담을 넘어 사과 밭에 가서 사과를 몰래 땄습니다.
언니가 먼저 담을 넘어 와서 동생을 안아 내리는 중입니다.
동생은 아직도 긴장을 하고 있는지 얼굴이 붉습니다.
그러나 둘의 표정을 드려다 보면 한 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닙니다.
화면 가운데 위치한 모델들의 자세가 너무 안정적이어서, 불안감이 없기 때문일까요?
오히려 눈부신 맨발이 안타깝습니다.


 



 

 

최초의 슬픔     
252 x 203 cm / 캔버스, 유화 / 1888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립 박물관 화인 아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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