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옛이름이 대둔사였다는군요.
이곳 두륜산이나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은 월악산이나 주작산 같지 않고 산세가 부드럽습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사진이 실제보다 좀 어둡게 나왔는데,
이 정도는 아니라도 어둠이 슬슬 내려옵니다.
클났습니다. 입구에서 대흥사까지가 동학사 들어가는 것보다도 멀답니다.
자동차가 다니는 이 큰길 말고, 산책로가 따로 또 있다고 써있습니다만 엄두도 못냅니다.
마음은 급하고 발걸음이 바빠집니다.
누렁이가 등산을 안내한다는 그 여관입니다.
그 개는 지금 없을 겁니다. TV에서 본지도 꽤 됐지요.
입간판엔 유선여관이라고 써있는데, 대문에는 유선관(遊仙館)이라고 돼 있더군요.
여기서 숙박을 했으면 좋겠는데, 방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내려올 때 다시 알아보기로 하고 발길을 서둘렀습니다.
이 사진은 다른분의 브로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양해바랍니다.)
내려오면서 다시 들렸더니, 방이 하나가 남아있긴 한데, 이미 전화 예약을 한 사람이 있어서 안되겠다더군요.
일요일 저녁인데도 방이 없을 정도니까, 여기서 묵자면 예약은 필수입니다.
숙박료는 1실 3만원, 석식은 1인당 1만원, 조식은 7천원이랍니다.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늦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들렸을때도 식사는 끝났다고 하더군요.
일주문입니다.
아래에서는 대둔사라고 썼는데 여기선 대흥사라고 썼군요.
부도가 엄청 많습니다. 주눅들게 만들죠.
밝게도 찍어보고, 있는 그대로도 찍어보고 했는데.....,
그나저나 명필이지요? '해탈문(解脫門)', 얼마나 멋집니까?
원교 이광사 글씨입니다.
두륜산입니다. 봄에 산악회서 산행 많이 오는 산입니다.
저는 여태 못 와봤습니다.
큰 절에 들어왔구나,라는 게 탁 와닿습니다. 위압감을 느낍니다.
여기서 절 소개를 한번 들어봐야겠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옮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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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말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13명의 대종사(大宗師)와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명찰로 임진왜란 뒤에야 비로소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갖추었다. 가람배치는 절터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을 중심으로 별원의 성격을 지닌 남원과 북원으로 되어 있다. 북원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원은 천불전과 서산대사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表忠寺) 일곽, 다도(茶道)로 유명한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중건한 대광명전(大光明殿) 일곽으로 나뉜다. 대웅전은 1665년(현종 6)부터 1667년에 걸쳐 심수(心粹)가 중창했는데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집으로 내부는 단조로우며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李匡師)가 썼다. 대웅전 앞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無量壽殿)이란 편액이 있으며 동쪽 응진전 앞에는 대흥사응진전전3층석탑(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보물 제320호) 1기가 있다. 천불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은 1811년(순조 11)에 불탄 것을 1813년 중건한 것으로,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만든 천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이 봉안되어 있고, 천불전 좌우에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용화당(龍華堂: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과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이 있다. 1669년 건립된 표충사(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는 대흥사의 대표적 건물로 앞면 3칸의 맞배집이다. 서산대사·사명대사·처영(處英)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표충사 삼문(三門) 밖에는 2층 누각인 의중당(義重堂)이 있는데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집으로 봄·가을에 있던 표충사 제사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처리하던 곳이다. 의중당 동쪽에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비롯하여 사중유물(寺中遺物) 총 24종을 보관하고 있는 보장각(寶藏閣)이 있다. 표충사 동쪽 300m쯤에 있는 대광명전(전남 유형문화재 제94호)은 조선 후기 초의가 건립한 앞면 3칸, 옆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했다. 특히 초의가 직접 단청했다고 전하는 천장의 연꽃무늬와 운학(雲鶴)문양은 뛰어난 형상미와 색채감각으로 높이 평가된다. 대광명전 옆에는 고승들의 영정이 봉안된 앞면 9칸의 보련각과 요사채가 있다. 그밖에 사천왕을 봉안한 천왕문과 역대고승들의 부도·비석을 봉안한 비전(碑殿)이 있는데, 이 비전에는 서산대사부도(전남 유형문화재 제57호)를 비롯해 대흥사 대종사 13명과 대강사 13명의 부도 및 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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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보다도 내려갈 일이 더 걱정입니다. 당연히 랜턴은 준비하질 못했습니다.
촛불을 켜지 않은 사람은 쪽지를 사용하지 말라니요?
돈 얘기 하는 거지요? 돈 낸 사람만...... ㅠㅠ
'침계루(枕溪樓)', 역시 이광사 글씨입니다.
빼어난 작품으로 꼽힙니다.
저 분들이 마지막으로 나가는 탐방객입니다.
스님이 그러더군요. 관람시간 끝났으니 나가라구요.
이것이 바로 추사 김정희 때문에 유명해진 원교 이광사의 글씨 '대웅보전'입니다.
눈에 많이 익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 '무량수각' 그 편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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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 가는 도중에 여기 대흥사에 들려서,
"원교는 먹도 못가는 놈이여, 저건 글씨도 아녀. 내가 새로 써 줄팅께 그걸로 당장 바꿔라잉!"
그러곤 유배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려서는,
"먼저 번에 그 원교의 글씨, 버려부렸냐? 아녀, 다시 그걸루 걸어라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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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못 된 구석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주도 귀양 가서도 음식이 제 입에 안 맞는다고 밑반찬을 서울서 부쳐다도 먹었다잖습니까?
마누라는 얼마나 속이 탔을 거며, 또 그걸 몇달씩 오르내리면서 져날라다 준 머슴아비는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집안살림이나 넉넉했답디까?
툭하면 종이 타령, 붓 타령, 먹 타령,, 구해줄 수 있냐고...... 후배나 제자한테......
그것도 제주도 유배 가 있는 주제에.......
<완당평전>에도 보면 징징짜는 얘기가 많습니다.
군대 가서 돈 부쳐달라는 놈 같습니다.
인간이 덜 돼먹었어요. 나이값 못하는게...... 어떻게 제 생각만 하고 세상 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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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장면도,, 추사가 시건방을 떨었다기 보다는 어린양을 부린 것 같습니다.
원교도 당대에 알려진 명필인데, 아무리 추사래도 그런 무례한 짓을 범할 수는 없는 거지요.
(원교가 쓴 현판을 여전히 보관하고 있던 걸 봐도.......)
추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어준 초의선사도 잘못했지요.
추사네 집안과 원교네 집안은 당파와 관련해서 구원(舊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음은 원교에 대한 소개글인데 옮겨와봤습니다.)
우리 문예사에서 작품과 생을 맞바꾼 예는 허다하다. 500권이 넘는 다산의 저작은 18년 강진유배의 대가다. 18세기 조선예원의 영수인 표암의 존재는 과거길이 막힌 30년간의 안산 고행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 추사체 또한 제주유배 8년과 그 이후의 결정이다. 그러나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생애는 고통으로 치면 이들을 다 모은 것이다. 1728년 이인좌 난으로 소론이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 원교는 출사를 단념하고 근 20년간을 야인으로 백하 윤순과 하곡 정제두를 사부로 글씨와 양명학 공부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차라리 원교 일생에서는 다행이었다. 원교의 진짜 인생은 1755년 소론일파의 연잉군(훗날의 영조) 제거 역모사건(나주괘서사건)의 실패로 가담자 모두가 장살·옥사되는 가운데, 왕족의 후예이자 예술적 천품이 참작되어 영조가 원교에게 사약 대신 유형(流刑)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원교 스스로 2천리 유배 길을 나서는 1755년 3월30일을 성은(聖恩)으로 다시 태어난 생일 날로 삼을 정도였다. 원교는 조선의 최북단 함경도 부령에서 7년, 다시 최남단 절해고도인 전라도 신지도에서 15년간 도합 22년간을 유배지에서 살다죽었다. 요컨대 원교는 죽도록 유배지에서만 희(喜)·노(怒)·애(哀)·락(樂)을 모두 글씨에 담아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원교의 글씨에는 유독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기 어려운 다양한 표정이 포착된다. 그중에서 날고 뛰는 행서(그림1)는 원교체의 진수인데, 작가의 성정(性情)과 기질(氣質)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래서 다산과 같은 인물들은 반전이 심한 원교 행서를 “자형(字形)이 가증스럽다”고 혹평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씨에 개성을 그대로 담아내는 인물로는 원교를 따를 수 없다. 역사적으로도 그의 글씨를 놓고 스승인 백하와 서로 우열을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하는 비록 초서라 하더라도 온화하고 단정하지만, 이광사는 행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자체라도 반드시 우울한 심기를 떨치듯 삐뚤삐뚤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규상은 ‘서가록’에서 “연기현감 황운조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원교글씨의 경악할 만한 면을 헐뜯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의 기걸(奇傑)한 기질로 액운이 쌓임을 만났으니 반드시 편안하지 못한 심기가 붓끝에서 울려나온 것일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 것 같다. 하나의 획을 긋고 하나의 글자를 씀에 울림이 기세가 등등하고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는 진실로 은 갈고리나 쇠줄 같아 용이 날고 호랑이가 뛰는 듯한 기상이 바탕에 있다”(그림2)고 할 정도다. 요컨대 원교의 글씨는 획 하나 하나의 음악적 리듬에 자신의 미묘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는 데 가장 큰 특장이 있다고 하겠다. ‘서가록’에서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로는 ‘이광사는 글씨를 쓸 때 노래하는 사람을 세워두고 노랫가락이 우조(羽調)일 경우에는 글씨도 우조의 분위기로 썼으며, 노랫가락이 평조(平調)일 경우에는 글씨에도 평조의 분위기가 서려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글씨가 추구하는 바는 기(氣)라고 할 수 있다”고 한 데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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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이광사, ‘침계루’(枕溪樓), 편액, 전남 해남군 대흥사 소재.
그렇다면 원교글씨의 토대나 이상은 어디에 있는가. 원교의 문필은 고조부인 이경직·경석, 증조부 이정영, 조부 이대성은 물론 백부 이진유, 부친 이진검, 숙부 이진급 등이 타고난 명필임에서 확인되듯이 집안내림이다.여기에다 당시 과장(科場)에서 시체(時體)로 통하던 당대 최고명필 백하 윤순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원교 예술의 골간이 된다. 원교 스스로도 “내가 30세 이후로 고인의 필법을 전적으로 학습하였지만 필의(筆意)를 깨닫게 된 바는 백하에게서였다”라고 하였다. 요컨대 원교는 왕희지를 토대로 김생 이래 우리 글씨는 물론 중국의 당·송·원·명의 글씨 맥락을 소화해낸 백하의 창경발속(蒼勁拔俗)한 글씨미학과 학서(學書)방법이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교의 글씨는 백하와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송은 물론 위·진 고법에서 거슬러 올라가 전서와 예서로 된 여러 비석 글씨를 아울러 구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원교가 왕희지를 근본으로 둔 옥동 이서나 공재 윤두서는 물론 백하 등 선대 명서가들의 서예이념을 공유하면서도 그 이전의 전·예서에 뜻을 두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교가 자신이 지은 ‘서결(書訣)’에서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왕희지 고첩(古帖)이 없었는데, 오로지 옥동과 민성휘 집에서 얻어 본 낙의론(樂意論)과 동방삭화상찬(東方朔畵像讚) 두 첩에서 내 평생 필력을 얻었다. 무릇 고첩은 모두 모각(摹刻)을 거듭하였으니 오늘날 왕희지의 본색을 정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한(漢)·위(魏)의 여러 비석 글씨는 원래 각을 전하고 있어 심획(心劃)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이 두가지 첩을 여러 비석 글씨와 비교하여 익혔다”고 고백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요컨대 원교는 오체일법(五體一法)을 주장하며 이미 추사가 목표를 삼았던 왕희지 근본의 해서나 행초 중심의 첩학파는 물론 이전의 전·예서 등 비학파의 성과까지 동시에 실천해낸 선구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교 글씨의 이러한 성취에 대해 정작 추사는 ‘서원교서결후(書員嶠書訣後)’에서 원교가 먹을 가는 법, 붓 잡는 법도 제대로 모르고, 구양순과 안진경 글씨를 일률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추사는 청에서 들어온 급진적인 비학파 이론을 토대로 원교가 왕체 소해법첩과 ‘순화각첩’ 등 첩학의 본래 결함도 모르고 있거나 한·위의 여러 비석 글씨의 품평상의 오류까지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추사의 이러한 비판은 지금까지 본 대로 사실과는 다른 측면이 많을뿐더러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어 원교 서예의 예술적 성취를 평가절하케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http://cafe.daum.net/btong/Fhdd/62
저렇게 불을 켜니까 부처님도 조명빨 잘 받는데요? 근사합니다.
밤에는 첨 와봤습니다.
대웅전 앞뜰인 모양인데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가이드 '길소개'氏도 지금쯤 속이 탈 겁니다.
그 유명하다는 표충사 입니다. 눈물을 흘린다는 비석도 있구요.
후레쉬 터트리고 찍은 겁니다.
초의선사 동상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어휴, 진짜 이제부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유선관 말고도 민박집이 또 하나 있는데, 저녁밥을 안 준대서 그냥 내려왔습니다.
소주 한잔해야지요. 홍탁삼합인가로 안주해서 '길'氏는 막걸리 마시고, 저는 소주 두 병 마셨습니다.
2차로 이상한 나이트 가서 맥주 몇병 더 마시고......
여관서 잤습니다.
내일 출근하려면 여기서 새벽에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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