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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서양화

바로크 繪畵

 

 

 

 

 

 

엘 그레코(El Greco,1541년? - 1614년)는 그리스에서 태어난 스페인 화가로,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이다. "엘 그레코"는 에스파냐로 올 때 "그리스인"과 같다고 해서 스페인어로 "그리스인"이라는 말인 그레코(greco)라는 말을 불인데서 유래되었다.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비잔틴회화를 배웠다. 20세 무렵 이탈리아에 가서 베네치아파(派) 화가인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에게서 풍부한 색채를 배웠으며, 코레조로부터는 깊이 있는 명암에 의한 정서적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1577년에 스페인 톨레도로 이주한 후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 속에서 독창적인 작품을 시작하였으며, 선명한 색과 그늘진 배경의 대조, 긴 열굴 표현 등의 틀을 유지했다.

대표적 작품에 <장님의 치료> <에스폴리오>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목자들의 경배> 등이 있고, 풍경화 <톨레도의 풍경>과 <자화상>이 있다.

 

 

 엘 그레코 / 슬픔에 잠긴 성모 / 캔버스에 유채 52ⅹ41 /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엘 그레코 / 수도사 오르텐시오 팔라비시노의 초상 1609 / 캔버스에 유채 113Ⅹ86 / 보스턴 미술관

 

 

 

 

 엘 그레코 / 성 베드로와 성 바울 / 캔버스에 유채 121.5Ⅹ105 / 에르미타쥐

 

 

 

 

 

 

 

 

 

루벤스 (플랑드르 화가)  [Rubens, Peter Paul]

루벤스 (1577. 6. 28 독일 나사우 지겐~1640. 5. 30)는 벨기에 안트웨르펜.플랑드르의 위대한 화가.그의 그림은 바로크 미술의 감각적 풍만함을 잘 보여준다. 그의 걸작 중에는 수많은 초상화와 종교화도 있지만 생명력이...
서양 미술가들 가운데 여러 기법들을 가장 잘 소화해냈으며, 가장 다양하고 많은 작품을 창조한 화가에 속한다. 그는 넘치는 정력으로 로마와 베네치아 및 파르마에서 고대와 16세기 거장들을 연구하고 모사했다. 또한 당대의 미술가들이 이룩해놓은 미술혁명에서도 자극을 받았다. 그의 포용력은 끊임없이 창조의 원동력이 되었다. 맡은 일의 규모가 클수록 그의 기질에는 더 잘 맞았다. 그는 라파엘로의 로마 화실 이후 유럽에서 가장 큰 화실의 주인으로서 공적인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에 일반에게는 그의 매우 독특한 시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강렬한 개성은 가족과 친구들의 초상화에, 풍경의 분위기와 웅장함을 다루는 솜씨에, 〈모든 성인들 All Saints〉(네덜란드 로테르담 보이스 반 뵈닝겐 박물관 소장)의 밑그림인 유화 스케치 같은 작품들에, 그리고 안트웨르펜 대성당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에 성 요한의 얼굴을 그리기 위하여 철저히 연구한 것 등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루벤스는 서양미술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화가로서 티치아노의 미술이 갖고 있는 시적 감흥과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색채 구사, 그리고 유화물감을 다루는 완전한 솜씨를 열렬히 칭송했는데, 이것은 2번째 스페인 방문으로 절정에 달했다. 루벤스 자신도 이런 자질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빛을 반사하는 작은 패널의 흰색 표면 위로 가느다란 붓을 놀리거나 길이가 거의 2m나 되는 커다란 화폭에 물감을 듬뿍 묻힌 붓을 휘두르는 대가다운 몸짓도 터득했다. ( 브리태니커. M. Jaffe 글 | 金錦美 옮김)
 
 
 

 루벤스 / 밀짚모자 1625 / 목판에 유채 79Ⅹ54.5 / 런던 미술관

 

 

 

 

 루벤스 / 王女 이사벨라의 시녀 1625 / 목판에 유채 63.5ⅹ47.5 / 에르미타쥐

 

 

 

 

 루벤스 / 헬레나 푸르멘트의 초상 1631 / 목판에 유채 75ⅹ56 / 암스텔담 미술관

 

 

 

 

 루벤스 / 세 미의 여신 1639 / 캔버스에 유채 221Ⅹ181 /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루벤스 / 파리스의 심판 1635 / 목판에 유채 144ⅹ190 / 런던 미술관

 

 

 

 

 

 

 

 

 

 

할스 

1581/85 네덜란드 안트웨르펜~1666. 9. 1 하를렘.
17세기 네덜란드의 뛰어난 초상화가.
 
초기생애
프란스 할스의 생애나 작품에 대해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자료가 전혀 없어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윤곽만이 알려져 있다. 그는 플랑드르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1591년경 가족은 안트웨르펜에 정착했으며 할스는 이후 평생을 이곳에서 지냈다. 25세 또는 30세(출생연대가 불분명하므로)가 될 때까지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미술가로서의 최초의 활동을 알려주는 증거는 1610년경 그가 독립 미술가로 등록되는 단체인 하를렘 성루카 화가조합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뒤이어 그는 안네트예 하르멘스도흐테르 아벨과 결혼했으며, 아벨은 두 아이를 낳고 1615년에 죽었다. 2년 뒤 할스는 레이스베트 레이니에르스와 결혼했다. 현존하는 작품들로 보아 할스는 초기에 차분한 초상화 및 하를렘에 있던 여러 조합들의 회원들과 군인들을 모델로 한 집단 초상화들을 그렸던 것 같다. 이 초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이미 완숙한 경지의 초상화 솜씨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당대의 네덜란드 미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분방한 붓놀림으로 그린 대작 〈하를렘에서 열린 성 조지 시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 Banquet of Officers of the Civic Guard of St. George at Haarlem〉이다. 이 그림에는 그때까지의 집단 초상화에서는 무시되었던 생동감과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이미 나타나 있다. 그러나 1620년경 할스는 옛부터 네덜란드인의 특성으로 여겨진 쾌활한 분위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그의 초기 작품의 특징으로 굳어졌다. 그가 그린 초상화의 상당수는 마냥 떠들며 노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흥겨운 사람들〉의 모델인 한스 위르스트는 돼지의 발과 청어, 달걀로 만든 목걸이를 걸치고 높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할스의 집단 초상화에서도 이같이 자연스런 삶의 기쁨이 뚜렷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딱딱한 형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2번째로 그린 〈하를렘에서 열린 성조지 시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인데, 여기에서는 인물들이 그들의 경제적 여유를 나타내기 위해 보통 신비스러운 종교적 황홀경을 나타낼 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그림은 또한 신비스럽고 영적인 느낌을 넌지시 전달하고 있는데, 자신의 모델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 이러한 느낌은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점점 사라지고 절대 사실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
1620년대경 할스는 인상파 화법과 비슷한 유연한 붓놀림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동시대의 스페인 화가인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붓 터치로 형태들을 구성했는데, 이러한 화법으로 인해 이 두 화가는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러나 할스는 밝은 색채의 빠르고 자유분방한 붓놀림을 이용해서 형태를 넌지시 나타냄으로써 인물과 동작과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벨라스케스와 구별된다. 17세기의 화가들은 대부분 여러 점의 예비 데생과 어느 정도의 밑그림, 그리고 정교한 끝손질을 거쳐 서서히 그림을 완성시켰다. 할스가 사용한 방법을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는 캔버스에 바로 그리기 시작하여 거의 유화 스케치에 가까운 처음의 자연스러운 표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재빠르게 그림을 완성한 것 같다. 할스는 전생애에 걸쳐 계속해서 이와 같은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그의 날카로운 인물 묘사는 더욱 두드러지게 직접성을 띠게 되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의 그림은 점점 더 자유분방해졌다.
 
후기생애
할스의 중년 이후의 그림에서는 쾌활함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40세 이후에 그린 초상화들에서는 주제의 인물들이 얼굴에 슬픈 그늘을 드리운 채 세상을 다 알고 있는 듯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특징을 강하게 보여주는 최초의 초상화는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 Man with Arms Crossed〉이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또다른 그림으로는 〈웃고 있는 기사 The Laughing Cavalier〉·〈이사크 아브라함스존 마사의 초상 Portrait of Isaac Abrahamszoon Massa〉·〈피테르 반 덴 브루케 Pieter van den Broecke〉·〈니콜라스 하셀라르〉·〈빌렘 반 헤이토이젠 Willem van Heythuyzen〉·〈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다니엘 반 아켄 Daniel van Aken Playing the Violin〉 등이 있다. 이 초상화들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을 나타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아주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1630~50년에 할스는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하를렘에 거주하는 중산층의 성실한 시민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100점이 넘는 개인 초상화와 6점의 집단 초상화와 가족 초상화를 그렸다.
그의 말년은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그는 괴로운 가족문제에 시달렸다. 그는 계속 꾸준히 그림을 그렸지만 1650년 이후로는 거의 일거리를 주문받지 못했다. 166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인정되어 당국으로부터 연금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불운에도 불구하고 할스가 마지막 16년 동안 그린 초상화들은 뛰어난 걸작들이다. 이무렵 그의 그림에는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인간의 희극이 비극으로 바뀌고 이성적인 인간과 미치광이를 가르는 질서가 붕괴된다. 이제 더이상 웃음을 띠지 않게 된 그의 초상화들은 일정한 나이가 든 후에는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생이 비극적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그뒤 할스는 점점 더 전통적인 주제들에 가까워졌으며 술잔과 식탁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주제의 강렬함과 생생함을 줄이고 구도를 더욱 단순화시켰으며, 더욱 자유분방하게 그렸다. 색채는 상당히 줄어들었으나 수십 년 간의 작품에서 매우 폭넓고 다양한 흑백의 색조를 구사했는데, 이 색채들만으로도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처럼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 볼 수 있었던 화려한 색채의 조화는 표현하기 어려운 신경 경련과 갑작스러운 움직임 및 움찔하고는 다시 빨라지는 심장박동들을 형상화한 듯한 미술로 이어졌다. 할스는 일생 동안 하를렘을 명쾌하게 관찰했다. 그는 하를렘을 젊음의 환희가 가득 찬 도시로 묘사했으며, 자신의 삶과 쇠약해져가는 건강을 이 도시의 이미지에 반영함으로써 죽을 때까지 이 도시의 충실한 동반자로 남았다.
당대로서는 화풍이 매우 독특했던 미술가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는 거의 직계 제자들을 두지 않았는데, 그와 가장 비슷한 화풍을 보인 화가는 아드리안 브라우어로서 그는 할스의 기법을 사용해서 여관의 일상적 장면이나 그와 비슷한 주제들을 뛰어나게 묘사했다. 할스는 초상화 이외의 다른 주제들은 소홀히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재능은 있지만 편협한 화가로서 평가되어왔으며, 미술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19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그의 자유분방한 화풍은 에두아르 마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미묘한 색채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 들어와 그는 중요하고 뛰어난 사실주의 화가로서 재평가되고 있다. (P. Descargues 글)

 

   

 

 할스 / 집시여인 1635 / 목판에 유채 58ⅹ52 / 루브르 미술관

 

 

 

 

 할스 / 용커 람프와 그의 연인 1658 / 캔버스에 유채 105ⅹ78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할스 / 기분좋게 취한 술꾼 / 캔버스에 유채  81 ⅹ 66.5 / 암스텔담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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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Mulatte
 
 
 
Pieter van den Broec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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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eckelhaering
 
 
 
Portrait of a Woman
 
 
Holländischer Kava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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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ienporträt mit fünf Perso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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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ender Knabe
 
 
 
Willem Coy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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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ät des Verdonck
 
 
 
Fisher Boy
 
 
 
Nicolaes Hasselaer
 
 
 
The Meagre Company (detail)
 
 
 
The Meagre Company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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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melpot-Spieler
 
 
 
Zwei musizierende Knaben
 
 
 
Jester with a Lute.
 
 
 
Regents of the St Elizabeth Hospital of Haarlem
 
 
 
Malle Babbe
 
 
 
Portrait of a Man
 
 
 
The Company of St George (The St Jorisdoelen)
 
 
 
René Descartes
 
 
 
Isabella Coymans
 
 
 
Family Group in a Landscape

 

 


Family Group in a Landscape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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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s obraz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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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ernhochzeit

 

 

 

 

 

 

 

 

벨라스케스 [Velazquez, Diego Rodriguez de Silva] 1599. 6. 6 스페인 세비야~1660. 8. 6 마드리드.

 

17세기 스페인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서 전세계적으로도 위대한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자연주의 양식으로 묘사한 인물과 정물작품들을 보면 그의 뛰어난 관찰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6세기 베네치아의 회화를 연구하면서 여기에 영향을 받아 사물의 특성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시로서는 독특하게도 시각적 인상을 강조한 걸작들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베네치아화파). 벨라스케스는 화려하고 다양한 붓놀림과 미묘한 색의 조화를 이용하여 형태·질감·공간·빛·분위기의 효과를 내는 데 성공했으며, 그로 인해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의 주요 선구자가 되었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화가로서보다는 전기작가 겸 이론가로서 더 많이 알려진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프란시스코 파체코가 1649년에 발간한 〈회화미술 Arte de la pintura〉를 통해 주로 알려져 있다. 벨라스케스에 대한 완전한 전기는 궁정화가 겸 미술학자인 안토니오 팔로미노가 1724년에 발간한 〈미술관과 시각적 단계 El Museo pictórico y escala óptica〉의 제3권〈스페인 파르나소 El Parnaso español〉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것은 벨라스케스의 제자이자 팔로미노의 후원자인 후안 데 알파로가 쓴 전기적 자료를 기초로 쓴 것이다. 개인적인 기록은 매우 적으며 그의 그림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도 비교적 드물다. 그는 작품에 서명이나 날짜를 거의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자와 연대를 밝히는 데는 양식상의 증거만을 기초로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의 초상화들은 분명히 그의 화실에서 조수들에 의해 모사된 것이 많지만 그 자신의 작품은 많지 않으며, 그의 자필서명이 들어 있는 작품들 중 남아 있는 것은 150점도 채 안 된다. 그는 그림을 천천히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기에는 마드리드에서의 궁정관리직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다.
 

 

 벨라스케스 / 붉은 옷의 王女 마르가리타  1653  / 마포에 유채  128.5 ⅹ 100 / 비인 미술관

 

 

 

 

 벨라스케스 / 푸른 옷의 王女 마르가리타  1659  / 마포에 유채  127 ⅹ 107  /비인 미술관

 

 

 

 

 벨라스케스 / 간식 1617 / 캔버스에 유채 108.5 ⅹ 102 / 에르타쥐 미술관

 

 

 

 

 벨라스케스 / 王子 발타자르 카를로스의 기마상 1634 / 캔버스에 유채 209 Ⅹ173 /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필립 드 상패뉴 / 리셜리외 삼면초상 1640 / 캔버스에 유채 58 Ⅹ 72 / 런던 국립회화관

 

 

 

 

 

 

 

 

 

렘브란트 (네덜란드 화가)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유화·소묘·에칭 등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17세기의 화가이며 미술사에서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의 그림은 화려한 붓놀림, 풍부한 색채, 능숙한 명암배분이 특징이다. 그의 수많은 초상화와 자화상은 인간의 성격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며, 그의 소묘는 당시 암스테르담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 예술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적인 호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그당시 그의 동시대인들은 풍경화나 정물화, 또는 일상생활을 묘사한 풍속화를 더 많이 그렸다. 렘브란트도 인기있는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에는 자기 제자를 비롯한 젊은 경쟁자들에게 밀려나 빛을 잃었다. 그가 통달한 또 하나의 주요분야는 식각판화였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의 판화들은 비싼 값에 팔렸고, 그의 뛰어난 판화 기법은 몇 세기 동안 판화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 특히 젊은시절의 작품을 대표하는 전형적 특징은 유럽의 중요한 화가들(특히 가까운 벨기에 안트웨르펜 출신의 P.P. 루벤스)과 경쟁하려는 개인적 야망이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유행과 렘브란트 자신의 기질은 그의 야망을 좌절시켰고, 그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고독하고 괴팍해져 외톨이가 되었으며 그결과 자기 나름의 독자성을 얻게 되었다. 조용하지만 깊은 감정 상태에 빠진 영원한 인간세계를 독특하고 생생하게 재현한 것은 그의 이 독자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조용한 인간의 모습은 렘브란트 예술의 중심 주제이며 보는 사람과 그림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오늘날에도 여전한 렘브란트의 인기와 위대함은 바로 그 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렘브란트 / 요하네스 엘리슨의 초상화 1634 /  캔버스에 유채 124 ⅹ 173 / 보스턴 미술관

 

 

 

 

 렘브란트 /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의 초상 1650 /  캔버스에 유채 108 ⅹ 86 / 에르미타쥐 미술관

 

 

 

 

 렘브란트 / 아르카디아의 의상을 걸친 사스키아 1633 / 캔버스에 유채 123.5 ⅹ97.5 / 런던 국립회화관

 

 

 

 

 렘브란트 / 직물조합의 간부들 1662 / 캔버스에 유채 191 ⅹ 279 / 암스텔담 미술관

 

 

 

 

 렘브란트 자화상 1640 / 캔버스에 유채 102 ⅹ 80 / 런던 국립회화관

 

 

 

 

 렘브란트 자화상 1640 / 캔버스에 유채 102 ⅹ 80 / 런던 국립 미술관

 

 

 

 

 

 렘브란트 / 다나에 1636 / 캔버스에 유채 185 ⅹ 203 / 에르미타쥐 미술관

 

 

 

 

 렘브란트 / 수도사 1660 / 캔버스에 유채 79.5 ⅹ 67.7 / 암스텔담 미술관

 

 

 

 

 렘브란트 / 어머니의 초상 1631 / 목판에 유채 60 ⅹ 48 / 암스텔담 미술관

 

 

 

 

 렘브란트 자화상 1661 / 캔버스에 유채 91 Ⅹ 77 / 암스텔담 미술관

 

 

 

 

 렘브란트 / 벨사살의 향연 / 캔버스에 유채 164 ⅹ 204 / 런던 미술관

 

 

 

 

 렘브란트 / 성가족 1644 / 목판에 유채 60 ⅹ 77 / 암스텔담 미술관

 

  

 

 

 무릴로 / 소년과 개 / 캔버스에 유채 77.3 ⅹ 61.5 / 런던 미술관

 

 

 

 

 무릴로 / 창가에 기댄 농가의 소년 / 캔버스에 유채 52 ⅹ 38,5 / 런던 미술관

 

 

 

 

 무릴로 / 거지소년

 

 

 

 무릴로 / 원죄없는 처녀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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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 (예술)  [― 藝術, Baroque period]
출처: 브리태니커 
 
 
16세기말경 이탈리아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유럽에서는 대략 17세기, 독일과 남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절정에 이르렀다. 바로크 시대 작품의 특징은 양식적인 면에서 혼합적이며 심지어 반항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에 호소하여 감정적 상태를 표출하려는 욕구는 일반적으로 극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바로크 양식과 관련된 몇 가지 특징들은 장려함, 감각적인 풍요, 극적 효과, 생동감, 운동감, 긴장, 감정분출, 예술간의 특징들을 흐리는 경향 등이다.
 
바로크라는 용어는 이탈리아어인 'Baroco'에서 유래한 듯하다. 이 용어는 중세 철학자들이 구조논리학에서 장애물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이후 이 말은 '왜곡된 생각이나 사고의 복잡한 과정'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또다른 유래는 포르투갈어인 'barroco'(스페인어로 barrueco)에서이다. 이 용어는 불규칙적이고 불완전한 모양의 진주를 의미하는데 '바로크 진주'라는 보석상들의 용어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미술비평에 있어서 바로크는 불규칙적이고 화려한 것을 뜻하거나 정형화된 규칙이나 비례로부터 벗어난 것들을 지칭한다. 바로크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17세기 신고전주의적 관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요한 빙켈만부터 존 러스킨,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를 거치면서 약간의 수정이 이루어졌다. 19세기 후반까지 바로크라는 용어는 비정상, 기괴함, 과장, 과도한 장식 등의 의미를 가졌다. 하인리히 뵐플린의 선구적 연구 〈르네상스와 바로크 Renaissance und Barock〉(1888)에 이르러서야 은근한 경멸적 의미가 아닌 하나의 양식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고, 바로크 양식의 특징들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졌다. 
 
바로크 시대의 예술작품들이 그러한 다양성을 보이기 때문에 그 작품들의 공통된 특징들은 당시의 광범위한 문화적·지적 풍토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중 3가지가 바로크 미술에 영향을 준 중요한 요인이다. 첫째, 반종교개혁의 출현과 그 영토적·지적 지배영역의 확장이다. 16세기 말엽에 이르러 매너리즘이라는 세련되고 품격있는 양식이 유력한 표현수단이 되지 못했으며 예술가 그룹에서 마니에리스모가 종교예술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트리엔트 종교회의(1545~63)에 따라 미술이 교회에서 대중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확장하는 수단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포교원칙을 채택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회는 예술작품이 감동적이면서도 신도들에게 감각적으로 분명히 호소해야 한다는 의식적인 예술 계획안을 채택했다. 이 계획안에서 발전된 바로크 양식은 역설적이게도 감각적이면서 정신적이다. 즉 사실적인 표현방법은 표현이 평범한 신도에게 보다 이해하기 쉬운 종교적인 영상을 제공했으며 극적이면서도 환영적인 효과는 신도들을 경건하고 헌신적인 태도를 갖게 했고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바로크식 교회의 천장화들은 무한성을 생생하게 나타내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상의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둘째, 세력 있는 중산층의 등장과 함께 절대왕정의 강화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곧 예술의 주요한 후원자가 되었다. 바로크 궁전들은 중앙집권국가의 권력과 장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하고 넓은 규모로 세워졌다. 베르사유 궁과 그 정원이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동시에 중산층의 미술시장이 발달했는데 프랑스의 르 냉 형제와 조르주 드 라 투르, 그리고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다양한 유파들의 작품에서 그들의 사실주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 셋째, 과학의 발달과 세계탐험에 의해 자극된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지적 지평의 확대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미천함, 특히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으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알게 되자 자연세계의 복잡성과 무한성이라는 2가지 새로운 의미를 동시에 부여했다. 넓은 자연의 배경에 인간이 조그마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17세기 풍경화의 발달은 이러한 인간조건에 대한 인식전환을 보여준다.
 
바로크 시대의 예술작품들은 기묘한 다양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주로 자연주의와 고전주의가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과 공존하면서 혼합되었기 때문이다. 실상 1690년대의 마니에리스모를 결정적으로 종결짓고 바로크 양식을 선도했던 안니발레 카라치와 카라바조 같은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각각 고전주의와 자연주의적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엄밀한 의미에서 바로크 회화는 1620년대 로마에서 시작되어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구이도 레니, 일 구에르치노, 도메니키노를 비롯한 수많은 미술가들의 천장화와 교회장식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가장 유명한 바로크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는 로마에 있는 성베드로 대성당의 제단에 나선형 기둥이 있는 감실과 정면의 거대한 열주를 설계했다. 카를로 마데르노,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구아리노 구아리니 등에 의해 발전된 바로크 건축은 거대함, 기념비적 성격, 움직임, 극적인 공간과 조명의 연속성, 대조적인 표면효과를 이용한 풍부한 실내장식, 생생한 색채, 건축구조의 즉물성을 높이고 관능적인 유희를 자극하는 화려한 소재 등을 강조했다. 이렇게 전개된 고전주의 경향은 프랑스에서 바로크의 추진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진지하고 논리적이고 질서정연한 그림을 그린 니콜라 푸셍과, 더 화려한 작품을 그린 샤를 르 브룅, 초상화가 히아생트 리고, 니콜라 드 라르질리에르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프랑스 건축에서는 섬세함·우아함·신중함 등의 바로크적 특징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성향이 확고한 스페인에서는 특히 건축에서 바로크 양식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스페인 최고의 건축가 호세 베니토 추리게라의 건축물은 표면 텍스처와 화려한 세부묘사에 대한 스페인 특유의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추리게레스크(Churrigueresque)라는 이름이 붙여진 건축양식으로 많은 추종자를 매혹시켰고 그의 스타일이 받아들여졌으며 이 양식은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 등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비롯한 17세기 스페인의 화가들은 어두운 색조로 매우 사실적인 표현을 추구했는데 이는 정통적인 바로크 화풍에서는 약간 동떨어진 것이었다. 
 
바로크 미술은 북유럽, 특히 지금의 벨기에에서만 일부에 국한되어 펼쳐졌다. 당시 스페인령으로서 가톨릭의 영향이 두드러졌던 이 지역에서 최고의 장인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인데 그의 작품에 나타난 날카로운 대각선 구성과 넓고 기운찬 형상들은 전형적인 바로크 화풍을 보이고 있다. 안토니 반 데이크의 우아한 초상화와 야코프 요르단스의 힘찬 인물표현 역시 그 좋은 예이다. 네덜란드의 예술은 사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주는데 이는 중산층 계급 후원자들의 취향에 의한 것이었으며, 수없이 다양한 양식과 렘브란트나 프란스 할스 같은 시골 풍경화가들의 그림은 중요한 점에서 바로크 양식의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크는 영국에서도 주목할 만한 영향을 남겼는데 교회·궁전의 디자인, 특히 크리스토퍼 렌 경과 존 밴브루 경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바로크의 마지막 꽃핌은 남독일 로마 가톨릭 지역과 오스트리아에서였는데 이곳의 건축가들은 1720년대 이탈리아 건축의 모델로부터 과감히 떨어져나왔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교회·수도원·궁정의 장식을 디자인한 J. B. 피셔 폰 에를라흐, J. L. 폰 힐데브란트, 아잠 형제, 발타자어 노이만, 도미니쿠스 치머만이다. 이들의 디자인은 미묘한 효과를 만드는 채색 표면과 지극히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스투코 장식을 잘 조화시킨 것이다. 
 
음악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 중 하나가 17세기초에 일어났는데 이번에도 역시 이탈리아가 그 선봉에 섰다. 종교음악에서는 16세기의 보편적인 다성음악 양식인 스틸레 안티코(stile antico:옛 양식)가 계속 유지되었던 반면, 독창 성부를 강조하고 베이스 성부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며 표현적인 화성에 대한 관심이 그 특징인 스틸레 모데르노(stile moderno:새 양식)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 음악어법의 확장으로 성악과 기악의 차이뿐만 아니라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의 차이가 뚜렷해졌으며 국가간의 차이도 현저하게 드러났다. 다른 장르의 예술과 마찬가지로 바로크 시대 음악은 그 양식의 다양성이 특징이다. 오페라·오라토리오·칸타타가 새로 등장한 가장 중요한 성악양식인 반면, 소나타·협주곡·서곡 등 중요한 새 기악양식들이 생겼다. 최초의 '새 음악'의 대작곡가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인데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1660~1725)와 조반니 페르골레시(1710~25)가 그 뒤를 계승했다. 이탈리아에서 바로크 기악음악의 전통은 아르칸젤로 코렐리(1653~1713),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 주세페 타르티니(1692~1770)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프랑스에서 바로크 음악의 대가는 대표적인 오페라 작곡가인 장바티스트 륄리와 장 필리프 라모이다. 영국에서는 스튜어트 왕가 가면극의 총체적인 극적 경험이, 독일 태생이며 이탈리아에서 교육받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성악음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계승되었으며, 독일에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종교음악에서 두드러졌다. 그밖의 주목할 만한 독일의 바로크 작곡가로는 하인리히 쉬츠(1585~1672),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73~1707),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1681~1767)이 있다. 
 
문학에서 구체적으로 보이는 바로크적 특징은 이탈리아의 잠바티스타 마리노, 스페인의 루이스 데 공고라, 독일의 마르틴 오피츠의 작품에서 나타난다. 주로 존 던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는 바로크 문학과 결합했다. 바로크 양식은 좀더 가볍고 덜 극적이며 과도하게 장식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특징적인 양식으로 18세기에 그 막을 내렸다.
 
 
 
 
바로크 진주 (보석)  [baroque pearl] 
 
불규칙하거나 기묘한 모양을 가진 진주.
 
진주는 진주낭(眞珠囊)이 어떤 큰 방해를 받지 않고 규칙적으로 자랄 수 있는 부드러운 조직 내에서만 항상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예로 진주포낭은 때때로 단단한 근섬유의 방해를 받는 근육조직 내에 박히게 되는데, 이 경우 이들은 불규칙하거나 진기한 형태를 갖게 된다.
 
바로크 진주는 문예부흥기의 보석세공인들로부터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그들은 이것을 바다 연체동물에 의해 기형적으로 만들어진 산물이라기보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진기하고 정교한 진주의 한 형태로 보았다(→ 르네상스 미술). 바로크 진주는 조각의 몸체를 구성하는 보석세공품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16세기 이래 캐닝 보석(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인데, 이 작품에서 커다란 바로크 진주는 사람의 몸체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인어(人魚)의 몸통으로 사용되어, 진주·루비·다이아몬드와 함께 에나멜을 입힌 금 위에 붙어 있다.→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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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음유 시인 레너드 코헨의  "A Thousand Kisses Deep"이다
닐 조단 감독의 영화 The Good Thief 의 삽입곡으로 유명한 곡
2001년 앨범 Ten New Songs에 수록됐던 곡으로
소설가이기도 한 코헨의 노랫말은 형이상학적인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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