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 수틴 Chaim Soutine

2021. 3. 9. 21:30미술/서양화

 

 

황홀한 침범 - 사임 수틴

                                  / 김상미

 

 

왜 그랬는지 몰라, 그에게 필이 꽂혀 버렸어, 언제나 해진 외투주머니에 손을 넣고 구부

정하게 도심을 기웃거리는, 찢어지게 가난한 헌옷 수선공의 열 번째 아들, 바로 일 분 전

의 일이라도 지나간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친구라곤 오로지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

는 권투장의 아우성과 고함소리뿐, 외롭고 퉁명스럽고 거칠고 지저분한, 늘 허기진 위통

에 시달리는 파리한 얼굴의 남자, 동시대 작품들엔 아무런 흥미도 없고, 플랑드르 대가들

의 그림이나 쿠르베, 샤르댕, 렘브란트 그림 앞에선 무아경이 되는, 밤새 지붕 틈새로 새

어든 빛 같은 그에게 나도 모르게 필이 꽂혀 버렸어, 아마도 그가 그린 붉은 색 때문일 거

야, 화폭을 가득 채운 강렬하면서도 비극적인 붉은 색, 나는 그보다 더 칠흑 같은 빛을 보

지 못했어, 그보다 더 크게 울부짖는 열림을 보지 못했어, 내 옆의 누군가가 갑자기 나를

움켜쥐는 뜨거운 손 같은, 불꽃으로 달려드는 나방처럼 나도 모르게 그에게 필이 꽂혀 버

렸어, 그건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의 왕국으로 침범해 그들의 영혼을 황홀하게 만지는 것과

같았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아주 오래된 아름다운 집들의 창문이 동시에 와장창 깨지

는 듯한!

 

 

 

모딜리아니가 그린 <샤임 수틴의 초상>

 

 

 

 

 

수틴(Chaim Soutine)


활동년도 : 1894~1943
작가소개 : 리투아니아의 화가.
출생지 : 리투아니아 민크스 근교의 스밀로비치
주요작품 : 《맥심식당의 급사》(1927, 버펄로 올브라이트녹스미술관


민크스 근교의 스밀로비치 출생. 가난한 유대인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극빈한 소년시절을 보냈으나 일찍이 화재(畵才)를 나타냈고 1910년 고학으로 빌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그의 재능을 아낀 의사의 원조로 파리의 미술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며 파리에서 거처로 삼은 곳은 방랑 미술가 라 뤼슈의 집합처로, 그 곳에서 A.모딜리아니와 M.샤갈 등과 우정을 다졌다.
1919년부터 3년간은 남프랑스의 세르에 체류하였는데, 그 곳 남국의 빛과 색채는 M.블라맹크에 심취하여 있던 그의 작품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일련의 풍경화를 그리는 동안 주황색 ·녹색 ·노란색과 같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와, 대상을 강하게 왜곡시키는 주관적 표현을 개발하였다. 1922년 파리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미국의 대수집가인 번즈 박사에 의하여 약 100점의 그림이 팔렸다.

그 후로 에콜 드 파리의 유력한 사람으로 화단의 인정을 받았으나, 여전히 수육(獸肉)이나 미친 여인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격정과 환각을 충만시켜 박해받는 인간이 품은 고독한 영혼의 절규라고 할 수 있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만년에는 파리를 떠나 지방에서 생활하였으며, 불우한 가운데 절망과 빈곤의 생애를 마쳤다. 대표작에 《맥심식당의 급사》(1927, 버펄로 올브라이트녹스미술관) 등이 있다.

 

 

 

 

샤임 수틴(Chaïm Soutine, 1894-1943/1893년생이라는 설도 있음)은 20세기 현대미술에서 표현주의자(expression‎ist)로 불린다. 강렬한 색채와 붓 터치는 독일 표현주의자나 프랑스 포비스트(야수파/Fauvist)들의 작품을 연상시키지만 수틴의 작품은 색채에 의존하여 관객들에게 감성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작품들과는 다르다. 색채는 강렬하나 수틴은 우리를 그의 작품 속으로 직접적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서는 관람객을 끌어들이면서도 동시에 심리적으로 밀어내는 묘한 이중성을 만날 수 있다. 수틴은 늘 주변적인 인물이자 경계선 상에 선 인물(“liminal” figure)로 불려진다. 그는 파리에서는 이방인으로, 프랑스 중심의 아방가르드 그룹에는 속하지 못했던 외국인이었다. 또한 그는 유태계 출신으로 프랑스 출신의 프랑스 작가들보다는 외국계 미술가들과 더욱 많은 교류를 남겼다.

 

수틴은 독일 표현주의자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가 그린 작품에서 보이는 연극적인 요소나 왜곡되거나 과장된 표현을 빌리기도 하지만 페인팅 자체의 물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화론을 구축하였다. 수틴이 유화를 다루는 능수능란한 방식은 인체나 동물, 집, 소품 등 사소한 물건 하나하나를 중요한 회화적인 오브제로 부각시키는 작가의 그리기 방식에서 강조된다. 수틴은 여러 번 덧칠해서 바르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이나 엄격한 구성, 어두운 소재를 즐겨 사용하였고, 스스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히, 수틴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찢어버렸고, 파리 미술계에서도 다소 까다롭고 기이한 인물로 통했다.

 

수틴은 폴란드 옆에 위치한 벨로루시의 민스크 근처 스밀라비치(Smilavichy)에서 태어난 리투아니아계 유태인 미술가이다. 그는 보수적인 정통파 유대교도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그 중에서도 보수적인 하시디즘(Hasidism) 교리를 배웠고, 유태인 게토(ghetto)에서 성장하며 드로잉에 관심을 보였다. 수틴은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가 주장하던 탈무드 전통에 대해서는 반감을 느꼈으며, 특히 이미지의 사용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던 유대교의 전통성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당시 정통파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예술가라는 직업 자체를 금기시했기 때문에 수틴의 취향이나 성향은 그가 속한 커뮤니티 내에서는 반항적인 것으로 비춰졌다.

 

 

 

 

 

수틴은 파리로 가기 전인 1910년에서 1913년까지 빌니우스에 위치한 빌나 미술학교(Vilna Academy of Fine Arts)에서 공부하였으며, 이 학교는 유태인 입학을 허용하던 몇 안 되는 학교였고, 동시대의 국제적인 아방가르드 미술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그는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주로 비극적인 소재와 내용을 다뤘고, 이러한 성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게토에서의 경험과 유태인에 대한 박해 등이 이러한 트라우마를 형성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는 만 17세가 되던 1913년에는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수학했지만, 오히려 루브르 미술관에서 볼 수 있었던 고야와 틴토레토 등과 같은 거장들의 작품에서 더욱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수틴은 주로 파리로 유학 온 다른 동유럽 작가들과 어울리며 몽파르나스에 있는 라 뤼쉬(La Ruche)에서 거주하였고,

 

당시에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와 친하게 지냈다. 두 사람은 같은 유태인 출신이자 파리의 이방인이라는 점에 깊이 공감하였다. 양차세계대전 사이 동유럽 출신의 유태작가들은 파리의 몽파르나스에서 거주하면서 아방가르드 흐름을 형성하였는데, 수틴은 모딜리아니와 같은 미술가들과 교류하였다. 수틴은 컬렉터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동유럽 출신의 유태인 작가들처럼 극도로 가난하였고, 지병이었던 위장병에 시달렸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수틴의 초상은 현재 여러 점 남아있는데, 모딜리아니는 당시 그들의 작품을 팔아주던 화상인 레오폴드 즈보로스키(Léopold Zborowski, 1889–1932)가 살던 아파트의 문에도 수틴의 초상을 그렸다고 한다. 이 화상은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이 파리에 폭탄을 투하했을 때 수틴을 이끌고 니스로 함께 피난을 갔을 정도로 이방인이었던 모딜리아니가 파리에서 화가로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프랑스인들의 외국인 혐오증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표하면서 자신들이 유태인이라는 점 때문에 테러를 당하지 않을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물론, 수틴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이나 쥘 파신(Jules Pascin)과도 친분을 나눴으나, 방을 함께 썼던 친구인 모딜리아니가 1920년에 사망했을 때는 극도의 슬픔을 느꼈다.

 

 

 

1919년에서 1922년까지 수틴은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세레(Ceret)에서 주로 지내면서 수많은 풍경화를 제작하였으며, 이러한 풍경은 대부분 묵시록적이며 아주 어두운 것이 특징이다. 수틴은 뛰어난 동시대의 작가들인 피카소(Pablo Picasso)나 마티스(Henri Matisse)와 같은 거장들의 명성에 가려진 감은 있지만, 수틴이 제작한 풍경화나 초상, 특히 도살당한 동물들의 사체 그림들은 공포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는 독특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1920년대는 소위 파리화파(School of Paris)의 전성기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러시아,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에서 이주해온 유태인 미술가들로, 이디시어(Yiddish)와 불어를 구사했다. 프랑스 정부는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구감소를 방지하기 위해 외국인 이주정책을 적극 권장하였고, 전후 경제 활성화를 위해 이민은 예전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로웠다. 또한 유태인 미술가들의 등장은 유태인 화상의 등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세계 제 1차대전 이후에는 폴 기욤(Paul Guillaume)이라는 화상이 수틴의 작품을 팔아주었으며, 1923년에는 수틴의 개인전을 개최해 미국인 컬렉터 앨버트 C. 반즈(Albert C. Barnes, 1872–1951)에게 52점의 작품을 판매했다. 반즈 때문에 수틴이 제작한 작품들이 미국에 제일 많이 소장되어 있다. 수틴의 후원자였던 마들렌 카스탱(Madeleine Castaing, 1894–1992)과 그의 남편도 몽파르나스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중요인물이다. 특히,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던 마들렌은 1927년부터 자신들의 별장이 있던 샤르트르 근방에서 수틴과 함께 여름을 보냈으며, 현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그녀의 초상은 1928년에 의뢰된 작품이다.

 

 

 

수틴은 [쇠고기 사체(Carcass of Beef)]라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작업실에 소의 사체를 보관했다고 하며, 방에서 심한 악취가 나자 이웃들이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는 일화가 있다. 렘브란트의 작품에서도 보이는 이 모티프는 수틴의 작품에 등장하며, 이후 피카소의 작품과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작품, 또 1990년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렘브란트의 작품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면, 수틴은 유태인으로서 느꼈던 경험을 더해 렘브란트의 작품을 재해석했다.

 

 

 

수틴은 이 시리즈로 열 개의 연작을 남겼다. 수틴은 렘브란트가 그린 같은 주제의 그림을 루브르에서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2006년 2월에는 수틴의 작품 경매에서 1924년에 그린 이러한 작품이 대략 165억 원(£7.8 million.$13.8 million)에 경매되는 신기록을 남겼다. 그는 렘브란트, 샤르댕, 쿠르베 등과 같은 과거 거장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그들의 작품에 표현성을 더해 본래의 형태를 왜곡시켰다. 특히, 이 작품은 [모나리자 스마일(Mona Lisa Smile)이라는 영화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미술사 수업을 가르치는 장면에 등장하여 대중적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수틴은 현대미술에서 추함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또 다른 기준을 이 작품을 통해 제시하며, 선과 색채, 형태와 질감을 통해서도 분위기와 개념을 전달할 수 있음을 표현한다. 이러한 작업방식을 고수하면서 수틴은 계속해서 도살당한 동물을 다양한 양상으로 표현했다. 그가 제작한 [매달려 있는 칠면조(Hanging Turkey)]나 [껍질이 벗겨진 토끼(The Flayed Rabbit)]는 끔찍하고 혐오스럽지만 동시에 섬세한 붓 터치와 감각적인 색채 때문에 그로테스크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기이한 작품이다. 이러한 유형의 작품들은 몽파르나스에서 수틴이 겪었던 가난과 외국인으로서 느꼈던 두려움뿐 아니라 묵시록적인 동시대의 상황을 반영한다.

 

이전과 달리 1928년부터는 파리를 중심으로 반유대 정서가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수틴의 위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카미유 모클레어(Camille Mauclair)는 <르 피가로(Le Figaro)> 등에 ‘유대인 문제(The Jewish Question)’를 거론하며, 프랑스 미술을 옹호하는 글을 게재하였고, 문화계에서 유대인들이 주류로 부각되는 것에 대해 반감을 표시했다. 이것은 파리화파와 프랑스화파(Ecole Ffançaise)의 갈등을 부추기고 경쟁을 부각시킴으로써 보수적인 프랑스인들의 환심을 사는 기사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컬렉터들은 수틴에게 여전히 호의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930년대에도 여전히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고, 1935년에는 시카고에서 첫 전시를 개최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937년에는 죄 드 폼므 국립미술관(Galerie nationale du Jeu de Paume)에서 작품을 전시하면서 국제적인 작가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략하면서 그는 게슈타포를 피해 파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곳 저곳 도망 다니며 은신처를 찾아 다녔다. 그는 천공성 궤양(perforated ulcer)에 걸려 수술을 받기 위해 파리로 다시 왔다가 결국 1943년 8월 9일에 사망했다. 수틴을 포함한 파리화파(School of Paris)에 속한 화가들은 대부분이 비프랑스 계통의 외국인이자 유태인 출신이었으며, 수틴은 이들 중에서도 유년시절과 양차 세계대전 중에 겪었던 고통과 절망을 거칠고 투박한 붓 터치로 과감하게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개인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시각화한 화가로 평가된다.

 

 

 정연심 /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홍익대학교 영어교육과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 1995년에 도미하며 뉴욕대학교 예술행정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5년 뉴욕대학교 Institute of Fine Arts에서 미술사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뉴욕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조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