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9. 17:00ㆍ미술/서양화
월터 랭글리 - 그림 속에 눈물과 한숨을 담다 (펌)
요즘 세상살이가 팍팍한 때문인지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가슴에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영국 화가 월터 랭글리 (Walter Langley / 1852~1922)의 작품들을 보면 19세기 말 영국 어민들의 한숨과
눈물이 흥건합니다
랭글리는 영국 버밍햄의 슬럼가 근처에서 태어났는데 형제 자매가 11명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나던 시대는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빅토리아 여왕시대였죠. 당시 노동자 계급들에게는 영양실조와 질병 그리고
유아 사망 같은 가혹한 환경이 겹쳐진 환경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이 가난한 노동자와 어부들 같은 노동자
계급에 포커스가 맞춰 진 것은 어렸을 때의 성장 환경 때문이기도 합니다.
15살부터 시작한 석판공의 견습생 일은 21살이 될 때까지 계속 됩니다. 그 후 캔싱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산업디자인을 공부하는데 장학금 지원 기간이 끝나자 석판공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게
됩니다. 제의를 받아들여 금전적인 문제는 해결했지만 석판화를 제작하느라 정작 그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고작 3일뿐이었습니다
1880년 랭글리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뉴린(Newlyn)이라는 어촌을 찾게 됩니다. 잠깐의 방문이었지만
뉴린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어촌에서 일어나는 일상들과 그들의 힘겨운 삶이 사회주위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묘사하고자 했던 주제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던 것이죠.
다음 해 버밍햄의 유력자로부터 작품 20점을 주문 받은 랭글리는 뉴린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파운드의 후원을 받는데 그 해 랭글리가 판매한 그림은 총 102점이었다고
하니까 대단한 성공을 거둔 해였습니다. 기록에는 총 723파운드를 벌어들였는데 당시 석판공 수입의 3배
였습니다. 랭글리의 훌륭한 선택과 성공이었습니다
랭글리가 뉴린에 정착한 후 몇몇 화가들이 뉴린으로 이사를 옵니다. 마치 프랑스의 바르비종처럼 뉴린도
화가들이 모이는 곳으로 바뀝니다. 뉴린은 곧 화가들의 목소리와 작품 활동으로 떠들썩한 어촌 마을이 되고
나중에 그 곳 출신 화가들은 뉴린파 (Newlyn School)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따져보면 랭글리가 그 시작인
셈입니다
랭글리의 작품은 당대 좌파라고 분류되었습니다. 그의 친구 중에는 빅토리아 시대 좌익을 담당했던 사회주의
노동당의 당원도 있었지만 랭글리 자신이 끝없이 가난이 계속되는 노동자 계층에 대한 연민을 기록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1차 대전이 시작되자 해안가에서 이젤을 펴 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전쟁 중이니까
위험했겠지요. 랭글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미술사 최고의 수채화가라는 평가도 있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가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물론 주제와 기법에 따른 분류이지만 이것 저것을 다 떠나서 제가
느낀 랭글리는 ‘그림에 눈물과 한숨을 담아낸 화가’였습니다
(아버지를 꼭 닮은 아들 A Chip Off The Old Block / 1905)
(독서 삼매 A Quiet Read)
(고기잡이 철 In the Fishing Season / Watercolor) )
(추억들 Memories /1906)
(어머니의 사랑 Mother Love)
(엄마의 마음 Motherhood /Watercolor on Paper)
(슬픔은 끝이 없고 Never Morning Wore To Evening / 1894)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 The Breadwinners / 1886)
(신생아 The New Arrival)
(고아 The Orphan / 1889)
생각은 아득하고 Thoughts Far Away / Watercolor heightened with body color)
(사라진 손 길 Touch of A Vanished Hand / Watercolor / 1888)
배를 기다리다 Waiting For the Boats / Pencil and Watercolor / 18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