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9. 09:11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1
카라밧지오(Michelangelo Merisida Caravaggio)
(1573년 ~ 1610년 7월 18일)
그가 주로 사용한 혁신적인 명암법은 바로크 회화의 주요특징이 되었다.
그는 종교적인 주제를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전통을 경멸하고 거리에서 소재를 취해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성 마태오를 주제로 한 3점의 그림(1597경~1602, 로마 산루이지데이프란체시 교회)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뒤이어 〈엠마우스에서의 만찬〉(1596~98)과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 〉(1605~06)과 같은 걸작들을 그렸다.
초기생애
카라바조는 카라바조 후작의 집사 겸 건축가인 페르모 메리시의 아들이었다.
11세 때 고아가 된 카라바조는 바로 그해에 화가인 밀라노의 시모네 페테르차노 밑에 도제로 들어갔다.
이미 그림의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던 그는 1588~92년 로마에 갔다.
그는 이상화된 피렌체 회화에 반대하여 자연과 일상적인 사건들을 묘사하는 쪽에 더 가까운 양식을 발전시킨
롬바르디아 및 베네치아 회화 양식을 열심히 연구하여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젊은시절 그는 밀라노에서 로마까지 여행하면서 도중에 파르마· 볼로냐· 피렌체· 아시시 등지에 머물렀던 것이 확실한데,
그 과정에서 볼로냐 출신의 혁신적인 당대 화가인 카라치가(家)의 작품들 및 마사초와 조토의 초기 걸작들을 보았다.
카라바조는 이것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색채와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 생생한 느낌을 주던 밀라노 시기의 기법은 선을 더욱 뚜렷하게 그림으로써 억제되었으며,
형식적인 구도에서는 가장 평범하고 수수한 주제들에서 볼 수 있는 사실적 표현이 더욱 강화되었다.
1590년대초 로마의 미술계에서는 미켈란젤로가 확고한 위치에 있었으며,
지적으로는 활기 차고 열정적인 반종교개혁기의 막을 올린 트리엔트가 지배하고 있었다.
로마는 명예와 부를 좇아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가난한 미술가들을 포함해서 온갖 방문객들로 넘치는 활기 찬 도시였다.
카라바조는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캄포 마르초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5년은 불안정하고 굴욕스러운 고통의 시기였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들에 따르면, 카라바조는 잡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었으며 어떤 스튜디오에서도 몇 달 이상 머물지 못했다.
마침내 1595년경 독자적으로 일을 하기로 결정하고 마에스트로 발렌티노라는 상인을 통해 그의 그림들을 팔기 시작했는데,
그 상인이 가져간 카라바조의 작품은 교황궁에서 유력한 고위성직자인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의 주목을 끌었다.
카라바조는 곧 델 몬테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델 몬테의 후원을 받기 전까지 카라바조는 정신적·물질적으로 곤궁한 상태에서도 40여 점의 작품을 그렸다.
그 가운데에는 야심작도 상당수 있는데 그것들은 매우 획기적인 회화적 발명으로서
카라바조의 무질서하고 방탕한 일상생활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우아하고 고상한 솜씨와 명확하고 적절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으며 개인 수집가들을 위한 작품들이었다.
각각의 구도에는 회화에 대한 카라바조의 철저한 태도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특히 이 초기의 그림들은 '꽃을 그리는 것은 인물을 그리는 것에 못지않게 매우 어려운 일이며',
'뛰어난 화가는 자연의 사물을 잘 그릴 수 있다'라는 그의 신념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과일 바구니 Basket of Fruit〉에서는 화려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진 과일들이 밀짚 바구니 안에 균형 있게 배치되어 있으며
시각적으로 인상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로마에서의 주요작품
이 작품들을 계기로 사실적 표현양식이 전통적인 양식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카라바조의 사실적 자연주의가 처음으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콘타렐리 예배당에 있는 성 마태오의 생애를 주제로 한
작품들에서이다.
카라바조는 1597년에 로마의 산루이지데이프란체시 교회에 있는 콘 타렐리 예배당의 장식을 의뢰받았는데,
델 몬테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일로 그는 24세의 나이에 중요한 후원자와 고객들에게 '저명한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 일은 성 마태오의 생애에서 따온 장면들로 이루어진 3편의 대형 그림들,
〈성 마태오와 천사〉·〈성 마태오의 소명〉·〈성 마태오의 순교〉를 포함하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이 3점의 그림에서 카라바조는 聖人傳記의 전통에 따른 삽화적 방식 대신에
불온한 사회적 태도에 영향을 받은 극적인 사실주의를 채택했는데,
이것들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마 카라바조는 결국 공개적으로 자신의 폭넓은 변화를 드러낼 수 있는 이러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구도와 주제의 표면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예술성 자체, 즉 시간과 빛의 느낌도 새롭게 시도하고 있다.
카라바조가 회화적 혁신에서 사용한 수단은 빛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선과 색에 못지않게 빛이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작품의 구도를 결정하고 있다.
20세기의 미술평론가인 로베르 롱기는 카라바조가 빛을 사용한 것의 중요성을
르네상스 시기에 원근법이 발견된 것의 중요성에 비유했다.
그의 빛은 자연의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에서, 거의 언제나 구경꾼들의 어깨 지점에서 가득 쏟아지는 신비한 빛이며,
색의 체계를 변화시켜 피부의 변색현상처럼 색의 미묘한 변화를 없애버리고
그리하여 색조를 단순하고 매우 어둡게 만드는 연극무대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그런 빛이다.
콘타렐리 예배당의 장식은 1602년경에 완성되었다.
카라바조는 당시 30세도 채 안 되었지만 당대의 모든 화가들을 능가했다.
개인이나 교회 모두 그에게 많은 그림을 주문했다.
그가 예술적으로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그려진 이 그림들의 일부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산아고스티노 교회를 위해 그린 〈성모와 순례자들〉·〈로레토의 성모〉는
전경의 무릎 꿇고 있는 '더러운 발과 남루한 모자' 차림의 두 노인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 정녀 마리아의 죽음〉은 동정녀의 평범한 얼굴 생김과 벌거벗은 다리, 물에 빠진 여자처럼 배가 불룩한 모습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동정녀를 모욕했다고 해서 카르멜회 수도사들에게 거절되었다.
이 그림은 루벤스의 권유로 1607년 4월에 만토바의 공작이 구입했으며
만토바로 옮겨지기 전에 1주일 동안 로마에서 화가들에게 전시되었다.
성숙한 양식의 절정기
미술가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 및 진보적인 고위성직자들은 카라바조의 거칠고 난잡한 미술에 들어 있는
미묘하고 신비한 함축적 의미에 매혹되었지만,
교회의 공직자들은 전통적인 화가들의 자기방어적인 과민성과 보수적인 성직자 및 많은 대중들의 본능적인 저항을 반영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카라바조가 받았던 여러 가지 비난이 그의 성공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의 명성과 수입은 늘어났으며, 그는 다른 화가들의 부러움을 사기 시작했다.
초기 로마 시기의 절망적인 방랑생활이 끝나고 그는 추기경과 왕자들의 사교계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여전히 성급하고 방탕한 성격을 버리지 못했다.
초기 로마 시기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콘타렐리 예배당의 장식 이후 카라바조는 여러 차례 걸쳐 법을 위반했다.
1600년 한 동료 화가는 폭력 사건으로 그를 고발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한 군인에게 부상을 입혔다.
1603년 또다른 화가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프랑스 대사의 중재로 가까스로 풀려났다.
1604년 4월 그는 급사의 얼굴에 아티초크 접시를 던진 사건으로 고발되었으며,
10월에는 로마 수비대에게 돌을 던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605년 5월 그는 무기를 잘못 사용해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7월 29일에는 애인을 지키려다가 한 남자를 다치게 하는 바람에
한동안 로마를 떠나 있어야만 했다.
그뒤 1년도 지나지 않아 1606년 5월 29일에 카라바조는 다시 로마로 돌아왔으나
테니스 경기중 점수 때문에 심한 다툼을 벌이다가 라누초 톰마소니라는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카라바조는 자신도 부상을 입은데다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에 겁을 먹고 초조한 상태에서
그 도시를 피해 카라바조 후작의 한 친척이 소유하고 있는 근처의 영지로 피신했다.
그뒤 그는 다른 은신처로 옮겨다니다가 결국 1607년초 나폴리에 도착했다.
그는 한동안 나폴리에 머물면서 플랑드르의 화가인 루이 팽송을 위하여〈로사리오 기도중의 성모〉를,
몬테델라미세리코르디아 예배당을 위하여 그의 후기 걸작들 중 하나인〈은 총을 주제로 한 7편의 작품〉을 그렸다.
이 그림의 어둡고 절박한 분위기는 틀림없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을 그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또한 그의 회화양식의 변화를 처음으로 나타내고 있다.
1607년말(또는 1608년초)에 카라바조는 몰타 섬을 여행하여 그곳에서 유명한 미술가로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열심히 일을 하여 여러 작품을 완성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의 교회를 위해 그린 〈세례 요한의 참수〉였다.
1608년 7월 14일 카라바조는 몰타 수도회에서 '정의의 기사'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그뒤 곧 그가 저지른 죄에 관한 소문이 몰타에 퍼지고 다시 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그 수도회에서 쫓겨나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탈출했다.
카라바조는 시칠리아로 피신하여 1608년 10월에 시라쿠사에 도착했으나 추격받을 것이 두려워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명성이 따랐으며,
그리하여 시라쿠사에서 그는 산타루치아 교회를 위하여 후기의 비극적인 걸작인〈성녀 루치아의 매장〉을 그렸다.
1609년초에 그는 메시나로 피신하여 그곳에서〈나사로의 부활〉·〈목자들의 경배〉를 그렸으며,
그뒤에는 팔레르모로 피신하여 그곳의 산로렌초 예배당을 위하여〈성 프란체스코와 성 라우렌티우스의 경배〉를 그렸다.
카라바조가 도망을 다니면서 가장 어려운 역경에서 그린 작품들 중에는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뛰어난 구도의 작품들이 몇 점 들어 있다. 구도는 예전보다도 더욱 웅장하지만,
이 작품들은 예전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직접적인 묘사보다 미묘한 감정 표현과 부드러운 색조로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를 괴롭혔을 것임이 틀림없는 산란한 정신상태를 고려할 때
이 차분하고 강렬한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뛰어난 작품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의 필사적인 도주는 오직 교황의 사면으로만 끝날 수 있었는데,
카라바조는 1609년 10월 그가 다시 북쪽의 나폴리로 거처를 옮겼을 때
로마에서 그를 위하여 중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불운이 그를 덮쳐 그가 어떤 여관 문앞에서 공격을 받아 심한 부상을 입고 죽었다는 소문이 로마에 퍼졌다.
회복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1610년 7월 배를 타고 교황령 안의 스페인 속령인 포르테르콜레로 갔으나
잘못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는 이미 자기를 로마에 데려다줄 배가 자신의 물건을 싣고 이미 떠난 뒤였다.
불행과 극도의 피로가 겹친 데다가 열병이 재발해서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떠나가는 배를 보며 바닷가에 쓰러진 후 며칠 뒤 37세도 안 된 나이로 죽고 말았다.
평가
카라바조는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미술가로 평가된다.
그는 이전 1세기 동안 미술을 이끌어온 인간적·종교적 경험을 이상적인 형태로 나타내는 플라톤식 이상을 버리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으며,
인생은 언제나 일종의 드라마이고 모든 경험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물리적 현상 속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우 감정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현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들의 의미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에서 극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묘사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그의 그림들은 순간을 포착한 극적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의 인간관은 당시에는 독특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널리 칭찬을 받고 그의 기법이 널리 모방되기는 했지만 그는 외로운 인물이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L. Carluccio 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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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1577~1640)는 카라바조(1573~1610)의 미술을 잘 알고 있었으며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루벤스는 플랑드르로 돌아온 때로부터 수년이 지나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매장>을 모작한다. 원작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표현은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카라바조에 대해 루벤스가 지니고 있었던 높은 평가는 그의 작품 <성모의 죽음>(루브르 박물관)을 빈첸초 공작으로 하여금 금화 280스쿠도에 사도록 권유한 사실에서도 알수 있다. -『루벤스』: 콘스탄티노 포르쿠 외 지음. 이지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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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 & 카라바조
루벤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 1611-1614
루벤스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사교성이 좋아서 승승장구했던 사람입니다.
당대에도 인기가 좋았던 국제적 인기 화가이자 수완 좋은 사업가로, 궁정화가 겸 외교관으로......
구매자가 원하는대로, 상황이 바뀌면 또 바뀌는대로......
짝퉁을 방비하느라 판화로 만들기도 하고...... 하여, 공방에 조수가 수백 명이었다는.......
이러한 루벤스가 카라바조를 높이 평가했다잖습니까.
그래서 많은 카라바조의 작품들을 모작하고, 거금을 주고 사기까지도 했다는.
그런데 카라바조가 루벤스보다 많이 앞선 시대의 사람이 아닙니다. 동시대 사람이예요.
카라바조 1573 - 1610년 / / 루벤스 1577 - 1640년.
20대에 함께 이태리에서 활동했던 사이이기도 합니다.
×
루벤스의《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을 보면 카라바조의 냄새가 물씬 나죠.
우측 상단에 있는 사람의 인물상도 그렇습니다만,
예수를 그린 걸 보면 완전 ‘카라바조 버전’이예요.
얼굴을 잘 보십시요, 어디선가 본 듯하지 않습니까? ─> 바로 카라바조입니다.
카라바조
카라바조가 자기 얼굴을 그린 것도 있었죠. 말하자면 자화상인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란 그림에서의 골리앗.
↙
어떻습니까? 카라바조 = 골리앗 = 예수,,
교황청에서 눈치를 못 챘나봐요. 알아더라면 당장 모가지가 날아갔겠죠.
카라바조의 작품은 이런식으로 불온한 그림들이 많습니다.
×
'예술혼'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루벤스는 카라바조에 껨이 안됩니다.
카라바조는 창조적 재능을 맘껏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에 맞서 항거를 했었죠.
(카라바조가 성격이 포학하네 어쩌네 했다는데, 100% 믿지를 못하겠어요.)
그의 작품엔 이런 식의 비아냥이 숨겨져 있어요.
화가로서의 자부심도 교황과 대척할만큼 대단했었지요.
그림으로 입신출세하려던 루벤스와는 격이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카라바조,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 1602-3
자, 카라바조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그림을 한번 볼까요?
죽은 예수 얼굴과 마주 대하고 있는 어두컴컴한 화면 속의 젊은이 보이시죠?
이 부분이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잘 보세요,, 젊은이가 날카롭게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어요.
그래서 카라바조가 일부러 어둡게 그린 겁니다.
카라바조는 이태리 르네상스 후기 사람이죠. 바로크로 넘어가는...
그의 고뇌는 단순히 종교의 허구성에만 머문 게 아니었습니다.
르네상스 반동으로 표현의 자유가 좌절되었던, 깨어있는 지식인들의 총체적 절망이라고나 할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눈치 못 채게 항거했을 뿐이죠.
그러니까 카라바조가 수 백년을 앞서 간 사람이 아니라,
그의 사고와 업적이 수백 년간 잊혀졌거나 과소평가된 거라고 봐야 합니다.
르네상스 속에서의 지식인들의 좌절이 생각할수록 안타까와요.
↙ 참고로,
루벤스가 모사했다는 카라바조의 그림,「성모의 죽음」(1604)입니다.
※
2012년 2월 12일. 블로그에 썼던 글입니다.
3
카라바조,《의심하는 도마》
카라바조, <의심하는 토마스>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02년, 107x146cm, 포츠담 신궁전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는 르네상스 후기의 혁신적인 미술가로, 밝고 어둠의 대비가 강렬한 명암법 사용과, 이전에 이상적으로 표현하던 종교적인 주제를 벗어나 사실적인 자연주의를 작품의 특징으로 한다. 이 작품에서도 화가는 극명한 명암으로 부활한 예수님과 의심이 많은 제자 토마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성경은 토마스가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 정말 손을 넣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많은 화가는 ‘토마스의 의심’ 도상(圖像)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표현하곤 한다.
첫째, 예수님이 다른 한 손으로 직접 옷깃을 걷어 내는 장면.
둘째, 예수님이 자신의 옆구리 상처를 손으로 가리켜 보이는 장면.
셋째, 예수님이 토마스의 손을 자신의 옆구리 상처 속으로 집어넣도록 잡아당기는 듯한 장면이다.
이 그림은 세 번째 장면으로, 등장인물 외에 모든 배경을 생략하고 어둡게 표현한 채, 예수님이 토마스의 손을 잡고 자기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옆구리를 보여주고 있다. 토마스의 뒤에 두 명의 인물(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전체 화면 구성은 오른쪽 세 명의 머리가 한곳으로 모여 왼쪽의 예수님 머리와 함께 십자가 형태를 이룬다. 또한 시선의 움직임은 빛을 따라 자연스럽게 왼쪽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부터 예수님의 어깨, 예수님 바로 오른쪽에 얼굴만 보이는 인물, 붉은색 옷을 입은 인물, 마지막으로 토마스의 손가락으로 이어져 예수님에게 머문다.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예수님께 도착하게 된다.
어두운 배경만큼이나 불신과 의혹이 많았던 토마스는 예수님으로부터 이어진 빛을 따라 서서히 불완전한 믿음을 거쳐 완전한 믿음으로 넘어가는 모습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고개 숙인 예수님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오른손으로 옷자락을 옆으로 당기면서까지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토마스의 손을 잡은 예수님의 왼쪽 손등에는 십자가의 흔적인 못자국이 선명하다.
하지만 죽음의 승리자답게 예수님의 몸은 왼쪽에서 비추는 빛으로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모습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 예수님과 달리 토마스의 모습은 세파에 시달린 듯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지어져 있고, 허름하고 실밥이 떨어진 어깨 언저리에서 보듯이 남루한 옷을 입은 보통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상처에 오른손 검지를 깊숙이 집어넣고 있으며, 그의 왼손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듯 허리를 받치고 있다. 그의 동작은 몸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것 이외에도, 이미 흔들린 자신의 심리적인 균형을 잡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대 안정시키려 하는 모습이다.
토마스의 뒤에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를 향한 그들의 눈빛이나 고개 숙여 집중하는 모습은 토마스만큼이나 떨리면서 진지한 표정이다. 예수님은 직접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옆구리와 손의 상처로 제자들의 닫힌 문을 열어 그들이 절망과 불신의 믿음에서 완전한 믿음을 드러내게 하신다.
* 출처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8) [2014년 4월 27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이민의 날) 인천주보 3면, 윤인복 소화 데레사 교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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