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12. 19:16ㆍ미술/서양화
출처
http://blog.naver.com/dkseon00/140057305137
제롬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제롬은 작품의 구상을 위해 터키를 방문합니다. 터키 방문을 통해 중동 지방의 맛을 알게 된 그는 곧 이어 이집트도 여행합니다. 그가 묘사한 중동 지방의 다양한 그림과 주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고 오리엔탈리스트로서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시작이 됩니다.
(가면 무도회가 끝나고 난 뒤의 결투 Duel after the Masked Ball / 1857)
가면 무도회 중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연극 같은 배경 속에서 결투가 벌어졌고 결과는 금방 결정 된 것 같습니다. 칼을 버리고 떠나는 승자 옆에는 한 사람뿐이지만 패한 사람 옆에는 걱정스러운 얼굴의 사람들이 셋이나 됩니다. 덤비지 말지 -----.
37살이 되던 해 제롬은 8개월 일정으로 이집트 여행을 끝낸 후 자신의 그림을 취급하던 화상의 딸과 결혼할 계획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위의 그림과 같은 일이 실제로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어떤 파티에 참석했다가 미술상이었던 사람과 아마 여자 문제로 심한 말을 주고 받았던 모양입니다. 결국 결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제롬은 결투가 처음이었지만 그 미술상은 ‘프로’였습니다. 제롬의 의사가 결투 시간에 맞춰 도착했고 의사는 제롬에게 비스듬히 서라고 충고합니다. 상대의 총알은 제롬의 오른 손을 스쳤고 제롬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물론 결과는 제롬의 패배였겠지요. 정면으로 서 있었으면 총알은 제롬의 가슴을 뚫었을 것입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불어로 번역해서 알려주고 싶습니다.
(죽여! Thumbs Down / 1872)
검투사들의 처절한 싸움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상대의 가슴에 발을 올려놓고 관중들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관중들은 엄지 손가락을 아래로 내립니다.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신호로는 ‘죽여’ 입니다. 발 아래 깔린 패자의 손은 애처롭게 하늘을 향하고 있지만 피를 본 관중들은 냉혹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원래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는 것은 불만의 표시이지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라는 신호가 아니었는데 제롬이 이 그림에서 처음으로 목숨과 손가락의 방향에 의미를 부여했고, 세월이 지나 헐리웃 영화에서 이 그림의 상징을 이용하는 바람에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의견이 사실인지 지금 확인 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제롬 선생님, 제대로 한 건 하셨군요!
삼각 붕대를 하고 이집트 여행길에 오른 제롬은 시리아를 거쳐 성지 순례까지 끝내고 귀국해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대단한 정열입니다. 하긴 그 정도 에너지가 있어야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겠지요.
(사자 Lion)
검 붉은 척박한 땅에 사자 한 마리가 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고요하지만 긴장된 느낌이 가득합니다. 사자가 응시하고 있는 곳은 죽음의 땅입니다. 사자는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이르렀을까요? 헤밍웨이 식으로 말하면 고독했기 때문일까요? 동물을 매우 좋아했던 그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작품 중에는 특이하게 사자와 호랑이가 묘사된 것이 여러 점 있습니다.
(갈증 Thirst / 1888)
마지막 남은 물일 수도 있습니다. 옆에 시들어가는 나무를 보면 생명이 끝나가는 땅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떠나지 못하는 사자의 행동입니다. 사자를 보다가 인상파 화가들과 극에 서서 싸웠던 그의 말년이 떠 올랐습니다. 어쩌면 사자는 인상파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화풍을 지키고자 했던 제롬 자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을 한 제롬은 그 후 1남 4녀를 두었습니다. 딸들은 자라서 유명 인사들과 결혼을 해서 손자 손녀를 그에게 안겨주었지만 아들은 화가의 길을 걷다가 폐결핵에 걸려 2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뜰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하렘 여인들 Harem Women Feeding Pigeon in Courtyard / 1894)
왕 하나를 바라보고 평생을 갇혀 살아야 하는 궁중의 여인들에게 새는 부러움의 대상이겠지요.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를 프랑스 정부는 정부 주도로 개설된 학교의 교수로 임명합니다. 학생은 16명이었는데 아마도 그의 개인 화실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 사이의 친목을 도모할 목적으로 제롬은 학생들을 이끌고 석 달 반의 중동 여행을 다시 떠납니다. 이 때는 아랍어도 배웠다고 하니까 준비를 철저하게 한 모양입니다.
(카이로 전경 View of Cairo)
카이로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카이로에 가도 낯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은 이 그림 때문입니다. 신화 속에나 볼 법한 도시를 꼼꼼히 그려 놓았습니다. 건물 하나 하나를 그리는 제롬의 붓 터치를 따라 가다가 빨래를 너는 여인과 그 옆에 그늘 치고 누워 있는 여인들을 만났습니다.
‘지내기 어떠신가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똑같지요’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똑 같은 세상이면 정말 좋겠습니다.
중동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제롬의 그림에는 그가 수집했던 옷과 소품들이 꼼꼼히 묘사되기 시작했습니다. 또 작품 속의 주제들도 대개 정해졌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중동지방 묘사를 위한 매뉴얼’이 만들어 진 것이죠.
(문 앞의 서 있는 카이로 출신의 여인 Woman from Cairo at Her Door / 1887)
마치 화보 사진을 찍는 듯한 모습입니다. 성장을 한 여인의 고혹적인 자태를 보다가 평상복 차림이 아닌 것에 잠시 의혹의 눈빛을 보냈습니다. 입구에 놓인 꽃을 보다가 새 장 속에 새하고 눈이 마주쳤습니다
‘혹시 ------ ?’
‘딴 생각하지마!‘
제롬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여왕의 단골 초대 손님이었고 유럽 각국으로부터 명예로운 호칭이 그에게 쏟아졌습니다. 프랑스 최고 인사들만 초대받았던 수에즈 운하 개통식에도 참석을 했으니까 당시 그의 위상이 짐작됩니다. 이때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발발합니다. 식구들과 함께 고향으로 피신했던 제롬은 파리가 함락 위기라는 소식을 듣고는, 식구들을 바다 건너 런던으로 보내고 자신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 돌아갑니다.
‘ 붓을 버리고 조국을 위해 총을’ 잡은 제롬 선생님 -------.
(모스크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Prayers in the Mosque / 1892)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푸른색 타일 위로 부서지면서 경건하고 차분한 실내를 만들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신께 드리는 가장 큰 자기 반성의 표시입니다. 종교가 주는 힘은 자기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통해서 좀 더 ‘사람다워지는데’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어디에서라도 좋으니까 사람들마다 가슴에 얹혀 있는 성찰과 반성의 짐을 덜어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렘의 목욕탕 Harem Pool)
여인만 사는 하렘에는 다양한 시설이 있었습니다. 제롬의 작품 중에 하렘의 목욕탕을 묘사한 것이 여럿 있는데 제가 이 작품을 골라 든 이유는 장난처럼 그은 천정의 빛 때문입니다. 자연 채광의 효과를 묘사한 것이겠지만, 하렘 속의 여인들과 바깥 세상이 연결되는 통로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통로는 여인의 주먹 하나도 빠져 나가기 어려워 보입니다.
파리로 돌아갔지만 상황은 좋지 않아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제롬은 가족이 있는 런던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런던에서도 그의 작업은 계속되었는데 이 때 소위 ‘목욕탕 시리즈’ 가 완성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제롬의 재산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는데, 프랑스 정부도 보호 했지만 프로이센 정부도 제롬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재복도 인복도 많으셨군요, 제롬 선생님 ---.
(조각 작업 Working in Marble / 1895)
서 있는 작업대의 불안한 균형 때문에 그림을 보는 저는 혹시라도 작업대가 뒤집어질까 봐서 조마조마한데 나이든 조각가의 눈은 너무 진지합니다. 팔은 완성이 된 것 같은데 모델은 여전히 팔을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각상은 방금 돌 속에 갇혀 있다 나온 느낌입니다. 나를 천천히 벗겨 내면 무엇이 나타날까 ----.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 사이로 수 많은 생각들이 피어 올랐습니다..
제롬은 파리코뮌에 의해 황폐해진 학교에서 다시 강의를 시작합니다. 세상은 바뀌어 공화정이 되었고 그 동안 왕궁과의 친분 때문에 상대적으로 떨어진 그의 명성도 다시 끌어 올려야 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일주일에 두 번 말을 타고 출근을 했는데 기병장교처럼 보였던 그의 모습은 당시 신문에 끝없는 이야기 거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언론 플레이를 아는 제롬 선생님 -----.
(작업 끝 The End of Sitting / 1886)
조각이 끝났습니다. 오랫동안 포즈를 취했던 모델은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을 천으로 덮는 중입니다. 얼굴이 가려지는 바람에 모델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천을 조각에 두르는 이유가 조각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림을 보다가 그림 속에서는 사람과 조각이 구별되었겠지만 그림 밖에서 바라보는 저에게 사람과 조각이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살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기준인가요?
말년의 제롬은 인상주의와의 싸움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난 번 소개했던 카유보트가 수집해서 남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뤽상부르 미술관에 걸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의 화실에서 전시회를 반대하는 조직을 구성합니다. 신문 기자들도 불러서 이 사실을 보도케 하고는 본격적으로 압력을 넣었습니다.
또 마네의 추모 전시회가 에콜에서 열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내세운 이유는 마네가 에콜에서 공부한 적도 가르친 적도 없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인상파가 싫었던 것이죠. 그러나 제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네의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할 수 없이 전시회에 참석한 그가 작품을 둘러보고 한 마디 했습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더군’
제롬이 인상파에 대해 남긴 최고의 찬사였습니다.
(호수의 여름 오후 Summer Afternoon on a Lake / 1896)
조각가로도 훌륭한 작품을 남겼지만 이번 이야기에서는 건너 뛰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이야기도 생각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제롬의 그림을 보다가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그림만 봐’
제롬의 목소리였습니다.
[출처] 장 레옹 제롬 2 - 오리엔탈리스트|작성자 레스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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