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헤르만 헤세의 수채화

2016. 9. 16. 09:25미술/서양화

                             헤세의 자화상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맞는 여름방학에 마냥 가슴 설레이며 잠 못 이루다가 방학 바로 다음날, 아침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밥상에 내려놓고선 단짝인 친구네 집으로 달려갔다. 방학날이 마침 친구의 생일이라서 그녀가 같은 반 친구들에게 받았던 생일선물이 못내 궁금했기 때문이다. 친구가 서랍에서 꺼낸 선물들은 이쁜 편지지나 작은 수첩, 머리삔같은 게 대부분이었지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친구 오빠와 사촌 언니가 보내준 선물은 나를 솔깃하게 했다. "나는 오늘 새벽까지 다 읽었으니까...너도 가져다 읽어봐. 우리 언니가 보내준 이 책, 정말 대단해..너도 아마 이 책을 읽고 나면 나처럼..이 여자 에게 홀딱 빠져들고 말걸?" 이렇게 해서 나는 친구의 생일 바로 다음날 전혜린님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와 조우하게 되었다. 친구의 얘기처럼 나도 그 수필집을 읽으면서 전혜린이라는, 여태 듣도 보도 못한 여자에게 순식간에 매료되고 말았다. 한 번 책을 펼치면 밤을 꼬박 새우며 책을 읽었던 시절인지라 책 한 권 읽기는 누워서 떡먹기였지만 이상스럽게도 그녀가 쓴 글귀들은 잊혀지지 않고 내 뇌리에 차곡차곡 입력 되는 게 차암 신기했다. 그 뒤 책방을 뒤져 그녀가 번역했고 그녀가 좋아한다는 책들을 죄다 사서 읽게 되었고 그녀를 통해 이미륵과 프랑솨즈 사강, 로제 마르탱 뒤가르와 루이제 린저, 에리히 케스트너, 하인리히 뵐, 하인리히 노바크 등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더구나 십대인 나를 잠못이루게 하고 내 영혼의 가장 넓은 평수를 차지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그녀가 번역했다는 사실에 나는 또 한 번 감격했다. 그녀를 알기 직전, 나는 헤세에게 빠져 헤세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었던 터라 그녀도 나처럼 헤세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한껏 고무되었던 까닭이었으리라. 헤르만 헤세를 모르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청소년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즈음 헤세의 책들은 청소년기에 들어선 내 또래의 아이들에겐 단연 최고의 작품이었고,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고뇌와 방황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데미안을 비롯해, 지와 사랑,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 로스할데등등.. 헤아릴 수 없는 작품들이 60 년대의 헐벗고 굶주린 우리의 영혼에 일용할 양식을 주었다. 또한 소설과 함께 헤세가 쓴 수많은 시들이 우리 청춘의 푸른 저수지로 폭풍우처럼 밀려들어왔던 그 시절, 생각해 보니 바로 그때가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전혜린님의 수필을 통해 얼핏 헤세가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라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그가 아마추어 경지를 훌쩍 뛰어넘어 개인전을 열 정도로 유명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내 나이 오십 중반이 훨씬 넘어 서였다. 헤세의 그림 속엔 사람이나 동물이 나오지 않는다. 딱 한 번 자신의 정원에 물을 주고 있는 '정원사 헤세' 라는 작품을 그렸 을 뿐, 이천 여점이 넘는 작품 속엔 늘 산과 들, 강과 나무, 흰구름과 이름없는 들꽃들이 주인공이었다. 헤세는 언제나 '나는 화가가 아니다. 나는 아마추일 뿐이다.'라고 자신의 그림 솜씨에 겸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들엔 소박함과 따뜻함이 묻어 있어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를 한없이 편안하게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친구나 지인들에게 수채화를 그린 엽서나 편지를 즐겨 보냈었는데 위에서 말했듯 전혜린님의 수필집에서도 헤세로부터 받은 그림엽서에 대한 얘기가 나와 우리를 즐겁게 한다.
    <한 장의 그림 / 헤르만 헤세>> 가을의 찬 바람이 시든 갈대밭을 스산히 불어간다. 갈대잎은 밤 사이에 회색이 되었다. 까마귀는 버드나무를 떠나 육지로 날아간다. 호수에서는 한 노인이 외로이 서서 쉬고 있다. 머리에 바람과 밤과 다가오는 눈을 느끼고 그늘진 호수에서 밝은 하늘을 바라본다. 거기 구름과 호수 사이에 한 줄기 물가의 육지가 햇빛 속에서 따뜻하게 빛나고 있다. 꿈과 시처럼 행복에 찬 금빛 호수가. 노인은 빛나는 이 풍경을 똑똑히 눈 속에 간직하고 고향을, 지난 행복한 세월을 생각한다. 그리고 황금빛 태양이 흐려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자 머리를 돌려 버드나무에서 떠나 천천히 육지로 걸어간다.
    <행복해 진다는 것 / 헤르만 헤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하고 마음속에 조화를 찾는 한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한... 사랑은 유일한 가르침 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깊은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었다네
    <기도 / 헤르만 헤세> 하느님이시여, 저를 절망케 해 주소서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미혹의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온갖 모욕을 겪도록 하여 주시옵고 내가 스스로 지탱해 나감을 돕지 마시고 내가 발전하는 것도 돕지 마소서 그러나 나의 자아가 송두리째 부서지거든 그 때에는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아 주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으려고 하나 나는 오직 당신의 품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저녁 무렵 / 헤르만 헤세> 양떼를 몰고 목동이 조용한 오솔길을 가고 있다. 집들은 잠이 오는 듯 벌써 깜박이고 있다. 나는 이 마을에서, 지금 단 하나의 이방인 슬픔으로 하여 나의 마음은 그리움의 잔을 남김없이 비운다. 길을 따라 어디로 가든 벽난로에는 따뜻한 불이 타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고향과 조국을 느껴보지 못했다.
    '어떤 두 사람이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심연이 놓여있다. 단지 엷은 판자로 된 비상다리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그 심연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것은 사랑 뿐이다.'
    '잿빛으로 불쾌하게 놓인 이 세상이 그 언젠가는 향기 나고 아름답게 울려퍼졌던 것을 잊었는가? 아무리 고통을 주고 받아도 시간은 그 마음을 바람에 날려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들은 끝없는 광채 속에 머문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이 마음의 황폐로부터, 내가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던 일로부터 탈출구를 발견했다. 물감과 페인트를 붓으로 찍어 칠하는 작업, 이 작업에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한, 이 예술 작업을 통해서 나는 커다란 위안을 받는다.'
    '나와 나의 작은 수채화 물감들은 시와 먼 기억들, 내가 가졌던 꿈들을 그린다. 나는 여전히 내가 그림에 있어선 단순한 아마추어 임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글을 쓸 때 펜으로, 그림을 그릴 때 붓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따뜻해 진다. 그 순간 나는 즐거움으로 견딜 수 없게 된다.'
    '삶의 방법에 있어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 길을 꾸준히 나아갈 뿐 자신의 길을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것, 즉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종종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했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느냐는 중요치 않다. 내게 있어 그것은 문학 이 내게 주지 못했던 예술의 위안 속에 새롭게 침잠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중요한 일은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을 보고 그를 존중 하고 각각의 다른 사람들을 보고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성격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고 서로 다른 성격과 개성을 지닌 사람을 통해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배워야 한다. 하나의 그림에는 수 많은 색채가 담겨져 있다. 하나의 색깔로만 칠해진 그림 은 어디에도 없다. 수 많은 색채들이 어울려서 하나의 명작을 만들어낸다.'
    헤세는 스위스 테신에서 자신의 생애 반 이상을 보냈으며, 테신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려 2,000 여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그림 속에 자신이 꿈꾸는 이상세계를 담고자 애썼는데, 음악과 함께 그림은 그의 평생지기가 되었다. 1946 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세는 85 세를 넘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는 전쟁을 싫어한 평화주의자였기에 자신이 태어난 독일 국민들과 언론으로부터 배신자, 매국노라는 무차별 공격을 받았고, 그의 모든 작품들은 출판금지와 판매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헤세가 지닌 올바른 가치관이야 말로 그를 보석처럼 반짝이게 하는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건 아니었을까...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감꽃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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