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시각예술에서 재현의 의미기능
최 광 진 (미술학 박사)
1. 서 론: 왜 다시 재현인가
2. 모더니즘: 표층적 재현에서 심층적 재현으로
3. 포스트모더니즘: 심층적 재현에서 은유적 재현으로
4. 은유적 재현의 딜레마
5. 결론
1. 서론: 왜 다시 재현인가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미술 모두에서 중요한 논점이 되고 있다. 1860년대 인상주의부터 1960년대 미니멀리즘까지 약 한 세기에 걸쳐 진행된 모던 미술은 재현이미지를 제거하고 점차 추상화되고 물질화되는 경향을 띠었고, 이후 포스트모던 미술에서는 재현이미지들이 다시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팝아트와 극사실주의는 물론이고, 1980년대를 주도한 신표현주의 계열과 최근의 많은 비디오아트와 영상작품들에서도 재현이미지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중요한 양식적 특징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시각예술에서 재현이미지의 등장은 물론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정점으로 한 서양의 전통미술은 재현이미지를 위해 원근법이나 명암법 같은 다양한 기술들을 개발했으며, 모던 시대에도 달리(S. Dali)나 마그리트(R. Magritte)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에게서 시각이미지는 중요한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을 형식주의와 환원주의로 간주하는 패러다임에서 재현이미지는 청산의 대상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린버그(C. Greenberg)는 달리나 마그리트 같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모던적 흐름에 역행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처럼 현대 시각예술에서 재현의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것은 작품으로서 이미지의 ‘의미기능(semantic function)’에 대한 관념이 시대마다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 의해 창출된 기호(표상체)로서의 작품과 지시대상(대상체) 사이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의미효과(해석체)가 시대마다 기능을 달리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예술에서의 의미기능 변천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살펴봄으로써 오늘의 시대정신을 간파하고 그것이 지닌 의의와 딜레마를 고찰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이러한 논의에 앞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양식적인 이미지와 의미론적인 의미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재현이미지를 제거했다고 해서 전적으로 재현의미가 제거되었다고 볼 수 없으며, 또한 재현이미지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실적 재현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작가들은 대중들이 오해하기 쉬운 이러한 점을 통해 역설적으로 시대의 정체된 인식을 공격하곤 했다. 예를 들어 모더니스트 화가들이 재현이미지를 제거하고 추상화를 제작했을 때 대중들은 재현의미가 상실되었다고 비난했고, 또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스들이 재현이미지를 등장시켰을 때 재현의미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작가들은 거꾸로 이용하여 그러한 인식을 역설적으로 공격하였다.
본 논문은 양식적인 측면이 아니라 의미론적 관점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관을 비교 검토하고, 특히 오늘날 포스트모던 이미지의 의미기능을 해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늘날 재현이미지의 재등장은 모더니즘의 동어반복적이고 자기지시적인 국면에서 벗어나 작가가 경험한 일상과 삶의 단편들을 끌어들여 작품이 외적인 세계와 내용적으로 모종의 관계를 맺으려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것이 과거 리얼리즘에로의 복귀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오늘날 미술계뿐만 아니라 현대철학의 첨예한 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는 언어나 이미지와 실재(real)와의 관계를 재검토하고 있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의 이론들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후기구조주의자들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언어나 이미지가 실재 세계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한 데에 있을 것이다. 언어는 실재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언어 내부의 차이의 체계라는 소쉬르(F. Saussure)의 지당한 명제는 언어에 의해 언어적으로 형성된 우리의 사유체계를 해체시키고(라캉), 그동안 우리가 믿고 신뢰했던 것들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시대와 사회의 특정 구조에 의해 형성되고 정의된 권력(푸코)이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믿어왔던 거대서사(리요타르)들의 허구에서 벗어나 미시세계에 주목하게 한 것은, 실재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버전을 제공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새로운 버전에는 언제나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듯이, 이러한 논의들에 간과해서는 안될 혼동과 오해들이 양산되고 있음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 오해와 혼동의 진상은 언어나 이미지가 실재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 곧 기표의 자율성과 자유를 보장하여 맹목적이고 일시적인 유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태도이다. 이들은 이미지가 실재를 재현한 것이라는 전통적 의미기능을 역전시켜 이미지가 실재를 지배(보드리야르)하는 것으로 그려보이려는 데 특징이 있다.
물론 오늘날의 사회는 보드리야르(J. Baudrillard)의 통찰대로 텔레비전과 컴퓨터 등 각종 영상매체가 정보사회를 주도하고 있고, 우리는 그러한 이미지들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텔레비전의 사극이나 흥미 있는 한 인간의 생애를 드라마로 옮긴 프로그램에서 유족이나 지인들은 그 프로그램이 실재와 다르게 왜곡되었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그 드라마의 제작자의 대답은 언제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니 그냥 드라마로서 보아달라고 답변한다. 심지어 객관적인 사실을 다루는 뉴스 프로그램마저도 그러한 왜곡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알게 모르게 그러한 이미지의 폭력에 세뇌되고 길들여진다. 결국 우리의 의식은 실제와 다르게 왜곡되어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지배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여기서 연구자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이미지가 실재를 지배한다는 이러한 사실에 반론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 이미지가 실재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 하는 점이다. 일부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그들을 따르는 많은 미술가들이 오해하고 있는 점은 이미지가 실재와 ‘다르다’는 것을 ‘무관하다’는 것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르다’라는 말과 ‘무관하다’는 말은 서로 유사한 개념이지만 미묘하고 중요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이미지가 실재와 ‘다르다’고 할 때는 실재와의 비동일적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실재와의 변증법적 관계를 열어두고 있지만, ‘무관하다’고 했을 때는 실재와의 대응관계를 완전히 차단하는 뉘앙스가 강하다. 보드리야르 같은 몇몇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스들은 이미지와 실재와의 변증법적 상호관계를 고찰하기보다는 ‘무관하다’는 쪽으로 몰고 감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이 애초의 거부하려고 했던 형이상학의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런 맥락에서 라쉬(S. Lash) 소쉬르가 말한 “차이를 통한 의미작용”을 소쉬르 이후 많은 분석가들이 이를 잘못 이해하여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지적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Scott Lash, Sociology of Postmodernism,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0, p. 8 참조.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관심은 “이미지는 실재와 다르지만 무관하지 않다”는 가설을 근거로 하여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관계 양상을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그 관계는 물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고전적 재현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지가 완전히 독립적인 순수한 현존(presence)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것은 재현을 거부하고 창조주의 아우라(aura)를 획득하려는 대다수 모더니스트들의 야망이자 이상이었다.
절대적 현존이라는 창조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더니스트들의 노력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특수한 환경 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과정 속에 있는 우리 인간은 언제나 시작점에 있어서 모방과 재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의미론적으로 재현은 모더니즘뿐만 아니라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개념이며, 그것이 재현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재현의미의 양상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것을 비교 검토하는 데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역사적으로 재현의미의 개념이 변천하는 과정을 고찰하는 가운데, 그 양상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모더니즘은 다름 아니라 고전적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는 ‘표층적 재현’을 ‘심층적인 재현’으로 전환시키고자 한 것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심층적 재현’의 권위적이고 관념적인 측면에 저항하여 알레고리를 의미작용으로 하는 ‘은유적 재현’으로 전환한 것임을 밝힐 것이다. 다음으로 은유적 재현의 특성과 딜레마를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포스트모던미술의 의의와 방향을 가늠해보고자 하였다.
2. 모더니즘: ‘표층적 재현’에서 ‘심층적 재현’으로
전통적으로 시각예술은 어떤 대상을 사실적으로 모방하는 기술로 인식되어 왔으며, 작품으로서의 이미지는 그것의 원본이 되는 대상과 시각적 유사성(resemblance)이 존재해야 하고 그러한 시각적 닮음에 의해서 회화적 환영이 발생한다고 본다. 여기서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대상의 ‘구체적’ 외양을 가리키며, 대상을 일대 일의 관계로 지시(denotation)하기 때문에 ‘표층적 재현(outer representation)’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형이하학적 재현을 말한다.
이러한 표층적 재현은 근원적으로 플라톤의 모방론(Mimesis Theory)에서 까지 소급된다. 형이상학적 이데아를 본질적인 세계로 규정한 플라톤은 당시 스코파스나 프락시텔레스 같은 화가들이 이미지를 환영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표층적인 것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미술을 사악하고 유해한 것으로 여기고 시민들 서열에서도 미술가를 아주 낮은 지위로 격하시켰다. 그러나 표층적 재현은 전통적으로 서구철학사와 미술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으로, 르네상스 미술이 탄생되는 이론적 배경이 되었고, 19세기 전반까지 서양미술의 토대가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헤겔적 관점에서 미술사를 진보적 발전을 위한 내러티브로 파악하는 단토(A. C. Danto)는 이러한 표층적 재현을 ‘바자리 에피소드(episode)’라고 부른다. 단토에 의하면 바자리(Vasari)는 미술이 발전을 거듭하여 시각적 외양을 정복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3차원적 세계를 2차원적인 공간에 재현하는 바자리식의 내러티브는 움직임을 재현해내는 동영상이 회화보다 실재 사물을 더 잘 묘사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을 때 종말을 고했다고 본다. A. C. Danto, After The End of Art: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1997, p. 106 참조.
조형예술로서 시각이미지가 구체적 지시대상에 대한 일 대 일의 대응관계를 갖는다는 표층적 재현은 19세기 후반 들어 미술의 자율성이 새로운 시대이념으로 추구하는 모더니스트들의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들은 문학에서처럼 이미지가 대상이나 주제에 종속되는 한 미술만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더니즘 미술이 미술 외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형식이나 매체 자체의 특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재현의 의미기능 제거를 의미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니다. 모더니스트들이 제거하고자 한 것은 재현이미지이지 재현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혼동은 모더니즘이 정점에 도달하는 1960년대 미니멀리즘에서 명백히 드러낸다. 대표적인 미니멀리스트인 스텔라는 초기에 “당신이 본 것은 곧 당신이 본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자기지시성의 신념을 위해 좌우대칭의 규칙적인 패턴을 양식화함으로써 재현의미를 차단하려 했으며, 저드가 회화적 일루전과 재현적 성격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3차원적인 특수한 사물을 단일한 형태로 제시한 것은 모더니즘을 재현의미의 제거, 즉 자기지시적인 것으로 환원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재현의 완전한 제거는 예술가 스스로가 절대적 창조주로서 신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때 작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창조함으로써 독창적 아우라(aura)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야망은 불완전하고 상대적 세계인 사회현실과 일상적 삶으로부터 미술을 분리시키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모더니즘의 이러한 환원주의적 성격은 상대적 현실세계를 절대적 관념세계로 전향하고자 한 것이며, 그것이 완전히 실현되었을 때 의미작용은 ‘자기지시적’인 동시에 ‘전체지시적(whole-referential)’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재현의미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표층적인 차원을 보다 심층적인 차원으로 전환한 것이기 때문에 ‘심층적 재현(inner representation)’ 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재현으로서 의미작용을 특수에서 보편으로,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전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모더니즘 미학의 토대를 마련한 벨(Clive Bell)이나 대표적 모더니즘 미술평론가인 그린버그(C. Greenberg)에서도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 벨은 전통미술이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를 이미지의 재현기능에 있음을 주목하고, 예술작품은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느끼는 사랑, 미움, 동정, 권태 등과 같은 일반적 정서와 분리되는 ‘독특한 정서(peculiar emotion)'를 환기시켜야 하며, 그러한 독특한 정서는 선과 색, 즉 형식과 형식들의 관계와 조합인 ’의미 있는 형식(significant form)'으로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Clive Bell, “The Aesthetic Hypothesis,” in Art, London: Chatto and Windus, 1914, reprinted in Modern Art and Modernism: A Critical Anthology, eds. F. Feascina, C. Harrison, New York: Harper and Row, 1982, pp. 67-68 참조.
이러한 기준에 의해 그는 심리적이고 역사적 가치를 지닌 초상화나 지형학적인 작품들, 그리고 어떤 내용을 서술하고나 상황을 설명하고 암시하는 그림들과 도해들을 ‘기술적 그림(descriptive painting)'이라 부르고 불순한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르네상스 미술이나 영국의 아카데믹한 회화들은 어떠한 삶의 정서를 연상시키는 재현이미지로 인해 비순수하고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러한 속스러운 재현의 기술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고 숭고한 인상적 형식을 추구한 원시미술이나 후기인상주의 미술을 높이 평가한다. 같은 책, pp. 71-72 참조.
이러한 벨의 예술론은 삶으로부터 철저한 분리를 통해 형이상학적 승화된 정서를 체험하고자 한 것이고, 정신을 재촉하여 감각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사물의 오염으로부터 스스로를 정화시켜 형상적 세계의 속박을 벗어나 영원한 존재와의 전적인 조화 및 근본적일 통일을 달성하게 하려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 미학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과 다름 아니다. 또한 이러한 사고의 근저에는 종교와 유사하게 어떤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층적 재현에 도달하는 것을 예술의 사명으로 간주했다.
또한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대중성을 포기하고 사회와의 모든 관련성과 모순들을 해소할 수 있는 절대성의 표현으로 나아가게 되고, 구체적인 주제나 내용을 회피하게 됨으로써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본다.
아방가르드가 ‘추상’ 혹은 ‘비대상적’ 미술이나 시에 이른 것은 절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였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자연이 스스로 정당하고, 풍경화가 그것의 대상과 상관없이 미학적으로 정당하듯, 의미나 유사성, 원본성과 상관없이 창조하지 않은 ‘주어진’(given) 어떤 것, 즉 오직 그 자체의 의미로 타당한 어떤 것을 창조함으로써 신을 모방하려 한다. 내용은 완전히 형식 안으로 용해되어서 미술이나 문학은 전체나 부분에서 그 자체가 아니면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 못한다. 그러나 시인이나 미술가는 누구보다도 상대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여기서 절대가 환기시키는 가치는 상대적인 가치로서 미학적 가치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모방이며, 신의 모방이 아니라 미술과 문학 자체의 원리와 과정을 모방하는 것이 ‘추상’의 기원이다. 일상적 경험에 의한 주제로부터 예술가들은 매체로 관심을 돌렸다. 비재현적이거나 추상이 미학적 타당성을 지니려면 임의적이고 우연적이어서는 안되고 합당한 제약이나 원형에 의거해야 한다. 일상적이고 표층적 경험의 세계가 단절되었으므로 이런 제약은 이미 미술과 문학이 일상적 세계를 모방할 때 적용되는 바로 그 과정이나 원리들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 과정이나 원리들 그 자체가 예술의 주제가 된다. C. Greenberg, “Avant-Garde and Kitsch,"(1939), ed. O’Brian John, Clement Greenberg: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Perception and Judgment, vol. 1,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pp. 8-9.
1939년에 쓴 이 글에서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연원을 절대성을 추구로 보았고, 예술적 절대성이라는 것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가치가 용인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예술의 본질을 모방(mimesis) 개념으로 포괄하고, 이에 따라 예술향수의 측면에 대해서는 미적 효과로서 카타르시스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 두 개념을 오로지 심리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예술의 독자적인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예술의 모방은 고도의 기술적 제작이나 단순한 습관에 의한 직인적 제작과 대립된다. 왜냐하면 예술의 모방은 그 합목적성에 있어서는 자연의 생성원리와 비교되지만, 이와 같은 합목적성은 예술가가 자각한 의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竹內敏雄, 『미학 예술학 사전』, 미진사, 1989, p. 27.
그는 플라톤과 달리 모방을 인간의 심성과 행위의 보편적인 양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사물의 본질이 사물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내재한다고 믿었다.
이 점은 모더니즘이 주체의 주관성과 매체의 특성을 강조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매우 유익하다. 형상(패턴, 질서, 질)이 독립적인 존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질료(물질, 구조, 양) 속에 내재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그동안 이원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사물과 본질을 통합시켜 역동적인 상관관계로 봄으로써 미와 예술의 보편적 개념규정보다는 그것이 현실에서 작용하는 경험적이고 심리적인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러한 그의 견해에 따르면, 물질은 사물의 본질적인 성질을 잠재적인 가능성의 상태로 지니고 있으며, 이 본질이 자기실현과정을 거쳐 자기완성(entelechy)에 이른다.
그린버그가 앞에서 추상미술이 매체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임의적이거나 추상적이어서는 안되고 합당한 제약이나 원형에 근거해야 한다고 한 말이나 과정이나 원리 그 자체가 예술의 주제가 된다는 주장은 바로 물질의 표층 속에 잠재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상개념을 추출하고자 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미술의 매체를 물질적인 것으로 파악했고 물질에 내재한 심층적 질서를 드러내는 것이 모더니즘의 과제로 파악했다.
그린버그는 1960년 무렵 <모더니스트 페인팅>에서 이를 규범화하면서 칸트를 따라 모더니즘 미술은 ‘내재적 비판(immanent criticism)'을 통해 ‘자기규정(self-definition)’을 행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매체들로부터 차용한 효과들을 제거하는 것을 자기비판의 과제로 삼았다고 정의한다. C. Greenberg, “Modernist Painting"(1960), ed..O’Brian John, Clement Greenberg: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Modernism with a Vengeance, vol. 4.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p. 86.
이 말은 베버(M. Weber)가 말한 ‘자기결정(Eigengeseltzlichkeit)' 혹은 ‘자기입법(self-legislation)'의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한 영역이 자신의 관습들과 가치 평가의 양식을 발전시키고, 한 영역 안에서의 가치는 그 영역 안에 있는 문화 대상이 그 영역 자체의 고유한 규범에 얼마나 잘 들어맞느냐에 따라 달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론적 영역에서 한 명제의 가치는 그것이 실재를 재생산하는 정도에 덜 의존적이고 그 명제를 지지하기 위해 이론적 담론(theoretical discourse) 안에서 인용되어지는 논증과 증거에 더 의존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S. Lash, 앞의 책, pp. 8-9 참조.
라쉬(S. Lash)는 모더니즘은 허구로 판명된 삶의 의미를 질문하고 재해석함으로써 본질과 보편적인 것의 추구로 나아가게 되고, 미적 영역에서의 가치는 실재하는 것을 재생산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린버그가 제안했던 것처럼 주어진 미적 소재에 존재하는 잠재력을 체계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같은 책, p. 9참조. C. Greenberg, “Complaints of an art critic," in C. Harrison and F. Orton(eds), Modernism, Criticism, Realism, London: Harper & Row, 1984, pp. 3-8 참조.
그러나 라쉬는 오늘날 모더니즘이나 잘못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서 유행처럼 사용되는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인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자기지시성은 소쉬르(F. Saussure)가 말한 “차이를 통한 의미작용”에서 유래한 듯하지만, 소쉬르 이후 많은 분석가들이 이를 잘못 이해하였다고 간주한다. 즉, 소쉬르의 통찰대로 의미들이 실재와의 관계가 아니라 기표들 사이의 차이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표의 자기지시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기표들이 그들 자신의 외부, 즉 기의들을 지시할 수 있는 능력은 그들 자신들 사이의 차이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지, 그것이 대상과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모더니즘 회화에 있어서 표면의 ‘평면성(flatness)’이 자기지시성의 개념을 지지하지만, 만약 그것이 ‘자기지시적’이라 해도 모더니즘 회화의 심미적 타당성이 외부세계에 있는 지시 대상을 지시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그것의 미적 가치가 스스로를 지시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전혀 아니라고 주장한다. S. Lash, 앞의 책, pp. 8-9참조.
여기서 자기(self)라 함은 앞에서 논의했듯이 표층적이고 물질적인 수준의 것이 아니라 과정적이고 원리적인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이며, 때문에 이는 재현 대상을 심층적인 것으로 전환한 것이지 재현을 제거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텔라나 저드 같은 미니멀리스트들이 자기를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모더니즘을 재현 제거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한 것은 모더니즘의 본질을 왜곡하여 해석한 결과이다. 이들의 재현제거의 노력은 기하학적 사물화를 피할 수 없었고 작가의 주관적 의도마저 배제됨으로써 프리드(M. Fried)가 지적한 것처럼 미술을 현전적이고 즉물적(literalist)인 것이 됨으로써 물질주의로 귀결시켜 버린다.
재현의 의미기능을 표층적인 것에서 보다 심층적인 차원의 것으로 전환함으로써 자율성을 확보하려했던 모더니스트들은 물질로서의 매체 자체에 본질적인 것이 내재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실천해 보이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종말의 고한 이유는 이러한 고상한 목표와 과정을 동일시하고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결론지었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충분조건이 있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예술은 전적으로 같다”는 본질주의적 태도는 하나의 이데아로서 목표수준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역사적 주체가 현실적으로 도달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린버그 같은 모더니스트의 오류는 이처럼 포착 불가능한 세계를 ‘평면성(flatness)’ 같은 자명한 것으로 결론지었다는데 있다.
3. 포스트모더니즘: ‘심층적 재현’에서 ‘은유적 재현’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독단적 본질주의와 역사적 에피스테메(푸코)를 절대적 본질과 동일시하는 ‘동일성 사고(identity thinking)' 사고의 오류를 비동일성(아도르노)의 것으로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숭고하고 고상한 이념이 무너지고 역사적 상대성과 개별적 특수성에 주목하여 사회와 일상적 삶의 미학화(페더스톤)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다. 사유주체의 이성의 집권이 무너짐으로써 모든 것을 맥락적이고, 상대적인 타자들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주장하게 된다.
이것이 저자의 죽음(바르트)과 텍스트로의 관심이 전환되는 이유이다. 텍스트는 독창적인 저자의 메시지가 아니라 출처가 불투명한 글들이 뒤섞이고 충돌하는 다원적인 공간으로서 문화의 수많은 핵심들을 차용하여 만들어진 조직체이다. 포스트모던 작품들은 이러한 텍스트의 성격을 조형적으로 실천하고 있으며, 이것이 재현이미지가 재등장하는 배경이다.
브라이슨(N. Bryson)의 지적처럼 미술도 사회적 공간으로부터 분리된 순수형식이라기보다 그것이 생산되는 맥락의 복잡 다양한 역학 관계를 함축한 담론(discourse)들이 형상(figure)에 부단히 개입됨으로써 그것이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형성한다. 주체의 죽음에 대한 인식 이후의 포스트모던 문화적 증후군은 삶과 사회의 단편적 기표 이미지들이 분열증적으로 등장하면서 자족적인 물질성을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모더니즘에서처럼 더 이상 심층적인 본질을 드러내려하지 않고, 기존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비판적으로 의미부여를 하므로 메타적 성격을 지닌다. 여기서 작가의 임무는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기존의 것에 대한 비판과 조합이다.
들뢰즈(G. Deleuze)의 말처럼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머리 속에, 혹은 자신주변에, 혹은 화실 안의 많은 상투적 재현이미지들 가지고 있다. 그것은 화가의 기억과 환상, 그리고 사진, 영화, 텔레비전, 등 각종 영상매체로부터 얻은 이미지를 포함한다. 따라서 화가의 임무는 이러한 상투적인 것들로 잠식되어 있는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어떤 것이 장애물이고 어떤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인가를 규정하는 것이다. G. Deleuze,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Paris: La Difference, 1981; 하태환 역, 『감각의 논리』, 민음사, 1995, p. 57 참조.
그러나 그것이 재현되는 대상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화가는 무언가 와의 결합과 새로운 조작을 가한다. 그것은 주어진 이미지를 차용하여 다른 것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에 ‘은유적 재현(metaphorical representation)’이라 할 수 있다.
은유(metaphor)는 하나의 의미체계를 준거로 이용하여 다른 의미체계를 설명하거나 명확히 함으로써 작용한다. 준거가 되는 첫 번째 의미체계인 ‘준거 영역(source domain)’은 아주 구체적이고 잘 이해된 상태이며, 아무런 문제가 없고 친숙한 것을 환기한다. 반면에 말하고자 하는 이차의 ‘목표 영역(target domain)’은 포착하기 어렵고 불투명하며, 준거 영역에 의하여 부여되는 의미 없이는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으로써 은유는 친숙하지 않은 것을 친숙한 것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주고, 낯선 사건이나 경험 혹은 세계를 인식 가능한 것으로 다시 기술해 보이는 방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방가르드 예술은 사실 은유적인 특성을 지니며, 그린버그식의 모더니즘을 비판한 클라크(T. J. Clark, 1982)의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는 미술 스스로가 독자적인 가치의 원천이 된다는 후기 그린버그적 인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방가르드의 실천으로서 모더니즘의 형식논리를 ‘부정의 실천(practices of negation)'으로 간주한다. 그에 의하면 매체는 자족적인 특성이 아니라 ‘부정과 이탈의 장소(the site of negation and estrangement)'이고, 그것은 어떤 사회적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T. J. Clark, “Clement Greenberg's Theory of Art" Critical Inquiry, Vol. 9, Septembe 1982. edited by Francis Frascina, Pollock and After: The Critical Debate 2nd Editio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0, pp. 71-72 참조.
클라크의 기본입장은 예술이란 소통과 저항, 그리고 어떤 기준을 필요로 하며, 그 기준들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해체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모더니즘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본 것에 근거하지 않았다거나 사실주의적 규정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재현의 특수한 실천’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특수한 재현이란 고전적 리얼리즘에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적 실천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에 의해 제약됨을 의미한다. 즉 미술을 가능케 한 이러한 제약들(constraint)은 언제나 있어왔으며, 이러한 제약이 없이는 어떤 명료함과 침묵의 표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책, p. 86 각주 11참조.
. 이때 미술은 이러한 사회적 제약들에 대해서 은유적 관계에 선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모더니즘 회화에서 평면성이 은유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은유 없이는 어떠한 사실도 존재하지 않으며, 복합적인 의미행위의 매개물 없이는 어떠한 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책, p. 81.
고 주장한다.
단토는 나폴레옹이 로마 황제로 재현된 조각에서 조각가는 단순히 로마 황제의 옷을 입은 실재의 나폴레옹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로 하여금 나폴레옹의 고상한 로마 황제에게 취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하는 것으로 이러한 조각상은 위엄, 권위, 권력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때 로마 황제로서 나폴레옹은 로마 황제로 바뀌는 것(transform)이 아니라, 로마 황제의 속성을 지니는 것(transfiguration)이라고 주장한다. A. C. Danto,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3, p. 168 참조.
다른 예로서, 단토는 일반적인 재현과 예술작품의 재현을 구분하기 위하여 비평가 로랑(Erle Loran)과 리히텐슈타인(R. Lichitenstein)이 그린 세잔느 그림을 비교한다. 같은 책, pp. 142-49 참조.
로랑이 자신의 저서 <세잔느의 구도>에서 작품의 형식적 구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이어그램을 제시했는데 이 다이어그램과 몇 년 후 팝아트 작가인 리히텐슈타인이 그린 <세잔 부인의 초상(1963)>과 크기와 재질은 차이가 있지만, 사진기로 찍어서 같은 크기의 사진으로 만들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그 예술작품은 그와 동일한 다른 재현물과 다른 어떤 특별한 것 혹은 다른 특별한 종류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두 대상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리히텐슈타인은 스스로의 의도에 의해 어떤 점을 지적하고 지시하기 위해 다이어그램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한 다이어그램이 아니고 ‘수사적(rhetorical)’인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무엇을 재현하든지 그것은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이어그램이 우리 문화에서 갖는 함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함의에 의해서 이 다이어그램은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든지 보여주려는 것에 대한 은유가 되고, 이 때 다이어그램의 형식 자체는 어떤 느낌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책, p. 148 참조.
예술적 재현에서 은유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언어로 메워질 수 있는 것보다 항상 많기 때문에 작품이 의미하는 것을 언어로 옮기는 것은 항상 위험하다. 그러나 예술적 재현이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것이라 해서 그것에 대한 반응이 단순 속성에 반응할 때 경험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은 은유의 구조에서처럼 인식적 반응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이 자신의 동일시와 구조를 획득한 역사적, 인과적 기반으로부터 그 예술작품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즉 작품 자체는 그것 스스로가 독특한 힘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예술적 환경과의 수많은 인과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때문에 단토는 예술작품과 사물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해석(Interpretation)’의 문제이고, 우리가 어떤 대상을 예술로 본다는 것은 우리의 눈이 볼 수 없는 것들, 즉 예술론의 분위기, 예술사에 대한 지식, 즉 예술계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A. C. Danto, “Art world,”, Journal of Philosophy 61, 1964, p. 580 참조.
은유적 재현의 의미작용은 추상(abstraction)화 작용으로 나아가지 않고, 언제나 형상(figure)을 선택하여 그 의미를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알레고리의 성격을 지닌다. 알레고리(Allegory)는 본래 “다르게 말한다”라는 그리스어의 allegoria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표현 그대로의 표층적인 의미와 심층적인 의미를 동시에 갖는 것을 말한다. 즉 인물, 행위, 그리고 때로는 배경이 일차적 의미층에 있어서 논리 정연한 말이 될 뿐만 아니라,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제2차적 인물, 개념, 사건의 층도 가리키도록 고안된 ‘복수지시(plural-reference)’의 한 양상이다.
알레고리가 포스트모던 비평에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오웬즈(C. Owens)에 의해서이다. 그는 그동안 모더니즘 미학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되어온 알레고리가 포스토모던미술에서 재등장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알레고리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C. Owens, “The Allegorical Impulse: Toward a Theory of Postmodernism,” October, no. 12(Spring, 1980), reprinted in Beyond recognition: representation, power, and cultur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2, pp. 53-61 참조.
(1) 알레고리의 가장 근본적인 충동은 과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확신과 과거를 현재를 위해 복원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이 충동들은 정신분석학에서 알레고리가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과, 20세기의 비평가인 벤야민이 철학적 편견 없이 알레고리를 중요한 주제로서 다루고 있는 이유라고 본다. 알레고리와 정신분석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할 것. Joel Fineman, “The Structure of Allegorical Desire,” October, no. 12(Spring, 1980), pp. 47-66.
(2) 알레고리는 하나의 텍스트가 또 다른 텍스트에 의해 중첩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3) 알레고리적 구조 내에서 하나의 텍스트는 비록 둘 사이의 관계가 단편적이고 간헐적이며 혼란스럽다 할지라도 또 다른 텍스트를 ‘통해서’ 읽혀진다.
(4) 알레고리를 이용하는 작가들은 이미지를 창조하지 않고 차용된 이미지를 통해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며, 문화에 대한 해석자를 자처한다. 그에 의해 이미지는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하며, 원래의 이미지는 보존되지 않는다.
(5) 알레고리는 해석학이 아니며, 오히려 원래의 의미에 또 다른 의미를 첨가함으로써 의미를 교체하고, 이전의 의미를 대신하며, 이것은 일종의 보충(supplement)이다. 보충(supplement)은 기술소(記述素)의 효과에 대하여 데리다가 부여한 여러 가지 명칭 중 하나로 오웬즈는 알레고리와 보충을 동일시하고 있다.
오웬즈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미술에서 이러한 알레고리적 특성들이 몇 가지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한다. 그 첫 번째 경향은 브라운트흐(Troy Brauntuch), 르빈(Sherrie Levine), 롱고(Robert Longo)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이미지 차용(appropriation)이다. 이 경향은 영화 스틸이나 사진, 드로잉 같은 다른 이미지의 복제를 통해 이미지를 생산하지만, 이것들을 조작함으로써 이미지가 가진 원래의 여운과 의의, 그리고 의미에 대한 그것의 신뢰성을 박탈하여 모호하게 만든다. 같은 책, p. 54 참조.
두 번째 경향은 주변 환경과 물리적으로 결합된 작품이 관람객과 만나는 바로 그 장소에 자리잡는 ‘장소특수성(site-specificity)’이 강조된 작품이다. 예를 들어 스미드슨의 <소용돌이 방파제(Spiral Jetty)>와 같은 장소특수성을 지닌 작품들은 제한된 기간에 특정한 장소에 설치되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데, 이런 일시성은 우연성에 대한 척도를 제공한다. 오웬즈는 이러한 장소특수성을 지닌 작품들은 모든 현상들의 덧없음과 일시성을 상징하며, 20세기 죽음에 대한 상징물로 간주한다. 같은 책, pp. 55-56참조.
이 경향의 작품들은 작품의 비영속적 특성으로 인해 사진으로만 보존되며, 이는 결정적으로 사진이 지닌 알레고리적 잠재력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알레고리적 미술로서의 사진은 안정되고 고정된 이미지 속에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C. Owens, 앞의 책, p. 56 참조. 알레고리적 충동을 사물의 일시성을 이해하고, 그것에 영원성을 부여해주려는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베야민이 주목한 바 있다.(W. Benjamin, The Origin of German Tragic Dram, trans. John Osborne(London: New Left Books, 1977, p. 233 참조)
세 번째 경향은 포토몽타주(photomontage)처럼 ‘하나 다음에 또 다른 하나’를 단순히 배치함으로써 병렬적인 작품을 구성하여 축적시키는 수학적 수열방식이다. 벤야민은 포토몽타주(photomontage) 역시 어떤 목표에 대한 엄격한 이념을 갖지 않고 사진 조각들을 끌어 모은다는 점에서 알레고리적 충동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W. Benjamin, 앞의 책, p. 178 참조)
이러한 포토몽타주를 작품에 적용한 예로서 오웬즈는 알레고리적 구조를 강박 신경증과 유사하게 만든 플래처(Angus Flecher), 강박관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르윗(Sol LeWitt), 다르보벤(Hanne Darboven)의 작품을 들고 있다. 구조를 연속체로서 투사하는 이러한 작품들은 수사학에서 알레고리가 전통적으로 계속되는 연속물 속에 도입된 단일한 은유로 정의되어 왔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은유적인 축을 환유적인 차원 속에 투사하는 것이다. 알레고리는 연속체로서의 구조를 공간적이거나 시간적 혹은 시공간적으로 구체화하는 일에 관계하지만, 그 결과는 역동적인 것이 아니라 정태적이고 제의적이며, 반복적인 것이다. 결국 알레고리는 서술적인 조합원리가 통사적인(syntagmatic) 접합 원리로 대체된 지점에 이야기를 한정시킴으로써 그에 역행하는 구조를 취한다. C. Owens, 앞의 책, p. 57 참조.
그러므로 알레고리는 은유와 환유를 모두 함축하는 것이며, 모든 양식적 범주화에 대해 그것을 초월하여 운문이니 산문에서와 같이 가장 객관적인 자연주의를 가장 주관적인 표현주의로, 또 가장 확고한 사실주의를 가장 초현실주의적이고 장식적인 바로크 양식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Joel Fineman, “The Structure of Allegorical Desire,” October, no. 12(Spring, 1980), p. 51.
또한 알레고리적 작품은 미학적 경계를 넘나드는 종합적 성격을 띠며, 이러한 장르간의 혼합은 뒤샹(M. Duchamp)에 의해 예견된 것으로 오늘날엔 이전까지 존재해온 별개의 미술 매체들을 거리낌 없이 결합시킨 절충적인 작품들, 즉 잡종교배의 작품들 속에서 재등장한다. 이러한 이미지 차용, 장소특수성, 일시성, 수사적 성격, 혼성교배와 같은 전략들은 모더니즘 미술 전략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포스트모던 미술의 중요한 특성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이처럼 은유와 알레고리로서의 재현은 구성적, 초월적 주체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예술작품을 구성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가능하게 한다. 자기동일적인 초월적 주체를 전제하는 대신, 작가와 함께 작품의 창조에 참여하는 관람자, 독자, 해석자에 의해서 역동적으로 침투되거나 또는 거부되기도 하는 주체의 위치들이 구성되는 것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생태학적인 관계망을 열어 보인다.
4. 은유적 재현의미의 딜레마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과제는 처음에 제기했던 것처럼 은유와 알레고적 특성을 지닌 포스트모던 미술을 재현이라는 고리타분한 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포괄할 수 있다면 그것을 대상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포스트모던 미술은 재현과 구성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해체(deconstruction)에 대한 관심의 반영이라 할 수 있으며, 오웬즈 역시 알레고리를 재현이 아니라 해체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해체의 충동은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특징이며, 모더니즘의 자기비판적 경향과 구분되어야 한다. 모더니즘 이론은 모방론, 즉 지시대상에 대한 이미지의 적용은 보류되거나 연기될 수 있으며, 예술의 대상 그 자체는 해당 지시대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보충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시대상을 보류하지도 않고 연기하지도 않지만 그 대신에 지시행위(activity of reference)를 문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율성, 자족성, 초월성을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자체의 우연성, 불충족성, 초월성의 결여를 말하기 위함이다. C. Owens, 앞의 책, p. 85.
예를 들어, 셔먼(C. Sherman)이 영화의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그녀 스스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무제의 영화 스틸 사진들(Untitled Film Stills)>(1977-80)은 미디어에 의해 투사된 여인들의 이미지들이 갖는 가장된 순진무구함을 어렵게 재구성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것의 해체를 성취하고 있다.
오웬즈에 따르면 그들의 알레고리적 방식을 설명해주는 것은 이러한 작품들의 공모관계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품에서 모방이 비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판은 모방적 전략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바로 비판되고 있는 그 행위에 참여해야 하는 불가피한 필요성에 다시 한번 직면한다. 같은 책, pp. 83-84 참조.
그런 점에서 재현이미지들은 실재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차이(difference)가 지속적으로 연기되는 차연(데리다)으로서의 의미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차연이 지속적인 작용을 하려면 물론 어떤 목적 내지는 지향점이 있어야하고, 그러할 때 차연작용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본질적인 실재는 우리가 포착 불가능한 그 무엇이라는데 딜레마가 있다. 그것이 오늘날 문화현상에서 이미지의 폭력과 허무주의로 흐르는 이유이다.
이러한 우려는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simulation) 이론에서 절정에 다다른 듯한데, 그는 역사적으로 이미지의 의미가 변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설명하면서 오늘날 포스트모던적 이미지의 특징은 실재와 전혀 무관한 관계라고 정의한다. 그가 말하는 이미지 의미기능의 네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이미지가 근본적 실재를 반영하는 단계. (2) 이미지가 근본적 실재를 은폐하고 왜곡하는 단계. (3) 이미지가 근본적 실재의 부재를 은폐하는 단계. (4) 이미지가 실재와 전혀 무관한 단계(J. Baudrillard, "The Precession of Simullacra," Art After Modernism: Rethinking Representation, New York: The New Museum of Contemporary Art, 1984, p. 256 참조.)
이 단계에서 이미지는 “더 이상 어떤 지시물이나 대체물을 갖지 않고, 원본이나 실재가 없는 모델들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를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라고 부른다. 같은 책, p. 253 참조.
이것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비실재지만, “실재 그 자체보다 더 실재 같은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시뮬라시옹으로서의 이미지의 작용은 과거 재현처럼 반사적이거나 추론적이지 않고 핵분열적이고 발생적이다. 이는 이미지에 남아있는 형이상학적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이미지의 부차적 기능을 선차적인 것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미지 개념이 드러난 작품을 현대미술로 간주하고, 그 시발을 팝아트로 본다. 그는 팝아트 이전의 미술이 무언가를 지시하고자 하는 심층적인 세계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팝아트야말로 ‘기호의 내재적 질서’에 완전히 동화되었다고 간주한다.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이상률 역, 문예출판사, 1991, pp. 164-166 참조.
따라서 그에 의하면 “오늘날 모든 현대적 이미지들은 실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미지들로서 이것들은 사라져버린 무언가의 흔적일 뿐이며, 더 이상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지도 않으며, 워홀의 캠벨 스프가 갖는 유일한 특권은 아름다움과 추함, 실재와 비실재, 초월성이나 내재성의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보드리야르, <예술의 음모>, 배영달 편저, 서울: 도서출판 백의, pp. 193-194.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예술의 속성을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형식의 문제라고 결론 내리고 현대미술은 “가치 혹은 이데올로기로서 평범한 것, 하찮은 것, 보잘것없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노력”이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기호와 같은 수준에 이를 때, 그것이 미술의 중요한 사건이다”라고 말한다. 같은 책, p. 11.
이러한 그의 이미지론의 맹점은 이미지의 지시기능을 단절시킴으로써 또 다른 관념론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미술을 형식의 문제, 즉 ‘기호의 내재적 질서’로 결론지은 것은 모더니즘의 ‘자기지시성’과 유사한 또 다른 차원에서 자족적 형식주의에 도달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노리스(C. Norris)는 이러한 이유에 대해 구조언어학의 공시성을 기술하기 위해 내놓았던 방법론을 보드리야르가 20세기 후반의 지배적인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확대 적용하여, 반리얼리즘적 입장으로 몰고가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Christopher Norris, What's Wrong with Postmodernism, New York: Harvester Wheatsheaf, 1990, p. 180 참조. 노리스는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 동굴밖에 어떤 삶도 없다고 생각하는 고착된 결정성, 즉 전도된 플라톤주의의 또 다른 양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드리야르는 자신이 비판한 형이상으로 되돌아가는 아이러니를 범하고 있다. 즉 그가 모더니티를 생산과 욕망의 거울시대라고 비판하고, 그 이분법을 넘어서는 영역으로 제시한 것이 상징계였으나, 이 상징계라는 또 하나의 기호영역을 안정책으로 내세운 것은 플라톤주의를 역으로 뒤집어 기호나 이미지를 보편현실로 내세우는 기호의 형이상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제임슨이 구조주의를 철학적 형식주의로 보는 것과 유사하다. 구조주의는 실체적 사유 개념을 부정하고 지시대상의 가로치기를 주장하는데, 이는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일 대 일 대응이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가 이처럼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하더라도,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미지가 대상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미지를 생산하는 작가는 이미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심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클라크가 말한 ‘사회적 제약’이나 단토가 말한 ‘미술계의 분위기’ 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워홀은 슈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캠벨 수프 깡통이나 대중스타인 마릴린 먼로 같은 소재를 차용한 작품은 단순한 기호의 내재적 질서가 아니라, 당시 미술계의 분위기, 즉 1950년대 미국미술을 지배했던 추상표현주의의 독창적이고 숭고한 아우라에 대한 일종의 저항인 것이 틀림없다. 또한 소비적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워홀의 작품은 당시 미국 사회의 일상이 갖는 비개성화된 익명성과 획일적 반복성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엄연히 미술계와 사회와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의미를 발현하는 것이고, 또 그러한 관계 속에서만 워홀의 작품은 역사적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5. 결론
지금까지 모더니즘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도 시각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재현의미기능을 긴밀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다음 세 단계의 개념 변천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1) 표층적 재현: 고전적 리얼리즘에서처럼 이미지가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주제를 지시한다는 관념으로, 이때 이미지의 의미는 구체적 대상에 종속되며, 대상과 일 대 일의 대응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표층적 재현은 주체의 의지보다 실재대상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에 의미의 지시작용은 구체적이고 일의적이다.
(2) 심층적 재현: 모더니즘에서처럼 이미지가 어떤 대상의 원리나 과정을 드러낸다는 관념으로, 이때 이미지의 의미는 절대적 원리로 환원되고, 대상과 일 대 다의 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심층적 재현은 대상의 외형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에 의미의 지시작용은 포괄적이고 총체적이다.
(3) 은유적 재현: 포스트모더니즘에서처럼 이미지가 알레고리 작용을 통해 삶과 사회의 제약이나 조건을 비판적으로 관계 짓는다는 관념으로, 이 때 이미지의 의미는 대상과 주체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으며, 쌍방향적 지시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은유적 재현은 주체와 대상, 해석자 사이의 관계작용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에 의미의 지시작용은 차연적이고 생태학적이다.
이상을 통해, 오늘날 간과되고 있는 이미지의 재현의미를 끝까지 고수하고자 한 것은 우리의 인식은 그것이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우리의 경험세계에서 비롯된다는 확신 때문이다. 또 실재는 이미지에 의해 포착할 수 없고 직접적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오늘날에 와서야 자명해진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실재에 대한 접근은 중요한 과제이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해체는 해체를 위한 해체가 아니라, 실재계에 도달하기 위한 해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방향감각이 상실된 포스트모던 시대에 다시 재현을 문제 삼음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결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지도 그릴 수 있는 외재적 세계에 살고 있으며, 실재에 대한 인식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 제임슨)를 통해 총체성(totality)에 대한 지속적인 사유를 열어 보이려 한 것이었다. 총체성은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려는 것으로, 이러한 재현되지 않는 것의 재현은 필연적으로 은유와 알레고리를 낳게 되며, 그러한 방식으로 세계를 그려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적인 모사와 같은 의미에서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역사적으로 조건 지워진 틀을 통해 코드전환(transcoding, 제임슨)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술의 재현은 세계를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진 틀을 통해 코드전환한 것이며, 그것은 삶과 사회, 그리고 미술사 등의 여러 복합적인 인과관계가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 알튀세르)으로 얽혀있는 통합적 재현이라 할 수 있다. 표층적 재현은 재현된 이미지를 대상에 종속된 것으로 봄으로써 미술을 자연과학적인 것으로 귀속시켰고, 심층적 재현이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숭고한 형이상학적 세계로 환원시켜 미술을 종교적인 것으로 귀속시켰다면, 오늘날 은유적 재현은 형이하학과 형이상학, 현실과 관념, 그 어느 축에도 일방적으로 환원되지 않고, 그 각 영역이 상호 침투하고 작용하는 ‘과정’ 그 자체에 주목함으로써 예술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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