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15. 17:51ㆍ미술/서양화
서양화가 중에 권총으로 자살한 사람은 두 명이다. 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반 고흐이고 다른 사람은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른스트 루트비히 케르히너이다.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8. 19 x 27 스위스 바젤 미술관
반 고흐가 그린 최고의 명화 <꽃병에 꽂힌 열네 송이 해바라기>는 압생트로 인한 黃視症에 걸리면서 얻어낸 작품이다. 그가 압생트를 과음했다는 사실은 그 무렵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위의 <자화상>은 압생트를 많이 마신 다음날 그린 것으로, 눈 주변의 부종과 눈의 충혈, 술의 부작용으로 변형된 얼굴, 굳어진 표정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녀, <주정꾼 자화상> 1915년. 89 x 119 뉘른베르크 게르만 국립박물관
타원형의 갈색 테이블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같이 불안한 모양으로 화면 상부를 차지하고, 테이블 위에는 아프리카 가면처럼 생긴 유리잔이 놓여 있다. 청색과 붉은 무늬로 된 가운을 입은 화가는 몸을 겨우 테이블에 기대고 있고, 그의 얼굴은 마치 반 고흐가 술에 취한 다음날에 그린 자화상을 닮았다. 눈 주위가 부어오르고 입 주위가 튀어 나왔으며 오른손으로는 술을 더 요구하는 듯이 손을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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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전정은 현대미술 이야기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현실을 더 나은 세상으로 연결해 주는 다리”
1905년 건축학도였던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5.6-1938.6.15)는 에리히 헤켈 (Erich Heckel), 카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등 과 함께 아방가르드 회화 모임을 조직하고 이름을 ‘다리파(독일어로는 브뤼케(Brücke), Bridge(다리)를 뜻한다)’라고 칭한다. 기존의 가치와 관습을 뒤흔든 독일 철학가 니체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이탈리아의 미래파 화가들처럼 사회의 전면적인 개조를 추구한 다리파 화가들은 미술을 내적 갈등의 시각적 표현으로 간주하였는데, 이들의 작품은 주로 왜곡된 형태와 색채의 부조화로 폭력적이고 강렬한 스타일이 주류를 이룬다.
키르히너의 작품 속 자연과 도시풍경
키르히너와 다리파 화가들은 1906년 드레스덴의 푸줏간 자리에 공동 작업실을 만들고 함께 작업을 시작한다. 이시기 키르히너가 선호한 장르는 누드화로, 당시 반문명 혹은 반근대화의 일환으로 유럽 일대를 휩쓴 네이처리즘(naturism)의 영향을 보여준다. 네이처리즘은 나체주의(nudism)로도 불리는데, 문자 그대로 문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 그들에게 벌거벗는 다는 것은 문명화, 산업화로 인해 잃어버린 인간의 순수함과 본성을 회복한다는 의미였다. 키르히너의 에로틱한 누드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문명과 대척점에 서서 이를 거부하는 일종의 저항자인 것이다. 키르히너는 스스로 이러한 저항자가 되어 드레스덴의 휴양림 속에서 자연과 함께 스스럼없이 지내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즐겼고, 이를 작품으로 남겼다.
키르히너, <모리츠부르크의 목욕하는 사람들>, 1909, 캔버스에 유채, 151*199cm
나무아래 누드들>, 1910, 캔버스에 유채, 77*89cm
1911년 키르히너를 포함한 다리파 화가들은 베를린으로 이주한다. 베를린이라는 대도시를 본거지로 삼은 이들은 도심의 거리 풍경과 행인들에 관심을 가졌다. 키르히너가 바라본 도시의 이미지는 내재된 증오와 냉소로 가득 찬 타락 그 자체였다. 드레스덴의 자연에서 건강한 생명력과 자유를 본 키르히너가 문명화된 대도시를 그와 반대되는 이미지로 받아들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원근법이 무시된 배경 속에서 거리를 활보하는 인간 군상들은 신경질적인 날카로운 선으로 그려져 있다. 어둡고 침울한 색채와 대비되는 요란한 차림의 부유한 여성 혹은 창부들은 마치 가면을 쓴 듯 한 얼굴을 하고 있다. 사람으로 꽉 채워진 압축된 화면을 지배하는 공격적인 뾰족뾰족한 형태의 마무리는 보는 이를 긴장시킨다. 화려한 도시 속에 감추어진 불안하고 뒤틀린 인간의 심리를 포착한 키르히너의 거리풍경 그림들은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그의 그림이 되었다.
또 다른 그림
75연대 견장이 달린 군복과 모자를 쓴 남자가 입에 담배를 문 채 손목이 잘린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눈동자가 없는 푸른색 눈은 불안하기 짝이 없고 군인 뒤로 보이는 나체의 여성은 갈 곳을 잃은 듯 헤매고 있다. <군인으로서의 자화상>은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키르히너가 전쟁으로 황폐해진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실제로 손목이 잘린 것은 아니지만, 전쟁의 충격으로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두려운 마음과 초점 없는 푸른색 눈으로 대변되는 내적 불안을 생생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일찍이 미국의 미술사학자 고든(D. Gordon)은 이 작품을 ‘가장 위대한 반전(反戰)화’로 평한 바 있다.
1차세계대전 당시 키르히너는 다른 예술가들처럼 전쟁이 부패한 정권과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이 만들어낸 부정한 사회를 청산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군에 입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전쟁의 엄청난 참극을 목격한 충격과 그로인해 얻은 신경쇠약증 뿐 이었다. 제대 후 우울증과 죽음의 악몽에 시달리던 키르히너는 스위스 다보스로 이주하여 살게 되는데, 전쟁의 상처를 극복해갈 무렵 나치로부터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히는 두 번째 고통을 받게 되고 다시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자 자신의 집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하여 삶을 마감한다. 기존의 모든 관습과 규범에 대항하는 ‘반항아’였던 키르히너는 타고난 예술적 감성과 예민함으로 내면의 심리를 솔직하고 대담하게 묘사한 작품을 남겨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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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 출처. http://blog.daum.net/winsys777/1675
Marzella, 1909 and 1910, oil on canvas, 76 x 60 cm
Vier Holzplastiken, 1912, Dallas Museum of Art
Landscape in Graubünden with Sun Rays
Archers, oil on canvas, 195 x 150 cm
Self-portrait as a Soldier, 1915, oil onanvas, 69.2 × 61 cm
Böhmischer Waldsee, 1911
Sitting Woman, 1907
Tavern, 1909, circa 1909, oil on canvas, 71.8 x 81.3 cm
Naked Playing People, 1910
Fränzi in front of Carved Chair, 1910, oil on canvas, 71 x 49.5 cm
Portrait of a Woman, 1911, oil on canvas, 80.6 x 70.5 cm
Nollendorfplatz, 1912, oil on canvas, 69 × 60 cm
Berlin Street Scene, 1913, oil on canvas, 121 x 95 cm
Street, Berlin (1913), one of a series on this theme, depicting prostitutes
Potsdamer Platz, 1914, oil on canvas, 200 x 150 cm
Brandenburger Tor, 1915, oil on canvas, 50 x 70 cm
Self-portrait as a Sick Person, 1918
Two Brothers, 1921
View of Basel and the Rhine, 1921, oil on canvas, 119.9 x 201 cm
The Visit–Couple and Newcomer, 1922
Snowy landscape, 1930
Violett House in Front of a Snowy Mountain, 1938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
독일의 표현주의 운동을 시작하고 본 궤도에 올리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키르히너는 1901년 드레스덴 공과대학에 입학해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 1903년부터 1904년까지 2년에 걸쳐 뮌헨에서 미술을 배웠다. 그는 1905년 대학을 마치고 독일 표현주의의 드레스덴 그룹인 다리(Brücke)파를 결성했다. 이 시기에 그는 베를린의 퇴폐적인 모습을 작품에 많이 담아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잡지 폭풍우(Der Strum) 및 청기사파에 참가했으며 강렬한 회화적 분출을 추구한 그는 왜곡된 형태와 색채의 부조화를 통해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과 창작에의 열망을 표현했다.
키르히너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대에 자원입대했으나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고 이듬해 신경쇠약으로 임시 제대했다. 1917년 전쟁을 피해 스위스 다보스 근처 프라우엔키르슈로 이주한 그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그의 그림도 한결 차분해지고 단순화되어 알프스 산의 풍경과 소박한 농부의 모습, 그리고 친구들의 초상화를 선보였다.
1933년 전쟁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날 무렵 당시 정권을 잡은 나치는 키르히너를 ‘퇴폐 미술가’로 규정했다. 1937년 나치 정권이 뮌헨에서 선전용으로 마련한 ‘퇴폐 미술전’에 키르히너가 포함되자, 키르히너의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나치는 그의 작품의 전시 및 거래를 금지하고 600점이 넘는 그의 작품들을 미술관에서 철거시켰으며, 이로 인해 많은 작품이 파괴되었다. 절망에 빠진 키르히너는 깊은 우울증으로 58세가 되던 1938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위 사진은 Photographic self-portrait, 1919)
주요작품으로 《마르첼라 Marzella》(1909~1910), 《거리의 다섯 여인들 Five Women on the Street》(1913), 《베를린의 거리 풍경 Berlin Street Scene》(1913), 《군인 차림의 자화상 Self-Portrait as a Soldier》(1915), 《할레의 붉은 탑 The Red Tower in Halle》(191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