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에서 해인사가 가까운 거리가 아니드만요.
한 시간은 족히 달려온 것 같습니다.
(실은 뒷자리서 내리 자느라..... ㅋㅎㅎㅎ)
꼭 40년만입니다. 대학 1학년 때 와보고는......
대원암(?)에서 일주일간 묵었었죠. 일타스님이 해인사 방장 하실 때였습니다.
대불연 수련회로 와서 고생 좀 하고 갔습니다.
강원(講院) 젊은 중들이랑 붙어서 배구시합도 지고, 축구시합도 지고. ㅎㅎㅎ
도토리묵 말린 걸 사온다는게 깜빡 잊었습니다.
싸리버섯도 나와 있더군요.
길가 땅속에서 송이버섯 나온 것도 보았습니다.
성보박물관입니다.
입장료를 따로 또 받습디다. ㅠㅠ
최치원『계원필경』원본이 여기에 있었답니까???
심우도(尋牛圖)
팔상도(八相圖)
팔만대장경 판본
이건 실제 활자본이 아니라,「법구경」을 옮겨 적은 예술작품입니다.
‘……법구경은 팔만대장경판의 원문 이미지를 사용하였고,
한글 텍스트는 법정스님이 번역한 것을 사용하였다. ……
이 작품을 통해서 인간존재의 진실에 대해서, 인간다운 삶에 대해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각성해 보고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었으면 한다.’
40년 전에 제가 여기 왔을 때, 해인사 본절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대웅전이랑 범종각이랑, 텅빈 넓은 마당 끝에 커다런 요사채가 하나 있었던 것 같고,
그것밖에 기억이 나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버스가 턱 밑에까지 올라왔던 것 같은데......
성보박물관 전시물이 ‘해인사’ 이름에 비해서 너무 빈약하네요.
앞으로 많이 더 채워야겠습니다.
해인사 계곡물이야 좋지요. 지리산 칠선계곡을 부러워 할 바가 아닙니다.
이건 당시에 없던 것들인데, 으리으리하게 만들어 세웠길래, 누군가?하고 보니…
…… ‘자운 대율사’라고 써있네요.
성철 스님 이름에 가려서 제가 몰랐던가 봅니다.
생몰연대가 1911년-1992년이니까. 성철스님(1912년-1993년)스님보다 꼭 1년 먼저 태어나서 1년 먼저 돌아가셨군요.
검색해보니 이분 부도탑이 정릉「경국사」란 절에도 또 있답니다.
자운당 성우 대율사 스님은 1911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에서 태어났으며1917년 진부면 서당에서 동몽선습,사서삼경 등 유서를 수학하였다.1926년 16세의 나이에 정초기도를 위해 절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오대산 상원사에 가서 혜운경윤스님으로부터 “백년삼만육천일(百年三萬六千日)이 불급승가반일한(不及僧家半日閒)이라”(세속의 100년 36,000일보다, 출가의 반나절이 더 낫다)는 순치황제 출가시를 듣고 발심하여 마침내 1927년 17세의 나이로 출가를 결심하고 해인사로 달려가 팔만대장경판전에서 일만배를 올리고 혜운스님을 은사로 남천한규화상을 계사로 대적광전에서 사미계를 수지하고 서원게를 읊었고, 같은 해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1929년 해인사 강원에서 사교과를 수료하고 범어사 선원에서 수선안거를 시작해 그 해 순천 선암사 선원에서 동안거를 하였다.
1932년 범어사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해인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표훈사에서 동안거를 하였으며 1933년에 울진 불영사에서 하안거 및 동안거를 하였다.1934년 24세에 범어사에서 경념율사로부터 비구계를 수지하고 율장연구 시작하여 5부대율을 날마다 서사 지송근행하였으며1935년 범어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3년 동안 울진 불영사에서 장좌불와로 결사하였으며 1937년 문경 김룡사와 양산 통도사 선원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1938년 울산 학성선원에서 하안거를 하였다.1938년 도봉산 망월사에서 용성 대선사로부터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거양(擧揚)한 다음 ‘청산상운보(靑山常運步)하고 백운영부동(白雲永不動)이로다 인답수저과(人踏水底過)한데 수불착의상(水不着衣裳)’이라는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용성종사(龍城宗師)는 이를 보고 그 경지를 인증하여 곧 입실건당을 허락하고 ‘정존백수자(庭前栢樹子)가 염연관수림(儼然冠山林)이로다 신대감청색(身帶紺靑色)하고 엽복수미산(葉覆須彌山)’이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의발(衣鉢)을 전해주었다.1939년 일제의 식민수탈로부터 조국해방과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불교의 빛나는 전통을 중흥시키려는 대원을 세우고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서 날마다 20시간씩 백일 용맹정근으로 문수기도를 봉행(奉行)하던 중, 99일째 되는 날에 황홀한 속에서 푸른 빛 사자를 타고 나타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심지계법문(心地戒法門)을 통달하였으니, 계율을 홍통(弘通하여 모든 인연을 구족하고 대법당을 건립하여 칠불법계(七佛法戒)를 선양하며 승강(僧綱)의 확립과 승풍을 진작하여 천하사원에 복기명위(福基命位)를 확립하고 계해(戒海)가 징청(澄淸)하여 속태가 없어지며 불일(佛日이 장명(長明)하고 법륜이 상전하기를 발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률로써 법륜상전(法輪常轉)의 서원을 세우시고 불조혜명의 기틀을 바로 잡았다.1940년 이후 10여 년간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였으니, 북(北)으로는 금강산 마하연과 남(南)으로는 학성선원,불영사,김용사,통도사,백양사 등 선원에서 정진하였다. 서울 대각사에 주석하면서 당시 희귀한 율장을 구할 수 없어 2년여에 걸쳐 삼복 염천에도 두터운 장삼을 입고 날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실려있는 오부율장(五部律藏)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筆寫)하여 율장(律藏)을 깊이 연구하였다.1948년 37세 때 처음으로 문경 봉암사에서 결사하면서 보살계 수계법회를 가졌다. 1949년 계율 홍포의 원력으로 비구계본(比丘戒本 1만부, 비구니계본(比丘尼戒本) 1만부, 사미율의(沙彌律儀) 5천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5천부, 범망경(梵網經) 1만부 등 많은 율전(律典)을 출간 분포하였으며, 1951년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재난에 처한 재가불자의 수행과 교화를 위해서 부산 감로사를 창건하여 국난퇴치와 자성성불의 지름길로써 통도사와 감로사에 천화계단 보살계 수계산림과 삼천불 삼천배 참회기도 법회 개설하였다.
1955년 교단정화이후 초대 해인사 주지에 추대되었으며 1956년 합천 해인사 금강계단 전계화상에 추대된 후 1981년 종단 단일계단이 형성될 때까지 약 30여년 동안 전국 각 사찰에서 시행한 계단에서 스님으로부터 수계한 비구가 1650명, 비구니가 1536명, 그리고 사미 사미니 보살계 식차마나 우바새 우바이 팔관재계 등을 받은 수계제자가 도합 십만여 명에 달한다.1956년 재단법인 해인학원 이사장에, 1957년 조계종 경상남도 종무원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7년에는 범어사 주지를 지내시고 1957년 이후로는 계정일치 수행을 제창하고 경전과 율전의 한글 번역에 매진하여 무량수경,아미타경,십육관경, 약사경,자비도량참법 등 21종에 이르는 한글본을 출간 유포하시었으며, 휴대하기 간편한 문고판의 출판에도 심혈을 기울여 불설불명경(佛說佛名經),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 원각경(圓覺經) 보안보살장(普眼菩薩章),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십육대아라한예찬(十六大阿羅漢禮讚), 삼시계념불사(三時繫念佛事), 정토예경(淨土禮敬), 정토법요(淨土法要) 등을 간행하여 언제 어디서든 독경하고 예참할 수 있도록 유통불사를 행하시었으며,『미타예찬彌陀禮讚』『정토의범淨土儀範』『제경정화諸經精華』등 9만여 부를 간행,유포했다.
스님은 감로사에 주석하면서 주야로 각각 삼시계염불사(三時繫念佛事)로 예참하며 육시염불(六時念佛)을 봉행하였다. 일일(一日) 30만독씩 아미타불종자진언을 염불하였고, 또한 오후 4시 아귀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헌식 외에는 하루 한 끼니만의 일중식(日中食)을 공양하면서도 삼천배의 정진을 늦추지 않으셨다.1960년 스리랑카에서 개최한 세계불교승가연합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1974년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한 세계평화촉진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1976년 조계종 원로에 추대되고, 이어 총무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77년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조계종 대종사법계를 품수하였다.1981년 종단 단일계단전계화상에 추대되고1987년 동국역경원장에 이어 재단법인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에 취임하였다.1992년 계유년 음력 1월 4일 해인사 홍제암에서 '진성원명본자공(眞性圓明本自空) 광조시방극청정(光照十方極淸淨) 래여청풍소일래(來與淸風逍遙來) 거수명월자재거(去隨明月自在去), 라는 임종게를 쓰신 다음 서쪽을 향하여 합장하고 단정히 앉아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명하면서 조용히 입적하시니 향기가 진동하고 묘음이 청아하였으며 염불소리와 함께 입으로부터 오색광명이 서쪽하늘을 가득 메웠다.
세수 82세, 법랍66년이었다. 7일째인 2월 13일 해인사 연화대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장으로 거행하였다. 다비후 은행크기의 사리 19과와 녹두크기의 사리 5천여 수가 출현하였으나 생전에 사리를 찾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큰 것만 수습하여 이를 해인사 감로사 경국사에 나누어 봉안하였다.큰스님의 행장에 더욱 빛나는 것은 1953년부터 원적하시던 1993년까지 근 40여 년간 종단(宗團)의 계단주(戒壇主),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으로서 10여만 명에 달하는 수계제자를 배출하였다. 스님께서 젊은 시절 오대산에서 계율(戒律)로써 법전상전(法輪常轉)의 서원(誓願)을 세우고 불조의 혜명을 잇겠노라고 하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염원(念願)을 일생동안 견지하시고 수많은 출가(出家와 재가불자(在家弟子)를 배출하여 승단(僧團)의 기강을 확립하였으며 계해(戒海)의 징청(澄淸)을 위해 항상 전심전력을 기우렸던 것이다. 한 중생을 제도하여 불법(佛法)에 귀의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천상에 그 복업(福業)이 무량하다 하였거늘 하물며 이와 같이 많은 대중들에게 계율을 전수하여 청정한 범행을 닦도록 지도하신 스님의 계덕(戒德)은 능히 하늘로도 덮지 못하고 땅도 다 싣지 못할 것이다.
자운 스님은 해인사에서 염불만일회를 결사하여 관음전에서 정토왕생업을 닦았고, "정토삼부경" "정토심요" 등 저서를 내어 정토수행을 널리 선양하였으며 서울 보국사에서 대동염불회를 결사하여 정토수행을 보급하였으며 스님께서는 평소 염불과 참회, 지계수행으로 스스로 상참괴승(常慙愧僧)이라 하며 일심으로 법답게 살았다.
자료/감로사: www.gamrosa.or.kr
제가 기억하는 부도탑은 당시에 이것 뿐이었습니다.
↓ 성철스님 부도탑입니다.
완전 성역으로 만들어놨군요.
제게 수계를 주시려 했던 그 일타스님 부도탑이로군요.
성철스님 부도보다는 이게 훨씬 현대적 감각 있고 세련되고 낫네요.
이러지 말라고 유언들을 했을 터인데, 거참.
당간지주라는 거지요?
당간지주(幢竿支柱) : 돌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철제·금동제·목제인 경우도 있다. 기본형식은 두 기둥을 60∼100㎝의 간격으로 양쪽에 세우고 그 안쪽 면에 상대하여 간(杆)을 설치하기 위한 간구(杆溝)나 간공(杆孔)을 마련하고, 아래에는 간대(竿臺)나 기단부를 시설하였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기단부의 구조가 거의 파손되고 교란되어 있는 상태이다.
당간지주를 간구 또는 간공의 위치 및 형태·외형·장식 등에 의하여 분류하여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간구·간공의 위치나 형태에 따라 구분하면 원형 또는 방형의 간공이 세 군데 관통되어 있는 것, 윗부분에만 간구가 있는 것, 윗부분에는 간구가 있고 그 아래로 2개의 관통된 간공이 있는 것, 윗부분에 간구가 있고 그 아래로 방형의 작은 간공이 1개 또는 2개 있는 것 등이 있다.
둘째, 외형에 따라 분류하면 一자형, 기둥의 바깥면 중간에 한 단의 굴곡을 주어 상·하부로 나눈 것, 기둥 바깥면의 두 곳에 굴곡을 주어 허리가 잘룩하게 보이도록 한 것, 그 밖의 특수한 형태 등으로 나누어진다.
셋째, 기둥에 새겨진 장식에 따라 구분하면 바깥면 모서리에 모죽임만 있는 것, 선문(線文) 또는 돌대(突帶:돋을띠무늬)로 장식한 것, 선문이나 돌대로 장식하고 그중 꼭대기의 사분원(四分圓)에 한 단의 굴곡을 둔 것, 그 밖의 특수한 모양을 가진 것 등이다. 이러한 당간지주의 형태는 시대가 흐름에도 큰 변화가 없고, 다만 각 면에 장식된 무늬와 기둥의 돌다듬기 수법만이 시대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정도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당간지주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것이며, 그 이전에 조성된 예는 남아 있지 않다. 통일신라시대의 예로는 부석사당간지주(浮石寺幢竿支柱, 보물 제255호)와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를 비롯하여, 기단부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는 금산사당간지주(金山寺幢竿支柱, 보물 제28호) 등으로, 각 부에서 세련되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827년(선덕왕 10)이라는 제작연대를 밝힌 명문이 새겨져 있는 중초사지당간지주(中初寺址幢竿支柱, 보물 제4호)는 다른 당간지주의 편년을 고찰할 수 있는 기준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와 같이 안쪽 면을 제외한 각 면에 종선문(縱線文)을 조식(彫飾)하고 주두(柱頭)도 원호(圓弧)를 이루었으며, 간대와 기단 등 각 부분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무늬가 형식화 또는 약화되어 정교하지 못하고 돌다듬기도 고르지 않아 둔중한 느낌을 준다. 대표적인 예로는 만복사지당간지주(萬福寺址幢竿支柱, 보물 제32호)·천흥사지당간지주(天興寺址幢竿支柱, 보물 제99호)·춘천근화동당간지주(春川槿花洞幢竿支柱, 보물 제76호)·홍천희망리당간지주(洪川希望里幢竿支柱, 보물 제80호)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처럼 거대한 규모의 당간이나 지주가 조성되지는 않았다. 법주사의 당간과 같은 경우도 원래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지주에 당간만을 근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는 대개 작고 낮으며 선문 등의 조식이 없는 지주에 목조의 당간을 세웠는데, 그나마 지금은 당시 중창한 여러 사찰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당을 세우기 위하여 사찰 앞에 설치되었던 건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당간지주는 선사시대의 ‘솟대’와도 일맥상통하며, 일본의 신궁(神宮)이나 신사(神社) 앞에 있는 ‘도리이(鳥居)’와도 특히 관련성이 많은 건조물이라 할 수 있다.
해강 김규진 글씨랍니다.
중국「소림사」들어가는 입구랑 아주 비슷하네요.
“워~~ 레벨이 다릅니다 그려~~~!!!”
다음엔 통도사를 가봐야겠습니다. 내가 송광사는 가봤었던가?
대웅전은 새로 지은 게 분명하고, 저 탑은 어디에 있던 걸까요?
탑이 아주 멋진데, 능히 국보급으로 보이는데, 보물이라고조차도 안 쓰여 있네요?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입니다.
이 주련은 남전(南泉) 스님의 글이고, 글씨는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 선생이 썼습니다.
해인사 수다라장(修多羅藏)에는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습니다.
수다라(修多羅)란 범어 sūtra를 음역한 말로 경(經)을 말합니다.
수다라장(修多羅藏)이란 부처님께서 말씀한 교법(敎法)을 총칭한 말로 여기가 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전각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경판을 모신 판전은 남과 북은 길게 동서로는 작은 판전이 있는데 이 수다라전은 그 남쪽 판전입니다.
수다라전 맞으편에는 법보전(法寶殿)이란 판전이 있습니다.
http://cafe.daum.net/www.fragrantbuddhism
소나무 참 예쁘지요? 나무 색깔도… 어쩜 꼭 요즘 화가가 그린 그림 같습니다.
기왓장 씌우겠다고 모금하고 있던데, 어딜 또 새로 씌우겠단 것인지......
이 전나무도 500년 됐다던가? 이렇게 생긴 전나무는 처음 봅니다.
최치원이 지팡이 거꾸로 꽂은 게 이렇게 컸다는.... ㅋㅋㅎㅎ
「대비로전」,
이 현판은 여엉 안 어울리누만요. 해인사 네임밸류가 있지, 어떻게 이런 글씨를......
대나무 통발입니다. 역시 스케일이 다르구만요.
에이 뭐, 오야 맘이지 뭐.
해인사에서 대전까지 두 시간 꼬박 걸립디다.
갈 때는 네비가 경부선으로 가라더니, 올 때는 익산으로 찍어줍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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