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작품 못 본 게 많네요

2015. 4. 22. 16:21미술/서양화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는 건물 가까이 붙어서 걸었다. 뭉크가 거리를 지나갈 때 사람들은 뒤돌아보며 그를 쳐다보곤 했다. 큰 키에 조각한 듯 고전적 기품이 느껴지는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꿈꾸는 듯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과 단호한 턱이 주는 상충된 이미지의 효과와 같은 기이한 느낌 때문이었을까.
   
   뭉크는 평생 그림 이외엔 어떤 즐길 만한 일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어떤 예술가보다 단조로운 삶을 살았다. 옷 입고, 밥 먹고, 산책하고, 면도하는 일과 같이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그에게 그림만이 세상에서 그가 알고 있는 가장 덜 단조로운 행위였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뭉크는 어디에서건 이방인으로 머물렀고, 어떤 타인과도 가깝게 지낼 수 없었으며, 어떤 여자와도 자기 삶을 공유할 능력이 없었다.
   
   그런 뭉크가 죽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자기 집 2층에는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는데, 사후 그 방이 개방되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유화 1008점, 드로잉 4443점, 실크스크린 1만5931점, 석판화 378점, 에칭화 188점, 목판화 148점, 석판화용 석판 143점, 동판 155점을 비롯해 수많은 사진과 일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뭉크는 평상시의 생각대로 이 모든 유산을 아무런 조건 없이 노르웨이 오슬로시에 양도했다.
 
1963년 오슬로시는 그 작품들을 소장하기 위해 뭉크미술관을 열었다. 유년기를 넘길 가망이라곤 전혀 없어보였던 한 남자에겐 놀라운 유산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뭉크가 자신의 작품이 팔리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뭉크는 그림들을 자신의 ‘아이들’이라고 불렀고 남들이 그의 손아귀에서 그림을 떼어놓으려고 하면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래서 한 점이 팔리면 똑같은 것을 그렸다.
 
대표작 ‘절규’가 네 점씩이나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판화 제작에 몰입한 것도 원본을 자기가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팔고 나면 뭉크는 그것을 지독하게 그리워했고 종종 다시 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림을 되찾아오는 일이 있더라도 소중하게 걸어놓지는 않았다. 단지 그림이 거기 있다는 안도감으로 족했고 그것이 다음 작품을 위한 동기 유발이 되어주었다.

 

 

 

 

 

 

 

 

 

 

 

 

 

 

 

 

 

 

 

 

 

 

 

 

 

 

 

 

 

 

 

 

 

 

 

 

 

 

 

 

 

 

 

 

 

 

 

 

 

 

 

 

 

 

 

 

 

 

 

 

 

 

 

 

 

 

 

 

 

 

 

 

 

 

 

 

 

 

 

 

 

 

 

 

 

 

 

 

 

 

 

 

 

 

 

 

 

 

 

 

 

 

 

 

 

 

 

 

 

 

 

 

 

 

 

 

 

 

 

 

 

 

 

 

 

 

 

 

 

 

 

 

 

 

 

 

 

 

 

 

 

 

 

 

 

 

 

 

 

 

 

 

내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병이요, 도취이다. 그 병은 벗어나고 싶지 않은 병이요,

그 도취는 내게 필요한 도취이다. <에드바르트 뭉크>

 

노르웨이 뢰텐에서 가난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는 어린 시절부터 병과 죽음의 분위기속에서 자라 평생 이러한 음울한 주제에 집착했다. 그리하여 병, 죽음, 애수, 질투 등의 주제 그림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그렸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네살 때는 한살 위 누나조차 갑자기 죽고 말았다. 이처럼 소년시절에 돌발적으로 겪은 가족사적 불행은 뭉크로 하여금 자신이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났다 믿게 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타고난 재능을 보인 뭉크는 의사나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염원에 따라 1879년 크리스티아냐(현 오슬로) 공과대학에 입학하지만 얼마 후 오슬로 미술공예학교로 전과했다. 여기에서 노르웨이 자연주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를 만나 사사받으며 프랑스 인상주의의 움직임을 접했다. 1885년 파리를 여행한 뒤 고갱과 로트렉같은 후기 인상파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고 '봄날의 칼 요한 거리'(1891)나, '저녁때의 칼 요한 거리'(1892)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뭉크는 이 시절 사회적 관습과 예술에 대해 보헤미안적 개방성을 가진 헨릭 입센, 크누트 함순, 스테판 말라르메 등 유명 문예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살아있는 인간성을 가진 인물의 창조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유년의 어두운 기억 때문에 자신이 요람에서부터 죽음을 알게 된 사람이라 자주 말한 뭉크는 흔히 '절망의 화가'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인간의 원초적 모습 구현을 통해 평생 동안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는 생명의 신비성을 추구했다. 

30대에 들어서는 문화 후진적인 19세기 말의 북유럽을 탈피하고자 베를린으로 건너가 독일 표현파와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1892년 독일 미술계로부터 초청받아 개최된 베를린 개인 전시회에서 대다수의 관객으로부터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는 야유를 받았지만, 소수이긴 해도 새로운 예술적 시도라는 호의적 반응도 끌어내었다. 이때부터 1908년까지 독일생활을 한 뭉크는 1920년대에 접어들어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나치스 시대에는 나치정권으로부터 초기 정치 선전적 목적에서 상당한 환영을 받았지만, 뭉크가 이 정부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자 퇴폐 작가로서 크게 폄하되는 수모도 겪었다. 화가로서 뭉크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 내면의 불안과 공포감을 구체성을 띤 상징 속에 표출하고자 했다. '절규', '생명의 춤', '흡혈귀', '죽음의 소녀' 등은 이런 회화적 개성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여러 상징주의파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산했다. 

그의 그림들은 마치 지옥의 유황불에서 방금 건져낸 것처럼 흐물흐물하고, 등장인물들은 금방이라도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화폭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빛바랜 붉은 색조들은 마치 오로라의 극광처럼 너울거리며 현실 공간조차 환상의 환영으로 만들어버리는 충격의 느낌을 만들어 내었다.  

뭉크에게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죽음의 사선을 넘나드는 일이었다. 우리는 뭉크를 통해 한 개인의 우울을 발견하지만 더 나아가 그가 살았던 세기 말의 시대적 우울감도 추출해 낼 수 있었다. 그 어떤 개인도 자신의 시대와 동떨어져 살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그의 그림 구석구석들에서 거장의 솜씨로 재현된 것이었다. 


 (출처.cafe.daum.net/kseriforum/HjpR/1298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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