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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미술 이야기 (책)

세상에! 이럴 수가! - 명화의 비밀

 

 

 

1999년 1월,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앵그르 전시회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매우 아름다운 초상 드로잉에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얼굴의 모습은 놀랄 정도로 '정확'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부자연스럽다 싶을 만큼

축적이 작았다. 게다가 앵그르의 드로인 작품에서 놀라운 점은 모델이 모두 낯선 사람들이고, 단 하루 만

에 완성될 정도로 대단히 빠르게 그려졌다는 데 있다. 나도 수년간 많은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에 앵그르

처럼 그리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있다. 나는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대체 어떻게 한 걸까?

 

 

 

 

 

 

 

 

 

 

르블랑 부인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보자.

제작된 시기는 1823년인데, 회화적 사진술이 발명되기 전 15년전이다. 

그런데도 직물 무늬가 얼마나 정밀하고 사실적인지 한번 보라. 

옷자락이 겹쳐진 부분, 그림자, 섬세한 무늬의 묘사에 전혀 '어색함'이 없고 모든 부분이 대단히 사실적이다. 

이것을 '손'으로 그리려면 고도의 관찰력과 솜씨가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앵그르처럼 많은 주문을 받았던 화가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울만큼 시간이 걸렸을 터이다.

더구나 당시에 그는 그림 사업에 몰두해 있었다.

앵그르는 사진술이 발명될 때까지 살았고,  만년에는 사진도 이용했다고 한다.

그는 틀림없이 카메라 오브스쿠라를 알았을테고, 그것을 이용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의자에 걸쳐진 르블랑 부인의 옷자락은 내가 보기에 광학장치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무늬가 자연스럽게 겹쳐진 부분은 점을 하나씩 찍어서 그려야만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광학뿐이다.

 

"나는 앵그르가 모종의 광학장치를 작품에 이용했다고 확신한다.

드로잉의 경우에는 <카메라 루시다>였겠지만,

회화의 섬세한 세부를 그릴 때는 <카메라 오브스쿠라>도 사용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만이 유일한 설명이다.

그러나 앵그르가 처음으로 광학을 이용한 화가는 아니다.

베르메르도 카메라 오브스쿠라를 사용했다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그가 또 처음이었을까? 아니면 그 이전에 광학을 이용한 화가들이 또 있었을까?

나는 많은 책과 목록을 뒤져 찾을 수 있는 증거를 모두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에는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내 호기심은 점점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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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지음
한길아트 | 2003.10.01
60,000 51,000

 

과거의 화가들은 어떻게 그토록 생생하고 정밀하게 묘사한 것일까?
우리 시대 최고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영국 팝아트의 기수이자 ‘수영장의 화가’로 알려진 데이비드 호크니는 최근에 특별한 결심을 했다.

과거의 거장들이 어떻게 주변의 세계를 그토록 정밀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를 알아내려 붓을 놓고 그림을 중단했다.
자신도 화가로서 늘 유사한 기술적 문제에 부딪혔던 그는 이렇게 자문해보았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
이후 2년에 걸쳐 그는 화가의 입장에서 미스터리를 추적하고 옛 거장들의 숨겨진 비밀을 밝히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의 연구가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놀라운 발견은 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했고, 여론의 주목을 끌었으며,

세계적으로 저명한 과학자, 예술사가, 미술관장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BBC 방송국에서는 호크니가 이룬 성과를 다큐멘터리물로 방영했으며,

뉴욕대학은 그의 발견을 주제로 이틀간 회의를 열기도 했다.
명화의 비밀은 과학적,시각적 증거가 하나씩 발견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조금씩 밝혀진다.


얼마나 생생하게 묘사하느냐, 얼마나 사진처럼 그려냈느냐는 추상미술이 과거의 고전미술을 밀어낸 지 한참 되었는데도

사람들의 미적 기준을 통제한다. 아직까지도 ‘영화의 한 장면’과 ‘그림 같다’는 우리의 통념적인 미적 기준이다.
과거 르네상스 미술은 여전히 현대의 화가들에게도 거장의 미술이며,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천재의 영역이자,

저명한 영국의 미술사학자 곰브리치조차 르네상스 시대에 왜 그렇게 많은 천재 화가들이 등장했는지

명쾌하게 밝혀내지 못해 꼬리를 내리게 만드는 철옹성의 예술 영역이다.

미술사학자들은 과거 거장들의 작품 앞에서 화가가 어떻게 탁월한 묘사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눈부시다, 

천재적이다 등의 추상적인 수사법으로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호크니 이후 더 이상의 변명은 구차해질 뿐이다.


허리가 긴 매끈한 오달리스크의 화가로 유명한 앵그르가 그린 미녀들의 투명한 피부 앞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한숨을 내쉬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저런 묘사가 가능하단 말인가?


''명화의 비밀을 푸는 두 개의 키워드'', 렌즈와 거울


과거의 거장들은 이미 우리에게 문헌이 아닌 그림으로 비밀의 열쇠를 남긴 바 있다.

얀 반 에이크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정중앙에 볼록거울을,

라파엘로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렌즈를 쥐어주었다.

얀 반 에이크의 볼록거울은 정말 부부의 결혼식 현장에 증인을 그려 넣기 위한 상징적 도구에 불과할까?

교황 레오 10세가 렌즈를 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사학자가 아닌 화가 호크니는 자신의 경험을 빌어 정말 화가가 거울을 사용했으니까,

렌즈를 사용했으니까 라는 결론을 내린다.


진실은 가까이 있었다.

과거 명화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암호는 두개의 단어면 충분하다. 렌즈와 거울.

이 단어를 입력하고 엔터키만 치면 모니터에 창이 뜨듯, 호크니의 방에 대장벽의 창이 여러 개 겹쳐 뜨듯, 진실의 창은 열린다.
이 두 개의 열쇠를 가지고 호크니는 수백 개의 그림을 증거로 제시한다.
비잔틴 시대의 그림부터 렌즈와 거울이 본격적으로 쓰인 르네상스 시기를 거쳐 19세기까지.

그 수많은 그림은 그의 연구실을 장식하고 결과물은 거대한 장벽을 이루어 하나의 작품으로 우리 앞에 섰다.


''호크니는 서양 미술사학계를 위험에 빠트렸다''


호크니의 연구결과가 발표되자, 미술사학계의 학자를 비롯한 관계자들 모두 그가 ‘예술적 천재성은 타고나는 것이다’라는

영원불멸의 명제를 공격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 동안 천재적인 화가의 손에서 작품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 광학적 기술에 의해 그토록 섬세한 묘사가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과학적 사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례로 호크니는 렌즈와 거울을 키워드로 그림과 화가들의 작업상태를 재해석해냄으로써

베르메르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베르메르는 일상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내는 일상의 천재 화가가 아니라,

사실 그저 노동자가 렌즈로 관찰하며 오랫동안 세워두기에 가장 만만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제 서양 미술사는 다시 씌어져야하는 것일까?
거장들은 그들의 천재성을 의심받아야하며, 그 자리를 광학 물체에게 내주어야하는 것일까? 


'' 미술을 과학적으로 기술한 최초의, 최고의 보고서''


이 책에는 데이비드 호크니가 붓을 놓고 연구에 몰두한 지난 2년간의 노고가 그대로 배어 있다.

수백 개에 이르는 시각적 증거물들, 그리로 그 증거물을 문헌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과거의 자료들,

미술사학자, 광학박사, 미술관장 등의 동료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이 책은 렌즈와 거울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던 과거의 거장들이 그 둘을 합쳐 화학적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진에게 자리를 내준 역사적 사실을 실증적으로 추적한 최초이자 최고의 보고서이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명화의 비밀은 한꺼풀씩 벗겨진다.
그리고 과거 거장들의 그림은 미술사가들이 입힌 상징의 아우라 속에서 박제가 되기 직전에 호크니에게 구원받았다.

거장들의 그림은 이제 진실의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한다.

 

 

 

 

 

 

 

 

 

 

 

           

 

 

 

 

 

 

 

 

 

 

 

 

 

 

 

 

 

 

 

 

 

 

 

 

 

 

 

이 드로잉에서 앵그르의 선은 더듬어 그렸다고는 볼 수 없을만큼 빨라 보인다. 형태 또한 아주 정밀하고 정교하

다. 내 생각에 그는 곧바로 카메라 루시다를 통해 부인을 바라보고 몇 가지 유의점을 종이에 적은 뒤 머리카락,

눈, 콧구멍, 입가의 위치를 정했을 것이다. 이 과정은 불과 몇 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관찰과

눈 굴리기로 얼굴 그림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한두 시간쯤 들였으리라.

옷은 나중에 점심을 먹고나서 그렸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루시다를 조금 이동해야 했을 터이다. 이동시켰다

면 확대비율이 약간 달라졌을 것이다. 머리 크기를 8% 가량 줄여보면 신체와 훨씬 잘 맞는 것으로 미루어 앵그

르는 분명히 그런 작업을 했을 것이다. (이 내용은 1829년에 그린 루이 프랑수아 고디노 부인 초상화에 대해서)

 

 

 

 

 

 

2.

 

 

 

 

카라바조의 《술마시는 바쿠스》(1595년) 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손으로 잔을 든다. 그래서 잔과 컵은

보통 식탁 오른편에 놓인다.      지오토를 비롯한 초기 화가들은 그들 눈에 비친대로 오른손으로 술을 마시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화가들이 렌즈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생각되는 16세기 말에 갑자기 왼손잡이 모델이

부쩍 많아졌다. 우연일까?   이 현상은 카라바조와 더불어 시작되어, 좋은 품질의 평면 거울로 상을 바로 잡을

때까지 약 40년 동안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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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후원자인 델 몬테 추기경으로부터 얻은 새 렌즈는  더 복잡하고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그림은 1598년에 그린《엠마오에서의 만찬》이다.  오른편의 베드로와 가운데 앉은 그

리스도의 팔에서 놀라운 원근법적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베드로의 오른손보다 그리

스도의 오른손이 더 작다. 의도적일 수도 있겠으나 렌즈와 캔버스를 이동시켰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무

늬가 있는 식탁보를 흰색으로 덮었다는 점도 눈여겨 보라.  아마도 초점을 다시 맞출 때 무늬를 맞추는 어려

움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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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필립4세》의 전신 초상화를 보자. 머리는 작은데 비해 키나 몸통이 지나치게 크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를 취하고 싶어하지 않는 왕족이나 귀족들을 그릴 때에는 몇 차례만 자세를 취하게 한 뒤 그것들

을 모아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카라바조가 자연주의의 수준을 높이고 강한 조명을 사용한 것은 얼마 안 가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특히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에 영향을 미쳤다.   한 가지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질문은 어떻게 그 많은 화가들이 그

기법을 금세 익힐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위에 두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3년 기간 동안에 놀라운 성장을

보여준 그런 예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광학이 명성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광학은 단지 이미지, 외양, 측정수단을 제공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의 구상은 여전히 화가의 몫이었으며,

그 기술적 문제를 극복하고 렌즈 이미지를 그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뛰어난 기량이 필요했다.

그러나 광학이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화가들이 그것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나면,

즉각 작품들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우선 다른 때 같으면 연관짓지 못했던 화가들 간의 놀라운 유사성이 보인다.

또 전통적으로 함께 분류되는 화가들 간의 큰 차이도 알게 된다.

또한 광학을 도입하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려운 왜곡과 불연속도 확인할 수 있다."

 

 

 


 

 

4.

 

 

 

카라바조보다 50년쯤 뒤에 활동한 베르메르는 광학도구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회화에도 이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미경과 렌즈를 만든 '반 레벤후크'는 그의 이웃이자 유언 집행인이었다.  베르메르는

렌즈의 광학적 효과를 알고는 크게 기뻐했으며, 그것을 캔버스에 재현하고자 했다.

그 중에는 연(軟)초점도 있고 초점과 전혀 무관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가정부를 그린 이 작품에서 전경의 바구니는 뒤쪽 벽에 걸린 바구니와 비교하여 초점이 맞지 않았

는데, 이는 베르메르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왜곡이다.  또한 바구니, 빵, 조끼, 주전자에서 보는 것처럼 밝으

면서도 초점이 없는 '후광'효과도 맨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베르메르가 광학효과를 이용

한 화가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출발점이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여인이 베르메르의 가장 만만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가정부는 귀부인들보다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그 이유는, 귀부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이런, 두통이 있어서 잠시 쉬어야겠어요"

라는 불평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 아닐까?

 

 

 

 

 

 

6.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작품으 반 아이크가 1434년에 그린 《아르놀피니의 결혼》이다. 여기에도 볼록거울이 있다. 나는 늘

샹들리에에 매료되었다. 이것은 밑그림이나 수정작업이 전혀 없이 그려졌는데, 이렇듯 복잡한 원근법적

형태를 그렇게 그린 것은 놀라운 솜씨다. 반 아이크는 구멍 옆에 화판을 거꾸로 걸어놓고 그렸을 것이다.

샹들리에가 올려다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보인다는 점을 눈여겨 보라.  이것은 거울-렌즈의 효과

인데, 이렇게 하려면 그리고자하는 대상과 수평으로 거울-렌즈를 맞추어야 한다. 

 

 

 

 

 

 

7.


홀바인 Portrait of the Merchant Georg Gisze 1532, Oil on wood, 96,3 x 85,7 cm Staatliche Museen, Berlin

 

 

 카펫을 자세히 보면 원근법이 잘못되어 있고, 모서리도 잘못 꺾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8.

 

 

 

 

 

내가 보기에 렘브란트도 분명히 광학을 알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논점은 간단하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정서적 힘으로 광학이 주는 자연주의적 이미지를 초월했다.  그의

이전과 이후의 어떤 화가도 그처럼 얼굴을 그리지는 못했다. X선사진으로 보면 렘브란트가 강렬한 명암

의 대조,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강한 빛을 얼마나 재빨리 포착했는지 알 수 있다.

 

 

 

 

 

 

광학 이미지의 한계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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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가 1596년에 그린 과일의 사실성과 1877년에 세잔이 그린 사과를 비교해 보라. 그림에서 멀어질수록

카라바조의 사과는 점점 알아보기 어려워진다. 반면에 묘하게 세잔의 사과는 점점 더 확고해지고 선명해진다.

카라바조의 이미지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세잔의 이미지는 감상자에게서 나오는 것,  즉 감상자의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다.

한 눈의 렌즈로 보는 시야와 두 눈을 가진 인간이 보는 시야의 차이다.

 

 

 

 


 

 

왼편의 소년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것이고, 오른편은 세잔이 그린 소년의 초상이다. 누가 더 선명한가?

아래 그림에서 처럼 거리를 떼고 보라. 다시 누가 더 선명한가?

 

 

 

 

 

 

그렇다, 세잔의 혁신은 그림의 대상이 자신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에 관해 스스로 품은 의혹을 그림 속에

집어넣었다는 데 있다.  그는 시점(視点)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물을

복수의 시점에서, 때로는 모순적인 위치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두 눈을 가진 인간의 시야다.

(두 눈, 두 시점, 따라서 의혹은 필연적이다.)

이와 달리 한 눈을 가진 렌즈의 전횡적인 시야는 궁극적으로 감상자를 수학적인 위치로 전락시키며 공간과

시간 속의 한 점에 고정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