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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der's gallery 2017/04/18 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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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따르는 여인 │ 요하네스 베르메르 │ 1657년경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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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향집 │ 오지호 │ 1935년 │ 국립현대미술관
천지간을 매운 봄볕은 화가의 정수리에 떨어져 어깨 위에 내리고 이젤을 타고 올라 캔버스를 넘어 화가의 네칸 모옥(茅屋) 부엌 문간으로 밀려 든다. 세상을 채우는 봄볕의 눈부심에 부엌 앞에 가없이 서 있는 고목의 그림자마저도 제 빛깔을 잃고 눈 부시다. 저를 닮은 황토를 요로 깔고 세상 미물에게조차 차별 없이 비추는 봄볕을 이불로 덮었으니 삽살개도 봄에 취해 늘어져 간혹 한 쪽 귀만 쫑긋 세울 뿐이다. 봄의 기척은 삽살개에게 들리나 보다. 이 찬란한 봄의 고요를 깨는 것은 햇살 아래로 조심스레 부엌 문간을 열고 걸어 나오는 화가의 어린 둘째 딸 금희의 붉은 옷이고 그 옷을 입힌 어린 딸을 바라보는 아비의 마음이며 또 아비인 화가의 눈길이다. 척박했던 그 시대 이 땅에도 이토록 화사한 봄 볕이 쏟아져 내린 줄 화가의 그림이 아니었던들 어찌 알 수 있을까? 한 폭 그림으로 봄은 내게 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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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작품의 고향-한국미술 작가가 사랑한 장소와 시대
임종업 지음/소동·2만2000원
가난한 농부이자 염부인 아버지는 소금을 팔아 그를 인천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러나 농촌이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외면하기에는 그의 가슴이 너무 뜨거웠다. 결국 1980년 초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 고향으로 내려왔다.
“나는 농부인 나의 아버지와 이웃의 농부를 통하여, 무너져가는 농촌사회와 그들 삶의 가치를 빼앗는 권력과 폭력을 고발하고 싶었다. 그 현장이자 무대가 바로 나의 고향인 오지리였다.”(<땅의 정신, 땅의 얼굴>)
화가 이종구는 고향에서 캔버스나 고급종이 대신 헌 쌀부대에 고지식한 농부 모습의 아버지, 이웃 어르신들, 그리고 농투성이 친구들을 그렸다. 아버지의 얼굴, 핏줄 선 팔뚝, 투박한 손에 농촌의 현실이 그대로 담겼다고 믿었다. 작품 속의 아버지는 벼를 촘촘히 심은 논 위에, 튼실하게 자란 배추밭 위에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그때 ‘쌀부대 작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나에게 그림 그리기는 노동이다. 농부의 아들은 미술을 해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고 전혁림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알아주지 못하는 화단의 세태에 실망해 1977년 예순세 살에 고향 통영으로 돌아왔다. 그는 오랜 지기 김춘수 시인의 표현처럼 “치아를 상하고 위벽을 헐어가며 만든 색채” 코발트 블루 물감으로 한려수도의 풍광과 사람들의 삶을 담아냈다. 그 무렵 ‘한국의 피카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5년 11월 그의 신작전 <구십, 아직은 젊다>가 열린 경기도 용인의 이영미술관에 노무현 대통령이 갑자기 방문했다. 노 대통령은 코발트 블루 색채가 강렬한 <한려수도의 추상적 풍경> 앞에 멈춰 섰다. “젊을 때 괴로운 일이 있으면 통영 달아공원을 찾았다.” 그날 청와대로부터 전시장에 걸린 <통영항>을 구입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구십의 노화가는 넉 달 동안 “펄펄 날면서” 대통령이 좋아했던 미륵산을 한가운데 배치한 또 다른 <통영항>을 그렸다. 그림은 이듬해 3월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 걸렸으나, 2009년 노대통령이, 또 한해 뒤 화가가 세상을 떠나자 떼어 옮겼다.
<작품의 고향>은 한국 화단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 13인의 창작공간을 돌아본 미술 안내서다. ‘고향’을 화두로 내걸었지만 겸재 정선(인왕산), 허씨 삼대(진도), 전혁림(통영), 강요배(제주도), 이종구(오지리)처럼 ‘생래적인 고향’뿐만 아니라, 박대성(경주), 황재형(태백)과 같이 주파수가 통하여 눌러앉은 ‘제2의 고향’, 그리고 서용선(영월), 김기찬(서울 골목길), 송창(임진강), 오윤(지리산) 등과 같이 오랜 시간을 두고 작업한 곳을 두루 살폈다. 강원도 태백부터 제주도까지 발품을 팔며 작가를 만나고 작품을 들여다봤다.
지은이는 <한국의 책쟁이들> <미술마을 인문여행>을 쓴 임종업 <한겨레> 선임기자. 작품의 ‘고향’이란, 작가가 치열한 삶에서 ‘펄펄 끓는 시대정신’을 길어낸 곳임을 일러준다. 예컨대 한국 민중미술 1세대 화가 강요배에게 고향 제주는 ‘4·3 항쟁’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80년대부터 현실 참여 미술그룹 ‘현실과 발언’ 동인 활동 틈틈이 ‘4·3 항쟁’ 탐구에 매달려온 그는 마침내 1992년 <동백꽃 지다-제주민중항쟁사 화집>으로 작업을 총정리했다. 그리고 마흔 살에 제주로 낙향했다. 그는 “유년기 내 몸과 마음의 세포에 각인된 그 매운 바람의 맛이 강한 인력이 되어 기어이 나를 끌어들였다”고 말한다. 그는 한라산 자락의 한림읍 귀덕1리에 살림집과 작업실을 마련하고 아직 풍화되지 않는 분노와 열정을 제주의 자연 그림에 쏟아내고 있다.
‘광부 화가’ 황재형은 “삶의 풍경을 잘 드러내는 현장”을 체험하려고 고향인 전남 보성 대신 탄광촌 태백으로 달려갔다. 1980년 4월 정선 사북에서 탄광 근로자들의 총파업이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된 지 두 해가 지난 가을이었다. 그는 위장취업을 숨기려고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낀 채 3년간 채탄인부로 ‘막장 인생’을 살았다. “과연 노동이 삶에서 어떻게 가져지고 있는지(‘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작가의 독특한 표현), 가장 첨예한 곳에 인간 삶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고 싶었다.” 실명의 위기를 넘긴 그는 34년째 ‘제2의 고향’에서 광부들의 애환과 탄광촌의 자연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박대성은 신라 수천 년의 역사를 좇아 경주 남산 자락에 정주한 뒤 석굴암과 불국사, 남산 등 천년 왕국의 정화를 먹으로 되살리고 있다. 그에게 경주는 “인도, 로마 문명이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을 건너와 완성된 곳”이다. 또 서용선은 1986년 영월을 다녀오고부터 단종의 애사에 꽂혔다. 삼촌인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왕위에서 축출되어 영월 청령포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은 단종 이야기는 그를 ‘역사 풍경화’ 작업에 매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5년 타계한 사진작가 김기찬은 아무도 관심 두지 않던 서울 중구 중림동, 만리동, 의주로 등 골목길 풍경을 30년 동안 기록했다. 송창은 고구려와 신라가 물길을 두고 다퉜던 임진강이 디엠지로 말미암아 ‘금단의 영역’이 되어버린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캔버스에 옮긴다.
결국, 지은이는 “장소는 역사”라고 말한다. 맛깔스런 글솜씨를 좇다 보면 장소가 지닌 인문학적 의미와 확장성을 재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정상영 선임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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