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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미술 이야기 (책)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요약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요약|◈─…… 그림공부방

정인성 | 조회 94 |추천 0 |2008.03.13. 08:49 http://cafe.daum.net/jisart/FCUK/188 

[각 시대에서 나오는 주제에 대해서 정리]


-주제가 갖고있는 시대적 의미-


1. 신비에 싸인 기원(선사 및 원시 부족들:고대 아메리카)


BC10,000~ BC15,000년전 원시인들에 의한 미술작품은 엄격히 말해서 美를 추구하고 감상을 위해 제작되었다기보다는 생존적인 의미가 깊다. 즉 그림과 조각은 주술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라스코동굴벽화에 그려진 동물의 경우 크기도 다양하고 겹쳐 그렸으며 방향성이 있게 단순한 선과 적은 색으로도 생생하게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보존상태가 양호한 까닭은 동굴입구가 적어서 온도와 습도차가 적었기 때문이다. 알타미라동굴벽화의 경우 벽면의 입체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림으로써 더욱 생동감이 느껴지며 죽은 소를 표현함으로써 소의 영혼을 죽여서 사냥에 성공할 것이라는 주술적 의미를 갖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된 12㎝정도 크기의 부적처럼 들고 다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너스상을 살펴보면 원시시대에 필요한 여성의 美(생산과 종족번식)를 표현했을 것이다.


2. 영원을 위한 미술(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이집트는 아프리카 문명권에 속하는데 나일강에 의해 외세로부터 침략을 받지 않아 지리적으로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이집트 미술의 특징은 기하학적인 규칙성과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감상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영원히 살아 있도록’하기 위한 목적과 기능이 뚜렷한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는 넓은 사막과 수시로 범람하는 강, 넓은 평야에 잦은 외세의 침입으로 인해 예측 불허한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아 일관성 있는 미술이 발달할 수 없었기에 이집트에 비해 문화적으로는 앞섰지만 질적으로는 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이집트의 내세관에 비해 메소포타미아는 현세적인 미술을 다루었다. 그러한 모습들은 수메르 지역에서 아카드를 거쳐 앗시리아로 중심지가 옮겨가는 동안 왕의 전승과 용맹성 및 절대성을 기리는 비석 등에 잘 나타나있다.

그 밖의 크라데스, 데라, 크레타섬, 미케네 등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는 미술품들에서는 당대의 사람들이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장식적인 목적으로 표현한 것들과 이집트와의 교류를 짐작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보여지고 있다.


3. 위대한 각성(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그리스)


그리스를 처음 지배했던 초기 몇 백 년 동안 그들이 만들어 낸 미술품은 매우 조잡하고 원시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다양한 도기는 단순한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어떤 정경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엄격한 디자인의 일부를 형성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 중에서 아테네는 미술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조각에 있어 인체를 표현하는데 있어 옛날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방법’을 알고자 했다. 즉 신에게 완벽한 모습을 바치기 위해 무표정하거나 고졸한 미소를 띠고, 젊은이가 컨트라 포스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자연스러운 근육을 나타내기 위해 옷주름을 이용하여 이상적인 인물상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또한 화가들도 도자기에 그려 넣는 그림에 있어 같은 방법을 따랐다. 무엇보다도 위대한 발견, 즉 원근법에 의한 단축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시대에 인류사상 처음으로 과학과 철학에 대해 눈을 뜬 때이며, 연극이 발전된 때이기도 하다. 그리스 미술이 그 뒤 여러 세기에 걸쳐서 그처럼 찬양을 받은 것은 규칙의 준수와 규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조각가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에서는 실제적이지는 않으나 사실적 모습을 표현했으며 순간성 보다는 질서와 명확함을 찾아 표현함으로써 고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4. 아름다움의 세계(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그리스와 그리스의 세계)


자유를 향한 미술의 위대한 각성으로 불리우는 고전시대는 대체로 기원전 520년경부터 기원전 420년경 사이의 백 년 동안에 일어났다. 이 시대의 건축물은 과거 도리아식의 기본적인 양식을 갖고 있으나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 세부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한없이 우아하고 아늑한 인상을 주는 이오니아 양식이 도입된다. 이같은 특징은 조각과 회화에서도 나타나는데 무표정하게 감정을 절제하고 이상적인 표현으로 완벽을 추구했으며, 더욱 부드러워진 자태와 피부에서 오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풍부한 옷주름으로 표현되어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강력한 제국의 건설은 그리스 미술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인데, 이 시대의 미술을 헬레니즘문화라고 일컫기도 한다. 건축양식에는 화려함이 더해지는 코린트 양식이 도입되며 조각에서는 거칠고 격렬한 작품을 선호했으며, 그 대표적인 작품의 ‘라오콘’은 보다 연극적이어서 사람들에게 강렬하고 깊은 인상을 준다.



5. 세계의 정복자들(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로마, 불교, 유태교 및 기독교 미술)


로마시대가 되면서부터는 신보다 인간위주의 인간의 삶에 중심을 둔 실용적인 작품이 많아졌다. 신전이 시내 한복판에 건축된 것만 보아도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로마인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토목 공학이다. 그들이 만든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들자면 콜로세움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원형경기장일 것이다. 1층은 도리아식 변형이고, 2층은 이오니아식, 3층과 4층은 코린트 양식의 반원주이다.

로마 건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아치의 사용인데 다리나 수로에도 아치를 사용했으며, 판테온이라 불리우는 신전이 가장 경이롭다.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따다가 그것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응용하는 것이 로마인들의 특징이었다. 로마인들은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들로 공상적인 것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시대의 미술은 벽화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데 원근법을 몰랐으나 나름대로 표현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6. 기로에 선 미술(5세기에서 13세기까지:로마와 비잔티움)


미술사에 있어서 중세기가 암흑기로 표현되기도 하고, 이 시기의 미술은 종교의 시녀라고도 표현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교회를 국가의 지주로 삼게 되자 매장문화가 정착되어 무덤에 성경내용을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성경의 내용에 치중하느라 공간과 구성에 있어 미를 무시한 비논리적인 표현이 보여진다.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하묘소인 카타콤의 천장과 벽에 그려진 그림에는 현세의 관심보다 구세주와 함께 하는 내세에 있었으며, 인간적인 美보다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구원을 표현하는데 더 큰 의미를 두었다.

모든 조각상이 우상으로 여겨져 금기 시 된 반면, 문맹자들의 교화를 위해 회화를 허용한 사실은 미술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시기의 기독교 미술은 원시적인 방법과 세련된 방법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었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7. 혼돈기의 서양미술(6세기부터 11세기까지:유럽)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에는 어떤 분명하고 통일적인 양식이 생겨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많은 서로 다른 양식들이 갈등을 일으켜 혼돈된 상태와 여러 민족과 계급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며 이 시기가 끝날 무렵에야 그러한 갈등이 겨우 마무리지어졌다.


8. 전투적인 교회(12세기)


중세미술의 중심역할을 한 것은 성당이었다. 중앙집중형태인 박스모양이 주를 이루었으며 초기에는 육중한 수직수평으로 안정감을 나타낸 로마네스크 양식이, 점차 스테인드글래스의 화려함을 추구하고 안정감이 사라진 고딕양식이 주를 이루게 된다.


9. 교회의 승리(13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인 샤르트르 성당의 외부에 장식된 조각물을 살펴보면 인체의 볼륨이 거의 없고 길쭉하여 마치 기둥의 일부처럼 보인다.

고딕양식의 아름다움을 대표할만한 건물로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을 꼽을 수가 있다. 또한 고딕양식의 랭스 대성당에 장식된 조각물은 과거에 비해 보다 인체의 볼륨을 살려 사람같이 표현했으며, 콘트라포스토 자세가 보여 르네상스 양식의 잉태를 알리고 있다.

회화에 있어서는 조토이후의 화가들에게서 과거의 그림과는 달리 인간중심으로 변화된 르네상스적 요소가 발견된다.


10. 귀족과 시민(14세기)


고딕 말기에 와서 과거의 종교적인 주제를 벗어난 작품이 보여지는데 랭부르 형제가 그린 ‘지극히 호화로운 기도서’라는 작품에 실제 모습을 보고 그대로 표현한 일상적인 내용의 그림이 보여지며, 로렌제티 형제는 공간과 주변 현실에 매료되어 공회당의 벽에 시에나 시 전체의 경관을 전개하기도 했다.


11. 현실성의 정복(15세기 초)


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한다. 초기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시대 미술계의 삼두마차는 미술에서 자연주의를 다시 도입한 화가 마사초와 조각가 도나텔로, 그리고 우아한 선을 통해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준 화가 보티첼리가 있었으며, 건축에 있어서는 부르네르스키를 꼽을 수 있다. 피렌체의 거장들 중에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인 로렌초 기베르티는 나름대로 힘차고 실감나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리스, 로마의 미술과 문학이 재음미되었고 인체와 생태계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가 이루어졌으며, 자연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팽배하였다. 해부학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도움으로 화가들은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종교내용을 주제로 한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러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예술가의지위도 상승하여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거장이 탄생하기도 했다.


12. 전통과 혁신(15세기 후반:이탈리아)


16세기에는 미술의 주도권이 피렌체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갔으며 거기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거장들이 회화와 조각에서 유래 없는 걸작들을 생산했고, 그들의 작품은 엄격한 구도와 완벽한 비례, 원근법 등 르네상스의 기법을 총망라하여 회화 발전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 시기를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라 부른다.

한편 신대륙의 발견이나 과학적인 탐구로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진 반면, 종교 개혁으로 인해 교회는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신이나 절대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식게 되고 인간에 대한 탐구가 활발해 졌다. 얀 반 아이크의 사실적인 초상화와 뒤러의 목판화와 동판화에서 보이는 강렬한 정서, 엘 그레코의 일그러진 육체와 초현실적인 명암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인간 삶의 여러 단면들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13. 전통과 혁신(15세기:북유럽)


피렌체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서도 예술의 새로운 진보가 시작되었는데 북유럽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적인 르네상스의 부활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나름대로 고딕 양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예술의 개혁을 이루어 냈다. 북유럽인들을 자연에 눈을 돌렸다. 그들에게는 이상적인 비례를 가르쳐 줄 고전 조각품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적인 기법으로 세부 묘사에 치중하며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

이와 같이 공들인 묘사법은 초상화에서 특히 두드러졌는데, 프랑스의 왕 샤를6세는 신부감을 물색할 때 화가를 보내어 초상화를 그려 오게 한 뒤 그림만 보고 결정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정밀 묘사는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들이 터득한 유화 기법에 의해 가능했다. 유화는 템페라보다 마르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색채를 혼합할 수가 있었으며, 따라서 명암을 미묘한 변화를 통해 입체적으로 보이는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들은 또한 ‘대기 원근법’을 통해 공간감과 거리감을 전달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는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장면을 다룬 데 비해 북유럽 르네상스에서는 종교적이고 가정적이고, 귀족적인 모습의 배경을 사용하였으며, 실제 풍경의 배경을 넣고 개인적인 느낌이 나타난 장면을 많이 그렸다.


14. 미술의 위기(16세기 후반:유럽)


스페인에서 가장 활약이 두드러진 화가는 엘 그레코였는데 그는 긴 손과 날씬한 몸매의 그림을 즐겨 그렸다.

후기 르네상스에 들어서면서 매너리즘이 생겨나는데 기존의 조화와 이성, 현실성을 대신해서 부조화와 감성,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려는 욕망에 자연의 관찰에 기초한 사실주의 양식을 저버렸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과장하여 지나치게 귀족적인 우아함을 추구한 결과 균형적인 안정감 대신 불안정함을 드러내고 있다. 구성도 사선을 위주로 하여 가운데가 텅 빈 채 사람들이 그림의 구성으로 몰려있다. 이것은 공통된 믿음을 잃어버린 채 혼란에 빠진 당시 현실이 회화 속에서 불균형과 산만함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15. 발전하는 시각의 세계(17세기 전반기:카톨릭 교회권의 유럽)


르네상스의 뒤를 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라고 부른다. 바로크라는 용어가 허세부리고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부정적 의미로 종종 사용되지만 미술의 영역을 일상 생활로까지 확장시킨 시기이다.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역동적이고 순간성과 감정의 실감나는 표현으로 공간을 확장하여 관람자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극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사선구도와 어두운 배경을 사용하고, 주요인물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어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한다. 작품의 소재에 있어서도 종교화, 제단화,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 궁종초상화, 귀족초상화 등 바로크 시대는 드라마나 연극같이 극적이고 풍요로운 시기였다. 이 시대의 거장으로는 베르니니, 카라바조, 벨라스케스, 루벤스, 렘브란트, 베르미오, 루이스델, 쁘생, 등 여러 지역에서 활동한 작가들이 있었다.



16. 권력과 영광의 예술(17세기 말과 18세기 초: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루이 14세의 사후 귀족들의 해방이 시작된 18세기 초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한 감각적인 그림의 로코코 미술이 등장하게 된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들뜬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행을 말한다.

쾌락을 추구하던 미술후원자들의 취향을 잘 반영하는 축제와 유흥을 낭만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화려한 그림이 그려졌다. 로코코 미술은 프랑스 사회와 미술의 취향을 엄숙하고 진지한 것에서 유쾌하고 심미적이지만 공허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바토가 유명하다.


17. 이성의 시대(18세기:영국과 프랑스)


한편 영국의 제도와 영국인의 취향은 이성의 법칙을 갈망했던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찬미하는 모델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미술이 신처럼 군림한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시기의 화가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장 밥티스트, 시에몽, 샤르댕 이다.


18. 끝없는 변혁(19세기)


서구의 역사에서 19세기는 격변의 시대로 기록된다. 교회는 그 세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군주제도가 무너져 갔으며 새로운 민주주의는 성장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전통이 그 권위를 잃었고 미래는 불확실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미술계 상황도 다양한 요소들이 과도하게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 양식이 몇 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시대는 가고, 한 사조와 그것에 맞대응하는 사조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그것은 곧 어떤 ‘주의(~ism)’로 불리우며 각각의 미술 사조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세기를 휩쓸었던 ‘주의’들을 종합해 보면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라는 세 개의 주요 사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고전주의 미술의 특징은 검소한 색채와 엄숙하고 진지한 느낌을 표현했으며 그리스 로마 역사와 신화를 그려 도덕성을 고양하고 영감을 주고자 했다. 견고한 붓터치로 고요하고 이성적인 분위기를 주려고 노력하였다. 대표작가로는 다비드, 앵그르 등이 있다.

낭만주의 미술의 특징은 직관, 감성, 상상력에 가치를 두고 전설적이고 이국적인 것 자연, 폭력적인 것을 주제로 영웅적인 투쟁에 대한 그림, 풍경화, 야생 동물화를 재빠른 회필과 강한 명암의 대조로 사선을 주로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대표작가로는 제리코, 들라크루아, 터너 등이 있다.

사실주의 미술의 특징은 시각적으로 인지된 것들만 수정하지 않고 정확하게 모방하기를 고집했다. 주제 역시 종래와는 완전히 달라져서 화가들은 개개인이 체험할 수 있는 그 당시에 일어난 일만을 그리리는 것으로 국한 시켰다. 즉 자신들이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것만을 진실한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농부나 도시의 노동자 계층을 다루게 되었으며 색채에서부터 주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엄숙하고 절제된 것이었다. 대표작가로는 쿠르베, 밀레, 도미에, 마네, TJ 클락 등이 있다.



19.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Ⅰ (19세기 후반)


세기말에 이르면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아르누보, 상징주의와 같이 어떤 유파가 휩쓸었다가 금방 다른 유파로 대체되곤 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인상주의는 르네상스의 산물인 원근법, 균형잡힌 구도, 이상화된 인물, 명암 대조법 등을 거부함으로써 미술 전통에 혁신을 가져옴으로써 르네상스 이후 최초의 총체적인 미술혁신으로 기록된다. 인상주의자들은 색채와 빛을 통하여 찰나의 시각적 감각을 표현하려 했다. 빛의 순간적인 성질을 표현하고자 인상주의자들은 짧은 붓터치와 물결이는 듯한 화필을 구사하였다. 빛에 의한 순간성을 포착하기 위해 주로 야외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으므로 산업화된 당대의 모습과 함께 풍경화와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대표작가로는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이 있다.


20.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Ⅱ (19세기 후반)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은 인상주의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 데에 매달려 때로는 무계획하고 무분별하게 보이는 인상파의 작품을 보다 본질적이고 견고하게 만들고 싶어했다.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쇠라는 점묘법을 세잔은 색면을 개발하게 되었다. 대표작가로는 쇠라, 로트렉, 세잔, 고갱, 반 고흐 등이 있다.


[19세기 미술사] -좀 더 자세히-


서구의 역사에서 19세기는 격변의 시대로 기록된다. 교회는 그 세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군주제도가 무너져 갔으며 새로운 민주주의는 성장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전통이 그 권위를 잃었고 미래는 불확실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미술계 상황도 다양한 요소들이 과도하게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 양식이 몇 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시대는 가고, 한 사조와 그것에 맞대응하는 사조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그것은 곧 어떤 ‘주의(~ism)’로 불리우며 각각의 미술 사조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세기를 휩쓸었던 ‘주의’들을 종합해 보면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라는 세 게의 주요 사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고전주의 미술의 특징은 검소한 색채와 엄숙하고 진지한 느낌을 표현했으며 그리스 로마 역사와 신화를 그려 도덕성을 고양하고 영감을 주고자 했다. 견고한 붓터치로 고요하고 이성적인 분위기를 주려고 노력하였다. 대표작가로는 다비드, 앵그르 등이 있다. 다비드의 작품 ‘포리우스의 맹세’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은 역사화에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조각적으로 표현했다. 앵그르의 작품 ‘오달리스크’와 ‘터키탕’에서 보면 상상의 근동여성들을 선의 흐름과 피부의 질감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낭만주의 미술의 특징은 직관, 감성, 상상력에 가치를 두고 전설적이고 이국적인 것 자연, 폭력적인 것을 주제로 영웅적인 투쟁에 대한 그림, 풍경화, 야생 동물화를 재빠른 회필과 강한 명암의 대조로 사선을 주로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대표작가로는 제리코, 드라크루아, 터너 등이 있다. 제리코의 작품 ‘메두사의 뗏목’에서는 당대의 충격적인 사건을 그림으로 나타냈다. 드라크루아는 ‘키오스 섬의 학살’, ‘바리케이트를 넘어서는 자유’ 등의 작품에 전쟁의 잔혹함과 혁명적인 내용을 담아 내었다. 터너는 색채이론에 능했으며 ‘불타는 국회의사당’, ‘눈보라’와 같은 작품을 통해 대자연에 인간의 불가항력적인 모습을 추상화에 가깝게 표현하였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리얼리즘이 성행하는데 사실주의 미술의 특징은 시각적으로 인지된 것들만 수정하지 않고 정확하게 모방하기를 고집했다. 주제 역시 종래와는 완전히 달라져서 화가들은 개개인이 체험할 수 있는 그 당시에 일어난 일만을 그리는 것으로 국한 시켰다. 즉 자신들이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것만을 진실한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농부나 도시의 노동자 계층을 다루게 되었으며 색채에서부터 주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엄숙하고 절제된 것이었다. 대표작가로는 쿠르베, 밀레, 도미에, 마네, TJ 클락 등이 있다.
쿠르베의 ‘나에게 천사를 그리게 하려면 천사를 보여다오.’라는 말은 사실주의의 특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의 작품 ‘돌 깨는 사람들’이나 ‘오르낭의 장례’에서 보여주듯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며 주인공이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한편 ‘안녕하십니까? 쿠르베씨’라는 작품에서는 당시 화가의 의상이라든지 후원자 앞에서 당당한 화가의 위치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밀레는 주로 프랑스의 시골풍경을 즐겨 그렸는데 이러한 유파를 ‘바르비종파’로 일컫는다. 그의 작품 ‘씨 뿌리는 사람’에서는 이상화된 농부의 모습을 그려 농부의 다양한 모습을 존엄하고 강인하게 묘사하고 있다.
도미에는 ‘삼등열차’와 같은 작품에서 도시 소시민들의 모습을 그렸다.
마네는 ‘풀밭 위의 식사’와 ‘올랭피아’라는 작품으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림을 평면적인 요소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조형성을 표현하였다.
TJ클락은 새로운 시각을 갖고 새롭게 변화된 사회상과 계급의 혼란을 모호한 형태의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19세기말에 이르면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아르누보, 상징주의와 같이 어떤 유파가 휩쓸었다가 금방 다른 유파로 대체되곤 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인상주의는 르네상스의 산물인 원근법, 균형잡힌 구도, 이상화된 인물, 명암 대조법 등을 거부함으로써 미술 전통에 혁신을 가져옴으로써 르네상스 이후 최초의 총체적인 미술혁신으로 기록된다. 인상주의자들은 색채와 빛을 통하여 찰나의 시각적 감각을 표현하려 했다. 빛의 순간적인 성질을 표현하고자 인상주의자들은 짧은 붓터치와 물결이는 듯한 화필을 구사하였다. 빛에 의한 순간성을 포착하기 위해 주로 야외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으므로 산업화된 당대의 모습과 함께 풍경화와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대표작가로는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이 있다.
모네는 물을 소재로 즐겨 사용하였으며 순간의 빛을 포착하여 간단한 붓질로 인상만을 표현했다. ‘루앙대성당 시리즈’에서는 빛과 날씨에 따른 형태와 색채의 변화를 담은 연작물로 유명하다.
르누아르를 관능과 기쁨의 화가로 일컫는 이유는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며 예쁜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작품의 주제를 아름다운 여인과 귀여운 아이들, 화창한 야외풍경이 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관능적이고 풍만한 여인의 누드를 즐겨 그렸다.
드가는 그림의 구성 등 치밀한 구도로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한 화가였다. 마치 스냅사진과 같은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표현하였다.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은 인상주의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 데에 매달려 때로는 무계획하고 무분별하게 보이는 인상파의 작품을 보다 본질적이고 견고하게 만들고 싶어했다.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쇠라는 점묘법을 세잔은 색면을 개발하게 되었다. 대표작가로는 쇠라, 로트렉, 세잔, 고갱, 반 고흐 등이 있다.
쇠라는 보색을 병치함으로써 채도를 높이는 점묘법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특정한 선과 색채의 결합을 통해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잔은 자연의 기하학적 구조를 통찰하고자 했다. 특정한 사물의 외형을 단순화시켜 본질에 가까운 거의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입체주의의 근원 되기도 했다.
고갱의 작품 ‘이아 오라나 마리아’에서는 평면적인 면과 추상화된 인물, 강하고 밝은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타히티 원주민 그림을 통해 ‘근원’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림에 나타난 못생긴 원주민들은 벌거벗고 있기에 감추고 미화한 것 없이 어떤 것보다 순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 고흐는 예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불운한 천재의 원형이었다. 그는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노란색을 주로 사용하여 곡선의 화필을 통해 굽이치는 운동감을 표현하였다.

아르누보’는 ‘신미술’이라는 뜻으로 자연주의적이고 유기적인 형체를 구사했던 장식미술로서 회화만이 아니라 건축과 디자인도 포함된다. 유럽의 전통적 예술에 반발하여 예술을 수립하려는 당시의 미술계 풍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초기 표현주의 작가로는 뭉크가 있는데 그의 ‘절규’라는 작품에서 보여주듯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성으로 왜곡된 형태와 색채를 통해 현대인의 고뇌를 표현해냄으로써 표현주의의 창시자가 되었다.

상징주의는 초현실주의의 전초병이었는데 문학과 미술 분야를 동시에 장식한 예술사조였다. 피상적인 외관뿐인 가시적인 세계를 버리고 환상 속에서 내면의 세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표작가로는 루소, 르동, 라이더 등이 있다.
루소의 작품 <원숭이가 있는 열대 숲>에서 보여주듯이 평면적인 인물과 크기, 비례, 원근법이 모두 어긋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어색한 그의 정글그림들은 환상적이고 아동화 같이 소박한 풍경화에서 신비롭고 이세상 것이 아닌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있다.
르동은 환상적인 꽃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루소처럼 훗날 초현실주의에 영감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