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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미술 이야기 (책)

『화가의 마지막 그림』

 

 

 

화가의 마지막 그림 

이유리 지음 ㅣ 2016.06.10

 

 

 

화가 19인의 마지막 그림이 알려주는 삶의 매서운 진실!

그림을 다리 삼아 이 세상을 통과해온 미술 저술가 이유리가 들려주는 19인의 예술가가 남긴 마지막 명작 이야기 『화가의 마지막 그림』. 저자가 유독 '화가의 마지막 그림'에 마음을 빼았긴 것은 화가가 죽음에 임박한 순간, 그들이 무얼 목격하고 예감하였으며 어떤 메시지를 최후로 남기고 싶었는지 궁금해서다. 이 책은 이러한 궁금증을 시작으로 명작의 작품들을 선별하여 묶었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에는 생에 대한 에너지와 열망, 그리고 끝내 놓을 수 없었던 희망과 염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먼저, 한 번 잡은 작품은 끝을 내고야 마는 고흐는 이례적으로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그림《나무 뿌리》를 통해 타살되었다는 가능성을 전한다. 다음으로,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중섭 화가는 마지막 작품《돌아오지 않는 강》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국적을 뛰어 넘어 열병 같은 사랑에 빠진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처럼 화가들은 마지막 그림을 통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화가들이 남긴 마지막 그림을 통해 사랑해야 하는 이유, 용서해야 하는 이유, 체념해야하는 이유를 깨닫는다.

 

 

 

이유리 
어릴 적부터 미술 교과서나 신문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들을 오려내어 스크랩하던 소녀였다. 영어 공부를 하러 간 영국에서, 영어 공부 대신 런던에 있는 갤러리란 갤러리는 모조리 훑고 다녔고 결국 영어 대신 머릿속에 방대한 미술지식을 안고서 돌아왔다.서강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인일보 사회부를 거쳐 현재 미술 분야를 중심으로 한, 글쟁이의 삶을 살게 되었다. 괴테는 이야기했다. “세상을 피하는 데 예술보다 확실한 길은 없다. 또 세상과 관련을 맺는 데도 예술처럼 적당한 길은 없다”고. 괴테의 말에 동감하며 ‘예술작품’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책으로 《검은 미술관》,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국가의 거짓말》이 있다.

 

 

 

 

여는 글

_ 생의 위대한 비밀을 품은 열아홉 화가의 마지막 명작

 

백조는 평생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단 한 번 아름답고 구슬픈 울음을 뱉는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백조의 노래'는 보통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슈벨트가 죽은 뒤 마지막 가곡집의 제목이 '백조의 노래'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립고 그리워서, 그리다 _ 이중섭 

1955, 돌아오지 않는 강

 

「하루는 시내에서 돌아와 방문을 여니 중섭이 신문광고를 잘라 벽에 붙여놓고는 나보고 보라는 듯이 씩 웃었다. 순간 술냄새가 풍겼다. 벽에 붙인 것은 그 당시 상영중인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는 영화의 제목이었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굵은 선으로 테두리를 그려놓았는데 바로 그 밑에다 아내(남덕)에게서 온 편지를 잔뜩 붙여놓았다.」- 한묵, '내가 아는 이중섭',《계간 미술》1986년 가을

 

아내와의 편지 연락에 연연하던 그가 이 무렵부터는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개봉도 하지 않은 편지를 영화광고 아래에 잔뜩 붙이고 있는 그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돌아오지 않는, 아니 돌아오지 못하는 아내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었을까. 언젠가 만날 것이라는 희망마져 놓쳐버린 그의 앞에 무엇이 더 남았겠는가. 그는 돌아오지 않는 강 건너로 스스로 떠날 준비를 한다.

1956년 7월 말, 폭음으로 인한 극심한 간염으로 서대문 적십자 병원 내과에 입원한 그는, 그 후로 한 달가량 지난 9월 6일에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무연고자로 신고된 그는, 3일 후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찾아온 친구들이 그의 몸을 거두어줄 때까지 시체실에 방치되어 있었다. 끝까지 외로운 삶이었다.

그는 결국 죽어서 소원을 이루었다. 이중섭의 친구들이 그를 화장한 후에 남은 뼈의 일부를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고, 일부는 일본에 있는 그의 아내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남덕은 남편의 뼛가루를 집 뜰에 고이 모셨다고 한다. 이중섭은 뼛가루로나마 그리운 아내와 아이들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서로의 전부를 쥐어준 사랑 _ 잔 에뷔테른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결국 1920년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의 삶과 작품이 인정을 받게 됩니다. 비록 생전에는 끼니를 위해 레스토랑에 수많은 그림을 줄만큼 가난과 궁핍 속에서 살다갔지만, 그가 죽은 후 미술계와 대중은 그를 높은 평판의 반열에 올려 놓았습니다. 작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소파에 앉아 있는 누드 또는 아름다운 로맨드>라는 작품은 2010년 11월 2일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6900만 불에 낙찰되는 기록을 낳습니다. 사후 모델리아니가 더 신화화된 데에는 잔느와의 러브스토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펌1)

 

만약 애초부터 잔 에뷔테른이 모딜리아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너무 일찍 생을 마감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다 드러내 보이지 못했지만 잔 역시 드로잉과 미술적 감각이 남다른 예술가였다. 1911년 콩쿠르상 후보에도 오른 소설 <기아와 비탄의 날들>에도 당시 13살이었던 그녀의 그림이 삽화로 쓰일 정도였다고 하니 말이다. 또한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던 그녀는 자신의 옷과 장신구를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어 입을 정도로 뛰어난 감각과 예술적 열정을 지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1917년 그녀 나이 19세, 당시 14살 연상이었던 33살의 가난한 화가 모딜리아니를 만나게 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들의 만남으로 모딜리아니를 얻었던 대신, 촉망받았던 또 한 명의 예술가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잔 에뷔테른은 원래 거친 붓 터치와 강한 색을 사용해 풍경화나 정물화 작업을 주로 했지만, 모딜리아니를 만나면서 인물화 위주의 작업으로 전환했다. 한편 모딜리아니 역시 잔을 모델로 어느 해보다 왕성하고 수준 높은 작품을 생산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순탄치 만은 않았다. 바로 죽을 때까지 그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가난과 모딜리아니의 병 때문이었다.
( ............ )
이번만은 병마가 자신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모딜리아니는 죽기 직전에 자화상을 그린다. 뛰어난 초상화가였음에도 정작 스스로의 얼굴은 그리지 않았던 그가 마지막 작품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두꺼운 갈색 코트와 회색 목도리로 몸을 꽁꽁 싸맸지만, 오른손에는 자신이 화가라는 것을 증명해 내는 듯이 팔레트를 들었다. 한창 결핵 때문에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던 시기여서일까. 자화상 속 모딜리아니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짙다. 뜨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감고 있지도 않은 두 눈.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외로운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그 모든 걸 관조하고 있는 듯한 표정. 그렇게 그는 이 자화상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듯하다. (펌2)

 

 


죽음이 삶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날 _ 에곤 실레 


환희처럼 슬픔처럼, 이별 _ 에드워드 호퍼 

 

previous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_ 나혜석 

 


그는 자살하지 않았다 _ 빈센트 반 고흐   

 

 

1890, Oil on canvas, 103*50.5cm,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끝끝내 생명을 얘기하려 한 사람 _ 프리다 칼로 


이 주검의 행렬을 멈춰라 _ 케테 콜비츠   


내 그림만은 죽이지 말아주게 _ 펠릭스 누스바움 


피지 못한 원초의 세계 _ 폴 고갱   


불행한 날들에 찾아온 뜻밖의 소녀 _ 로렌스 스티븐 라우리  


비극에 무감한 사람들을 깨우다 _ 마크 로스코 


백인에게 ‘발견’되고, 백인에게 ‘소진’된 _ 장 미셸 바스키아


혼돈이라니, 빌어먹을! _ 잭슨 폴록

 


경멸과 동정이 뒤섞인 자화상 _ 카라바조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10년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돌아온 탕자의 고해성사 _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 렘브란트 oil on canvas (262 × 206 cm) ? 1668-69 Hermitage, St. Petersburg

 

 


혼돈의 시대에 당겨진 비극의 활시위 _ 보티첼리


돌고 돌아 신 앞에 선 르네상스의 천재 _ 미켈란젤로 

 

 

 

 

참고문헌

 

 

 

 

 

 

죽음이 임박한 순간, 그들은 무얼 예감했고 무얼 그렸나?

19인의 예술가가 남긴 마지막 명작 이야기

 

가톨릭 성직자들 묘지 입구에는 라틴어 “Hodie Mihi, Cras Tibi(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해석하자면 오늘은 내가, 내일은 당신이라는 뜻이다. 수수께끼처럼 들리겠지만, 이 말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격언이다. 오늘은 내게 죽음이 드리워져 이렇게 누워 있지만 내일은 바로 당신의 차례라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여기 기억하고싶은 죽음들, 하지만 죽음조차 그 예술혼을 사그라뜨릴 수 없어 시공간을 초월해 기억되는화가들이 있다.

그림을 다리 삼아 세상을 통과해온 미술 저술가, 이유리는 예술가들이 남긴 빼어난 예술작품, 그중에서도 유독 화가의 마지막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 생의 끝, 가장 아름답고 치열한 시간에 화가의 손끝에서 피어난 그림 한 점엔 쉬이 껴안지 못할 삶의 진실이 녹아 있으리란 생각에서다. 실제로 화가의 마지막 그림 안에는 죽음이 임박한 순간, 그들이 무얼 예감했고 무얼 목격했으며 무슨 메시지를 최후로 남기고 싶었는지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속설에 따르면, 백조는 평생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단 한 번 아름답고 구슬픈 울음을 뱉는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백조의 노래는 보통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백조들이 토해낸 마지막 울음 같은 작품들을 정성스럽게 선별하고 묶은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예술가들이 남긴 마지막 명작집이라고 할 만하다.

 

 

반 고흐는 자살하지 않았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들

 

화가가 생을 마감하기 전 최후로 남긴 작품이라 하면 으레 비장감과 비극성 혹은 무력감과 덧없음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다. 실제로 책에서 다룬 19인의 예술가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비극 속에서 화가들이 길어올린 작품에는 생에 대한 에너지와 열망, 끝끝내 놓을 수 없었던 희망과 염원의 메시지가 가득했다. 또한 일반에 널리 알려진 내용과 전혀 다른 놀라운 반전도 있었다.

 

반 고흐의 진짜 유작 <나무뿌리>가 말해주는, 반 고흐 죽음의 진실

많은 이들이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이라 믿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반 고흐의 진짜 유작이 아니다. 그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완성한 뒤에도 그림을 더 그렸다. 죽음 직전에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나무뿌리>가 바로 그것. 반 고흐의 동생 테오의 큰처남이 남긴 편지에는 반 고흐가 마지막까지 그리고 있던 그림에 대해 죽기 전 그는 나무 덤불을 그렸다. 햇빛과 생명으로 가득한이라고 언급돼 있다. 실제로 이 그림은 채색이 덜 되어 스케치가 그대로 보이는데, 한번 잡은 작품은 끝을 내고야 마는 반 고흐에겐 이례적인 일이다. 채 완성하지 못한 이 그림은, 반 고흐의 죽음이 알려진 대로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는 데 무게를 싣는다. 반 고흐에게 총상을 입힌 용의자인 10대 소년 세크레탕과 반 고흐의 악연. 자살로 오해받은 총상 사건의 전말이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의 두 연구사,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교수, 하버드대학 교수, 미국 내 총상 분야 최고전문가의 생생한 증언과 논쟁으로 펼쳐진다.

 

 

이중섭, 잔 에뷔테른, 에곤 실레운명의 거친 옹이에 사랑을 맡기다

운명의 거친 옹이는 수줍던 연인들을 비극으로 물들여 애달픈 유작을 남기기도 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화가 이중섭, 그는 일제강점기에 야마모토 마사코와 국적을 뛰어넘는 열병 같은 사랑에 빠졌다. 가난 때문에 헤어진 연인을 그리며, 중섭은 그 유명한 중섭의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허나 척박한 현실은 재회의 희망마저 꺾었고, 그렇게 살아갈 이유를 잃은 이중섭은 연작 <돌아오지 않는 강>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그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사랑하는 모딜리아니가 결핵으로 끝내 숨지자 9개월 된 뱃속 아이와 함께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 잔 에뷔테른, 아내와 아이를 스페인독감으로 잃은 후 장례식 화환이 채 시들기도 전에 그들 뒤를 따라야 했던 에곤 실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이 비극 속에서 보여준 능동적인 사랑의 방식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사뭇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바스키아, 마크 로스코마지막 그림이 예언의 메시지가 된 화가들

거리의 낙서화가로 출발해 부와 명성을 쌓고 검은 피카소라 불리었던 바스키아는 의미심장하게 <죽음과의 합승>이란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린 후 자신의 주택에서 환풍기 앞에 기댄 채 숨졌다. 사인은 약물남용으로 인한 질식사. 그의 나이 불과 28세였다. 아프리카에서 새 삶을 살겠단 포부를 다진 바스키아였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유작에는 자신과 똑 닮은 인물이 해골에 올라타 죽음의 고삐를 당기고 있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섬뜩한 예언의 메시지로도 읽히는 이 그림에는 서구사회에서 백인에게 발견되고, 백인에게 소진된 바스키아의 피로했던 삶이 아프게 묻어난다. 바스키아 사망 후 그가 남긴 그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제도권 시장에서 인기몰이를 했다. 이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손목을 긋고 자살한 마크 로스코도 마찬가지다. 마크 로스코 역시 작업실을 물들인 붉은 피를 연상시키는 새빨간 채색화를 유작으로 남겼다. 그림으로 죽음을 예언한 이들의 삶은 참혹했지만, 화가의 삶이 참혹할수록 사후에 성공을 거둘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미술계의 얄궂은 속설을 이들은 자신의 생과 작품으로 증명하고 말았다.

 

카라바조, 렘브란트화려한 성공, 뜻밖의 최후

창녀를 성모마리아의 모델로, 거지와 평범한 속인을 성인의 모델로 그린 파격의 화가, 하지만 일상적 오브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아는 천재적 재능으로 로마 최고의 화가라 칭송받은 카라바조. 안타깝게도 그는 화실 밖에서는 광기에 휩싸인 폭군이었고, 끝내 살인을 저질러 사형선고를 받은 채 추방되었다. 그의 마지막 그림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에는 자신을 향한 동정과 경멸, 그 복잡한 심사가 담겨 있다. 단시간에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올라 남부러울 것 없었던 렘브란트 역시 카라바조의 전철을 밟았다. 그가 죽기 전 남긴 마지막 작품 <돌아온 탕자>에는 시작과 끝이 달랐던 그의 지난한 운명이 그대로 응축되어 있다. 허영과 낭비벽, 방탕한 스캔들로 인해 빚만 잔뜩 진 채 파산한 렘브란트는 결국 이름 하나 새긴 비석조차 갖지 못했다. 뜻밖에도 그가 죽기 전 남긴 마지막 그림 속에는 마치 예수처럼 인자하게 아들을 감싸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림 속 탕자가 렘브란트 자신이라면, 그는 무엇을 용서받고 싶었던 걸까. 삶의 불가해를 착잡함으로 맞바꾸는 이 그림들은 우리에게 또 한번 산다는 것을 고민하게 한다.

 

이외에도 시시각각 죄어오는 나치의 수색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는 증거의 표시로 붓을 놓지 않은 유대인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 생때같은 아들과 손자를 연달아 전쟁터에서 잃은 후 전쟁 반대메시지를 새긴 작품을 줄기차게 생산한 케테 콜비츠, 세상이 반대한 사랑을 했다는 아픔을 기어이 숭고한 작품으로 승화시킨 미켈란젤로 등 다채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이 아이러니!

그림이 일러준 삶의 매서운 진실

 

어쩌면 19인의 예술가들은 하나뿐인 마지막 유작을 남기기 위해 전 생애를 거치며 치열한 준비를 한 셈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묘비명과도 같았던 예술가들의 마지막 작품을 살피는 것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죽음을 비껴갈 수 없는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 화가의 마지막 그림만큼 잘 알려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화가들이 남긴 마지막 그림을 통해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이유, 체념해야 하는 이유, 기꺼이 용서해야 하는 이유, 비록 어긋났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삶을 되돌려야 하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이 이유들이 모일 때, 때로는 결별하고 싶은 이 고단한 생을, 화가 프리다 칼로가 그랬던 것처럼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용기를 손에 쥘 것이다. 매일매일이 막연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만 잘 죽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 아니 삶의 매서운 진실이 화가의 마지막 그림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는 게 쉽지 않을 때 잠시 멈춰 서서 이 책을 펼쳐봐도 좋다. 우리보다 앞서 치열하게 살다 간 화가들의 진심이, 인생의 의미를 풍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그림이 말을 걸어올 테니 말이다.

 

 

 

[본문 속으로]

 

바로 이 시기에 그는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을 그렸다. 그림 속 여인은 바로 집 앞에 당도했고, 여인을 기다리는 듯한 남자는 이제 곧 그녀와 만날 참이다. 하지만 그림 제목이 <돌아오지 않는 강>이다. 이중섭은 마릴린 먼로가 주연한 영화의 제목 <돌아오지 않는 강>을 어쩌면 자신과 아내를 가로막은 운명처럼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아내와의 편지 연락에 무척 연연하던 그가 이 무렵부터는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개봉도 하지 않은 편지를 영화광고 아래에 잔뜩 붙이고 있는 그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돌아오지 않는’, 아니 돌아오지 못하는아내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었을까. 언젠가 만날 것이라는 희망마저 놓쳐버린 그의 앞에 무엇이 더 남았겠는가. 그는 돌아오지 않는 강 건너로 스스로 떠날 준비를 한다.

_24p-25p, ‘이중섭: 그립고 그리워서, 그리다중에서

 

테오의 큰처남 안드리스 봉허의 편지도 새로 발견되었는데, 편지에서 봉허는 반 고흐가 마지막까지 그리고 있던 그림에 대해 죽기 전 아침에 그는 나무 덤불을 그렸다. 햇빛과 생명으로 가득한이라고 적었다. 반 틸보르흐와 마스는 이 편지에 언급된 나무 덤불이 바로 <나무뿌리>라고 결론지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나무뿌리>는 반 고흐가 죽을 때 그의 이젤에 세워져 있던, 미완으로 남은 마지막 작품이다. 그렇다면 반 고흐는 왜 죽기 직전에 이 작품을 완성하려고 애썼을까?

 _100p,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자살하지 않았다중에서

 

라우리의 미공개 유작을 본 순간, 캐롤은 자기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작품들은 라우리의 평소 작품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절반 또는 4분의 1이 찢어지거나 없어진 상태로 남겨진 그림 속에는 하나같이 소녀들이 그려져 있었다. 피부가 여린 소녀들이 좁은 튜브 같은 옷에 쥐어짜질 듯이 갇힌 채 위태롭게 서 있다. 심지어 단두대 속으로 강제로 밀어 넣어져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소녀와 그 옆에서 채찍을 들고 웃고 있는 사람을 묘사한 그림도 있다. 이 소름 끼치는 연작들을 눈살을 찌푸리며 훑어보던 캐롤은 한순간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림 속의 소녀가 자신처럼 작고 살짝 치켜 올라간 코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캐롤은 외쳤다. “맙소사, 이건 나야. 이 그림들은 나야!”

_180p, ‘로렌스 스티븐 라우리: 불행한 날들에 찾아온 뜻밖의 소녀중에서

 

사실 폴록의 유작 <레드, 블랙, 실버>는 폴록이 죽기 직전의 애인이었던 루스 클리그먼이 가지고 있던 작품이다. 클리그먼은 2010년 사망하기 전까지 줄기차게 이 그림에 대해 폴록이 19567월 잔디 위에서 내게 직접 그려준 러브레터였다고 주장했다. 크래스너가 클리그먼을 미워해 그녀 소유의 유작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풍문도 있다. 크래스너 입장에서는 클리그먼이 단순히 연적일 뿐 아니라 폴록의 죽음을 앞당긴 원흉이기도 했다. 폴록은 술에 취한 채 클리그먼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즉사했기 때문이다.

_229p, ‘잭슨 폴록: 혼돈이라니, 빌어먹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