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22. 18:33ㆍ미술/서양화
프로이드는 유대인으로, 1922년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아버지인 건축가 에른스트 루트비히 프로이트(Ernst Ludwig Freud)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933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이사하며 1939년 영국 국적을 취득한다. 그는 데번의 다팅턴 홀 학교에 재학했으며 나중에는 브리앤스턴 학교에 재학했다. 그 이후 그는 런던에 있는 샌트럴 미술학교와 골드스미스 컬리지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초기의 그의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의 성향을 많이 보이는데, 사람과 식물, 가구 등을 독특한 방식으로 나열한 그림을 그렸다. 이 때의 그는 비교적 물감을 얇게 펴바르는 방식을 사용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 그는 초상화와 누드를 그리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그는 두껍게 칠하는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 기법이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터치법을 사용하면서부터 프로이드는 단 한 번의 붓터치 후에도 꼭 붓을 씻어내야 할 정도였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의 색감은 부드러우며 채도가 낮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앉아 있는 사람만을 그렸다. 그가 그리는 초상화의 모델들은 대다수가 그의 주변인물로, 친구, 가족, 동료 화가들, 애인, 혹은 아이들이었다.
루시언 프로이드는 주로 인물화와 초상화를 그려왔는데, 사실적이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강박적인 묘사가 타 사실주의 작품들과 다른 개성을 갖고 있다. 대체로 그의 작품은 고독하고 밝은 색감에 날카로우며 세심한 형태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많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인물이지만 간간히 나타나는 도시풍경이나 정물 등을 보면 회화 매체에 대한 프로이드의 숙련도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프로이드의 무정하고 비전통적인 누드 작품들은 충격적이어서 전시중에는 미성년자에게 관람이 금지된 작품들도 있다. 인간의 얼굴에 초점을 둔 그의 작품들은 종종 육체적인 추함을 묘사함으로써 그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곤 한다.
" 보통 나는 사람들 얼굴의 감정을 담고자 노력한다. 나는 사람들의 몸을 통해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얼굴만 그렸었는데 마치 얼굴에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그것들의 팔다리가 되고 싶은 것처럼..." - 루시언 프로이드
그는 1951년에 그린 <패딩턴 실내(Interior at Paddington)>로 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21세기 사실주의 화가의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의자에 앉은 붉은 머리칼의 남자>(1962~63년작)
영국 출신의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임신 당시를 그린 극사실주의 화법의 누드화 <나체 초상화 2002)>
<넓은 실내 W11(와토를 따라서>
위키백과
Reflection (self portrait) 1985
John Minton 1952
Girl with a white dog 1951-1952
이 작품은 사실주의 대가인 프로이드가 ‘수 틸리(51세)의 누드로 소파에 누워있는 모습을 실물크기로 그린 것으로, 그림의 모델을 섰던 수 틸리라는 여성은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프로이드의 그림을 위해 옷을 벗은 채 포즈를 취하고 하루 4만원의 개런티를 받았다고 밝혔다.
프로이드는 지금은 런던 직업소개소 책임자인 틸리를 호주 출신 화가 리 바우러의 소개로 알게 됐으며 지난 90년대 초 4년 동안 서로 수시로 만나 점심식사를 같이한 뒤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작품은 완성된 뒤 개인 소장가에게 넘어갔다.
대체로 그의 작품은 고독하고 밝고 날카로우며 세심한 형태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많다.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인물이다.그러나 간간히 그린 도시풍경이나 정물 등을 보면 회화 매체에 대한 프로이드의 숙련도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그의 정밀함은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Factory in North London 1972
1950년대 프로이드의 작품이 보여주는 스타일은 아직 후기 작품의 고통스러운 격렬함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그렇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심리와 영혼을 탐구하려는 그의 경향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베이컨의 작품처럼 형체를 기형적으로 왜곡하지 않고도 프로이드는 현실과 성에 대한 냉정한 시각을 보여준다.
루시앙 프로이트는" 아름다움을 추함이라 하고 추함을 아름다움"이라면서 아름다운 여인을 초라한 모습으로 그렸다. 이때문에 프로이트의 작품은 여인의 나체를 관객에게 던져진 욕망의 고깃덩어리처럼 그리는 베이컨 작품과도 비교한다. 1951년에 첫 전시후 초현실주의자 들과 교류 곧 전후 독일의 표현풍의구상화로 변모했다. 그는 철학자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 에서 감각과 힘과 시간을보여주는 작품으로 발견한 베이컨의작품 루시앙 프로이드 초상연구의 모델이자 친구였다.
Naked girl asleep, II 1968
Naked Portrait with Reflection 1980
1951년 이후 누드화를 그리면서 가장 강렬하며 독창적인 화풍의 루드로 주목을 받았다. 영국 구상 미술전 전통을 이어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사실주의 화가로 불리는 그는 "나는 사람들의 벗은 모습을 그리는게 좋다. 옷을 벗으면 나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신나는 일들중 하나는 피부를 관통해 혈관 그리고 많은 흔적을 보는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벗는다고 그리진 않는다. 너무 경직돼 있다는 이유로 직업적인 모델은 피했으며 자신과 잘아는 친구. 가족. 동료화가등 주변인물을 다이내믹하고 거친 붓 터치로 긴장된 감있는 화면을 만들었다.
Lucian Freud, Sleeping by the Lion Carpet, 1996
Francis Bacon 1952
“Portrait Head”, 2001 Original Signed Etching on Somerset paper
1
지난 7월 20일 작고한 루시안 프로이드는 사진과 컴퓨터 그래픽의 시대에 회화의 저력을 보여준 화가였다. 직접 마주친 그의 그림은 시각적일 뿐 아니라 육감적인 기억에 각인되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초상화의 영역에서 그만의 세계를 완성하여 거장으로 추앙을 받았는가 하면, 육체의 불편한 진실을 담은 그의 그림들은 “왜곡이 심하다”, “음란하고 추하다”, “시대 감성이 결여된 아카데미즘이다”라는 혹독한 비난도 받았다. 하지만 돈이 척도인 시대에 부정적인 평가들은 그의 작품 가격 앞에 힘을 잃었다. 200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작품 한 점이 3364만 달러, 약 350억 원에 낙찰되면서 생존 작가의 작품 가격으로 기록을 세웠다. 그래서 그에게는 두 개의 타이틀이 붙게 되었다.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린 생존 화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친손자”.
1922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루시안 프로이드는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서 1933년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망명했다. 미술학교에서 고전적인 회화 수업을 했고, 이차 대전 이후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전후 유럽은 추상의 전성기였지만 그는 인물이든 정물이든 앞에 있는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그림을 그렸다. 1950년대 런던에는 그처럼 구상회화에 몰두한 작가들이 있었다. 일명 “런던스쿨”로 불린 프란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드, 마이클 앤드류, 프랭크 아우어박 등이었다. 프로이드는 1954년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에 베이컨, 벤 니콜슨과 나란히 초대될 만큼 인정을 받았으며, 13년 연상인 베이컨과는 만남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이컨의 직관과 감각을 중시하는 증감된 사실주의는 프로이드의 작업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다. 세밀화법과 선묘를 버리고, 물감과 붓터치로 공간과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캔버스가 크던 작던 서서 그리는 자세를 선택했다. 이 점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화가의 시점이 높아지면 그리는 대상에 대한 시각적 지배력이 커진다. 그리고 이젤 앞에 앉은 화가는 화면과 대화하는 상황이 되지만, 서있는 화가는 화면과 대결한다. 붓과 나이프를 들고 캔버스에 다가가서 터치하고 다시 멀어지는 화가의 모습은 펜싱선수 같다.
작업에 박차가 가해지면서 프로이드는 런던의 밤을 누비던 현란한 사교생활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기 시작했다. 상대방을 매혹시키는 이야기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를 사절했다. 미술계에서 조차 그와 직접 대화한 사람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사회생활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보호했다. 모든 규범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산 프로이드는 온갖 종류의 도박에 열정적으로 몰두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것도 그만 두었다. 나이 50에 접어들어서는 게임에서 돈을 잃는 스릴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부자가 되기도 했지만, 더 이상 다른 시간이 없을 만큼 낮에 두 번, 밤에 한 번, 하루 14시간씩 모델을 세우고 그림을 그렸다. 말년으로 갈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야심적으로 작업한 것으로 미루어 프로이드의 놀음판은 카지노와 경마장에서 아틀리에와 캔버스로 옮겨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림 한 점 한 점이 모델과 화가, 그리고 회화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모색, 모험의 결과물이며, 작가는 그만이 아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리고 잃었다고 판단하면 거의 완성된 그림도 거침없이 칼질해 버렸다니 도박으로서의 그리기를 추정해 봄 직하다. 하지만 아무 위험 부담 없는 창작이 가능할까? 명성을 얻고 나서 스스로 ‘자기 복제가’가 되어버린 수많은 직업 작가들은 ‘제조인’일 따름이다.
Lucian Freud painting the queen, 2001, photo: David Dawson | Lucian Freud, Queen Elizabeth II, 2001 Oil on canvas, 23.5 x 15.2 cm |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은 프로이드에게 부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는 주문대로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교황과 다이애나 비의 주문은 거절했다. “내 그림은 나와 내 주변에 관한 것으로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시도이다. 내게 흥미로운 사람들, 중요한 사람들,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을 내가 잘 아는 나의 공간에서 그린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더 자유롭게 작업하며 사람들로부터 그림을 만들어낸다”고 작가는 말했다. 그의 모델은 가족, 친구, 애인, 애견, 그리고 자기 자신이었으며 예외적으로 모델을 고용하기도 했다.
여러 해 동안 모델을 선 사람 중에는 무대 예술가이자 패션디자이너 레이 바워리와 런던 고용센타 직원인 수 틸리가 있다. 두 사람 모두 거구로서 1990년 전후 여러 해 동안 그려진 프로이드의 야심적 대작들에 기여했다. 레이 바워리의 기괴한 화장과 의상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프로이드의 모델로서 그의 벌거벗은 모습은 놀라울 따름이다. 틸리가 모델이 된 “잠자는 고용센타 팀장”은 미와 추를 넘어선 강렬한 작품으로 그 유명한 “생존 작가의 가장 비싼 그림”이다.
2000년 봄부터 이듬해 말까지 그린 영국 여왕의 초상은 프로이드가 기꺼이 그린긴 했지만 결과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작가는 여왕에게 최고의 공식행사 때만 쓰는 대 왕관을 쓰고 모델을 설 것을 주문해 왕실 내에 아틀리에가 마련되고 여왕이 포즈를 취했으나 정작 작은 공책만한 크기의 캔버스에 왕관도 일부만 보이는 작은 초상을 그렸다. 경직되고 수심 가득한 여왕의 초상이 공개 되었을 때 “여왕 모독이다”, “여장 남자 같다” “화장실에나 걸 그림”이라는 혹평이 있는가 하면 “끔찍한 한 해” (다이애나 비의 사망에 대한 여왕 자신의 표현)를 보낸 늙은 여왕의 고뇌와 결의를 보여준다는 옹호도 있었다. 왕실은 아무 코멘트 없이 작품을 소장하였고 프로이드의 주요 전시에 대여하기도 했다.
프로이드 앞에서는 여왕도 연인도 종종 모델이 된 그의 애완견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작가는 “나는 동물로서의 인간에 관심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물은 꾸미지 않고 감정 표현에도 거짓이 없다는 점에서 프로이드의 인간 바라보기는 생긴 대로의 참 모습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 적나라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40일동안 프로이드의 모델이 되었던 경험을 책으로 쓴 평론가 마틴 게이포드는 프로이드의 “잡아먹을듯한 시선”이 그를 얼마나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지를 적었다. “질감과 색감을 관찰하기 위해 화가는 코를 나의 뺨에 대고 들여다 보았고, 같이 식사를 할 때도 안면 근육의 움직임을 일일이 관찰 당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작은 초상화가 완성되었을 때, 게이포드는 “누구에게도 감춘, 나만 아는 결점이 다 드러나 버린 초상에 경악했다”고 회고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연상시키는 일화다. 빼어난 외모의 도리안 그레이는 악한 생각과 범죄 행위를 미모 속에 포장을 할 수 있었지만 그의 초상화는 흉측하게 썩어 문드러져 갔다. “이미지는 껍질”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으면서 이미지의 마술적 진실과 힘을 말한다. ‘사실주의’란 이미지의 진실에 대한 믿음이며, 그 진실을 보는 힘을 가진 자의 무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드의 초상이 드러내 보이는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얼굴과 육체에 관한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얼굴과 육체들은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매끈하고 예쁘지 않다. 그리고 동물들이 성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듯 프로이드의 나체 모델들은 종종 음부를 다 드러내 보인다. 그런데도 음란하기 보다는 다치기 쉬운 인간의 나약함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경우 모델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있으며, 화가의 시선은 엿보기가 아니라 선입견 없는 냉정한 관찰이다. 슈퍼 모델 케이트 모스 조차도 퀭한 시선으로 한 곳을 응시하는 지치고 불안한 임산부로 그려졌다. 살아온 삶이 각인되어 있고, 일상의 피로가 쌓인 몸, 땀이 나고, 냄새도 나고, 종기도 나고, 멍들거나 부르트기도 하는 약하지만 살아있는 살덩어리다.
태초부터 문명은 몸의 위생과 미화를 의무화 해왔지만 오늘날은 식품산업, 의료산업, 화장산업, 스포츠산업과 매스미디어가 아름다움과 건강의 아이콘들을 만들어 광고하며 얼굴과 몸을 적극적으로 만들 것을 주문한다. 주름과 뱃살은 거의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시대에 꾸밈없이 적나라한 육체를 보여주는 것은 도발이다.
Lucian Freud, Benefits Supervisor Sleeping, 1995
프로이드의 야심작이자 가장 유명한 그림인 “잠자는 고용센타 팀장”은 무겁게 늘어진 살덩어리를 소파 위에 걸친 팔로 균형을 잡고, 흘러내리는 젖가슴을 한 손으로 떠받친 채 낡은 소파에서 나체로 잠자고 있는 여성을 실물 크기로 그렸다. 이 거대한 육체는 21세기 선진사회가 죄악시하는 비만의 표상. 옷 속에서 불편하고, 타인의 시선 속에 불편했었을 몸이 완전히 퍼져서 쉬고 있는 모습은 프로이드의 그림 속에서 당당한 존재감으로 압도해 온다. 누더기 소파의 부드러운 색조와 푹신한 감촉으로 둘러 쌓여 빛나는 살덩어리는 체온과 습기가 느껴질 만치 생생하다. 화가는 지방질 혐오에 일갈할 생각이 있었다기 보다는 그 살아있는 풍만함을 화면 위에 되살리고자 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현대 소비사회 고유의 몸매에 대한 편견과 집착, 그것을 조장하고 조정하는 사회를 돌이켜 보게 한다.
해묵은 장르인 초상과 누드를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지만 프로이드의 그림은 “사실주의”의 힘으로 육체에 대한 불안함, 불편함, 성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되돌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마다, 이 순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그림이 되기를, 과거 어느 누구도 그린 적이 없는 그림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직 관찰의 힘으로 모델의 삶과 생각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이 시대에만 가능한 초상으로 만들었다. “아카데미즘”이라는 비난은 통하지 않는다.
일평생 수많은 자화상을 그린 프로이드는 자신을 바라 볼 때도 가차 없었다. 정말 남 보듯 하기 위하여 여러 개의 거울을 통해 반사된 이미지를 그리고 ‘반영’ 혹은 ‘성찰’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리플렉션”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내 나체를 그리는 것”이라며나이 70의 노화가는 팔레트와 나이프를 들고 서 있는 전라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의 말년 자화상은 우스꽝스런 연출 속에 냉소가 느껴지는데, 회화와의 내기에 모든 것을 바친 자의 기분이 그랬을까?
Lucian Freud at work, 2005, Photo: David Dawson
프로이드에게 세계는 모델이 있는 화실이었다. 드물게 풍경과 정물도 그렸지만 사람은 그가 그림을 시작하고, 전개하는 데 없어서 안 되는 요소였다. 그는 회화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이 된 화가-모델-회화의 삼각 관계를 일평생 드라마틱하게 운용한 거장의 계보를 이었다. 렘브란트, 쿠르베, 피카소, 베이컨 …… 화가는 ‘살’에서 회화가 생명을 얻는 길을 보았고 그림이 곧 ‘살’이기를, 살아있는 유기체이기를 원했다. “내 그림들이 모델을 닮기를 원치 않는다. 바로 그 사람이어야 한다. 내게 그림은 사람이다. 그림은 살처럼 살아 있어야 한다.”
누구나 즉각적으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시대에 회화는 느리고 지루한 매체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만큼 긴 회화의 역사는 인간 정신과 감성의 방대한 유산으로 시각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양한 것을 환기시키는 무한한 영역이다. 20세기 초부터 수많은 새로운 형식의 미술이 탄생하는 가운데 빈번하게 ‘회화의 종말’이 예고 되었고, 또한 빈번하게 ‘회화의 복귀’가 있었다. 루시안 프로이드는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려진 대상이나 작가의 표현이 아니라 회화 그 자체라는 것을 안 화가였다. 그림 앞에 서는 사람에게, 화가이던 관객이던, 인간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회화 말이다.
HARPERS's BAZAAR 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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