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이런 건 통영에 시비로 세워야겠다.
알래스카 Ⅱ
2022. 11. 22. 19:17
가난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소라처럼 휘감고 오르는 골목길과
먼바다로 떠나는 낡은 배 한 척
그대 나를 부끄러이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항구의 물굽이 너머 붉은 동백꽃이 피는
겨울 통영에 한 번 다녀가시지요.
첫사랑을 찾아 남쪽 바다를 찾아온 시인처럼
애끓는 그리움을 간직한 마음이어도 좋고
사는 일이 다 그렇지요 라고 생각하는
쓸쓸한 발길이어도 좋아요.
그대가 좋아하는 그윽한 로즈와인향처럼
우아한 시간을 준비할 수는 없지만
미농지 봉투 속에 담긴 오래된 연서 같은
나의 마음을 드릴 수 있으니
그대 정녕 나의 사랑을 미쁘이 생각하신다면
바람 불어 쓸쓸한 날
겨울 통영에 한 번 다녀가시지요.
가난한 내가 그대에게 보여 드릴 수 있는 것은
미역 줄기처럼 야윈 노래 한 곡조와
지난 시절의 남망산 기슭에 울려 퍼지던
통영 오광대의 문둥이 춤처럼 서러운 몸짓뿐
그리웠던 물새 한 마리
노을빛 물든 미륵도 지나 한려수도로 날아가고
동피랑 골목길에 애처로운 가로등이 불을 밝힐 때
가난한 내가 그대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눈썹 같은 골목길 안쪽 서늘한 창가에서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그림자뿐
여황산 배꼽 아래 명정샘이 마르기 전에
충렬사 돌담 너머 떨어진 동백꽃이 시들어가기 전에
그대 올겨울 통영에 한 번 다녀가시지요.
統營詩抄 / 이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