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서양화

大 피터 브뤼헐,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外

알래스카 Ⅱ 2020. 6. 1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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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피터르 브뤼헐, (1559년) 패널에 유채. 118 * 164.5cm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 피터르 브뤼헐은 16세기 중반 농민들의 평범한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일명 '농민의 브뤼헐'이라 불린다. 그의 작품에는 당대의 화가들에 비해 풍경이 많이 등장하는데 대체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단순히 풍경을 좋아하는 화가의 취향 탓은 아닐 것이다. 그는 지리, 역사,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찰했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립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성서, 신화, 당대의 민간 설화나 속담까지 아우르며 보통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서 관찰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대개의 회화에서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건 시대를 견인하는 상류층 사람들인데, 브뤼헐의 작품에는 당대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화면을 빼곡히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무척이나 친근하다. 음식을 먹고, 대소변을 보고. 농사일을 하고 노동을 하다가 쉬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절름발이, 맹인, 거지처럼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지극히 소외된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수백 명의 아이들이 등장해 갖가지 놀이를 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의 작품은 명확한 주제를 잡아내기가 쉽지 않고 세심한 눈길로 화면 구석구석을 천천히 탐험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작품은 전 세계에 45점 정도가 있는데16세기 북유럽 회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은 그의 걸작 중 사순과 수난을 주제로 한 두점의 명화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먼저 사육제와 사순절의 유래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육제는 유럽과 남미 등 가톨릭 국가에서 매년 2월 중 하순경 개최되는 대중적 축제의 장이다. 당초는 아기예수를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알현한 것을 기념하는 공헌절인 매년 16일부터 시작하여 사순절 직전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이 기간이 끝나면 금육과 절제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이 시작되기에 그전에 마음껏 먹고 놀자 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은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각종 축제가 사람들의 본능과 쾌락을 자극하였다. 오늘날에도 유럽의 유명도시에서 매년 개최되는 가면축제등도 이때부터 유래되었는데 가면을 쓰고 짙은 화장을 하고 서로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고 신분이 서로 다른 계층간에도 육체적 향락을 나누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던 풍습이 16세기 초반 종교개혁 이후 절제의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의식이 간소화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작품에서의 사육제는 사흘에서 일주일간 계속해서 실컷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춤추는 축제였고, 반면에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고 단식하고 회개하는 6주간의 참회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 중엔 음식을 절제해야 했는데 이런 계율은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더불어 애초에 사육제는 고기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축제였던 것이 점차 세속적 축제가 되었다. 결국 사순절과 사육제는 포식과 단식, 기쁨과 고통, 만족과 후회, 악덕과 미덕, 죄와 구원이라는 대립의 상징이었다.

 

작품은 이 기간 중 부활제와 사순절이 충돌하는 날 즉,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사흘간에 걸친 사육제의 마지막날인 고해의 화요일에 사육제와 사순절의 의인상이 맞서 싸우는 모습이다. 작품은 일명 사육제 소시지와 사순절 청어의 싸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카니발의 기름지고 풍족한 식탁과 사순절 금식기간 동안의 간소한 식탁을 대비한 의미가 된다.

 

화면을 살펴보자.

 

1  왼편의 많은 사람들이 사육제 놀이에 몰두하고 있다. 반면에 화면의 오른편에는 사순절을 상징하는 고난과 희생의 이미지로 수도사와 수녀가 수레를 끌고 있고 수레 위 의자에는 바짝 바른 한 여인이 앉아 있다.

2  건물의 배치 역시 왼편엔 축제를 상징하는 주점이 보이는 반면에 오른편은 사순절을 의미하는 교회가 배치되었다.

3  그림 중앙에는 어릿광대가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남녀를 안내한다. 남자는 사육제로 대표되는 루터주의자, 여자는 사순절로 대표되는 그리스도 교도를 나타낸다. 이 한 쌍의 남녀 중 여성의 등에는 불 꺼진 작은 초롱불이 매달려 있다. 이는 이들이 어둠속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4  대부분의 인간 군상들이 벌이는 행동이나 몸짓에서 화가의 냉소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브뤼헐은 사육제나 사순절 모두 인간의 어리석음이 낳은 악습으로 바라보았던 게 아닌가 싶다.

 

5  화면 왼편 건물앞의 한 무리의 거지들은 비참한 현실을 대표하는데 이들 앞을 무관심하게 걸어가는 두 남녀 성직자들과 대비된다.

6  한편 오른편 아래에는 교회에서 막 나온 남자에게 구걸하는 여인이 아이와 함께 그려져 있다. 이 여인에게 돈을 주는 남자는 적선이 영혼을 맑게 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행위임을 암시한다.

7  왼편 아래 구석 술집 앞에서는 노천연극이 열리고 있다. 집시들이 결혼을 소재로 한 광대극 <지저분한 신부>를 공연하는 것이다.

8  한편 화면 아래쪽 가운데의 뚱뚱한 남자는 포도주 통에 걸터앉아 머리위에는 고기파이를 얹고 손에는 긴 꼬치에 꿴 돼지고기를 들고 있다.

 

9  그의 뒤를 사육제 특유의 복장을 한 시종과 악기를 연주하는 남자들이 따른다.

뒤편의 여인은 달걀을 늘어놓고 팬 케익을 굽고 있고 그림 왼편 구석의 젊은이는 길게 네모난 와플을 머리에 둘러 감은 채 도박에 빠져 있다.

사육제의 마지막 화요일은 남은 달걀이나 버터 등을 전부 써서 팬 케익을 만들어 먹는 습관이 있었기에 팬 케익의 화요일이라고도 했다.

 

10  이를 마주보는 사순절의 의인상은 비쩍 마른 노파이다.

교회에서 쓰는 삼각의자에 앉아 양봉용 바구니를 쓰고 빵을 굽는데 쓰는 긴 주걱위에 청어를 얹었다.

발치에는 홍합에 담긴 큰 그릇이 있고 프레첼과 누룩을 넣지 않은 납작한 빵이 널려있다.

프레첼은 성찬의 빵처럼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하여 사순절 동안 굽곤 했다.

11  노파가 앉은 의자를 두 남녀 수도사가 끌고 뒤에는 맹인과 장애인과 미망인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들,

매장하기 위해 죽은 이를 손수레로 나르는 사람, 미사를 끝내고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두 남녀 수도사들 앞의 줄무늬 옷을 입은 광대는 한낮임에도 햇불을 들고 걷고 있다.

 

12  사육제의 음식은 고기뿐 아니라 와플, 버터, 달걀로 대표되고 사순절의 음식은 물고기, 프레첼, 납작한 빵,

홍합으로 대표된다.

역시 축제에는 음식이 빠질 수 없다. 화면 여기저기에는 참 다양한 음식들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늘 배가 고팠을테니까...

화면을 크게 펼쳐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터 같은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걸맞게 길바닥에는 달걀껍질, 생선뼈, 닭뼈, 소뼈, 돼지뼈등이 나 뒹굴고 있다.

원경에는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모습 그대로 벽돌로 된 3층 주택들의 파사드가 줄지어 늘어선 마을 안쪽이 축제의 무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마치 오페라의 무대 같은 마을 뒤편에선 끊임없이 배우들이 등장하며 화면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여튼 이 사육제 축제기간에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인 술, 음식, , 노래와 육체적 쾌락의 향연이었다.

 

 

글. 아트 커뮤니케이터 윤운중

 

 

 

 

 

 

 

 

아이들의 놀이(1560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죽음의 승리(1562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반란 천사의 추락(1562년)

 

 

 

바벨탑(1563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겨울 풍경(1565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건초 만들기(1565년), 프라하 국립 박물관 소장

 

곡물 수확(1565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눈 속의 사냥꾼(1565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결혼식 춤(1566년),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베들레헴의 인구조사(1566년)

 

베들레헴의 영아학살(1565년-1567년), 브루켄탈 국립박물관

 

코카인 나라(1567년),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농가의 혼례(1568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농민들의 춤(1568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거지들(1568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

 

장님을 이끄는 장님(1568년), 카포디몬테 박물관 소장

 

 

 

 

 

 

 

 

대 페테르 브뤼헐(Pieter Bruegel de Oude)_베들레헴의 영아학살Massacre of the Innocents

 

 

 

 

영아학살Massacre of the Innocents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2장 16절의 내용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아이=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왕은 왕위를 빼앗기는게 두려워 2세 이하의 영아를 모조리 학살하는데요,

아기 예수는 아버지 요셉의 현명한 대처로 목숨을 구합니다.

 

그림 속 베들레헴은 눈이 많이 쌓여있지만 실제로 중동의 사막에 자리하고 있어 눈이 내리는 곳이 아닙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전쟁으로 빈민가가 많은 베들레헴과는 다르게 동네가 부유한데.. 브뤼헐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공중에서 조망하듯 한 (Bird eye view) 구도이고,

판넬에 젯소(석회)칠을 한 붓 자국이 보입니다. 그 위에 연한 색부터 차례로 덧칠하듯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흰색 부분이 군데군데 갈라져 있습니다. 기존의 흰색에 다른 흰색을 덮어칠 한 흔적입니다.

원래 작품에는 잔인하게 살해 당하는 영아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림을 구입한 신성로마제국- 루돌프 2세의 명령으로 영아 위에 냄비, 칠면조, 멧돼지, 항아리등이 덧칠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 브뤼헐이 복사해 놓은 위작 덕분에 아버지 브뤼헐의 원작이 후에 덧칠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브뤼헐은 '영아학살'을 통해서 네덜란드에 가해진 공포정치와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 스페인의 알바공작을 베들레헴의 헤롯왕에 빗대어 그렸습니다.

여관에 걸린 문장은 예루살렘의 상징이고, 스페인 병사가 들고 있는 깃발의 쌍머리의 독수리문양은 신성로마제국-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징입니다.

브뤼헐은 그림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한 셈입니다.

 

 

아버지 페테르 브뤼헐Pieter Bruegel de Oude: 1525~1569.9.9

아들 페테르 브뤼헐Pieter Brueghel the Younger: 1564~1636.10.10

아들 브뤼헐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작품을 어떻게 복사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 브뤼헐의 작품성을 높이 샀던 친구 히에로니무스 코크Hieronymus Cock(1518-1570)는 아버지 브뤼헐의 작품을 판화로 남겨두었습니다.

아들 부뤼헐은 아버지 그림의 실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히에로니무스 코크가 남긴 판화를 보고 파운싱기법으로 위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그린 영아학살 위작들을 보면 조금씩 다릅니다.

파운싱기법으로 아버지의 작품을 그대로 복사했지만 원작이 아닌 판화작품으로 복사하다 보니 간혹 놓쳐버리는 부분도 있고, 채색도 조금씩 다른데요.

또 다른 작품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역시 아버지의 작품(판화)을 복사하듯 그렸지만,

아래에 눈길에 넘어지는 사람의 손동작이 어색 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을 통채로 빼놓고 그리기도 했어요.

 

 

 

영아학살의 주제는 역사에 기록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옛날 부터 많은 화가들 작품으로 남겼던 소재입니다.

▷ 니콜라 푸생의 영아학살 그림은 너무 잔인해서..ㅠ 후기에 빼고 싶었으나.. 푸생특집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올렸습니다.

 

 

* B.C. "예수 탄생 전"(before Christ)

A.D "우리 주님의 해"(Anno Domini)

C.E."서기"(common era)

 

 

* 참고자료

 

https://nuctom.blog.me/220483759308

https://nuctom.blog.me/221076456328

http://nuctom.blog.me/221370561749

 

 

 

 

 

 

 


자화상 네덜란드의 화가.

 

 

16세기의 가장 위대한 플랑드르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의 네덜란드는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는 여러 개의 독립된 주와 도시가 모인 것으로, 각각의 지방과 도시가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문화와 예술을 가지고 있었다. 브뢰겔은 1520년에서 3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할 뿐, 정확한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태어난 곳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주장이 있으며, 대체로 네덜란드 남서부의 브레다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게다가 그는 자화상이나 초상화도 하나 남아있지 않다. 처음에는 쿡에게, 그 다음에는 히에로니무스 콕의 제자가 되어 그 밑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그 후 1551년 안트웨르펜의 화가조합에 등록하고, 다음 해 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 유학하였다. 반 에이크 이래 북유럽 자연주의에서 출발한 그는 이탈리아 유학길에서 알프스의 풍경에 감명을 받고 스케치한 풍경화를 남겼는데 그 중 21점이 현존한다. 53년 귀국하여 안트웨르펜에서 제작생활을 하다가 63년 결혼, 브뤼셀로 이사하여 그 곳을 활동 본거지로 삼았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주로 민간전설·습관·미신 등을 테마로 하였으나, 브뤼셀로 이주한 후로는 농민전쟁 기간의 사회불안과 혼란 및 에스파냐의 가혹한 압정에 대한 격렬한 분노 등을 종교적 제재를 빌어서 표현한 작품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 후로는 점차 구도가 단순화되고 인물수도 적어졌으며, 극적 요소를 버리고 순수하게 사실적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농민의 실상을 묘사하게 되었다. 그는 숙명적으로 대지와 깊은 인연을 맺어 그 속에서 소박하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농민을 높은 휴머니즘의 정신과 예리한 사회비판의 눈으로 관찰하면서 묘사해 나갔다. 이로 인해 그는 최초의 농민화가가 되었으며, ‘농민 브뢰겔’ 로 불린다. 이 무렵의 것으로 현존하는 작품 중 판화에 비해 유화는 50점도 안 되지만, 그 작품들은 북유럽 전통의 사실성과 이탈리아에서 배운 엄격한 선(線)의 묘사를 통하여 독특한 스타일과 취향을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은 빈 미술사미술관에 많이 소장되어 있는데 "사육제와 사순절 사이의 다툼" "아이들의 유희" "바벨탑" 등과 4계절의 농촌을 묘사한 3점의 작품(4점 중의 1점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소장) "영아학살(兒虐殺)" "농민의 춤" "농가의 혼례" 등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베를린국립미술관 소장의 "네덜란드의 속담", 브뤼셀 왕립미술관 소장의 "반역 천사의 전락(轉落)", 나폴리국립미술관 소장의 "맹인의 우화"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브뢰겔은 1569년에 세상을 떠났고, 브뤼셀의 노트르담드라샤펠 교회에 묻혔다. 눈밭의 사냥꾼 1565년. 117x162cm. 미술사박물관, 빈

겨울은 사 계절 가운데 가장 인기가 없다. 적어도 화가들에게는 그랬다. 을씨년스럽고 스산한 겨울이 미술의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미술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꽃들이 저마다 자태 뽐내는 봄, 곡식들이 무르익는 여름, 그리고 주렁주렁 달린 포도송이를 수확하는 가을에 비하면 겨울은 무엇 하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토끼 사냥이나 가축을 도축하는 장면이 겨울에 어울리는 소재인데, 그것도 사계절 연작에서나 얼굴을 내미는 정도였다.겨울 그림이 저 혼자 독립 주제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세기 낭만주의 화가들부터였다 사계절을 인생의 네 단계에 비유할 때 겨울은 곧 노년이나 죽음을 의미했다. 봄바람이 씨앗의 생명을 어루만져줄 때까지 겨울은 그저 얼어붙은 표정으로 언제 올지 모르는 부활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풍경화에서 겨울이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는 겨울철 한복판에 태어난 아기 예수의 탄생장면에서 배경이 늘 다른 계절로 바꿔치기 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금세 알 수 있다. 또 이상향이라고 불리는 유토피아, 아르카디아, 천국, 에덴동산의 풍경에서도 겨울철 배경은 금물이었다. 심지어 지옥 그림을 그릴 때도 영혼을 뜨거운 불길에 태우는것으로 만족했다. 눈이나 얼음이 덮인 겨울 풍경은 도무지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계절 가운데 엄연히 한 몫을 하는데도 겨울은 무척 부당한 대접을 받았던 셈이다. 플랑드르 화가 브뢰겔이 그린 <눈밭의 사냥꾼>은 드물게 보는 겨울그림이다. 유화로 그린 풍경화로는 서양미술사 최초의 작품이라고 한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사냥개를 모는 사냥꾼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을 걷느라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사냥개들은 하루 사냥에 지쳤는지 눈을 핥아먹기도 한다. 아직 어린 강아지도 보인다. 사냥을 나가서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는지, 어깨에 걸친 여우 한 마리가 포획물의 전부이다. 사냥꾼들의 표정을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찬 바람에 고개를 깊이 파묻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사냥꾼들 옆으로 술집에 하나 서 있고, 사람들이 문간에서 짚불을 피우고 있다. 물을 데우거나 돼지털을 그을리려고 하는 것 같다. 술집 간판에는 ‘노루 집’ 이라고 적혀 있다. 모르긴 몰라도 사냥꾼들이 발품을 쉬어 가는 선술집일 것이다. 오늘 사냥감이 넉넉했더라면 계피가루를 뿌린 데운 포도주라도 한 잔 걸쳤겠지만, 사냥꾼들은 선술집을 못 본 척 그냥 지나친다 그림은 전형적인 겨울 풍경이다. 앙상한 나뭇가지, 꽁꽁 얼어붙은 밀밭, 허공을 가르는 까치 뒤쪽으로 멀리 배경을 가로막고 서 있는 산이 보인다. 눈이 덮여 있지 않았더라면 무척 스산했을 것이다. 그런데 보이는 가파른 벼랑과 뾰족한 산세는 브뢰겔의 고향 플랑드르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바다보다 저지 나라에 송곳 같은 암봉이 솟아 있다니, 아무리 화가가 제 마음대로 지어낸 그림이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브뢰겔은 스무 살 어름에 화가 도제 생활을 마치고 그림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에 몇 해 동안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눈밭의 사냥꾼의 오른쪽 배경에 등장하는 험준한 산악 풍경은 ‘악마의 거처’ 또는 ‘지옥의 입구’로 불리던 알프스의 경관을 플랑드르의 겨울 풍경에 살짝 집어넣은 것이다. 뒤쪽 알프스의 산악만 빼놓고 본다면 브뢰겔의 풍경화는 16세기 중반 플랑드르 농촌 마을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거둘 것도 없는 추운 겨울날 그때 사람들은 무얼 하고 지냈을까? 추위도 잊고 얼음 스케이트를 지치는 사람들, 팽이치기를 하는 꼬마 아이들, 새총을 겨누는 사람들은 마치 시골마을의 평화로운 풍속화처럼 보인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면서 사는 욕심 없는 삶의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 근심 걱정 없이 살았을까? 현실은 거꾸로였다. 브뢰겔이 살았던 때는 네덜란드 역사의 가장 불운한 시대였다. 16세기 중반의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통치와 압제에 시달리며 무지막지한 세금을 착취당했다. 인구 10여만을 가장 번성했던 안트베르펜 시의 역사를 훑어보면 네덜란드의 당시 상황을 거울처럼 보여준다. 남아메리카 전체에서 벌어들이는 세수보다 안트베르펜 한 도시에서 쥐어짜는 세금이 더 많아서 ‘북구의 당나귀’라는 별명을 더군다나 1555년 스페인의 카를 5세의 네덜란드 통치권을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를 억압 정치로 일관하면서 일체의 관용이 없는 엄격한 가톨릭 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노예 부리듯이 세금을 수탈해가는 식민 통치자를 네덜란드의 민심이 고운 눈으로 볼 리 없었다 잠잠했던 종교 분쟁이 들썩거리고 민란이 속출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끝없는 소요와 나라살림은 쪼그라들고, 농민들은 기아와 돌림병에 떼죽음을 면치 못했다. 펠리페 2세가 알바 백작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네덜란드 전역에서 거의 200만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네덜란드가 홀란드와 플랑드르 두 나라로 쪼개진 것은 지울 수 없는 비극으로 남았다

브뢰겔이 눈밭의 사냥꾼들을 그렸을 때는 알바 백작이 곧 네덜란드에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던 시점이었다. 사냥꾼들은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변변찮은 수확물이 그들의 몫이다. 풍경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멀리 보이는 농가에는 불길이 보일 듯 말 듯 치솟아 오른다. 곳간의 겨울나기 곡식들이 다 타버리고 나면 사람들은 굶주림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얼음을 지치는 사람들 가운데 임박한 위협을 눈치 챈 사람은 하나도 안 보인다. 브뢰겔은 붓을 통해서 네덜란드의 위기를 알리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봄이 오기 전에 더욱 혹독한 겨울이 닥쳐오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빈손의 사냥꾼으로 표현했던 것이 아닐까? 독일의 역사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예술이 역사를 바꾸지는 못하나 역사를 밝게 비추는 거울과 같다."고 말한다. 브뢰겔의 그림을 보면 그 말이 꼭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Pieter the Elder Bruegel(1525-1569), The Triumph of Death, 1562 대 피테르 브뢰겔는 역사적으로 파란만장했던 시기에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에서 작업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매우 적으며 그의 전기를 완전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브뢰겔은 작품에 날자와 서명을 기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의 믿을만한 연대표를 작성할 수 있다.

안트웨르펜 화가조합의 일원이었던 브뢰겔의 작품에서는 고전에서 영감을 받은 그 지방의 화파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1552년과 1556년 사이에 부뢰겔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알프스를 넘었던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는 한동안 동판화 제작에 몰두한 뒤, 직업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563년 브뤼셀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화가로 활동하게 될 두 아들이 태어 났는데 큰 아들 페테르와 1568년에 태어난 작은 아들 얀은 정교한 정물화가의 대가가 된다. 1565년 브뢰겔은 그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거대한 연작 [계절을 완성했다. 브뤼셀에서 그린 작품들은 새롭고 간결한 양식을 보여주며 초기작업의 전형적인 특징인 과도한 세부묘사를 포기하고 있다. 그러나 1569년 때 이른 그의 죽음으로 인해 전도유망한 발전은 중단되고 만다.


갈보리로 가는길, 1564

 




네델란드의 속담

 




놀이

 




농민의 결혼식

 




농부의 결혼식, 1568

 




눈속의 사냥군, 1565

 




동방박사의 경배, 1556-62

 




미치광이 그리트

 




바벨탑, 1563

 




바벨탑

 




베들레헴 호적조사, 1556

 




사육제와 사순제의 싸움, 1559

 




새 덫이 있는 겨울풍경, 1565

 




성 안토니의 시험, 1555-58

 




세례요한의 설교

 




수확하는 농부, 1565

 




이집트로의 피난, 1563

 




이카루스의 추락, 1558

 




장님의 우화, 1568

 




죽음의 승리, 1562

 




타락 천사들의 멸망, 1562

 




거지들, 1568

 




학교의 당나귀, 1556

 




봄, 1500

 




여름,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