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Ⅱ 2019. 5. 11. 18:01






이스라엘 기행(인디 부부의 내 맘대로 세계여행)



이스라엘 기행(인디 부부의 내 맘대로 세계여행)
저자 홍은표 / 출판  |  2018.9.10.




책소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은 아마 어려서 6일전쟁에 대한 뉴스가 오르내릴 때였을 것이다. 인구와 국토가 수십 배 큰 주변 아랍국들의 포위 공격 속에서 일주일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오히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적적인 능력이라든지, 외국에 있다가도 전쟁 소식을 접하고는 분연히 짐을 싸 고국으로 돌아가 참전한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회자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당시 냉전 체제에서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과 대치하고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본받을 만한 귀감으로 여겨졌다. 여기에 성당에 다니게 되면서 이스라엘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향의 이름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된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같이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것도 있었으나, 그들이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가하는 핍박의 소식은 이스라엘에 대해 갖고 있던 막연한 친밀감을 흔들어 놓았다. 더욱이 사춘기에 들어서고 현대 과학 기술을 접하게 되면서,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여러 교리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졌고, 이것은 오랫동안 내 정신적 방황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얼마 전 가을 햇살이 따사로운 날 성당 마당에서는 수녀님들이 책을 팔고 있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책 두 권을 샀는데, 여느 책과는 달리 지도를 바탕으로 성서 시대의 사건과 사람들의 삶을 그림으로 재미있게 표현한 책들이었다. 그동안의 성서학이나 성서고고학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보였고 내 취향에도 맞았으므로 단숨에 읽어 버렸다. 그러면서 문득 그 땅에 가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 땅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자 역사적으로 여러 문명이 충돌하고 교류하며 이동해 간 길목에 있는 땅으로서, 현재 인류가 가진 문화적 자산 중에 중요한 것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문제와 고통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였다.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편견 없이 객관적인 눈으로 그 땅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의 책과 미디어를 통하여 미리 공부를 하고 가려고 하였다.

이스라엘 여행이라 하면 보통 생각하게 되는 ‘성지순례’ 보다는, ‘사람’과 ‘땅’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는 여행이 되도록 하고 싶었다. 이를 통해서 ‘예수’와 ‘하느님’, 그리고 그분들을 믿는 종교가 어떤 배경에서 탄생하여 지금 여기에 이르렀는지 헤아려 보고, 아울러 지금도 갈등과 폭력이 끊이지 않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의 연원과 대안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싶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었으나 나는 아내와 자동차를 타고 이스라엘과 인근 지역을 가능한 한 넓게 돌아보려고 하였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수천 년에 걸쳐 쌓아온 인류 문명의 경이로움과 함께, 인간의 한없는 어리석음도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핍박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과 폭력과 어리석음의 역사와 함께 종교적 신비감까...지 합쳐진 이 이해하기 어려운 땅에서, 한편으로는 작게 움트고 있는 희망의 싹도 보았다.

이 책은 ‘성지 순례기’가 아니며, 부부 여행자가 세속적인 눈으로 이스라엘의 여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는 얘기를 하듯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사회는 여러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크게 벌어진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이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을 나름대로 아울러가면서 생활해 나가는 것을 보며, 우리가 가진 비슷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용한 사례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여러 생각을 이 책에 잘 담아내고 싶었는데, 다 마치고 보니 많이 부족하다. 다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선입견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한 요소를 갖고 있으며,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보고 배울 점도 많다는 것을 알리는데 작은 역할이나마 한다면 다행이겠다.

오랫동안 늘 내 곁에서 동행해 주고 있는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 목차


저자의 말
알아두기



01 네게브 사막


이스라엘의 관문, 텔아비브
일곱 개의 우물, 브에르세바
아브라함, 누구의 조상인가
역사의 퇴적층, 텔브에르세바
스데보케르 키부츠와 벤구리온
거대한 분화구, 미츠페라몬
이스라엘 요르단 국경

02 요르단의 페트라


 페트라 가는 길
나바태안과 향료길
붉은색 환영의 도시, 페트라
다시 이스라엘로

03 홍해에서 사해까지


 세 나라가 만나는 국경 도시, 에일랏
압축된 광야, 팀나 자연공원
소돔, 분노인가 사랑인가
함락되지 않은 요새, 마사다
다시 뜨는 바다, 사해
광야의 낙원, 엔게디
성경의 재발견, 쿰란
갈릴래아로 가는 길

.04 갈릴래아


 생명의 보금자리, 갈릴래아 호수
베드로의 집, 카파르나움
영광의 길 고난의 길, 베드로의 수위권
갈릴래아의 삼청동, 쯔팟
카파르나움의 그리스정교회
호반의 저녁식사
곱셈의 기적
참행복이란 무엇인가

05 나사렛


 카나의 혼인잔치
나사렛 가는 길
마리아는 누구인가
수태고지
요셉, 의로운 사람
마리아의 우물
나사렛 거리

06 지중해 연안


 시온의 관문, 하이파
시오니즘의 창시자 헤르즐
카르멜산의 보석, 바하이교 정원
문명 충돌의 현장, 아코
십자군, 수호자인가 약탈자인가
황제의 도시, 카이사리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07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작은 고을 베들레헴
예수는 왜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는가
게토의 역설, 팔레스타인 장벽
또 다른 실향민, 팔레스타인 난민
황폐한 족장들의 도시, 헤브론
막펠라의 족장들, 후손은 누구인가

08 예루살렘


 예루살렘, 평화를 갈구하는 도시
올리브산
수난 기약의 겟세마니
올리브산과 키드론 골짜기의 무덤들
다윗의 도성, 시온산
통곡의 벽에서 누가 우는가
예루살렘성의 아랍인
십자가의 길, 비아돌로로사
골고타와 예수무덤
또 다른 예루살렘



여행을 마치며 






책 속으로

─ 이스라엘의 관문, 텔아비브

텔아비브행 비행기는 예정대로 오후 3시에 출발하였다. 비행기 안에는 우리나라 사람보다는 인천에서 갈아탄 것으로 보이는 이스라엘이나 서양 사람들이 더 많았고 거의 만석이었다. 전에는 구분이 잘 안 되었는데, 모아 놓고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코카서스 인종과는 좀 다르게 보여 구별할 수 있었다. 원래 아랍 사람들과는 같은 모습이었을 테지만 조금 달라 보였다. 창세기에 따른다면 서양인이야 노아의 셋째 아들인 야펫의 후손이니 다르다 치고, 유대인이나 아랍인 모두 노아의 첫째 아들 ‘셈’의 후손이며,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니 모습이 같은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간 모진 역사를 거치며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 현대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유대인은 매우 다양한 외모와 인종적 특성이 있으니 외양을 따지는 것이 실제로 별 의미는 없겠다.

옆자리에 중년의 아주머니가 앉았는데, 티베리아스에 살고 있으며, 단체로 뉴질랜드 관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서울에서 이틀간 머물다가는 길이라고 했다. 서울의 도시 규모와 현대적인 모습에 감탄했다고 한다. 나는 이스라엘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싶은데, 영어로 소통은 잘되지 않았다.

비행기는 9시경 정시에 도착하였다. 이스라엘은 원래 우리와는 7시간의 시차가 있으나, 여름엔 서머타임을 시행하므로 6시간의 시차가 있다. 텔아비브 벤구리온 국제공항의 첫인상은 서구 어느 대도시의 새로 지어진 공항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스라엘은 통곡의 벽 앞에서 몸을 흔들며 기도하는 하레디의 모습이나,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민중을 상대로 최루탄이나 총을 쏘며 진압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공항은 이스라엘 입국을 환영한다는 메시지, 대형 광고판, 긴 자동보도 등 어디서나 늘 보던 풍경이다. 또 여러 여행기에서 이스라엘 청년들이 가장 버릇없고 이기적이라고 읽은 기억을 떠올리면서, 입국심사를 맡은 공무원이 무례하고 귀찮게 할지도 모르겠다고 지레 짐작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입국심사대에서는 어느 나라 공무원과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똑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항의 이름인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다비드 벤구리온’의 이름을 딴 것인데, 짧은 현대사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이 함께 존경하며 기릴 수 있는 위인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로서는 꽤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즈하크 라빈 전 총리가 꼽혔고, 그다음이 다비드 벤구리온 전 총리라고 한다. 시온을 찾아 멀고 위험한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와 새로운 나라를 일군 벤구리온을 국제공항의 이름으로 내세운 뜻이 이해할 만하다. 마찬가지로 에일랏 근방의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 국경 관문 이름을 이즈하크 라빈 터미널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주변 아랍세계와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기를 희망했던 그의 정신을 기...리는 것이겠다.

이스라엘을 여행한 이후에 아랍국가를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이스라엘 입국 스탬프를 별도의 종이에 찍어 달라고 하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입국 심사관은 내 여권을 복사하여 거기에 입국허가사항을 기재하고 비자는 별도의 작은 종이로 건네주었다.
입국장을 나와서 예약한 렌터카를 받았다. 차 시동을 걸려면 먼저 운전대 좌측에 부착된 키패드에 암호를 넣어야 했다. 이 암호는 차를 빌릴 때 종이쪽지에 써서 잠시 보여주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두라고 했는데, 시동을 켜려면 반드시 재입력해야 했다. 차를 설명해 주는 직원이 이스라엘에서는 차량 절도가 많다며 큰 문제라고 걱정하였다.

우선 목적지는 텔아비브 시내에 있는 호텔이다. 20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지만, 초행길에다 늦은 밤이라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였다. 서울에서 미리 예행연습을 통해 익숙해진 웨이즈(Waze) 내비게이션이 잘 안내해주기만 바랄 뿐이다. 시동을 걸고 이스라엘을 두루 살펴보는 여정을 출발하였다.

도착한 호텔은 깔끔했다. 호텔은 지중해 바닷가를 따라 나란히 난 길가에 있었지만, 바다와 호텔 사이에 미국대사관이 버티고 있어 호텔에서 바다가 바로 보이지는 않았다. 미국대사관은 거대한 요새와 같은 외관을 갖고 있어 마치 중세의 시타델을 연상시켰다. 미국은 이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고 줄곧 얘기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분쟁을 재점화할 것이 분명한 이러한 조치에 대해 유엔과 유럽의 여러 나라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모두 이를 비난하며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미국은 세계를 다스리고, 이스라엘은 미국을 다스리는 것인가.

이튿날 아침에 들어선 도로의 중앙분리대에는 커다란 대추야자 나무가 열을 지어 늘어서 있고, 좌우 길가에는 아담한 2, 3층짜리 목조 주택이 들어서 있어 여기도 지중해 연안의 도시임을 느끼게 한다. 이스라엘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많이 있지만, 텔아비브의 ‘화이트시티’도 그중 하나다. 텔아비브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기간인 1900년대 초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대도시로 발전하였는데, ‘화이트시티’는 1930년대 초부터 1950년대까지 유럽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해온 모더니즘 건축가들에 의해 현대적이고 기능적인 도시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오늘의 여정은 네게브 사막을 관통하여 이스라엘의 남쪽 끝인 에일랏까지 간 후, 이즈하크라빈 터미널을 통하여 요르단 국경을 넘어 페트라까지 가는 긴 여정이다. 이스라엘의 도로는 대개 관리가 잘되어 있고 고속도로도 대부분 무료인데, 유일하게 요금을 내는 도로가 이스라엘 중앙부를 남북으로 잇는 ‘6번’ 고속도로이다. 남쪽으로 내려가려면 이 도로를 타는 게 가장 빠른 길인데, 이 도로에는 톨게이트 같은 것이 따로 없다. 어디에서 오든 이 도로로 진입하는 지점에 자동판독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나중에 요금이 청구되는 형식이다. 텔아비브 시계를 벗어나 조금 달리자 곧 초원과 같은 풍경이 펼쳐지더니 오늘의 첫 목적지인 브에르세바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사막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 일곱 개의 우물, 브에르세바

브에르세바는 성서에도 여러 번 언급된 매우 오래된 도시이며, ‘일곱 개의 우물’ 또는 ‘언약의 우물’이라는 뜻이라 한다. 창세기에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간에 여기에 있는 우물을 두고 맹세하였다고 되어있으니 ‘언약의 우물’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사악이 이곳에 일곱 개의 우물을 팠으니 ‘일곱 개의 우물’도 되겠는데, 하나의 단어로 두 개의 다른 의미를 모두 담을 수 있는 것이 재미있다.

브에르세바는 현재 이스라엘 남부를 대표하는 일곱 번째로 큰 도시이며, ‘네게브의 수도’라고도 불린다. 예로부터 이스라엘의 영토를 일컬을 때 ‘단에서 브에르세바까지’라고 하였는데, 브에르세바를 넘어서면 네게브 사막이 펼쳐진다.

브에르세바는 특히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이사악과 야곱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활동 무대로 성서에 기록되어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 이사악을 낳은 것이 이 부근이며, 이사악의 아들 야곱이 형 에사우를 속이고 아버지의 상속 축복을 받은 곳도 이곳이다. 야곱은 브에르세바를 떠난 후 천국에 이르는 계단을 꿈꾸었다. 이후 브에르세바는 여호수아, 사무엘, 사울, 엘리야 등 히브리 성서 시대에 살았던 여러 사람의 무대였지만, 나는 특히 이곳에서 ‘나그네 살이’를 했다고 성서에 쓰여 있는 아브라함에 대해 알고 싶었다.


─ 아브라함, 누구의 조상인가

성서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노아의 10세손인 테라의 아들인데, 테라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그리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데리고 고향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에 머물다 거기에서 죽는다. 우르는 지금은 이라크에 속하고, 하란은 터키에 있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는 매우 강력하고 부유한 수메르의 성읍 중 하나였다. 수메르인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룩했는데 농업, 상업, 수학, 천문학, 예술, 건축, 문학 등이 발달했다.

아버지 테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과 일행은 가나안 땅으로 여행을 계속하고 세켐에 이른다. 세켐은 현재 팔레스타인의 서안지구에 속하는 나블루스이다. 가나안 땅에 심한 가뭄이 들자 그들은 이집트 땅으로 내려가 살다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거기서 쫓겨났다. 그들은 다시 가나안 땅의 베텔 근처로 돌아왔으나 불어난 식솔들의 문제로 조카 롯은 지금의 요르단 땅으로 떠나가고, 아브라함 일행은 헤브론 근처의 마므레에 제단을 쌓고 정착한다. 이후 여러 사건에 관계되면서 사해 근방의 여러 도시를 거쳐 브에르세바에 이르기까지 전전하는데, 이 과정 중에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고 그 민족이 영원히 살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한다. 죽은 뒤에는 헤브론의 막펠라 동굴에 먼저 자리를 잡은 아내 사라 곁에 묻혔다.

이슬람의 경우, 아브라함을 ‘이브라힘’으로 부르고, 정통성이 이사악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통하여 이어진다고 믿는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아브라함에 대한 견해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슬람에서 가장 성스러운 성소로 여겨지는 메카의 카바 신전을 세운 사람이 이브라힘이라고 할 정도로 그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는 물론 유대교에 못지않은 것 같다.

그러면 이렇게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세계 3대 유일신 종교에서 모두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일까? 성서나 쿠란의 기록에 따른다�



출판사서평

도서출판 인디라이프는 창립기념 기획 출판물인 ‘인디 부부의 내 맘대로 세계여행’ 시리즈의 두 번째 책으로 홍은표 작가의 ‘이스라엘 기행’을 출간하였다.
‘인디 부부’란 저자가 동갑내기 아내와 자신을 일러 부르는 호칭으로 저자의 아내는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오래된 그이터’를 출간한 안정옥 작가이다. ‘인디 부부’의 의미에는 60 이후의 삶도 전과 같이 열정을 다해 살아갈 것이라는 다짐이 들어있다고 한다.
이 부부에게 여행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중요한 인생의 변곡점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으면 이들 부부는 서슴없이 짐을 꾸려 나섰다. 60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이 많을 때 이들이 택한 여행지는 이스라엘이었다. 저자에게 이스라엘은 가고 싶은 곳이었다기 보다는 언젠가는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고 한다.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는 시점에 이스라엘은 그가 품고 있는 여러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하면 보통 생각하게 되는 ‘성지순례’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세속적인 입장에서 외부자의 관점으로 역사의 현장을 살피고 거기에 사는 여러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였다. 부부는 렌터카를 빌어 네게브 사막에서 시작하여 홍해, 사해, 갈릴리 호수, 지중해 연안을 거쳐 요르단강 서안에 이르고 마침내 예루살렘에 들게 된다. 이 여정에서 이들은 팔레스타인 땅의 특별한 자연경관과 함께 많은 역사의 아이러니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가장 작가의 눈길을 끈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의 일상적 삶은 꾸준히, 힘차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저자는 담백한 글과 본인이 찍은 깔끔한 사진으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해 나가면서,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이나 편견이 들어가 있는 견해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객관적인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여행 마지막 날은 공교롭게도 유월절을 맞는 안식일이었고, 이때의 특별한 경험이 저자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안식년이라는 깨우침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여행 이후 저자는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 냈다. 그동안 오래 몸담았던 사업을 내려놓고 아내와 함께 본인들이 가장 하고 싶어 했던 여행 관련된 일을 시작한 것은 물론, 부부와 또 다른 여행자들의 여행 경험을 엮어내는 출판 사업도 함께 열어, 제 힘으로 우선 부부의 책을 펴내게 되었다.
자신들이 꿈꾸는 여행을 스스로 계획하고, 본인들의 힘으로 실행하며, 보고 느낀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남겨 마침내 책으로 세상에 내어놓기 까지, 이들이 스스로 해내지 않은 것이 없다. 부부가 표방하는 ‘인디라이프’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1

─ 머리말 중에서 ─

이 책은 '성지순례기'가 아니며, 부부 여행자가 세속적인 눈으로 이스라엘의 여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는 얘기를 하듯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산다.
그러나 그 사회는 여러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크게 벌어진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이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을 나름대로 아울러가면서 생활해 나가는 것을 보며, 우리가 비슷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용한 사례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선입견과 달리 이스라엘이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한 요소를 갖고 있으며,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보고 배울 점도 많다는 것을 알리은데 작은 역할이나마 한다면 다행이겠다.

2018년 홍은표




2

이스라엘의 국토면적은 남한의 5분의 1쯤 된다. 이스라엘은 매우 복잡하게 다차원적으로 분열된 구조로 되어있다. 1)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문제, 2) 종교적인 사람과 세속적인 사람 간의 문제, 3) 이주해온 사람들과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 간의 문제, 4) 그리고 유대교의 아슈케나지와 스파라디 계열 간의문제 등 네 가지 문제를 이스라엘 사회가 가진 대표적인 대립요소라 지적하고 있다.

(* 아슈케나지는 동유럽이나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유대인이며, 스파라디는 스페인 레콘키스타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되어 북아프리카와 오스만투르크 지배 지역 또는 다른 유럽 국가로 이주해 살전 유대인이다.)





3





 마리아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2천년 전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여자는 14세 전후에 조혼하였다는 풍습에 따른다면, 수태고지를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나이도 그쯤 되었을 것이며, 아들인 예수와도 그 정도의 차이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굴도 희고 작으며 갸름한 코카서스 인종이라기보다는 다소 검고 턱선이 더 완만한 셈족 여인의 얼굴이었을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모습보다도 성모영보성당의 1층 벽감에 모셔진 성모상의 모습이 가장 사실에 가까울 것 같다. 사실 나사렛의 거리에서 만난 어린 여학생들에게서 그런 마리아의 모습을 보았다.




성모영보성당(수태고지교회)의 성모상




傳承에 따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마리아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고 일찍 죽었을 거라고 한다. 성모영보성덩 한쪽에 있는 성요셉성당의 나이든 요셉의 坐像은 걱정이 많아 보인다. 왜 고민과 걱정이 없었겠는가. 이런 요셉과 살았던 마리아는 평화롭고 행복하였을까. 하층민인 목수의 벌이도 변변찮은 터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미래를 꿈꾸기 힘든 상황 속에서 마리아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갔을까?

아들이 커서 가장을 고울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좀 나아진 듯했다가 요셉이 먼저 세상을 뜬 후에, 믿고 의지했던 아들마져 홀연히 세상 속으로 가출해 버리고, 모처럼 찾아간 아들이 자기 앞에서 홀대하는 듯한 말을 했을 때 그 가슴은 어떠했을까. 무엇보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아들을 마주한 심정은. . . .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얘기가 분분하지만 세속적으로 보자면 어느 것도 좋은 결말이 아니다.




 




 성요셉성당은 성모영보성당에 붙어 있는데, 지하에 요셉의 작업장이었다는 동굴이 있다. 성용셉성당 마당에 앉아 있는 요셉의 좌상은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아내가 낳른 맏아들이 내 아들이 아니라는데, 마리아의 수태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고. . . . 먹일 자식들은 많아졌는데 몸은 늙어 힘들어지고, 갈릴레아의 공기는 언제나 불안하고 어수선했을테니.





성모영보성당에 붙어 있는 성요셉성당의 요셉상




요셉은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어린 예수에게 목수일을 가르치며 함께 일 하였을 것이다. 늙은 요셉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다 세상을 떴겠지만, 젊은 예수는 그런 삶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서른 살에 분연히 들고 일어난 것이다.

성요셉성당은 성가족성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교회는 성가정축일을 지정하고 예수를 본받아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어머니를 기쁘게 하여 화목한 성가정을 이루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가 어떻게 아버지 요셉을 영광스럽게 하고, 어머니 마리아를 기쁘게 하였는지 나로서는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에수는 어머니와 형제를 떠나 더 큰 大意에 자기 몸을 바쳤다. 마리아는 늘 불안한 마음으로 집을 떠난 아들의 소식에 마음 졸이다가, 마침내 불온분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 아들을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여기에 성가정(聖家庭)이라는 이름이 들어설 자리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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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끝나자 시온주의 유대인들은 대거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왔다. 이러한 운동에는 시온주의자들의 조직과 자금이 집중적으로 동원 되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영국의위임통치 아래 있었으나, 시온주의자들은 무장조직을 동원하여 불법 이주를 금지한 영국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그러면서 풍부한 자금으로 대형 선박을 사들여 유대인을 유럽으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밀항 작전을 벌였다.


1947년 7월 12일에 4500여 명의 유대인을 태운 미국의 증기선 워필드호가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출발하였다. 이 배는 엿새 뒤 팔레스타인 해안에서 40km 떨어진 공해에서 영국해군에 나포되어 하이파로 예인되었다. 이 배에 타고 있던 유대인들은 유럽으로 되돌려 보내져 영국군이 괸리하는 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여기까지가 실제 벌어진 사건의 개요이다. 그런데 1958년에 이 사건을 모티프로 미국의 유대인 작가 레온 우리스가 <엑소더스>라는 소설을 발표했으며, 1960년에는 같은 제목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영광의 탈출>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실제 사실과 달리 엑소더스호가 영국을 굴복시키고 하이파 항구에 닻을 내리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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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엔 칼을!'이라는 출처도 분명치 않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슬람의 호전성에 대해 교육받아온 우리지만, 내가 살펴본 바로는 코란 대신에 바이블이라고 써 넣어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다. 내게 있어 오스만투르크는 '관용'이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벽면에 그려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콘과 같은 비잔틴 모자이크를 후ㅐ손하지 않고 엷은 회칠로 가려놓기만 했던 것은 그들의 관용정신을 나타내는 사례일 것이다.


반대로 기독교도들이 정복한 곳에서는 참혹한 파괴와 약탈이 있었다. 여기 아코에 있던 십자군도 예외가 아니다. 십자군이 떠난 뒤 아코에 들어온 오스만투르크는 남아 있던 도시를 파괴하지 않고 자기들 새 도시의 튼튼한 기초로 사용한 것이니 얼마나 현명한 처사였던가.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그곳에 살고 있던 아랍인과 유대인 수만 명을 학살했다.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다시 잃고 재탈환을 포기한 이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같은 기독교인을 약탈하고 학살하였다. 그러나 이와 달리 예루살렘을 되찭은 이슬람의 지도자 살라딘은 십자군과 기독교도가 에루살렘을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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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난민촌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전쟁이나 1967년 6일전쟁 때 발생한 난민과 그 후손들을 수용하고 있는 곳이다. 이들 난민은 이스라엘의 무력에 의해 쫒겨났거나, 전쟁의 공포를 피해 떠났거나, 아니면 아랍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떠난 사람들인데, 현재의 예루살렘성안 유대인 구역에 살던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난민의 숫자가 400만 명이 넘는데, 그 중 200만 명 가까이가 이웃 요르단에 있고, 가자지구에 100만 명, 요르단강 서안에 80여만 명 정도가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 전체 인구가 800만 명 정도라는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이고, 요르단의 경우에도 상당히 심각한 사회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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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를 제외한다면, 사실 이스라엘은 여행지로 그렇게 주목받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선입견에 더해서 분쟁의 이미지가 깊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본 이스라엘은 세속적 시각으로도 매력이 넘쳐나는 나라였다.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지형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이색적이고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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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역사기행(영광과분노의땅)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역사기행(영광과분노의땅)
저자  오가와 히데키        
 2001.2. - 서적 절판   

오가와 히데키(小川秀樹)는 1956년 출생으로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벨기에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루뱅 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했다. 그 후 UN을 비롯한 국제 기구와 이스라엘 주재 일본대사관 등지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국제 문제 저널리스트로 활약중이다.
저서로는 『벨기에, 유럽이 보이는 나라』『남아프리카 현장에서』『국제분쟁과 일본인』 등이 있다.



목차

제1부 약속의 땅 가나안
1. 아브라함의 자손들
2. 하늘의 역사, 땅의 역사
3. 성령의 광야에 서다

제2부 분노의 땅 팔레스타인
1. 우리도 이 땅에 조상을 묻었다
2. 슬픈 사마리아 사람들
3. 다윗과 솔로몬의 탄식

제3부 기적의 땅 갈릴리
1. 갈릴리에 나타난 예수
2. 환상속으로 떠나는 여행
3. 신의 전사, 십자군의 빛과 그림자

 


출판사서평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갈릴리 - 약속의 땅 이스라엘!
분쟁이 끊이지 않는 시련의 땅 팔레스타인!


국제기구와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에 근무했던 저자의 성지순례기.
국제문제 전문가인 저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적인 배경을 풀어낸다.

"중동평화에 먹구름" 매파인 샤론이 이스라엘 총리로 당선되자 외신면은 앞으로의 중동평화를 우려하는 기사를 일제히 보도했다.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면, 이렇듯 성지 예루살렘과 더불어 일촉즉발의 중동분쟁의 중심지란 상반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나사렛, 베들레헴 등 기독교 성지를 비롯하여 눈이 내리는 북쪽 산에서 이글거리는 지중해에서 육지 속의 바다 사해(死海)까지, 진기한 구경거리와 유적지로 가득한 곳이다. 또한 한 곳에 고대 유대, 그리스-로마, 이슬람 등의 유적이 공존하는 경우도 있어 살아있는 '인류문명사 박물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여러 곳을 샅샅이 둘러본 경험이 녹아있으며, 동시에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는 '자신이 느낀 것'을 찾으려는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 탓에 숨겨진 지역이나 유적지에 대한 언급도 적지 않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종교 국가, 무섭고 위험하다는 이미지로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곳이다.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가 발생한 성지로서, 일반 독자들에게는 영광과 분노의 역사가 교차되었던 역사현장으로서 흥미롭고 매력적인 곳이 아닐 수 없다.

본문 중에서


원래 '이스라엘'이란 족장 야곱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지만,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진다. 히브리 부족연합체를 이스라엘이라 하기도 하고, 사울 왕 이후 통일왕국을 이스라엘이라고도 합니다. 솔로몬 왕 이후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왕국이 그 명칭을 계승하기도 했습니다. 분열은 되었지만 민족과 역사의 총칭으로서 이스라엘이 사용되었고, 또한 20세기에 탄생한 신생국가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현재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국민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는 '이스라엘 국민'이라고 부르고 거기에는 소수 아랍계 주민도 포함됩니다.

같은 예로 '유다'도, 히브리의 일족으로서의 유다, 남부지방의 유다, 왕국분열후의 남유다 왕국, 바빌론 유수 이후 히브리인을 지탱했던 유태교 등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유다만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유태계'라고 부릅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할 경우는 '이스라엘인' '유다인'을 각각 북이스라엘 왕국, 남유다왕국의 맥락으로 구별해서 사용하고, 양자를 총칭하는 경우에는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물론 '유태인'이라고 쓴 곳도 있습니다.
(본문 10 쪽)



이스라엘인을 구별할 수 있는 네 가지 기준이 있다. 네 가지 기준이란 이스라엘 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4개의 기본적인 대립요소로 그것은 1)'종교적/세속적' , 2)'유대/아랍' , 3)'이주자...사브라',  4)'아슈케나지/스파라디' '를 말한다.

첫째 '종교적/세속적'이란, 이스라엘은 그 이미지에 반해서 많은 국민은 그다지 종교적이지 못하다.

둘째, '유대/아랍'의 구분도 언뜻 보기에 단순해 보이지만, 이야기하기가 까다로운 것은 유대계이지만 아랍계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또 아랍계라 할지라도 금발의 유럽적인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가자 난민 캠프와 북부 고원에 사는 이슬람 일파 드루즈족의 마을에서도 금발인 사람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용모만으로 판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셋째, '이주자/사브라'의 사라라는 말은 이스라엘 태생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벌써 사브라가 인구의 60%를 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구별인 '아슈케나지/스파라디'는 동유럽, 러시아계의 유대인과, 1492년 레콩키스타의 여파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나 북아프리카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지역 또는 다른 유럽 국가로 이주해 살았던 유대인과의 구별이다. 이스라엘 건국 때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아슈케나지였기 때문에 지금도 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덧붙여서 평화를 추진해 노벨 평화상을 탄 라빈(1922∼1955) 수상과 펠레스 전수상도 아슈케나지였다.
(본문 35-38 쪽)



중동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서안, 가자 지역이라는 말을 듣고 지도를 보다가 서안이 가자와 이스라엘 동쪽에 위치한 것을 보고 당황한다. 서안은 '요르단 강 서안'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당연히 반대쪽은 '요르단 강 동안'이라고 한다.
선입견과 현실의 괴리감은 서안 자체만을 두고도 말할 수 있다. 나무가 거의 없고 산이 많은 서안을 자동차로 달리고 있으면 경사면에 있는 아랍식 마을이 의외로 아름답다. 하지만 분쟁지역이라는 인상과 함께 수목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곳이 너무나 볼모지처럼 보인다. 사실 문화적, 역사적으로 서안지역은 불모의 땅이 아니다. 오히려 이만큼 풍부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지역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현실적으로 서안은 요르단 계곡과 함께 수자원의 보고이다. 이스라엘이 서안 점령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수자원 확보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전문가들은 서안만으로도 난민이나 국외 거주자를 포함한 600만 팔레스타인이 충분히 살 수 있다고 할 정도이다.
(본문 123-124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