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정호승 시집,《수선화에게》

알래스카 Ⅱ 2019. 5. 4. 16:58








풍경 달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하나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워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워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증명사진



주민등록증을

재발급받기 위해

넥타이를 매고 단정히

증명사진을 찍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슬픔 이외에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서

증명사진에 내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 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해마다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







수선화에게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어느 벽보판 앞에서



어느 벽보판 앞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

내 얼굴이 있었다

안경을 끼고 입꼬리가 축 처진 게

영락없이 내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大罪를 지어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







창문



창문을 닫으면 창이 아니라 벽이다

창문은 닫으면 문이 아니라 벽이다

창문이 창이 되기 위해서는

창과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창문이

닫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다


지금까지는

창문을 꼭 닫아야만 밤이 오는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열었기 때문에

밤하늘에 별이 빛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제 창문을 연다

당신을 향해 창문을 열고 별을 바라본다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가난한 사람에게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 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마음 하나 창 밖에 걸어두었습니다.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

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을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摩旨] 부처에게 올리는 밥 












내 나이가 이젠,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읽기엔…좀 유치하게 느껴지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