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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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은 화가로서 활동한 것이 극히 짧아서 작품이랄 게 없을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닙디다. 회화작품이 의외로 많고 수준도 대단히 높더라는 ─
또 한 명의 천재를 보았습니다.
[이주은의 미술관] '마르셀 뒤샹' 展
"변기 갖다놓고 예술작품"…
미술관에 가면 정말 존경스러운 작품도 만날 수 있지만, 때론 "이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싶은 작품도 있을 거예요. 어떤 것은 작품인지 물건인지 언뜻 구별하기조차 힘들지요. 과연 어떤 기준에서 이것은 예술작품이라 부르고, 저것은 그냥 물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프랑스 작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전시회를 보면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뒤샹은 예술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놓은 현대미술의 거장이니까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지금 그의 작품 150여점을 소개하고 있으니, 답을 확인해 볼 좋은 기회입니다. '마르셀 뒤샹' 전시는 4월 7일까지 열립니다.
![]() ▲ 작품1 - ‘샘’, 1950(1917년 원본의 복제품), 자기 소변기. |
뒤샹은 남자용 소변기〈작품1〉를 미술전시장에 가져다 놓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어요. 공장에서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예술작품으로 바꾸어 내놓는 작업을 그는 시도하고 있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소변기는 좀 더 과감하고 배짱 있는 작품이었어요. 왜냐면 누가 봐도 소변기는 화장실에나 어울리는 물건이었고, 품격 높은 예술과는 거리가 먼 물건일 테니까요.
'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장에 놓인 소변기는 '이것은 샘이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이것은 예술일까?'하고 묻는 것 같아요. 예술가가 작품으로 알쏭달쏭한 문제를 내면, 감상자는 퀴즈를 풀 듯 답을 생각해보는 게임인가 봅니다.
![]() ▲ 작품2 - ‘체스 게임’, 1910, 캔버스에 유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展 |
이렇듯 뒤샹이 예술을 게임처럼 여기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작품2〉를 보세요. 스물세 살 무렵의 뒤샹은 당시의 다른 화가들처럼 이런 그림을 그렸어요. 여기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자들은 차를 마시며 쉬고 있고 두 남자는 체스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뒤샹은 체스에 흠뻑 빠져 있었어요. 평생을 두고 체스를 좋아해서, 훗날 체스 대회에도 출전하여 마스터의 지위를 받았고 프로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답니다. 그는 늘 체스보드 앞에 누군가와 마주 앉아 게임하는 기분으로 작품을 구상했어요.
![]() ▲ 작품3 - ‘초콜릿 분쇄기(No.1)’, 1913, 캔버스에 유화. |
체스 못지않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기계였습니다. 〈작품3〉은 초콜릿 덩어리를 가루로 만드는 분쇄기인데요. 세 개의 원기둥이 맞물려 빙글빙글 돌아가며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아주 단순한 기계입니다. 뒤샹은 기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여겼어요. 그리고 기계도 사람처럼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는 기계들이 물건을 만드는 세상에서 예술작품은 반드시 예술가의 손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뒤샹 이전에는 천재적인 예술가가 고민을 거듭하고 열정을 쏟아내어 창조한 것만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았어요. 그러나 뒤샹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술작품이 되는 새로운 조건 세 가지를 내놓은 셈이죠. 이미 만들어진 물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 자기 이름을 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전시장에 들여놓는 것입니다.
마치 과거에는 사람들이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지만, 요즘에는 상점에서 파는 수많은 옷 중에서 하나를 골라 사는 것과 같아요. 일단 선택하여 내가 입고 다니고, 내 옷장에 넣어두면 그게 내 옷이 되는 것처럼 예술작품에서도 선택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 ▲ 작품4 - ‘파리의 공기 50cc’, 1919, 유리 앰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展 |
그러면 〈작품4〉에서 뒤샹은 무얼 선택했는지 볼까요? 이것은 약국에서 파는 둥근 유리병인데, 주사액이 들어 있던 상품이었어요. 뒤샹은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활동을 했는데, 어느 날 미국인 친구에게 파리의 기념품을 사다 주고 싶었어요. 무엇이 좋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그는 약국에 들어가서 유리병을 고른 후, 약사에게 액체를 비우고 다시 봉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그것을 뉴욕으로 가져가 친구에게 선물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파리의 공기가 50㏄ 들어 있다네." 평범하던 빈 유리병이 재치 넘치는 기념품으로 탈바꿈한 것은 바로 아이디어 덕분이지요.
![]() ▲ 작품5 -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혹은 마르셀 뒤샹에 의한, 또는 에로즈 셀라비로부터 혹은 에로즈 셀라비에 의한(여행가방 속 상자)’, 1966.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展 |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라고 믿었던 뒤샹은 자기 작품이 깨지거나 전쟁 중에 분실되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 뒤늦게 자기 평생의 작품들을 한곳에 넣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5〉를 보세요. 그동안의 결실들이 축소판으로 차곡차곡 들어 있는 상자예요. 상자를 열어 양옆으로 펼치면 아주 작은 이동식 미술관으로 변해요. 이 상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300여 점 제작됐는데, 하나하나 예술가의 지시와 손을 거쳐 만들어졌답니다. 이번엔 공장에서 찍은 이미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예술가의 정성이 실린 원본을 남긴 셈이지요.
뒤샹의 예술적 삶을 압축해놓은 이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또다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정말로 예술은 오직 아이디어일 뿐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결국 예술은 예술가의 흔적이 깃든 원본에 살아 있다는 뜻일까요? 그는 1968년에 생을 마감하면서, 50년 후의 감상자들과도 계속해서 예술로 게임을 하길 바랐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습니다. 작품이 물음표를 던지면 우리 역시 또다시 물음표로 응해야 하는, 쉽사리 끝나지 않는 게임이지요.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조선일보
뒤샹(Marcel Duchamp)은 1887년 프랑스 루앙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다.
공증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예술을 하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뒤샹 외에도 큰형, 작은형, 누이동생까지 모두 예술가가 되었다.
뒤샹이 살던 시대는 미술사에 있어서 유례없이 많은 사조와 이즘이 난무하던 시대이다.
이러한 상황은 뒤샹이 걸어간 길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1907년부터 1910년까지는 야수주의 속했고, 1910년 이후에는 입체파로 전환하였다.
1912년 2월 살롱 앙테팡당에서 열린 입체파 전시에서 뒤샹은 자신의 작품 한 점을 걸게 되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가장 획기적인 그림이었다.
바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라 명명된 이 작품은
그가 회화잡지에서 보았던 에띠엔느 마레의 기록사진이 움직이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입체파 전시에 내건 그림이었지만, 입체파 화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작품 제목을 지워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뒤샹은 작품을 떼어내어 집으로 가져갔고, 이로써 입체파와도 결별했다.
"나는 모든 회화 경향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회화작업 속에서는 근원적인 만족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1912년 이후로 직업적 의미에서 화가라는 직업을 그만 두기로 했다. "
그러나, 1913년 뉴욕에서 있었던 '아모리 쇼우 전시회"에서
이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뉴욕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으며, 그를 유명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전시를 개최했던 월터 패치(Walter Pach)는 1914년 파리를 방문하여 그를 미국으로 초청한다.
1915년 드디어 뒤샹은 뉴욕에 발을 내디뎠다.
그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기자들이 인터뷰를 청했을 정도로 뒤샹의 인기는 대단했다.
월터 패치는 그에게 집을 마련해 주었고, 뒤샹은 프랑스어 교습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의 작품들은 레디메이드로 통칭된다. 레디메이드란 '기성품'이라는 뜻이다.
즉, 원래의 용도로 쓰이지 않고 '작가의 선택'에 의해 전시장에 놓여 짐으로써
그 기성품은 이미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다른 '무엇(작품)'이 된다.
작가는 작품을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해야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이미 만들어진(READ-MADE) 것을 작품의 일부로 혹은 전체로 이용할 수 있다.
"Bicycle Wheel" 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작품을 제작할 때 개념이라든가 다른 어떤 사고를 작품에 반영시키지 않는다.
단지 자전거의 앞바퀴를 떼어내 작업실에 있는 부엌 의자에 거꾸로 부착시키고,
손으로 돌려 회전시킬 수 있도록 장치한 것 뿐이다.
그저 필요한 것들을 방에 놔두는 것처럼 작업했으며,
그것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Bicycle Wheel. 1913
Bottle neck 1914.
"Bottle neck"은 양철로 된 병 건조대를 5단으로 연셜시켜서 병을 건조하는 장치로
사용하고 제작한 다음, 자신이 서명을 한 것이다.
단순히 서명 만으로 '쓸모있는 선반'에서 '예술작품'으로 변모된 것이다.
이렇듯 뒤샹의 작업은 지난 수세기 동안 이어온 유럽 미술을 조롱하듯 레디메이드를 탄생시켰다.
"중요한 것은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고, 또 낡은 형식을 배제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천편일률성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손 대신에 자를 써서 선을 곧게 그리고, 또 인성은 배제하고 방향을 정한다"
그가 뉴욕에서 가장 먼저 제작은 레디메이드 작품은 눈삽이다.
어느날 컬럼버스 가의 철물점에서 눈삽을 사다가 친히 서명을 하고
<부러진 팔에 앞서 In advance of the Broken Arm>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뒤샹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건 바로 '샘'이다.
1917년 그는 앙데팡당 미술가협회가 주최한 전시위원회에 익명으로 이 작품을 보냈다.
전시 담당자들은 당연 이 작품의 전시를 거부했다.
뒤샹은 왜 이런 일을 했는가?
"단지 변기를 오브제로 선택했을 뿐이다.
일상적인 평범한 물건을 택하여 새로운 제목을 정하고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음으로써
변기에 대한 기존의 의미를 없애고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 낸 것이다."
변기는 더 이상 화장실의 변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작품이 된 것이다.
2년 뒤 뒤샹은 또 한 번 발칙한 짓으로 세상을 놀래킨다.
"지오콘다는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칭송받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가지고 전세계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그래서 고심한 나머지 콧수염을 예술적으로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가엾은 여인은 턱수염과 콧수염을 그리고 나니 무척 남성적으로 보여서
레오나르도의 동성연애적인 성향과 무척 잘 어울려 보였다. "
그는 세계대전으로 인해 기성의 모든 질서를 부정하는 다다이스트의 선봉자가 된 셈이었다.
파리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그에게 다다주의자들보다 더 많은 존경과 경외심을 보였고,
초현실주의의 지도자 앙드레 브르통은 그를 당대의 가장 위대한 미술가로 평가하였다.
이후 뒤샹은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계속 그의 실험정신을 불태웠다.
그의 작품들은 점점 비싼 값에 팔려나갔고, 그에 관한 저술들은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바이블이 되었다.
1945년 뉴욕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전문지는 그에 관한 신화로 도배를 했고,
1958년에 미셀 사누이에가 펴낸 그에 관한 재담 집, 59년의 로버트 레벨의 연구서,
60년의 죠지 허드 해밀톤의 '녹색 상자'가 연이어 출간되는 등 뒤샹의 인기는 말 그대로 대단했다.
1963년 파사데나 미술관에서 개최된 회고전에서 뒤샹은 20세기 미술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이로부터 6년 뒤 81세로 뒤샹은 숨을 거둔다.
뒤샹이 숨을 거둔 1968년, 미국은 또 다른 뒤샹을 만나 흥분해 있었다.
변기, 삽, 자전거 바퀴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앤디 워홀은 캠벨 수프 통조림을 들고 나와 예술이라 외쳤다.
"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기 보다 모든 것에 회의를 갖는다.
모든 것에 회의를 가지면서 전에 없었던 무엇,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그 무엇을 찾아내야만 한다.
나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을 우회시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려 한다.
예술은 습관성 마약과 같다.
예술은 성실성이라든가 진실처럼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마르셀 뒤샹-
분류없음 2009.04.10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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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생산하는 물질주의 시대의 상품들을 예술가가 창작하는 오브제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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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일곱 살 이후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체스에 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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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가 루셀에게 열광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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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이 사용하는 튜브 물감들은 제조된 생산물이자 이미 완성된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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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부터 1910년까지는 부지런히 손발 놀린 '8년간의 수영 연습'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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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 안에 대리석 육면체가 든 작품 '왜 재채기를 하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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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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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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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원재훈 / 시인 글을 쓴 원재훈은 1986년 시 '공룡시대'로 등단했으며 <낙타의 사랑>,<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하네> 등의 시집과 <만남,은어와 함께 보낸 하루>,<모닝커피> 등의 소설,<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등의 산문집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집필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작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