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마르셀 뒤샹 - 국립현대미술관

알래스카 Ⅱ 2019. 3. 28. 09:08

















.



.



 

 



 



 



 



 



 



 



 



 


  

 



 


 





.





.


.






 

 



 



 



 



 






뒤샹은 화가로서 활동한 것이 극히 짧아서 작품이랄 게 없을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닙디다. 회화작품이 의외로 많고 수준도 대단히 높더라는 ─

또 한 명의 천재를 보았습니다.

















[이주은의 미술관] '마르셀 뒤샹' 展


 

"변기 갖다놓고 예술작품"…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놨죠

 

미술관에 가면 정말 존경스러운 작품도 만날 수 있지만, 때론 "이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싶은 작품도 있을 거예요. 어떤 것은 작품인지 물건인지 언뜻 구별하기조차 힘들지요. 과연 어떤 기준에서 이것은 예술작품이라 부르고, 저것은 그냥 물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프랑스 작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전시회를 보면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뒤샹은 예술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놓은 현대미술의 거장이니까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지금 그의 작품 150여점을 소개하고 있으니, 답을 확인해 볼 좋은 기회입니다. '마르셀 뒤샹' 전시는 4월 7일까지 열립니다.

▲ 작품1 - ‘샘’, 1950(1917년 원본의 복제품), 자기 소변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展

뒤샹은 남자용 소변기〈작품1〉를 미술전시장에 가져다 놓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어요. 공장에서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예술작품으로 바꾸어 내놓는 작업을 그는 시도하고 있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소변기는 좀 더 과감하고 배짱 있는 작품이었어요. 왜냐면 누가 봐도 소변기는 화장실에나 어울리는 물건이었고, 품격 높은 예술과는 거리가 먼 물건일 테니까요.

'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장에 놓인 소변기는 '이것은 샘이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이것은 예술일까?'하고 묻는 것 같아요. 예술가가 작품으로 알쏭달쏭한 문제를 내면, 감상자는 퀴즈를 풀 듯 답을 생각해보는 게임인가 봅니다.

▲ 작품2 - ‘체스 게임’, 1910, 캔버스에 유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展

이렇듯 뒤샹이 예술을 게임처럼 여기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작품2〉를 보세요. 스물세 살 무렵의 뒤샹은 당시의 다른 화가들처럼 이런 그림을 그렸어요. 여기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자들은 차를 마시며 쉬고 있고 두 남자는 체스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뒤샹은 체스에 흠뻑 빠져 있었어요. 평생을 두고 체스를 좋아해서, 훗날 체스 대회에도 출전하여 마스터의 지위를 받았고 프로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답니다. 그는 늘 체스보드 앞에 누군가와 마주 앉아 게임하는 기분으로 작품을 구상했어요.

▲ 작품3 - ‘초콜릿 분쇄기(No.1)’, 1913, 캔버스에 유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展

체스 못지않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기계였습니다. 〈작품3〉은 초콜릿 덩어리를 가루로 만드는 분쇄기인데요. 세 개의 원기둥이 맞물려 빙글빙글 돌아가며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아주 단순한 기계입니다. 뒤샹은 기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여겼어요. 그리고 기계도 사람처럼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는 기계들이 물건을 만드는 세상에서 예술작품은 반드시 예술가의 손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뒤샹 이전에는 천재적인 예술가가 고민을 거듭하고 열정을 쏟아내어 창조한 것만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았어요. 그러나 뒤샹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술작품이 되는 새로운 조건 세 가지를 내놓은 셈이죠. 이미 만들어진 물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 자기 이름을 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전시장에 들여놓는 것입니다.

마치 과거에는 사람들이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지만, 요즘에는 상점에서 파는 수많은 옷 중에서 하나를 골라 사는 것과 같아요. 일단 선택하여 내가 입고 다니고, 내 옷장에 넣어두면 그게 내 옷이 되는 것처럼 예술작품에서도 선택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 작품4 - ‘파리의 공기 50cc’, 1919, 유리 앰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展

그러면 〈작품4〉에서 뒤샹은 무얼 선택했는지 볼까요? 이것은 약국에서 파는 둥근 유리병인데, 주사액이 들어 있던 상품이었어요. 뒤샹은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활동을 했는데, 어느 날 미국인 친구에게 파리의 기념품을 사다 주고 싶었어요. 무엇이 좋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그는 약국에 들어가서 유리병을 고른 후, 약사에게 액체를 비우고 다시 봉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그것을 뉴욕으로 가져가 친구에게 선물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파리의 공기가 50㏄ 들어 있다네." 평범하던 빈 유리병이 재치 넘치는 기념품으로 탈바꿈한 것은 바로 아이디어 덕분이지요.

▲ 작품5 -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혹은 마르셀 뒤샹에 의한, 또는 에로즈 셀라비로부터 혹은 에로즈 셀라비에 의한(여행가방 속 상자)’, 1966.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展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라고 믿었던 뒤샹은 자기 작품이 깨지거나 전쟁 중에 분실되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 뒤늦게 자기 평생의 작품들을 한곳에 넣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5〉를 보세요. 그동안의 결실들이 축소판으로 차곡차곡 들어 있는 상자예요. 상자를 열어 양옆으로 펼치면 아주 작은 이동식 미술관으로 변해요. 이 상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300여 점 제작됐는데, 하나하나 예술가의 지시와 손을 거쳐 만들어졌답니다. 이번엔 공장에서 찍은 이미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예술가의 정성이 실린 원본을 남긴 셈이지요.

뒤샹의 예술적 삶을 압축해놓은 이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또다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정말로 예술은 오직 아이디어일 뿐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결국 예술은 예술가의 흔적이 깃든 원본에 살아 있다는 뜻일까요? 그는 1968년에 생을 마감하면서, 50년 후의 감상자들과도 계속해서 예술로 게임을 하길 바랐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습니다. 작품이 물음표를 던지면 우리 역시 또다시 물음표로 응해야 하는, 쉽사리 끝나지 않는 게임이지요.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조선일보













 


뒤샹(Marcel Duchamp)은 1887년 프랑스 루앙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다.

공증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예술을 하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뒤샹 외에도 큰형, 작은형, 누이동생까지 모두 예술가가 되었다.

뒤샹이 살던 시대는 미술사에 있어서 유례없이 많은 사조와 이즘이 난무하던 시대이다.

이러한 상황은 뒤샹이 걸어간 길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1907년부터 1910년까지는 야수주의 속했고, 1910년 이후에는 입체파로 전환하였다.

1912년 2월 살롱 앙테팡당에서 열린 입체파 전시에서 뒤샹은 자신의 작품 한 점을 걸게 되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가장 획기적인 그림이었다.

바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라 명명된 이 작품은

그가 회화잡지에서 보았던 에띠엔느 마레의 기록사진이 움직이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입체파 전시에 내건 그림이었지만, 입체파 화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작품 제목을 지워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뒤샹은 작품을 떼어내어 집으로 가져갔고, 이로써 입체파와도 결별했다.


"나는 모든 회화 경향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회화작업 속에서는 근원적인 만족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1912년 이후로 직업적 의미에서 화가라는 직업을 그만 두기로 했다. "


그러나, 1913년 뉴욕에서 있었던 '아모리 쇼우 전시회"에서

 이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뉴욕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으며, 그를 유명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전시를 개최했던 월터 패치(Walter Pach)는 1914년 파리를 방문하여 그를 미국으로 초청한다.

1915년 드디어 뒤샹은 뉴욕에 발을 내디뎠다.

그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기자들이 인터뷰를 청했을 정도로 뒤샹의 인기는 대단했다.

월터 패치는 그에게 집을 마련해 주었고, 뒤샹은 프랑스어 교습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의 작품들은 레디메이드로 통칭된다. 레디메이드란 '기성품'이라는 뜻이다.

즉, 원래의 용도로 쓰이지 않고 '작가의 선택'에 의해 전시장에 놓여 짐으로써

그 기성품은 이미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다른 '무엇(작품)'이 된다.


작가는 작품을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해야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이미 만들어진(READ-MADE) 것을 작품의 일부로 혹은 전체로 이용할 수 있다.

"Bicycle Wheel" 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작품을 제작할 때 개념이라든가 다른 어떤 사고를 작품에 반영시키지 않는다.

단지 자전거의 앞바퀴를 떼어내 작업실에 있는 부엌 의자에 거꾸로 부착시키고,

손으로 돌려 회전시킬 수 있도록 장치한 것 뿐이다.

그저 필요한 것들을 방에 놔두는 것처럼 작업했으며,

그것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Bicycle Wheel. 1913

 

Bottle neck 1914.

 

"Bottle neck"은 양철로 된 병 건조대를 5단으로 연셜시켜서 병을 건조하는 장치로

사용하고 제작한 다음, 자신이 서명을 한 것이다.

단순히 서명 만으로 '쓸모있는 선반'에서 '예술작품'으로 변모된 것이다.


이렇듯 뒤샹의 작업은 지난 수세기 동안 이어온 유럽 미술을 조롱하듯 레디메이드를 탄생시켰다.

"중요한 것은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고, 또 낡은 형식을 배제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천편일률성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손 대신에 자를 써서 선을 곧게 그리고, 또 인성은 배제하고 방향을 정한다"


그가 뉴욕에서 가장 먼저 제작은 레디메이드 작품은 눈삽이다.

어느날 컬럼버스 가의 철물점에서 눈삽을 사다가 친히 서명을 하고

<부러진 팔에 앞서 In advance of the Broken Arm>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뒤샹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건 바로 '샘'이다.

1917년 그는 앙데팡당 미술가협회가 주최한 전시위원회에 익명으로 이 작품을 보냈다.

전시 담당자들은 당연 이 작품의 전시를 거부했다.

뒤샹은 왜 이런 일을 했는가?


"단지 변기를 오브제로 선택했을 뿐이다.

일상적인 평범한 물건을 택하여 새로운 제목을 정하고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음으로써

변기에 대한 기존의 의미를 없애고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 낸 것이다."


변기는 더 이상 화장실의 변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작품이 된 것이다.

2년 뒤 뒤샹은 또 한 번 발칙한 짓으로 세상을 놀래킨다.

 



 


"지오콘다는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칭송받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가지고 전세계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그래서 고심한 나머지 콧수염을 예술적으로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가엾은 여인은 턱수염과 콧수염을 그리고 나니 무척 남성적으로 보여서

레오나르도의 동성연애적인 성향과 무척 잘 어울려 보였다. "

 

그는 세계대전으로 인해 기성의 모든 질서를 부정하는 다다이스트의 선봉자가 된 셈이었다.

파리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그에게 다다주의자들보다 더 많은 존경과 경외심을 보였고,

초현실주의의 지도자 앙드레 브르통은 그를 당대의 가장 위대한 미술가로 평가하였다.

이후 뒤샹은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계속 그의 실험정신을 불태웠다.  

그의 작품들은 점점 비싼 값에 팔려나갔고, 그에 관한 저술들은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바이블이 되었다.

1945년 뉴욕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전문지는 그에 관한 신화로 도배를 했고,

1958년에 미셀 사누이에가 펴낸 그에 관한 재담 집, 59년의 로버트 레벨의 연구서,

60년의 죠지 허드 해밀톤의 '녹색 상자'가 연이어 출간되는 등 뒤샹의 인기는 말 그대로 대단했다.

1963년 파사데나 미술관에서 개최된 회고전에서 뒤샹은 20세기 미술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이로부터 6년 뒤 81세로 뒤샹은 숨을 거둔다.

뒤샹이 숨을 거둔 1968년, 미국은 또 다른 뒤샹을 만나 흥분해 있었다.

변기, 삽, 자전거 바퀴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앤디 워홀은 캠벨 수프 통조림을 들고 나와 예술이라 외쳤다.

 

"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기 보다 모든 것에 회의를 갖는다.

모든 것에 회의를 가지면서 전에 없었던 무엇,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그 무엇을 찾아내야만 한다.

나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을 우회시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려 한다.

예술은 습관성 마약과 같다.

예술은 성실성이라든가 진실처럼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마르셀 뒤샹-












분류없음 2009.04.10 05:57

마르셀 뒤샹


1912년 항공 공학 박람회를 관람한 뒤 뒤샹은 친구인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 말했다.“이제 회화는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겠어? 말해보게 자넨 할 수 있나?” 뒤샹이 ‘이제 회화가 망했다.’고 말한 그 자리에서 새로운 미술의 탄생은 예감되었다.

이제 뒤샹을 필두로 하는 현대 미술이 그 문을 열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회화 작품에 익숙한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우리 주위에 아주 익숙한 ‘물건’들이 아주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이다.뒤샹은 이전 세대의 화가들과 완전히 다른 화가로 살았다. 고흐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화가가 손으로 보여주는 예술에 대한 세상을 바꾸어버렸다. 그의 오브제들은 낯선 것이었다. 시장에서 구해온 남성용 소변기를 세워놓고 샘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는 논란의 중심에 섰다. 비난과 폭언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게 뭐야, 미쳤나? 이제 예술은 망했군’. 이런 반응과 더불어 전통적인 방법에서 뭔가 돌파구를 찾는 새로운 예술가들에게 열정적인 반응이 터진다.


그는 화가의 손을 해방시켰다. 그의 오브제 작품들과 소변기, 유리, 나무 상자와 같은 ‘레디메이드’ 즉 기성품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산업화 시대로 도래한 물질주의 시대 대량생산 시대에 예술가로서 탄생한 것이다. 마르셀 뒤샹을 만든 것은 현대 자본주의, 대량 생산 시대이기도 하다.


대량생산하는 물질주의 시대의 상품들을 예술가가 창작하는 오브제로 삼아


화가와 친분을 나누었던 시인 아폴리네르는 피카비아, 뒤샹과 함께 한 자동차 여행 끝에 이렇게 쓴다. 예술가의 자유로움에 대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시인의 직관이다.“치마부에의 그림이 거리에 도열해 있는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루이 블레리오의 비행기를 보았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인류는 지난 천 년 동안 영광스러운 인문 과학의 호위를 받으며 고민해왔던 것이다. 어쩌면 마르셀 뒤샹처럼 미학적 편견에서 자유롭고 열성적인 예술가에게는 예술과 사람을 융화시키는 것이 책무일 것이다.”


뒤샹은 회화를 20세기 사회상의 산물로 변화시켰다. 예술이 ‘독창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뒤샹의 이러한 작업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전환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뒤샹, 저 멋진 것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세상에서 고흐처럼 자신의 귀를 잘라내며 그림 한 점을 완성시키는 예술가의 초상은 이제 뒤샹이라는 이름 앞에 전 시대이며, 고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잭슨 폴록과 같은 현대화가들, 팝 아트, 시네티즘, 미니멀 아트, 개념 예술, 보디 아트 등등 우리들에게 난해하게 보이지만 중요한 현대 미술이 폭죽이 터지듯이 이 시대의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한다. 뒤샹은 현대 미술의 처음을 열었고, 그들에게 자유로운 ‘화가의 손’을 선물하고 정작 자신은 침묵했다.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서른 일곱 살 이후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체스에 몰입

1923년에 <큰 유리>라는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기고, 뒤샹은 표면적으로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체스에 몰두하면서 1968년 “하기야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훗날 <위대한 침묵>의 기간이라는 삶을 살았다. 미국에서는 예술가로서 영광을 누렸지만, 정작 조국 프랑스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하지 않고, 체스를 두고 파리와 뉴욕 등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거의 한 평생을 독신으로 (젊어 3개월 동안 잠깐 결혼 생활을 했고, 만년에 결혼을 한번 더 하긴 하지만) 살면서 불가에서 말하는 ‘무욕의 삶’을 살았다.



예술가로서 이러한 행동 때문이었는지 뒤샹은 말년에 “나는 그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고 그 어느 누구도 내게 빚을 지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유파나 이즘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침묵 속에서 작업한 <큰 유리>역시 사후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작업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도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이 침묵의 세월에 대해 만년의 뒤샹은 카반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단절은 여러 가지 일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예술가들과 매일같이 만나는 일, 예술가들과 살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하는 일이 나는 마음에 안 들었다. 1912년에 나를 좀 ‘화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독립전시회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를 출품했을 때였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전시회 개막식 전에 철거하라고 내게 요구했다. 그 당시 가장 앞선 사람들은 극히 지적인 사람들이었다. <나체> 그림은 그들이 이미 그어 놓은 선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2,3년간 입체주의가 계속되었으며, 앞으로 닥쳐올 것을 예견하고 절대로 분명하고 정확한 노선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순진하고 어리석은 일로 보였다. 그 당시 그 일은, 내가 자유롭다고 믿었던 예술가들로부터 나왔고, 나를 낙담시켰다. 나는 직장을 구하고자 했고,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그리고 혼자서 <큰 유리> 작업을 할 때의 심경을 토로하고, 사각형 속에 갇혀 있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대신 그는 유리의 투명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작품에 대한 열정을 상실했고, 충격도 갑작스러운 결정도 없이 그렇게 살았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종하는 그룹은 그의 작품에서 열정과 충격을 받는다. 새로움에 대한 이른바 전위적인 예술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반응은 거절과 퇴짜였다. 그러한 풍토 속에서 뒤샹은 화가들과 어울려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체스에 몰입해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실력을 보인다.


"나는 소설가 루셀에게 열광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뒤샹은 1887년 7월 28일에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인 블랭빌에서 태어났다.공증인인 뒤샹의 아버지는 모두 7남매를 두었는데, 생존한 6남매 중에서 뒤샹은 셋째 아들이었다. 여유 있는 집안이었고, 밤이면 체스를 두고 음악소리가 항상 흘러나왔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복한 가정 환경이었다. 큰 형은 화가, 작은 형은 조각가였다. 뒤샹의 초기 작품들은 그에게 친밀한 블랭빌의 전원 풍경이나 가족을 그린 스케치와 유화였다. 1902년에 그린 블랭빌의 풍경은 모네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아주 편안하다. 그리고 여자 마차꾼, 칼 가는 사람, 가스공과 같은 스케치는 이야기가 있다. 칼을 가는 사람, 마차를 세워놓고 호텔에 들어가 돈벌이를 하는 여자 마차꾼, 이것은 여태 우리가 알고 있는 회화이고 예술이었다. 이 세계에서 벗어난 결정적인 계기 중의 하나가 바로 레몽 루셀의 소설 <아프리카의 인상>을 각색한 연극을 보고 나서였다.


뒤샹은 말한다. “초기에 나는 루셀에게 열광했다.그 이유는 나로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유명한 이름이나 영향에 관계없이 완전히 독립적이라는 점이 나의 깊은 내면에서 찬탄을 끌어낸 유일한 이유이다. 아폴리네르가 루셀의 작품을 처음 보여 주었다. (중략)나의 정신 도서관에는 루셀의 모든 작품을 소장할 것이다. 그리고 시인 말라르메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동물적인 표현보다는 지성적인 표현으로 말하고 싶다. 이것이 예술이 가야 할 방향이다. 나는 ‘화가처럼 바보스럽다’는 표현에 신물이 난다.” 그리고 뒤샹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라고 재니스 밍크는 이야기한다. “푸앵카레는 물질을 지배한다고 믿었던 법칙이 단지 그것을 이해하는 정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일반 원리도 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과학은 사물 그 자체에 다다를 수 없다. 단지 사물간의 관계에만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뒤샹 자신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푸앵카레의 이런 생각들은 이후 뒤샹 작품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점부터 그가 제작한 모든 작품은 개별적으로 고립되지 않고 마치 루셀의 동음이자(同音異字)처럼 서로를 반영한다. 미술사가들은 최종 결론에 다다를 수 없어 애를 먹는다. 왜냐하면 뒤샹이 만든 것과 말한 것 사이에는 어떤 궁극적인 주장도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튜브 물감들은 제조된 생산물이자 이미 완성된 물건이다."


마르셀 뒤샹이 두 형이 머물고 있는 파리로 가 같이 살게 된 것은 1904년 10월 이었다. 그 후 만화와 회화 사이를 오가면서 그림을 그리다가 1912년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가 살롱 데 앙데팡당에서 거절당하자 그룹을 탈퇴한다. 다음해 뒤샹은 뉴욕의 아모리 쇼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를 출품했다. 뉴욕의 화단은 놀랬고, 이후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전위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 해에 그의 첫 오브제를 제작한다. 그리고 1915년에 그의 오브제들을 ‘레디메이드’라고 불렀다. 뒤샹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튜브 물감들은 제조된 생산물이자 이미 완성된 물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그림들은 ‘도움을 받은 레디메이드’이자 아상블라주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뒤샹은 알렌스버그, 월터 팩 등과 함께 독립미술가협회를 설립한다. 이 미술전은 심사위원도 없고, 상도 없는 미술전이었다. 1917년에는 자신의 작품인 <샘>을 ‘R Mutt’란 가명으로 출품했다. 이 작품 역시 자신이 속한 독립미술가협회에서 거부된다(가명을 써서 그의 작품인지를 아무도 몰랐다). 이 작품은 전시회 전시관의 후미진 곳에 내내 방치되어 있었다. 1920년에는 만 레이를 만나 우정을 나누고, 정밀한 광학적오브제들과 영화 실험 작업을 했다. 1923년부터 그는 완전히 예술가로서 활동을 접었다. 그는 예술가연하면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세월 동안 체스만 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생의 대부분을 주위와 단절한 채 고독한 작업을 했다. 사후에 공개된 <1. 폭포수 2. 점등용 가스 : 가 주어졌다고 할 때>라는 작품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1902년부터 1910년까지는 부지런히 손발 놀린 '8년간의 수영 연습' 기간



뒤샹은 다다이즘의 앙드레 브르통과 교류하였고, 초현실주의자들의 회화와 관계를 가졌다. 그는 세상이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세상을 향해 불평불만을 터트리지도 않는다. 그는 묵묵히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하여 나간다. 마음을 다치게 하는 ‘반응’들이 귀찮아서였을 것이다. 뒤샹의 작품은 지금 보아도, 전통적인 그림에 익숙한 우리들의 눈에는 낯설다. 이러한 오브제, 레디메이드는 자칫 예술에 대한 경박한 행동을 낳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전혀 미술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는 문외한이 뒤샹에 대한 자료만 보고 물건을 대충 전시해 놓고 자신도 모르는 제목하나 턱 달곤, 이것이 예술이다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곳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회화 과정을 다 거친다.


즉 1902년부터 1910년까지 ‘8년간의 수영연습’라고 한 기간, 즉 물위에 떠 있기 위해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이는 시간, 열심히 그림 공부를 했다. 1902년부터는 인상주의, 상징주의,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를 거쳐서 입체주의를 습득하는 과정을 거쳤다. 1915년부터 뉴욕으로 건너가 자기 양식을 수립한 기간을 1910년에서 1915년까지로 본다. 그리고 <큰 유리>의 제작기간인 1917년에서 1923년의 기간 동안에 뒤샹은 독창적인 레디메이드를 탄생시켰다. 그의 독창성은 위대한 선배 화가들의 정신을 배우고 익히고 나서 즉 절차탁마의 기간을 거치고 나서 탄생한 ‘독창성’이고 자유로움이다.


새장 안에 대리석 육면체가 든 작품 '왜 재채기를 하지 않지?'


뒤샹은 산업화 시대에 가져온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왜 재채기를 하지 않지?>라는 것이 있다. 새장 안에 각설탕처럼 생긴 대리석 육면체와 온도계와 오징어뼈를 쌓아 놓은 것이다. 이 작품에 서명된 뒤샹의 새로운 예명은 로즈 셀라비이다. 이 작품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사이의 과도기적 오브제로 평가된다. 훗날 이 작품은 파리의 초현실주의 미술 전시회에 출품된다. 뒤샹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작은 새장은 각설탕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각설탕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그걸 들어보면 생각지 못한 무게에 다소 놀랄 것이다. 온도계는 그저 대리석의 온도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작품처럼 설명도 난해하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작품에 대한 쉽고 전통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감상자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불편하게 한다.

뒤샹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일까 고민하면, 차라리 재채기를 한번 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이건 어쩌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우리들의 영혼을 깨기 위한 도끼자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 재니스 밍크는 이러한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짐작하고 이렇게 자상하게 설명해 준다. “뒤샹의 작품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여러 언어로 된 수백 번의 인터뷰와, 잡지 기사를 낳았고,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뒤샹의 삶과 작품은 해석을 조금만 바꾸어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읽힌다. 뒤샹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그것이 억설일지라도 침착하고 너그럽게 대했다. 사람들에 의해 체계화되어 새로운 창조물이 된 자신의 작품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닐지라도.” 뒤샹은 솔직히 어렵다 라고 말하는 것이 속 편하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라고 한다면 되겠다.


"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모나리자의 모습에 콧수염을 그려 넣은 뒤샹. 다빈치의 걸작인 모나리자의 그림에 콧수염만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왜 여인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남성화시키는 걸까? 그는 가부장의 화신인가? 뒤샹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선입견을 우선 버려야 하는 건 아닌가? 우리는 이미 대량 생산되는 물질의 세상에서 아무런 이해도 없이 그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왜 물건들이 만들어졌을까? 그것들은 우리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텔레비전이나 휴대폰, 그리고 각종 장비들 속에서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 그리고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것들은 정말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뒤샹이 레디메이드, 즉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물건들을 통해 우리에게 정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일까?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느끼는 그런 감정, 뒤샹에게 그런 감동을 느낀다면 좋은 것이고, 만약 아니라면 그냥 그 마음을 내버려 두자. 뒤샹의 그림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닐테니까…. 하지만 뒤샹은 예술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주위에서 가장 가깝게 존재하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바로 삶이고 생명이라고 침묵하면서 표현한다. 뒤샹은 그걸 자신의 방식으로 창조하고 레디메이드라고 불렀다. 마치 신이 우리들을 창조했듯, 그렇게 자신의 작품을 뒤샹이라는 영혼과 일치시켰다. 그래서 뒤샹의 이 말은 비교적 쉽게 다가온다. “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예술 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뒤샹의 어려운(?) 작품에 대해 쉬운 해답을 바라서는 안될 것 같다. 어려운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대담집처럼 좋은 책도 없다. 정병관씨가 번역한 <마르셀 뒤샹- 피에르 카반느와의 대담>을 우선 권하고 싶다. 만년의 거장이 젋은이와 만나 비교적 자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0세기의 가장 '특별한' 예술가인 뒤샹은 항상 유희하듯 예술을 대했지만 예술에 대한 기존의 의식을 가장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대담은 1966년 4월에서 6월에 걸쳐 파리 근교의 뇌이에 있는 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뒤샹 자신에 의한 그의 인생과 작품에 대한 어쩌면 유일한 증언일 것이다.


마르셀 뒤샹- 피에르 카반느와의 대담마르셀 뒤샹

그리고 화보 중심으로 된 책 재니스 밍크의 <마르셀 뒤샹 (정진아 옮김)>은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컬러 도판들과 함께 소개한다. 뒤샹의 대담집을 먼저 읽고 이 책을 대하면 조금 더 수월하게 뒤샹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뒤샹은 미술사의 수수께끼 같다.




원재훈 / 시인
글을 쓴 원재훈은 1986년 시 '공룡시대'로 등단했으며 <낙타의 사랑>,<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하네> 등의 시집과 <만남,은어와 함께 보낸 하루>,<모닝커피> 등의 소설,<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등의 산문집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집필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