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임청각
어제 친구랑 함께 안동 나들이 했습죠.
의성 고운사 들렸다가, 근처에 있는 <안동고등어구이백반>으로 점심을 먹고는,
동화작가 권정생님이 살았던 집이랑
그 유명해진 의청각까지 둘러보고 왔습죠. 어둑해져서.^^*
쾌청할 거라더니, 종일 비가 오락가락 합디다.
임청각(臨淸閣)
1
요즘 다들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인데, 새삼스레 중언부언할 필요야.....
2
누가 붙여놓은 것인지..... 관리인과 연관이 없지는 않겠지요.
3
군자정(君子亭)
사랑채 같은 이 정자의 현판 - ‘군자정(君子亭)’은 퇴계 선생님 글씨랍니다.
현판 자리가 대문에 가려 보이질 않네요.
거의가 다 노태우 대통령 재임기간 중입니다. 기간도 1~2년 사이에.
문재인 대통령께서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과 석주 이상룡 선생을 예로 들며 독립운동가를 최고의 존경과 예의로 보답하겠다고 역설한 것은 여러모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경축사에서의 언급처럼 임청각은 우리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지만 항일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떵떵거리며 산다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은 유학자이며 안동의진 지휘장이었던 서산 김흥락 선생의 제자로서 일찍이 의병운동에 참가했다. 1909년경부터는 교육의 역할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창립하고 시국강연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신민회의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방침에 뜻을 같이해 1911년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선생은 이곳에서 독립 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한 돈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며 대한독립의 기틀을 세웠다. 이후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2년 지린에서 순국하였다. 선생께서는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지만, 선생의 유해는 해방이 된 뒤에도 오랜 세월 타국에 묻혀 있다가, 1990년에 와서야 겨우 고국으로 돌아와 안장될 만큼 예우를 받지 못했다.
선생의 친척과 후손들의 삶은 더 비참했다. 당숙 이승화(애족장)를 비롯해 아우 상동(애족장), 봉희(독립장), 조카 운형(애족장), 형국(애족장), 광민(독립장), 친아들 준형(애국장), 손자 병화(독립장) 등 4대에 걸쳐 아홉 분이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삶은 파란과 가난의 연속이었다. 1942년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다니던 장남 준형이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만 보탤 뿐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데다 손자 병화마저도 1952년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다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선생의 손자, 손녀는 해방 후 고아원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특히 일제에 의해 반 토막이 난 임청각이 고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후손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독립운동가문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석주 선생의 후손들이 일제 치하 호적을 거부해 미국적 상태에서 타인 명의로 임청각 등기이전을 한 것은 슬픈 우리의 역사이기에 이것 또한 제대로 되돌려 놓아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처참한 모습이야 말로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꼬집은 대통령의 말처럼 아직도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역사를 잃으면 민족의 뿌리를 잃는 것이라며, 임청각 완전한 복원을 통해 민족의 자존감 회복을 약속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두지 않겠다고 한 대통령의 약속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 독립 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될 것이다.
안동시도 '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개인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신념 하나로 평생을 구국투쟁에 헌신한 민족 지도자 석주 이상룡 선생과 민족정기의 근원인 임청각의 온전한 복원을 통해 선생께서 끼친 삶의 향기를 널리 전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해방을 맞은 지 어느덧 7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나라에서 팔아서 안 되는 것을 팔아 부귀를 누린 자들의 영속적 영화가 국민적 총의에 의해 단죄되지 못하는 현실은 반드시 청산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께서 콕 찍어 임청각을 복원하겠다는 천명을 계기로 이러한 잘못된 역사의 흐름이 바로잡혔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권영세 안동시장
명박이 흔적을 여기서 또 보게 되네. 재수없이.
4
행랑채인데,
행랑채가 이렇게 안으로 들어와 있을리가 없지 않느냐, 물으니
행랑채가 두 군데에 있었던 것 같다,, 여기는 내당에 딸린 행랑채이고,
잘려나간 마당 가에 外 행랑채가 또 있었던 듯하다고 ─
당시의 사진이 있느냐, 물으니 , 희미한 상태로나마 있는 걸로 안다고 ─
글쎄요… 구전(口傳)에 의지해서 복원을 할듯 싶은데……
x
그게 아니네요.
행랑채는 이것 하나이고, 군자정이 사랑채가 맞는 것 같습니다.
5
사당(祀堂)
국내에 유일하게 위패가 없는 사당이랍니다.
위패를 땅에 파묻고 만주로 떠났다는데, 훗날 아무도 돌아온 사람이 없었으니,
위패를 어디에 묻었는지 알 도리가 없어서 ─
헐리기 전에는 마당이 엄청 넓었다는데,
2층전각으로 지은 대문이 저만큼 나가 있어서 그 위에서 낚시대를 드리울 정도였답디다. 과장이겠습니다만.
☆ ★
안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 전탑
임청각이랑 옆으로 나란히 붙어 있는 겁지요. 마찬가지로 도로변으로.
바꿔서 말하자면, 임청각이 통일신라시대 폐사지 터에다 지은 겁지요.
친구 얘기론,
전탑이 이곳 안동 쪽에서만 몇 개 발견된다누만요. 분황사에서 뚝 떨어져서.
하여, 근본이며 유래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이 친구가 요즘 면도를 안하고 댕기넹?
나일 먹을수록 외모에 신경 써야 뒤야!
허연 수염이 듬성듬성하면 혼자 사는 늙은이나 노숙자 같어 야.
가뜩이나 요즘 엉디 살도 푹 꺼졌다믄서.
☆ ★
1763년 임청각의 11대 주인이었던 허주 이종악(虛舟 李宗岳)이 그린 임청각
양 옆으로 집이 몇 채 더 있는 것뿐이넹.
지금이랑 별 차이가 없는디?
일제가 일부러 정기 끊느라 철길을 냈다는 것이 괜한 소리가 아닌가 몰것넹.
99칸이란 것이 집이 99채라는 말이 아니여.
뭔 뜻인지 알아먹것능가?